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0 회: Part 5. 흰 국화 한송이 -- >
우베에게 아카데미 인근에 숙소를 잡아두라고 지시한 카렐은 일단 작은 셔틀을 하나 빌려 푸아킨 경이 기다리고 있을 메디스 시로 향했다.
"되게 뜨겁네."
셔틀 문을 연 카렐이 몰려들어오는 열풍에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어차피 예상하고 온 일이었지만 바깥기온은 거의 사람이 버틸 수 있는 극한의 온도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도시 전체도 바깥으로 나와있는 '건물들'이 아닌 땅 속의 토굴 내에 자리잡고 있었다. 땅 위로 솟아있는 부분은 환기와 채광을 위한 창들이 위를 향해 군데군데 뚫려있는 약 1층높이 정도에 불과한 거대한 구조물이 고작이었다.
거의 대부분이 최고제후 플레렌 가 영지인 이곳에서 유일한 외부제후 영지인 이 도시같지도 않은 도시는 이곳 플레렌 가 영지 한중간의 마치 섬과도 같은 지역이었다.
이 구조물의 옥상에 있는 그늘진 격납고를 빌려 셔틀을 세워놓은 카렐은 숨이 막혀오는 먼지날리는 옥상을 가로질러 지하도시로 이어진 출구로 급히 뛰어들었다.
지하도시 주기장쪽 출구 초소에 있던 발 가 병사가 이 덩치큰 이방인의 등장에 조금 긴장한 얼굴로 달려나오고 있었다. 사막날씨에 적당한 누런빛 경갑주를 차려입은 이 경보병은 이런 외진 곳에 배치받아 놀고먹고있을 것 같은 생각과는 달리 꽤 제대로 군기가 든 모습이었다.
"외부인이시군요. 신분확인하겠습니다."
"황제령 프라임 5번도시 출신의 네이든 페네코. 귀족이요. 지질연구차 왔소."
총리대신인 페로가 만들어준 이 하급귀족의 가짜신분증은 말이 가짜지 진짜 신분증과 같은 프로세스에서 만들어진 '정품'이었다. 발 가 경비병은 유난히 키가 큰 이 귀족의 신분증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가라 손짓해보였다.
카렐이 경비병에게 작은 금조각을 하나 쥐여주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최근에 새로 온 방문객 혹시 없소? 북부 출신 나이든 귀족이 한명 왔을텐데?"
"아아, 그양반? 열흘쯤 전에 왔습니다.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고.....도시라고 코딱지만해서 조금만 뒤지면 찾을 수 있을겁니다. 여관은 달랑 세 개 뿐이니까요."
금조각을 손에 쥔 경비병이 그 딱딱하던 태도를 돌변하며 이를 드러내고 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끄덕인 카렐은 이 침침하고 낯선 지하도시에 조심스레 발을 들여놓았다. 생전 와 본 일도 없는 이곳에서 묘한 포근함을 느끼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그는 그저 기분 탓이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두번째로 찾아간 여관 로비 한구석에서 카렐은 무언가에 잔뜩 질려있는듯한 푸아킨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푸아킨은 그를 보자마자 구세주라도 만난 듯 급히 달려와 손을 꼭 붙들어왔다.
"직접 오셨군요, 이제 살았습니다. 누구 안따라왔겠죠?"
"따라오다뇨?"
주변을 한 번 두리번거린 푸아킨은 어리둥절해진 카렐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고 급히 자기 방으로 향했다.
일단 카렐에게 큰 절을 올린 푸아킨은 그의 앞에 꿇어앉아 땅이 꺼질 듯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이상한 태도에 카렐이 고개를 갸우뚱 하며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대공주저하께서는요?"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푸아킨의 뚱딴지같은 대답에 카렐이 다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만나뵙지도 못한겁니까?"
"코리온 도련님이 또 사고치시려는 모양이라고 말씀하셔서 급히 달려왔는데......아카데미 안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그쪽 경비병들이 막아서서......대공주저하와 연락도 끊어졌고......그래서 일단 그 앞에 숙소를 잡고 하룻밤 자려고 했는데.....자객이 들었습니다."
푸아킨이 조심스럽게 가슴을 벗어 내보였다. 그의 왼쪽 가슴에 칼에 베인듯한 꽤 긴 상처가 나 있었다. 겁에질려 의사도 찾아가지 못했는지 치료도 받지 못해 상처가 오그라든 상태 그대로였다.
"누구 짓인지 모르고요?"
카렐의 질문에 푸아킨이 고개를 거칠게 가로저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강도는 틀림없이 아니었습니다. 그 행동거지가 틀림없이 제대로 훈련받은 암살꾼이었습니다."
푸아킨의 큰 상처를 바라보며 카렐이 한숨을 내쉬었다. 카렐이 알기로도 푸아킨 경은 대공주 자녀들의 가정교사노릇도 했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코리온이 아무리 막되어먹은 놈이라고해도---물론 명색이 원리주의 유학자가 그럴 리야 없겠지만--- 설마 자신의 어린시절 스승을 이렇게 공격해 해칠 리는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코리온 말고 그의 배후, 혹은 수하에 푸아킨을 미워하는 못된 누군가가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수명개조 당대세대인 이 늙은 귀족이 재주좋게 자객의 손에서 빠져나왔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울 지경이었다.
"운좋게 가까스로 도망은 쳤는데 대공주저하와는 여전히 연락이 안되고 있습니다. 안좋은 일이라도 당하신게 아니신지......"
대공주가 어릴 때부터 그 측근을 지켜온 푸아킨은 어느 면에서는 대공주에게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고, 같은 이유로 대공주는 그에게 친딸 그 이상이었다.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계속 한숨을 내쉬는 푸아킨 경의 등을 카렐이 가볍게 토닥거려주었다.
"코리온 리쿠 학장이 기벽이 좀 있지만 친어머니에게 몹쓸짓을 할 그런 인물은 결코 아닐겁니다.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일단 이곳은 위험하니 황제령으로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대공주저하는 제가 찾겠습니다."
황제령으로 돌아가라는 카렐의 말에 안색까지 창백해진 푸아킨이 다시 카렐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간곡한 투로 말했다.
"아니옵니다. 대공주저하의 행방도 모르는데 제가 어떻게 황제령에 가서 속편히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이번에 코리온 도련님이 유학자들 소집한것과 관계가 있는 듯 하니 저도 여기 머물면서 전하를 돕겠습니다. 제발 윤허해주십시오."
밤늦게까지 ㅤㅋㅞㄹ크로 보낼 보고서를 작성하던 제네르는 창밖에서 여러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리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불침번을 위해 잠시 눈을 붙이고있던 시로도 반사적으로 일어나 그의 옆에 나란히 서서 창밖을 함께 내다보았다.
"근위대들인가?"
"아닙니다."
밤눈이 밝은 시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쇳소리가 함께나는데? 무장한 것 같아."
긴장한 표정의 제네르가 기사단에서 쓰던 전투용 스코프를 눈에 끼며 ㅤㅋㅞㄹ크에서 가져온 자신의 장검을 집어들었다. 몸에는 무명포를 두르고 있었지만 칼을 쥐며 날렵하게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그 태도가 무장이며 유학자인 조금은 특이한 그의 신분을 보여주고 있었다.
원래 뚱보 클레모 대신 소유였던 제네르의 장검은 네피가 원 주인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었다. 물론 섬세한 다마스커스 날로 만들어진 이 훌륭한 명검을 네피가 제손으로 제네르에게 주었을 리는 없었다. 명색이 기사단장이 변변한 좋은 칼도 없이 그냥 제식 장검으로 만족하고 지내는 모습을 보다못한 카렐이 어느날 술취한 네피를 살살 꼬드겨 '양도' 받아서는 그자리에서 제네르에게 '하사'해버린 물건이었다. 남의 물건으로 생색낸 카렐에게 술이 깬 네피가 얼마나 궁시렁거렸을지는 뻔한 노릇이었지만.
바깥을 다시 살펴본 밝은 눈의 시로가 대답했다.
"무장은 했습니다만 자세가 근위대는 아닙니다. 시미터하고 원형방패, 단검으로 무장한 경보병입니다. 체형이 가디언도 아닙니다."
"아카데미 치안대 놈들은 창하고 짧은 검를 쓰던데, 그럼 그것도 아니잖아? 뭐지?"
제네르가 스코프의 촛점을 맞추며 줄을 맞춰 아카데미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는 행렬을 바라보았다.
"쓰는 무기로 봐선 제후군같은데......아카데미 안에 군대를 들여보낼 간큰 제후도 있나? 게다가 여긴 최고제후 플레렌 가 영지인데?"
백여명의 군인들이 아카데미 안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제후군이면 가문의 문장을 달고 있어야 되는데 그것도 없는데요?......워낙 큰 행사니까 외부에서 제후군들을 불러다가 특별히 경비를 강화하려는 것 아닐까요? 학장 체면도 있고 하니 문장은 벗겨서 말이죠.."
"뭐 그럴수도 있겠지만......제기랄, 이거 환장하겠군."
제네르가 입술을 깨물며 천장을 올려보았다.
다시 자리로 돌아간 제네르는 개인 통신기 할룩스가 울리자 지레 깜짝 놀라 칼을 움켜쥐고 말았다.
"뭐지? 여기서 나한테 연락할 사람도 있나?"
아무생각없이 작동시킨 기계에서 나타난 모습은 뜻밖에 카렐이었다. 반사적으로 바닥에 꿇어앉은 제네르는 낯선 곳에 앉아있는 카렐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지금 어디 계신겁니까?"
"지금 아카데미 인근 여관에 우베, 푸아킨 경과 함께 머무르고 있네."
"예에? 그럼 여기 와계신겁니까?"
제네르는 카렐이 이곳에 와 있는 것이 반가워해야 할 일인지 걱정해야 할 일인지 잠시 헛갈리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카렐에게 낱낱히 보고를 올렸다. 별로 놀라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의 보고를 끝까지 들은 카렐이 굳은 표정으로 제네르에게 말했다.
"일단 내일 아침에 결의문 발표할때 가보도록 하게. 무장은 하지 말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내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테니 걱정은 말게. 시로는 짐 다 꾸려서 셔틀에 대기하고 언제든 출동할 수 있도록 하고 있게."
"알겠습니다."
카렐이 직접 지켜본다는 말에 그나마 한결 안심이 된 제네르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파예드 아카데미에서 하루에 한번씩 동향을 보고하기로 했던 티모트 부학장으로부터의 연락도 끊어지고 파견군에서 보내오는 정세보고도 영 심상치않자 가뜩이나 네페티 부인을 보내놓고 전전긍긍하던 베흔은 점점 불안감에 사로잡혀가고 있었다. 결국 직접 서부로 가기로 결정한 베흔은 서둘러 차비를 꾸리기 시작했다.
"제롬 각하께서 수우 전하를 도와 황궁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래도 서부 정세가 심상치않으니 제가 직접 가보아야겠습니다."
준비를 지켜보던 제롬에게 베흔이 짐짓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차라리 아들인 내가 가는 게 낫지않나?"
"아닙니다. 남부 최고제후분이 함께 계신다는 게 부인께는 도리어 마이너스가 될 여지가 있습니다. 근위대장 자격으로 제가 가는것이 낫습니다."
"그래......그렇긴 하지. 그새끼들 나 무지하게 싫어하니까."
제롬 공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래걸리지는 않을 것이니 페로 녀석 동향에 각별히 신경써주시고 지금같은 방어체계만 유지하시면 별일 없을겁니다. ㅤㅋㅞㄹ크쪽은 지난번에 받은 타격이 큰데다가 핵심인물인 제네르 하크로딘 그것이 서부로 가 있으니 한동안은 경거망동하지 못할 겁니다."
"알겠네."
잠깐새에 짐을 다 꾸린 베흔은 항상 자신을 따라다니는 근위대 고급가디언 다섯명을 이끌고 제롬 공의 배웅을 받으며 급히 셔틀에 올라탔다. 사실 이번 방문길은 네페티 부인이 염려되어서라는 첫번째 이유도 있었지만 주변의 눈치를 벗어나 오랫만에 단둘이 좋은 시간을 가지고픈 속셈도 없지는 않았다.
언젠가 그가 자신에게 정표로 선물했던 플레렌 가 문장의 화려한 단검을 만지작거리며 베흔은 부인을 다시 만날 기대에 잔뜩 부풀어가고 있었다.
+++++++++++++++++++++++++++++++++++++++++++++++++++++++++++++++++++++++++++++++++++++++++++
내용때문에 일단 잘랐는데 분량이 좀 적긴 하군요. ^^;;
여기까지가 파트 5,6,7의 도입부격이라고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