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69화 (69/1,132)

< -- 69 회: Part 3. A China Aster for Me -- >

"전하 예상이 그대로 맞으셨군요."

회의장을 나선 아메스가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절벽 위에 나란히 앉은 제네르와 가디언들이 그를 문득 돌아보았다. 제네르가 그에 화답하듯 입을 열었다.

"신흥귀족세력의 대표인 페로 자이센 경이 들어온다는 건 저네들 입장에선 어떤 식으로 결정난다해도 달갑지않을게야. 페로 경의 강력한 지도력은 천하에 알려져있잖나. 프라임 지역이 봉건체제에서 벗어나 중앙집권화된것도 결국 페로 자이센 총리하고 그 할아버지였던 투모카프 자이센 총리 작품이었고. 황권이 강화될 수 있던 절호의 기회였지만 무능한 선대황제는 그럴 생각조차도 못했지."

경세학자인 제네르의 설명을 말없이 듣던 가디언들이 알아듣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페로 자이센 총리는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관료위주의 중앙집권 강화를 시도할거야. 그러니 전하 입장에서는 반드시 끌어들이고 싶은 파트너겠지만 제후들 입장에서는 그다지 달가운 인물은 못되지. 그렇게 보면 총리를 지지하는 동부제후의 입장도 그리 확고하다고 말할수만도 없어. 바로 그게 총리가 전하가 가진 '명분'을 필요로하는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전하께서 아직 동부제후들에게 신분을 드러내놓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지."

"휴, 그렇게 복잡한 문제라니,"

제네르의 길어지는 설명에 네피와 조페가 머리가 아픈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제네르가 훨씬 단호한 목소리로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전하의 장악력이 결국 시험대에 올랐네. 전하께서 우리같은 새 사람들을 등용하신 목적이 아마 이거였겠지. 전하께서 안계신동안 우리가 저들 구세력을 압도해주길 바라고계실 것이야. 슈벨 수반은 현실적이고 신중한 인물이셔서 경거망동하시진 않으실테지만 토로 경은 맹목적이고 생각이 깊지 않은 면이 있어서 이번일로 지 밥그릇걱정할 구귀족세력 소인배들의 접근에 쉽게 넘어가실걸세."

아메스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황후폐하는.....어떡하실까요?"

"아마 꽤 난처하시겠지. 옛날부터 충성을 바쳐온 구귀족들을 이제와 버릴수도 없고, 그렇다고 정치적인 문제에서 전하의 결정을 대놓고 반대하기도 그러실테고....."

제네르가 옷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전하께선 우리에게 큰 힘을 주셨네. 전하께선 군권을 완전장악하셨고, 행정조직도 중도노선인물인 슈벨 수반이 장악하고 있으니 모든 건 전하 뜻대로 된 거야. 이젠 전하 뜻을 우리가 밀어붙이는 것만 남았네. 걱정 말게. 내가 앞장설 테니까."

자신만만하게 말하고는 멀어져가는 제네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페가 시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역시 대단한 양반이야. 전하께서 그렇게 깜짝등용하실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저런 대단한 여자를 어떤 운좋은 놈이 차지할꼬?"

"글쎄,"

시로가 한숨을 내쉬며 괜한 땅바닥을 신발 뒷굽으로 박박 긁어내고 있었다.

"열어봐. 원래는 네 지난번 생일에 합성표하고 같이 주려고 했던 거였어. 뜻하지도 않게 정말로 필요한 선물이 되어버렸네."

페로의 눈짓을 받은 킵이 뒤에 챙겨두었던 상자 두 개를 카렐의 앞에 내밀었다. 생각없이 상자를 열어본 카렐의 놀란 눈빛이 페로를 잠시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펴 보인 페로가 손가락으로 상자 안쪽을 가리켰다.

"지난번 네꺼 만든 사람 작품이야. 슴베*에 장인하고 네 이름도 새겨져있어. 주문한게 몇년 전인데 이제야 왔어."

순간 숨소리를 바싹 낮춘 카렐은 상자 안에 들어있는 길고 예리한 새 날을 조심스레 살피고 있었다. 지난번 푸엘 숲에서 못쓰게 되어버린 카렐의 카타나를 대신할 새 칼날이었다. 붉은빛으로 코팅된 예리한 날은 지난번 찢어져버린 연두빛 날보다 훨씬 맑은 광택을 뽐내고 있었다.

"좋은데."

"하다하고 하몬*도 아주 잘나왔어......부품은 거기 다 있어. 아직 시라사야*니까 자루는 니 손에 맞게 직접 조립해 봐."

부품들을 확인하던 카렐은 떡갈나무가 세심하게 새겨져있는 검은빛 츠바*를 만지작거리며 빙긋 웃음을 지었다.

아직은 칼을 쓸 몸상태는 되지 못했지만 어쨌든 정말로 필요한 물건을 선물받은 카렐은 기분이 꽤 좋은 듯 입가에 연신 웃음을 품고 있었다. 칼이 들어있는 그 옆 상자를 열어본 카렐은 페로의 그답지않은 세심함에 또한번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새 수트와 검은 망토, 뱀가죽 장갑과 악어가죽 장화, 브레이서, 벨트까지, 지난번 북극에서 불에 타고 찢어져 완전히 버려야했던 옷가지들이 그대로 재현되어 놓어있었다.

카렐은 페로의 검은빛 눈동자를 또한번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정말 고마워 페로."

수행원도 없이 밖으로 나선 카렐과 페로는 누가 먼저라는 말도 없이 중정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목발을 짚고 절룩거리며 천천히 걷는 카렐과, 그 옆에서 말없이 두 손을 뒷짐지고 걷는 페로 모두 조금은 긴장한 얼굴이었다.

카렐도, 페로도 지금이 가장 중요한 말을 터뜨려야 할 시기임을 잘 알고있었다.

"이젠 어떡해야 하지?"

페로의 질문에 카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페로는 갑자기 말을 하지 않는 카렐이 부담스러운 듯 그의 눈치를 힐끗 보았다. 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카렐이 들릴듯말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

우뚝 멈춰선 페로의 굳은 얼굴 위에 무성한 사과나무가 그늘을 드리웠다. 문득 고개를 든 카렐은 나무에 달려있던 잘 익은 사과 두 개를 따서는 걸치고있던 두툼한 망토에 문질러 닦았다.

"이게 더 맛있겠다."

카렐이 더 붉은 것을 페로에게 내밀었다. 사과를 받아든 페로는 카렐의 얼굴을 또한번 올려보았다. 오늘따라 어울리지않을 정도로 순수해보이는 페로를 내려다보며 카렐이 빙긋 웃음지었다.

"나 사과 무지 좋아하는거 알잖아. 맛있는 건 귀신같이 가려내. 그게 더 달다니까. 난 손가락 발가락에도 약간이지만 미각이 있다고 했잖아. 다 도마뱀 친척 조상님 덕분이지."

사실 페로는 사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결국 카렐의 뻔뻔스러움에 마지못해 웃음을 지으며 한 입 베어물었다.

"맞네. 정말 달아. 고마워."

둘은 사과를 씹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무언가 생각하던 페로가 갑자기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카렐이 붉은 사과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메스가......너한테도 얘기했겠지?"

말을 뱉은 카렐이 갑자기 쓴웃음을 지었다. 페로가 멀리 언덕 너머 남쪽 사막을 바라보며 말했다.

"뜻밖이야. 그녀석이 그럴줄은......어릴때부터 너 어지간히 싫어했는데."

"푸훗,"

옛 일을 떠올린 카렐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버지의 어린시절을 닮아서인지 유난히 성깔사납고 짖궂었던 아메스는 카렐에게 돌멩이를 집어던지거나 대놓고 욕을 하는 것은 예사였고 가끔은 노예나 하는 쓰레기 치우는 일이나 화장실 청소을 시키겠다며 떼를 쓰다가 아버지에게 혼난 일도 비일비재했다.

물론 아버지에 이어 당연히 집안 2인자로 대우받고 싶어했던 자신의 권위가 '사실상의 2인자'인 카렐 때문에 매번 꺾여버린다는 현실에 대한 괜한 심술 때문이라는 것 정도는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성깔은 상당히 최근까지---카렐이 할복해 버려지기 겨우 한달 전까지도---그다지 달라진 건 없었던 터였다.

"실속을 위해선 자존심 따위는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아이니까. 그게 페로 너와의 차이점이지."

더 이상 걷기가 버거운지 카렐은 나무그늘 밑의 카우치에 힘겹게 몸을 기대 앉았다.

그런 카렐 옆에 함께 자리잡은 페로가 조금은 떨리는 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내가 널 차지할 수는 없게 되었으니......내 대신 그애를 부탁해......성깔은 그모양이어도.....내 유일한 핏줄이야. 나이는 어려도 훌륭한 황후가 될 거야. 그럼 난 만족할테니......"

눈동자를 조금 움직인 카렐이 페로를 흘끔 돌아보았다. 마지막 한마디를 중얼거리는 페로의 눈동자가 조금은 붉어져 있었다.

갑자기 입가에 미소를 지은 카렐이 사과 한 입을 베어물며 속삭였다.

"넌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여유을 맘껏 맛보고?"

"나로서는 손해볼 것 없지. 방법이야 어쨌거나 황가에 내 피를 남길 수 있게 될테니. 국구이며 총리대신, 페로 자이센 공. 어때?"

"'공' 소리듣긴 아직 너무 젊군."

카렐이 짐짓 장난스레 키득거리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자신을 따라 일어선 페로의 다부지고 넓은 어깨를 품에 한 번 꼭 껴안아주었다. 카렐의 목에 얼굴을 기댄 페로도, 그의 검은 머리칼에 뺨을 부비는 카렐도, 지금의 이 선택이 가장 최선의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믿어의심치 않았다.

자리에 먼저 앉아있던 세네피스 황후는 약간 늦게 들어온 젊은 전사단 간부들에게 원탁에 빙 둘러앉을것을 지시했다. 제네르와 카렐로부터 '아메스를 황후로 삼는 것을 조건으로 한 동맹결성안'을 통보받은 황후는 몇시간동안의 칩거끝에 결국 이들 모두를 불러모은 것이었다.

우군은 한 명도 없이 얼떨결에 그들에게 '포위'되어버린 토로 경은 대뜸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젊은 친구들은 어른을 공경하는 법을 좀 더 배워야겠군."

세네피스 황후의 한마디에 제네르가 고개를 깊이 숙여보였다.

"늦은 것을 용서하시옵소서. 어떤 질책이든 달게 받겠사옵니다."

"이번 일 뿐만이 아냐. 지난번 회의때 원로 귀족들을 대하는 태도는 사실 약간 무례했네."

금방 상황파악을 한 '소장파 간부들의 수장' 제네르는 황후의 이런 질책에 변명한마디 없이 모두 수긍해보이며 용서를 빌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젊은 간부들의 태도를 꾸짖던 황후의 화살은 곧 토로 경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토로 경. 경도 젊은이들 앞에서 좀 어른스런 모습을 보여줘야겠네. 지난번같이 논리도 없이 억지를 쓰는듯한 태도는 어른답지 못하네. 그리고 몇몇 불손한 원로 귀족들의 말에 홀려 태자의 권한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건 뭐라해도 변명이 되지 않네. 앞으로 동맹문제는 태자의 통치권 차원의 판단에 일임하고 경은 태자 지시에만 따라 행동하게. 알겠나?"

간부들에 대한 질책이 토로 경의 자존심을 최대한 지켜주기 위한 '형식적'인 것이었다면 토로 경에 대한 질책은 '실질적'인 것이었다. 양측의 첫 라운드에서 젊은 간부들측의 판정승이 선언되는 순간이었다. 토로 경은 굳은 표정으로 황후에게 마지못해 머리를 깊이 숙여보였다.

"그리고, 아메스 자이센 부장의 문제는......급한것이 아니니 태자가 돌아오거든 생각해보도록 하지. 내겐 동의권은 있지만 실질적인 결정권은 태자가 갖고있으니......그때까지 아메스 자이센 부장은 몸가짐에 각별히 주의하고 체통을 손상시키는 일체의 행동을 삼가주게."

"명심하겠사옵니다."

아메스가 공손히 대답했다.

자신의 야심이 조금씩 현실화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메스가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애써 감추며 최대한 차분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자칫하면 S혈통도 받지 못한 2등 황족 정도로 전락했을 그의 운명은 아버지 페로의 제위에 대한 야심을 포기시킴으로서 일대 전환점을 맞고 있었다.

그는 세네피스 황후의 뒤이은 목소리에 잽싸게 머리를 조아렸다.

"열흘 후에 북부에서 제후회의가 있어. 카파키 가 제사도 그무렵 있으니 이야기만 잘된다면 아메스 자네도 함께가는 것이 좋겠군. 카렐의 뜻대로 된다면 조상님들께 인사를 드려야하지 않겠는가?"

세네피스 황후가 짐짓 책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며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황후 역시도 지금 상황에서 카렐에게 가장 강한 조력자가 되어줄 수 있는 존재가 페로 경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있었다. 그렇다면 어차피 정략혼을 맺을 바에는 최대한 빨리 저 나이어린 계집을 묶어버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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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부분보다 조금 짧지만 뒷부분과는 분위기와 무대, 내용이 완전히 단절되므로 일단 끊습니다. 다시 주요 내용으로 돌아간다고 해야 하려나......어쨌든 다음편은 6~7시 정도에 올릴까 합니다. 이러다가 4연참하는게 아닐까.... -.-;;;

이번엔 칼에 관련된 용어가 좀 들어갔네요. ^^;;

안내 : 카타나와 타치를 비롯한 일본도는 서양도검류처럼 대체로 한 셋트로 움직이지 않고(물론 그것도 종류에 따라 분해가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만) 필요와 용도에 따라 각 부품을 조립해 사용합니다.

* 슴베 : 나까고라고도 하는 칼날 뿌리 부분입니다. 보통은 손잡이에 묻혀있겠죠. 하지만 특별한 명도의 경우 제작한 장인과 주문자의 이름을 새겨넣는 부분이기 때문에 거래시에는 항상 분해해 보여주는 것이 보통입니다.

* 하다와 하몬 : 접쇠도검의 경우 날에 미세한 결이 드러납니다. 다마스커스 강의 검은빛 날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곡선무늬와 비슷한 원리입니다. 이를 하다라고 하며, 하몬은 날을 세우는 과정에서 날 부분에 마치 물결무늬처럼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시라사야 : 일본도에서 가장 중요한 날 부분을 장기간 사용하지 않거나 옮길 때, 임시적으로 만들어 끼워놓은 나무손잡이와 나무칼집 세트를 말합니다.

* 츠바 : 서양도검의 가드 부분입니다. 이 역시 취향에 따라 바꾸어넣는 악세사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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