< -- 90 회: Part 5. 흰 국화 한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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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정도 지나자 카렐의 새 일도 어느정도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암살미수사건의 범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지만 그건 근위대 보안국과 중앙본부의 몫이니 카렐과는 이제 별 관계없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도 카렐은 몇번 델루지 가를 찾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간만에 집에 돌아온 테번 공에 대한 문안인사 외에는 그가 그곳을 직접 찾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아니, 피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네페티 부인을 도저히 고개들고 대할 수 없던 카렐은 델루지 가에 가야 할 엔간한 일들은 부사령관인 모릭스에게 시키고 있었다. 이런 통에 카렐이 그곳에 반드시 가야 할 일이 생긴 건 정말로 달갑지않은 일이었다.
"병신 또라이같은 골빈새끼들,"
차를 타고가는 카렐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도적떼 주제에 감히 남부 최고제후가문의 종가에 기습을 하다니 이만저만 기가막힌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짐작컨대 옛날 제수스 자이센이 이끌던 폭도무리가 서부 최고제후 플레렌 가를 '멋지게' 기습해 성공한데서 나름대로 영감을 얻었을 것 같기는 했지만 그건 그 망할 도적놈들의 한심한 착각에 불과했다.
제수스 자이센은 옛 코메트부대의 군단장급 지휘관 중 한명이었다가 부대의 몰락과 함께 포로로 잡혀 노예로 전락했던 자였고, 그가 이끌었던 기습부대 역시 옛 코메트부대의 기동강습부대 요원들로 그 상관과 함께 비슷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던 자들이었다.---같은 부대의 참모총장이었던 테번이 남부최고제후가 되는 와중에 그 수하들은 그리된것을 보면 확실히 지위는 높고 볼 일이었다.
사실 그보다 더 한심한 건 델루지 가 종가 경비병 중 하나가 많지않은 돈에 눈이 멀어 그들을 종가로 들여보내는 바보짓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종가를 습격한 130명의 도적들은 저택 부근에는 접근도 못해본 채 그 바보짓의 댓가를 치러야 했다지만, 최상의 제후가를 자처하던 델루지 가로서는 이만저만 망신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베흔이 카렐에게 현장으로 직접 가 보라고 명령하면서 기껏 암살미수사건의 여파에서 벗어나 한숨 돌리던 그에게도 골치거리 하나가 또 떨어지는 셈이었다. 덧붙여 재수없이 공식 수사까지 명한다면 또 한동안은 카렐에게 쉴 날은 없이질 것이 확실했다.
"테번 공은?"
차 안에서 보고자료를 살피던 카렐이 부관 힐러 녀석에게 물었다.
"습격당시에 동부제후지역에 있었다고 합니다. 돌아온다고 했으니 이제 거의 도착했을겁니다."
"그래, 그 영감탱이가 있었을 리가 없지. 집에서 조용히 마누라 간수나 하고있을것이지 싸돌아다니긴....."
말투가 요즘 부쩍 세련되어진 듯 했던 카렐의 입에서 옛날습관이 또다시 튀어나오자 힐러 녀석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경계가 대폭 강화된 델루지 가 주변에는 평소보다 족히 두배는 되는 제후군들이 구석구석 철통같이 막아서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서 창과 방패, 짧은 검과 중장갑으로 무장한 낯선 보병들의 모습도 군데군데 보이고 있었다. 이들 중장보병은 원래 일선 군단에 배치되어있는 남부제후군의 주력보병이었고 말로만 정예부대 타령하는 이곳의 뺀질거리는 경비병들과는 그 눈빛부터 다른 녀석들이었다. 방패에 새겨진 군단마크를 보아 칼릴에서 서부제후군과 경계선 분쟁중인 최정예병들에 틀림없었다.
일선에나 있을 이들까지 불러들인 것을 보면 테번 공 그 노인네도 어지간히 놀라긴 놀란 모양이었다.
그 삼엄한 경계 사이를 뚫고 조용히 들어선 이 근위대 소속 무장차량은 델루지 가 저택 바로 앞에 멈춰섰다.
차에서 내려선 카렐은 이곳을 찾을 때 입던 흰색의 정복 대신 평소 입던 검은 수트에 옆이 완전히 트인 무릎 아래까지 오는 검은 튜닉, 검은 망토 차림에 3개나 되는 칼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집사가 허둥지둥 달려나와 머리를 조아리자 카렐이 그에게 사뭇 사무적으로 물었다.
"테번 공께선 오셨습니까?"
"예. 지금 부인과 함께 계십니다."
'웬일이야.'
내심 코웃음친 카렐은 집사의 인도를 받으며 저택 안에 성큼 들어섰다.
집사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2층의 대응접실 한쪽엔 얼굴이 잔뜩 일그러든 채 누군가와 열심히 통화중인 테번 공이 있었고, 반대편에는 그의 일곱 명의 첩들과 이십여명의 서자들이, 정실인 네페티 부인은 방 중앙에 장남인 제롬의 위로를 받으며 앉아있었다. 수우 녀석은 몇십년 전인가부터 잠적해버려서 몇달에 한번 집에 연락하는 것이 고작이라고 했으니 이정도면 모일 사람은 다 모인 셈이었다.
어쨌든 도무지 같이 있는 법이라고는 없는 이 기묘한 가족에게 참으로 보기드문 '오손도손한'(?) 모습이었다. 테번 공이 집에 거의 없는 것은 하루이틀의 일도 아니었고, 아들인 제롬 역시 아버지의 보좌관 노릇을 하느라 집에 있는날이 없었다. 첩들과 서자들도 어차피 본채와는 떨어진 별채에서 따로 살았기 때문에 하루종일 돌아다녀도 본채도 다 돌기 어려운 이 피곤할정도로 큰 집안에서 그들을 마주치는 일 역시 있을턱이 없었다.
큰 키에 깡마른 그 아버지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듯한 건장하고 듬직한 맏아들의 품에 안겨있으면서도 네페티 부인은 여전히 공포에 질려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서부의 그 유명한 플레렌 가 기습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부인이 이번에도 제일 많이 놀랐으리라는 건 당연한 노릇이었지만 저 남편이라는 노인네는 떨고있는 부인을 달래줄생각은 전혀 없는지 연신 뭐라 말싸움만을 벌이고 있었다.
"사방에 입막음하려는 것이겠죠?"
힐러가 카렐의 귀에 속삭였지만 그는 짐짓 못들은 척 조용히 서 있었다. 이런 망신스런 소문이 퍼지는 것을 최대한 막아야 하는 그의 입장에서 이 사건에 근위대까지 손을 대는 건 어지간히 곤혹스런 일이 될 것이 뻔했다.
"베흔 근위대장님의 연락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그의 앞에 다가간 카렐은 오른손을 가슴에 대어보이며 깊이 허리를 굽혔다. 아니나다를까 테번 공이 이를 드러내며 쏘아붙이고 있었다.
"그럼, 근위대에서 수사한다는 건가?"
그의 곱지않은 말투에 별로 동요하지도 않는 듯 카렐이 사무적으로 대꾸했다.
"아닙니다. 일단 제게 현장방문을 명령하신 것 뿐입니다. 물론 상황이 심각하다면 저희가 수사할수도 있습니다."
"별 사건 아냐. 그냥 미친 도적떼일 뿐이야. 어차피 오다가 다 죽였고 살아 도망친놈들도 없어."
테번 공이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다시 할룩스를 집어들더니 이번엔 근위대 중앙본부에 연락을 하고 있었다. 카렐로서는 차라리 다행이었다. 제발 베흔이 설득당해서 이 골아픈 사건에서 철수를 명한다면 오늘밤부터는 두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을 터였다.
카렐은 다시 네페티 부인을 돌아보았다. 아들의 품에 안겨있던 부인은 카렐을 한 번 바라보고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베흔과 열심히 투닥거리고 있는 테번 공의 목소리를 한귀로 흘려보내며 카렐은 창밖을 잠시 내다보았다. 백 보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저택 뒷쪽 화단 한구석과 관목울타리가 사방에 피가 흥건한 채 거의 뭉개져 있는 것으로 보아서 저쪽으로 기습을 시도했던 모양이었다. 저정도 거리면 처음 말과는 달리 저택에 꽤 가까이까지 근접했었다는 말이었다. 어쨌든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됐어."
테번 공이 할룩스를 끄며 카렐을 다시한번 째려보았다.
"근위대가 관여하지 않기로 했어. 세부명령은 너희 사령부쪽으로 연락이 갈거다."
"알겠습니다. 물러가겠습니다."
카렐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테번 공에게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막 돌아나가려는 카렐의 발목을 네페티 부인의 힘없는 목소리가 붙들었다. 순간 카렐의 머릿속이 아찔 해 왔다. 부인의 얼굴은 정말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저......어, 카렐,"
"말씀하십시오."
마지못해 다시 돌아선 카렐이 여전히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나하고......잠깐만 같이있어주겠어? 그냥.......좀 무서워서......"
"저 겁장이같으니!"
테번 공이 네페티 부인에게 대놓고 신경질을 부렸다. 기껏 쫓아낸 근위대 녀석을 다시 붙들려는 부인의 행동 때문인지 그의 얼굴이 어느새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참 겁에 질려있던 부인에게, 그것도 첩들 눈앞에서 정실부인에게 할 만한 말은 틀림없이 아니었다. 순간 발끈 한 카렐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지만 그로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난처해하는 아들 제롬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치며 네페티 부인이 카렐을 따라 응접실 밖으로 힘없이 걸어나왔다.
"미안해. 너 난처하게 해서......"
"전 괜찮습니다. 전 어차피 근위대 소속이니......부인께서 부군께 눈치보이게 된 게 더 문제일텐데......"
"어차피 저이는 내일이면 또 집에 있지도 않을텐데 뭐."
부인의 짙푸른 눈동자에 묘한 쓸쓸함이 감돌고 있었다. 카렐과 함께 뒤뜰에 나온 부인은 엉망진창이 된 장미화단 앞에 서 있었다. 늦은 오전의 따스한 햇빛이 둘의 머리위를 비추고 있었다. 워낙에 자그만 부인은 어느새 카렐의 큰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 있었다.
"서쪽 방에 있었는데 경비대장이 동쪽으로 가라길래 이 위로 도망쳤어. 안전한줄 알고 밖을 내다봤더니 여기서도 웬놈들이 다가오고 있는거야. 죽었다 싶었는데 다행히 경비병들이 뒤에서 덮치더라고. 바로 여기서 싸움이 벌어졌었어."
"핏자국이 남아있군요. 위험하셨겠습니다."
카렐이 피가 묻어있는 덩쿨잎을 따 내던지며 중얼거렸다. 부인은 그 도적때들이 나왔을 먼 숲 속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또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만 볼때마다 가슴이 철렁철렁 해."
"지금은 괜찮습니다."
카렐이 한손으로 칼자루를 쥐어보였다. 피묻은 장미화단을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라보는 외로움에 지친 부인을 내려다보며 카렐은 그 악마같은 베흔의 품에 안겨있는 그의 모습을 도저히 머릿속에 떠올릴수가 없었다. 카렐은 화단을 다시한번 내려보았다. 이지경이 된 화단을 눈뜨고는 못봐주는 그의 유별난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카렐은 자신의 이곳에 온 본분을 머릿속에서 잠시 한구석에 밀어놓고 있었다.
"힐러!"
카렐이 큰 소리로 부관을 불렀다.
"옛!"
"내 오늘 일정은?"
"1시에 지휘관 능력테스트 결과보고, 3시에 모의전투훈련 기획회의가 있고 5시에 감사부 보고가 있습니다."
"그럼 1시까지는 비는군?"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카렐은 약간 떨어진 곳에 보이는 정원사 창고로 다가가더니 무언가를 한아름 들고왔다.
"뭐하는건데?"
"가슴이 철렁철렁 하신다면서요."
카렐이 가져온 노끈과 철사, 약품과 작은 삽 등등이었다. 무기벨트와 망토를 옆에 끌러놓은 카렐은 부서진 나무 울타리를 다시 세우고 있었다. 그때까지 카렐이 무얼 하는건지 어리둥절해하던 부인은 그가 울타리에 끈을 꿰고 쓰러진 장미덩쿨들을 일으켜세우자 잠시 멍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
"세 포기정도는 살리기 힘들겠습니다. 하지만 워낙 빽빽하게 심어져있어서 잘만 배치하면 거의 티는 안나겠군요."
잠깐새에 장미덩쿨을 모두 세운 카렐은 작은 삽으로 땅바닥을 다시 다지고 가망없는 덩쿨들을 완전히 뽑아 밖으로 내놓았다.
"덩쿨식물은 생명력이 강해서 조금만 기다리시면 다시 예전같이 될 겁니다."
카렐은 죽은 잎과 꽃들을 솎아내고 꺾인 부분들에 조심스럽게 약품처리를 하고는 꼼꼼하게 밴드로 동여맸다. 어느새 카렐의 신발와 옷은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지만 그다지 상관하지 않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비료를 넣은 물을 뿌리고 나자 장미화단은 처음같지는 않지만 제법 훌륭한 상태로 복구되어 있었다. 겨우 10분 조금 넘게 걸린, 눈깜짝할새 벌어진 일이었다.
"새 잎하고 꽃잎이 나면 훨씬 좋아질 겁니다."
카렐이 무기벨트를 다시 허리에 두르며 부인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이제야 생각나......너 어릴때 정원사가 되는 게 꿈이라고 그랬지?"
"이젠 흘러간 옛 꿈이지요."
카렐은 흙투성이가 되어버린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잠시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부인을 다시 종가 현관 앞에 데려다준 카렐은 평소처럼 그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는 힐러와 함께 차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만."
카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네페티 부인이 무언가 생각이 난 듯 급히 카렐을 따라 돌계단을 뛰어내려왔다. 문득 뒤돌아선 카렐에게 바싹 다가선 부인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일......저녁에 혹시 다른 일 없으면......내가 개인적으로 초대하고싶은데.....저녁 같이할 수 있을까?"
부인의 느닷없는 요구에 난처해진 카렐은 잠시 갈등에 휩싸였다. 아직까지도 부인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 밉살머리스러운 베흔의 얼굴이 그의 눈 속에 계속 오버랩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부인의 간절한 눈빛에 카렐의 그 거부감은 결국 알 수 없는 감정에 굴복하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내일 7시에 찾아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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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스의 지하도시에 머무르던 일행은 대공주에 이어 카렐마저도 사라지자 걱정을 감추지 못하며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었다. 선임자로서 얼떨결에 명령권자가 되어버린 제네르가 지도와 수첩을 펼쳐들며 모두를 한 번 돌아보았다.
"거리로 봐서......통제구역 중앙에서 남쪽으로 나온다고 치면 최소 8일은 걸릴 거리인데.....전하 혼자 계신것도 아니고 네페티 부인과 제후군 지휘관들이 함께 있다면 단축되긴 어려울거다. 그리고 물과 식량문제도 있을텐데......휴......이런날씨에......가능하실지......"
"밀수업자들중에 에너지장벽 뚫는 미친 짓 저지르는 녀석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우베가 제일먼저 쓸만한 의견을 내놓자 제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푸아킨 경이 제네르의 눈치를 보며 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이 사실을......근위대에 알리면 어떨까요?"
"지금 미쳤습니까!"
시로가 대뜸 언성을 높였지만 푸아킨 경이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하지만.....아시다시피 네페티 부인은 저희쪽보다 근위대편 인물입니다. 플레렌 가문이 부인에게서 등을 돌린 건 저희보다 근위대에 더 직접적인 타격이란 말씀입니다. 근위대가 이 문제에 훨씬 더 적극적으로 나설지도 모릅니다."
"일리있는 말씀이군요."
제네르가 수첩에 무어라 적어넣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시로가 여전히 흥분한 목소리로 푸아킨 경을 막아서고 나섰다.
"부인만 사막에 떨어졌다면 그럴지도 모르겠죠! 하지만 전하께서 함께계십니다. 놈들은 내친김에 전하까지 해치려 들 겁니다."
"진정하게, 시로. 당장 그러자는 게 아니고 최악을 피하기 위한 차악일 뿐이니까. 일단은 돌아가는 모양을 조금 더 지켜보자고."
제네르가 푸아킨 경에게 거의 덤빌듯한 태도로 고함을 지르는 시로를 막아섰다. 여전히 씩씩거리던 시로는 자신의 어깨를 쓰다듬어주는 제네르의 손길에 결국 입을 다물수밖에 없었다.
해가 지면서 이번엔 기온이 무섭게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낮의 극심한 더위에 지쳐있던 일행은 이젠 살인적인 추위와 몰아치는 찬바람에 노출되어 있었다. 바위 틈새의 자그만 굴을 마주한 카렐은 힘겨운 걸음을 이어가던 일행 모두를 일단 정지시켰다.
"오늘밤은 여기서 보내야겠다. 유시프 장군, 불침번 순서를 정하도록 해."
장교들에게 야영준비를 지시한 카렐은 들것에서 몸을 움츠린 채 오들오들 떨고있는 네페티 부인에게 다가갔다.
"손이......말을 안들어......"
부인이 눈물을 찔끔거리며 중얼거렸다. 부인의 곱은 손을 바라보던 카렐이 한숨을 내쉬었다.
"동상입니다. 아직 심하지는 않으니까 옷 속에 품고계세요. 밤엔 제가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가져온 옷가지를 온몸에 둘둘 감은 12명의 장교들은 두명 혹은 세명씩 짝을 지어 서로서로 껴안고 잠을 청했다. 이 추운 날씨 속에서 저들 중 몇명이나 내일아침 제대로 눈을 뜰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땔감이라도 있으면 불이라도 피겠지만 이 황량한 사막엔 땔감으로 쓸만한 식물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셔틀에서 주워온, 아니 셔틀 의자에서 뜯어온 담요에 가까운 천조각들을 바닥에 깐 카렐은 입고있던 망토를 벗어 다시 그 위에 깔았다. 어쨌든 약간 떨어진 곳에 누워있는 부하들보다는 한겹이나마 더 깔게 된 셈이었다. 카렐이 눈짓으로 그 위를 가리켰다.
"여기 누우세요."
"응."
부인이 먼저 자리를 잡자 카렐이 그 옆에 나란히 누워 그의 유난히 자그만 몸을 품어안았다. 얼어버린 손에서 오는 아픔을 이를 악물고 참고 있던 부인이 끄응 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카렐이 갑자기 옆구리의 수트 버클을 풀기 시작했다.
"왜그래? 이 추운데......"
카렐은 부인의 얼어붙은 양 손을 끌어당겨 옷 속에 조심스레 파묻었다. 참으로 오랫만에 그의 맨살에 손을 대 본 부인의 얼굴이 조금 붉게 상기되고 있었다.
"조금만 참으시면 될 겁니다."
소금기가 잔뜩 엉겨붙고 이젠 거칠게 상해버린 부인의 곱던 얼굴을 카렐이 그 큰 손으로 한 번 쓰다듬어주었다. 그는 망토자락을 바싹 여며붙이며 먼저 눈을 감았다.
"주무세요. 지금은 제 몸에서 열이 많이 나고 있으니 괜찮을겁니다."
자신을 품어안고 그의 힘있는 목소리에 부인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비로소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는 카렐의 뒤로 감춰진 오른손이 마치 안절부절하듯 연신 단검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렐의 떨리는 왼손이 그의 뒷덜미를 이미 두 번이나 쥐었다가 놓았었다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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