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8 회: Part 2. 나를 잊지 말기를....... -- >
한 차례의 폭풍이 쓸고간 북극 해안가는 바닥에 널린 시체들과 신음하는 부상자들로 엉망이 되어있었다. 조페는 아직 살아 신음하는 근위대 부상포로들을 무장해제하고 결박해 넘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에게 자신의 금색 팔찌를 내보이며 하나하나 좋은 말로 위로해준 조페는 응급조치를 하던 부하들에게 '정성들여 관리'해 줄 것을 당부하는 성의까지 보이고 있었다.
"아마 근위대쪽 귀순자중에 9할은 저녀석 작품일거야."
바위에 걸터앉아 쉬고있던 네피가 다룬의 어깨를 툭툭 치며 중얼거렸다. 다룬이 피식 웃으며 주머니에서 말린 고깃조각을 꺼내 내밀었다.
"이거나 처먹고 입 좀 다물어. 전엔 안그러더니 언제 이렇게 수다장이가 됐냐?"
"오호, 먹을 게 나오네. 그럼 계속 떠들어야겠다."
참으로 오랫만에 나란히 앉아 연신 수다를 주고받는 이 두 동기생들에게 먼지투성이가 된 아메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버님이 찾으십니다. 지휘관들을 모두 모이라 하십니다."
'페로'가 부른다는 소리에 입을 삐죽거린 네피는 마지못해 다룬과 함께 임시로 만들어진 천막으로 향했다. 자리에는 가까스로 살아돌아온 토로 경, 제네르와 잠시나마 페로의 부장 노릇을 한 아메스, 특급 가디언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중앙에 앉아있던 페로의 시선이 모두를 한 번 빙 돌았다.
"모두 수고 많았다.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지만 결국 해낸 건 모두 여러 그대들 덕이다. 특히 제네르 하크로딘 경."
"예."
제네르의 흰색 전포와 갑주는 물론이고 특유의 밝은 금발머리에도 피와 흙이 튀어 몰골은 엉망이었지만 두 눈만은 여전히 번쩍거리고 있었다. 페로가 그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경이 소수의 병력으로 카인과 쿠베의 부대를 오랫동안 지체시킨 결과 주 방어선이 뚫리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다. 경의 공로가 정말 크다."
"황공하옵니다. 총리 각하."
제네르 경이 페로에게 공손이 고개를 숙였다.
"가디언들은 너나할것없이 모두 용감히 잘 싸워주었다."
가디언들을 돌아보며 웃음짓던 페로의 밝은 표정은 토로 경에게 가 닿으면서 대뜸 일그러들어버리고 말았다. 스스로의 큰 잘못을 모를 턱이 없는 토로 경은 고개를 잔뜩 숙여붙인 채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토로 로버넬 경."
페로의 목소리가 마치 저승사자같이 낮게 깔리고 있었다.
"예......"
"내가 바보라서 저지만 하라 했는 줄로 아시오? 섬멸은 내 추가병력 도달 후에 해야 할 일이었거늘! 명령대로 했다면 적의 돌파를 허용하지 않고 적에게 치명타를 입힐 수 있었을것을 경의 명령불복종으로 모두를 망쳐놓았소! 어떻게 책임질거요!"
페로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페로의 추상같은 호통에 완전히 기가 눌린 토로 경이 결국 자리에 꿇어앉고 말았다.
"죽여.......주십시오......."
허리에서 칼을 뽑아든 페로가 엎드린 토로 경의 머리를 향해 칼을 내리치자 자리에 모여있던 지휘관들까지 멈칫 하고 말았다. 자기도모르게 눈을 꼭 감았던 토로 경이 벌벌 떨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잘린 몇가닥의 머리카락이 그의 눈 앞으로 나풀거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명령불복종은 당연히 참수로 다스려야 할 것이나, 그동안 황실에 바쳐온 충성이나 겪어온 고초를 생각해 특별히 용서할 것이니, 앞으로는 권위에 도전하는 행동을 다시한번 보인다면 내 직접 그대의 목을 동강내놓을것이오!"
"명심하겠습니다......."
호되게 당한 토로 경은 결국 땅바닥에 꿇어앉은 채 페로에게 완전히 굴복하고 말았다. 페로의 서슬퍼런 기세에 당사자인 토로 경은 물론이고 자리에 모인 가디언이나 제네르까지 완전히 압도당하고 있었다.
칼을 거둔 페로가 씩씩거리며 자리를 비우자 사람들이 휴우 하고 숨을 한 번 내쉬었다. 잔뜩 풀죽은 토로 경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제네르 경이 옆에 서 있던 아메스를 보며 피식 웃음지었다.
"저정도면 전하 못움직이시는동안 집안단속은 따로 필요없겠는걸. 아마 한동안 토로 경은 찍소리도 못하고 죽어있어야겠지? 어쨌든 후훗. 저런 페로 경이라니.....누가 저 성깔을 다루겠어, 선대황제가 질질 끌려다녔을 만 하군......우리 전하나 된다면 모를까......"
"마취에서 깼나?"
병원을 찾은 페로는 막 나오던 의사를 붙들고 대뜸 물었다.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던 의사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취.....안하셨습니다."
"뭐라구?"
"아직 수술은 안끝났습니다. 제일 급한 옆구리와 허벅지쪽은 끝났고 전사단 의무관들이 지금 어깨하고 얼굴의 화상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상박골과 대퇴골도 산산조각났고 늑골도 남아난 게 없고.....아직 조금 기다리셔야......"
"마취를 안했다니!"
페로의 언성이 대뜸 높아졌다. 페로의 추궁을 대강 피해가려 했던 의사는 눈치를 힐끗 보며 결국 실토하고 말았다.
"마취를 거부하셔서......마취 없이 수술하고 계십니다."
"왜!"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제가보긴 바깥의 전투상황에 귀기울이고 계신 듯 싶었습니다. 창을 열어놓으라고 하신 걸 봐선......중간중간 한숨도 쉬시고......총리각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약간의 반응도 보이셨고......"
페로가 입술을 깨물며 허름한 수술실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신경계나 대사반응이 특이하시다고 그래서 함부로 국소마취도 할 수 없었습니다. 통증이 굉장하셨을텐데.......나무조각 뽑아낼 때하고 옆구리의 괴사된 조직 절개해낼 때 약간 눈물을 흘리신 것 빼고는......."
"들어가 봐도 되나?"
약간 고개를 갸웃거린 의사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대신 너무 접근하지는 마십시오. 감염될수 있으니......"
몸을 대강 씻은 페로는 수술실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에 들어섰다. 별도의 격리시설도 없는 작고 허름한 수술실 중앙에 카렐이 누워있었다. 희미하게 뜨고있던 카렐의 눈동자가 페로를 향해 조금 움직였다. 두 의사는 너덜너덜해진 카렐의 어깨에서 괴사된 조직을 제거하고 임시로 자리를 보호할 투명한 인조근육을 설치하는 중이었다. 끔찍한 고통을 참고있을 카렐의 두 손은 약간씩 경련을 보이고 있었다.
수술대에서 약간 떨어져 선 페로가 그에게 손을 치켜들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근위대 의사가 베흔의 찢어진 겨드랑이를 봉합하며 그의 눈치를 힐끗 보았다. 자존심이 제대로 상해 성낼 기운마저 잃은 듯 베흔은 지난번같이 대놓고 날뛰지는 않고 있었다. 이를 악문 채 흥분을 겨우 삭히고 있던 베흔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부상을 당하셨다면서요."
흥분한 표정의 네페티 부인이 상복 차림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베흔이 잔뜩 굳어있던 표정을 억지로 풀며 부인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네페티 부인도 함께있는 의사들을 의식하며 그에게 짐짓 사무적으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심하지 않습니다."
베흔이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도대체 어떤 나쁜놈이 감히......근위대장님을....."
"......다룬하고 싸우다가.....뒤에서 기습을......"
베흔은 차마 '시민'인 페로에게 당했다는 치욕스러운 얘기는 하지 못하고 적당한 말로 그냥 둘러대고 있었다.
"맙소사......상처가 이렇게 크다니.....피도 많이나고......."
평생 곱게만 살아온 네페티 부인은 베흔의 겨드랑이 상처에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지며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잠깐 나가있어."
의사들을 내보내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베흔이 부인을 먼저 가볍게 껴안았다. 네페티 부인은 베흔의 맨가슴에서 풍기는 살냄새를 맡으며 그의 탄탄한 근육에 몇번이나 입을 맞추었다.
"다치셨다는 말 듣고 너무 놀랐어요."
"이런 거친 일을 하다보면 종종 있는 일입니다.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부인같은 분은......이런 일에 관심두지 마십시오. 힘든 일은 제가 다 합니다. 남편도 그리되셨으니......이젠 저만 믿고 의지하시면 됩니다."
"그래도......"
네페티 부인은 건재한 베흔의 모습을 확인하고서도 무언가 불안한지 약간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갑자기 표정을 돌변한 베흔이 부인의 턱을 확 움켜잡으며 이를 드러냈다.
"설마......카렐 그놈 걱정하고계신 건 아니겠죠?"
베흔의 느닷없는 태도에 순간 창백해진 네페티 부인이 더듬거리며 겨우 대답을 토해냈다.
"카렐......이라뇨? 천만에요, 무슨 그런 말씀을. 감히 근위대장님을 거역했으니 당연히 죽어야죠. 그땐 제가 분별없이 굴었지만......그게 벌써 몇십년 전 일인데......"
온몸을 덜덜 떨며 가까스로 내놓은 부인의 변명이 그럭저럭 만족스러운지 베흔은 턱을 움켜쥔 큰 손을 놓고는 안어울릴듯한 미소를 지으며 부인의 반짝이는 금발머리를 다시 쓸어내렸다. 부인은 짐짓 미소를 지으며 베흔의 굵은 팔에 다시 뺨을 부볐다.
"대장님! 제롬 공께서 오셨습니다!"
또한번 좋은 시간이 방해되자 얼굴을 잔뜩 찌푸린 베흔은 부인과 다시 떨어져 설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제롬 공이 씩씩거리며 들어와 베흔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뚱땡이 대공주한테 한마디 듣고 오셨군요."
베흔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잘 아는군. 제후들 앞에서 내 망신을 시켜도 유분수지! 일을 그지경으로 질질 끌다니! 이게 뭐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제롬이 베흔에게 연신 삿대질을 하며 언성을 높였지만 베흔은 이 다혈질의 젊은 최고제후에게 엷은 미소만 지어보일 뿐이었다.
"후훗, 페로 그새끼.......급하기는 어지간히 급했군요. 그 자존심에 허수아비같은 황족들한테까지 비비려 들다니....."
열받은 제롬 공은 탁자 위에 놓여있던 물컵을 벌컥 들이키고는 다시 베흔을 째려보았다.
"이제 어떡할거야?"
"우선순위를 좀 바꿔야 하겠습니다."
"우선순위라니?"
"일단 눈치도 있고하니......페로 녀석은 잠깐 놔두고.......이기회에 ㅤㅋㅞㄹ크쪽을 제대로 손봐야겠습니다.......제일 껄끄러운 카렐 그년이 중상을 입어서 한동안 꼼짝도 못할것 같다니까......지도력에 공백이 생길겁니다. ㅤㅋㅞㄹ크 토벌군을 대폭 강화하고 녀석들을 제대로 손봐줘야겠습니다. 카렐 그놈만 없으면.....녀석들은 헛거나 다름없죠."
수술을 마무리한 의사들은 페로의 눈짓에 모두 자리를 비켜주었다. 몸을 소독한 페로는 몸에 몇개나 되는 관을 연결한 채 맥없이 병상에 누워있는 카렐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호흡장치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인지, 정말로 할 말이 없어서인지 카렐은 흐려진 눈으로 페로를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 조용했다.
"ㅤㅋㅞㄹ크에 돌아가지 마."
페로가 카렐의 손을 더 꼭 쥐었다.
"베흔 그새끼 너 다친거 아니까 이제 너희쪽만 죽어라고 칠 거야. 너희 조직은 이놈저놈 뒤죽박죽인 모래알이라구. 아직 체계도 엉망이고. 강력한 리더가 없으면 통제가 안돼. 나으려면 두세달은 걸린다며? ㅤㅋㅞㄹ크는 부하들한테 맡겨두고 일단 나하고 돌아가자."
카렐이 천천히 눈을 감자 페로가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카렐의 입술이 조금 떨
리며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페로는 급히 그곳에 귀를 들이댔다.
"널......되찾아서 기뻐."
너무 접근하지 말라는 의사의 경고도 순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페로는 무력하게 누워있는 카렐을 꼭 부둥켜안았다.
"총리각하! 떠날준비 끝났습니다!"
수술실 밖에서 다룬의 외침소리가 들려왔지만 페로는 카렐을 안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총리각하! 셔틀 준비중입니다!"
다룬의 재촉에 마지못해 고개를 든 페로는 잠시동안 자신을 바라보는 카렐의 시선에서 눈을 놓지 않았다. 말없이 뒤로 돌아선 페로는 느릿느릿한 걸음을 마지못해 밖으로 옮기고 있었다. 가장 고통스러웠고, 또한 가장 행복했던 이틀간의 사건들이 이렇게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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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 2 엔딩이군요. 파트 2의 엔딩은 조금 정신없었죠? 파트 2는 원래는 아래한글로 280여장 정도의 분량이었습니다만 손보는 과정에서 30장 정도는 삭제되었습니다. 내용에 큰 관계 없는 구구한 부분을 떼어내고 18금(?)을 삭제하고 재편집하니 그정도 되더군요.
뒤이어질 파트 3(A China Aster For Me, 나를 위한 과꽃 한송이)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파트 5를 위한 일종의 준비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량은 파트 2의 절반정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만 18금 부분이 많아 연재분에서는 많이 삭제될 듯 하니 분량은 장담하기 어려울 듯 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옛 이야기도 등장하지 않고 조금은 템포도 느려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이후부분을 위한 숨고르기를 하는 부분이라 생각하시고 부담없이 읽어주십시오. 조금은 무거웠던 이전보다는 가벼운 분위기에서 진행됩니다.
파트 4(Hypoxis Aurea, 빛을 되찾다)는 외전격인 크지않은 작은 에피소드입니다.
'The Iron Vein' 이 글은 총 3부의 시차를 둔 트릴로지 형식으로 짜여져 있으며, 그 중 가장 길고 내용이 방대한 1부는 현재 완결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2부는 지금 쓰는 중입니다만 현재 연재중인 1부 전반부 파트 4까지가 워낙 옛날에 쓴 글이라서 거의 리메이크를 거쳐 올리느라 지금 손을 못대고 있습니다.
1부는 몇몇 지인들과 아는 문단 소설가분에게 보여드리고 평가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인기투표결과(^^:::) 최고점을 받은 건 1부 피날레였고, 2위는 조금 후에 등장할 파트 5, 6이었습니다.
원래는 자가출판해서 취향이 맞는 친구들에게 선물하려던 글이었습니다만 그 권수와 비용이 만만찮아서 포기했습니다. ^^;;;
파트 5 (A White Chrysanthemum, 흰 국화 한그루)는 150장 정도의 분량으로 무대는 이제 황제령에서 제후지역을 장악하기 위한 경쟁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큰 축을 이룰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연재분에서는 내용이 조금 늘어나지 않을까 합니다.
파트 6 (A Mantis On the Bloody Rose, 핏빛 장미위의 사마귀)는 200장 정도의 분량으로 현재이야기는 그대로 진행되며, 과거이야기에서는 카파키 가와 베흔, 황가와의 악연의 뿌리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파트 2에서도 잠깐 언급되었던 제 글의 과거버전 주연(?)인 오르마즈 카파키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부분은 내용이 상당히 많이 늘어나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사족 : 이 부분은 1부 엔딩파트(최고점을 받았던)제목인 'A Noble Pine Tree Beside My Father(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와 함께 제가 가장 좋아하고, 그 부제또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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