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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57화 (57/1,132)

< -- 57 회: Part 2. 나를 잊지 말기를....... -- >

"시간은 우리편이다! 전혀 기죽을 필요 없다! 기사단이 측면에서 녀석들을 혼란시킬테니 너희는 침착하게 하나하나 상대하면 된다!"

카렐이 타던 흑마 시알피에 올라탄 붉은 전포차림의 페로가 선두에서 큰 세이버을 치켜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는 동부혈통다운 능숙한 승마실력을 과시하며 마을을 둘러싸고 배수진을 친 가디언들 앞을 한 번 죽 훑었다.

"네피! 시로! 다룬 모두 녀석들의 가디언들보다 한수 위다! 위급하면 킵과 조페가 언제든 너희를 도울 것이다! 너희는 지원군이 올 때까지 시간만 끌면 된다! 모험도 필요없고 영웅도 필요없다! 살아남기만 해라! 알았나!"

사기충천해진 이쪽 가디언들이 큰 소리로 함성을 올렸다. 유난히 거센 바람에 마을 남쪽 북극해안도 사나운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멀리 언덕너머 새카맣게 몰려오는 근위대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각하! 몸도 안좋으시니 제발 오늘만은 후방에 계십시오,"

보다못한 다룬이 페로의 말고삐를 붙들자 페로는 그의 손을 거칠게 쳐내며 쉰 목소리로 외쳤다.

"오늘은 베흔 그새끼 피를 꼭 보고 말테다."

"그새끼 왜이리 웬수가 많대?"

네피가 사탕수수 줄기를 쩍쩍대고 씹으며 중얼거렸다. 듣고있던 다룬이 그럴 상황이 아닌 줄 알면서도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가디언들이 각각의 위치로 흩어져 자리잡자 중군의 네피와 함께 자리잡은 페로는 망원경을 들고 다가오는 근위대들의 선두를 살폈다.

네피는 페로와 함께 있는 것이 영 껄끄러운지 그에게서 애써 고개를 돌리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상황에서 묵은감정을 드러내 좋을건 없었다.

"1진은 2, 3천정도 되겠군. 나머지는 부대 정비해 오느라 조금 처진 모양이다."

"베흔새끼가 일루와야 되는데. 시로나 다룬쪽으로 가면 어쩌지."

네피가 조금은 퉁명스럽게 혼잣말로 받아쳤다.

"아마 상대적으로 제일 약한 좌익의 다룬 쪽으로 가겠지."

페로가 대뜸 말을 몰아 다룬의 부대쪽으로 달려갔다.

"아씨, 뭐야, 썅, 끝까지 지가 잡겠다네."

네피가 들고있던 도끼를 한바퀴 빙 돌리며 씹던 사탕수수를 퉤 뱉었다.

이쪽을 향해 다가오던 근위대들이 약 3스타디아 앞에 우뚝 멈춰서서 진형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양익이 조금씩 앞서나오는 것을 보아 압도적인 병력으로 이쪽을 완전포위하는, 정석적인 공격을 펼치려는 것이 확실했다.

"킵은 우익으로! 조페는 좌익으로!"

페로가 선두에 서서 큰 소리로 외치자 후방대기하던 두 가디언이 일제히 양익에 합류했다. 진형을 갖춘 근위대들이 기세를 과시하듯 자신의 무기를 치켜들며 큰 함성을 올렸다. 때맞춰 이쪽 가디언들이 그들을 향해 일제히 가슴을 확 드러내보이며 큰 소리로 야유를 퍼부었다. 평소 이런 기세싸움이라면 사기를 위한 것이겠지만 오늘은 단 1, 2분이라도 시간을 벌어보기 위한 제스쳐에 불과했다.

"불!"

페로의 고함소리와 함께 후방에 대기중이던 삼십여명의 발빠른가디언들이 횃불을 들고 달려나가 오십 보 정도 앞의 바닥에 널려놓은 장애물들 위에 홱 집어던지고는 잽싸게 돌아왔다. 미리 기름이 뿌려져있던 장애물들에 불이 옮겨붙으면서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향해 치솟기 시작했다.

"저 유치한 새끼들, 원시시대 전쟁하나,"

불 덕분이 시계가 흐려지자 근위대 중군에 있던 베흔이 낯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연기 따위로 흐려진 시계는 전투용 스코프만 착용하면 해결되는 것이고 녀석들이 장애물이라고 불붙여 깔아놓은 잡동사니들 역시 1열의 방패와 돌격전차를 앞세운 근위대들이 진형을 갖추고 몇번만 몰아치면 박살이 날 엉성한 것들이었다.

"적당히 해라. 어차피 우리 기세에 충분히 주눅들었을테니."

베흔이 칼을 뽑아들며 직접 우익 선두 쪽으로 나섰다.

"전원 스코프 작용한다!"

각 일선 하급지휘관들이 휘하 가디언들에게 손짓하자 그들이 차고있던 스코프를 일제히 눈에 고정시켰다.

"공격개시!"

우군 선두에 있던 베흔의 큰 고함소리와 함께 근위대들이 일제히 전사단과 페로의 가디언 쪽으로 기세등등하게 내달렸다. 베흔의 예상 그대로, 페로가 미리 설치해둔 장애물들은 근위대의 진격을 '약간' 지체시켰을 뿐이었다. 장애물을 돌파한 1선의 가디언들이 페로의 배수진에 거대한 해일처럼 쇄도해들어왔다.

"적 1선에 페로 가디언들입니다!?

"뭐?"

1선에서 들려온 소식에 깜짝 놀린 베흔이 급히 되물었다.

"녀석들이 도망도 안가고 여기 있다고?"

"예!"

머릿속이 아찔 해온 베흔이 망원경을 들고 한참 격전이 진행중인 마을 초입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건 틀림없이 적의 1선을 이루고 있는 페로 가디언들과, 후방에서 말을 타고 독려하고 있는 페로 녀석의 모습이었다.

"썅, 저새끼, 뭐야."

다룬의 모습을 발견한 베흔이 결국 일선에 뛰어들어 페로의 앞에 달려들었다. 미리 대기하던 다룬이 칼을 치켜들고 주인을 향해 쇄도하는 베흔의 선공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날렵하고 긴 플람베르쥬를 움켜쥔 베흔이 조금은 둔한 양손검을 휘두르는 다룬의 공격 틈새를 정확히 짚어 칼을 내질렀다.

"밤새 안녕하셨나!"

다룬을 공격하던 베흔의 어깨를 거칠게 내리치는 칼이 있었다. 말에 올라탄 페로가 다룬과 싸우느라 정신없는 베흔의 어깨를 향해 다시 두번째 공격을 퍼부었다. 다룬과 페로 둘의 공격을 막느라 정신이 없는 베흔이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이 비겁한 놈!"

"오호 그러셔! 이건?"

페로가 말에 박차를 가하자 놀란 말이 앞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말굽에 채일뻔한 베흔이 뒷걸음질치다가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걸렸다!"

기회를 잡은 다룬이 베흔을 힘껏 내리치려는 순간, 옆에서 싸우던 다른 근위대 가디언이 대장을 향해 내리꽂히는 다룬의 묵직한 양손검을 힘껏 쳐내버렸다.

"뭐야 저새끼는!"

흥분한 다룬이 칼을 휘둘러 그 가디언에게 충성의 댓가가 무언지를 피로 알려주고 있는 새 허둥지둥 다시 일어난 베흔이 가디언 하나를 페로에게 보내고는 다시 다룬을 공격했다. 자신을 공격하려는 근위대원을 잽싸게 피해 반대방향으로 옮겨간 페로 역시 집요했다.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다룬과 싸우던 베흔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으익,"

이번의 베흔은 방금전만큼 운이 좋지는 못했다. 다룬의 칼과 거의 동시에 그를 향해 날아간 단검은 베흔의 흰 전포를 찢고 겨드랑이를 깊이 베어놓았다.

"에이! 썅!"

베흔의 흰 전포에 선홍색 피가 쫙 번져나갔다. 페로를 한 번 매섭게 쏘아본 베흔이 일단 2선으로 물러났다. 그 와중에도 장애물을 뛰어넘은 근위대원들이 계속 합류하면서 다시 이쪽의 전방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토로 경, 돌격!"

페로의 외침과 함께 양쪽에 대기중이던 토로 경의 기사단이 일제히 양익을 향해 달려들었다. 기병의 기습을 준비했던지 근위대측에서 2선에 대기하던 정규군 장창수들을 일제히 양쪽에 배치했지만 기사단의 오늘 목적이 공격이 아닌 견제에 불과한지라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하고 있었다. 기병들은 장창수들을 놀리듯 좌우로 위치를 바꾸어가며 그 틈새로 공격하고 빠지고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제롬 공. 지금 델루지 가는 상중인데 근위대에서 이런 불미스런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상복 차림의 제롬 공이 성난 레곤 대공주의 추궁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조심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인이 어찌 근위대의 일을 알겠사옵니까. 정말 뜻밖이옵니다."

"뜻밖이겠죠........물론 그러시겠죠. 제후들의 4두마차의 하나인 델루지 가의 초상이니 모두 근신해야 할 때 근위대가 저렇게 소동을 벌이고 있으니 델루지 가를 모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마땅히 할 말이 없는 제롬 공은 최대한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는수밖에 없었다. 자리에 모인 나머지 제후들도 불안한 표정으로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특히나 제롬의 어머니인 서부 최고제후 네페티 부인은 무슨 이유엔지 창백해진 얼굴로 식은땀까지 흘리며 좌불안석을 하고 있었다.

제롬이 과장된 손짓과 함께 변명처럼 말을 이었다.

"근위대장의 행동이 지나친 듯 싶으나 그간 황실을 위해 해온 지대한 공이 있사오니 일단 고정하시옵고......소인이 직접 근위대장을 만나보겠사옵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대공주가 오만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약간 돌아앉았다. 제롬 공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원군은!"

후방으로 말을 몰아 달려간 페로가 보좌관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5분 후 도착합니다!"

"씨발! 왜이렇게 느려!"

페로는 다시 전방으로 말을 몰아 달려나갔다. 2선으로 사라진 베흔은 생각보다 부상이 심각한지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카인과 쿠베의 부대가 남진합니다. 더 이상 저지는 불가능합니다."

제네르가 헐떡거리는 목소리로 할룩스를 통해 알려왔다. 그동안 남쪽으로 진군해오는 근위대 천여명을 붙들고 백여명의 기병으로 치고빠지며 최대한 진격을 늦춰온 제네르도 결국 한계에 부딪혔는지 부하들과 함께 이곳으로 정신없이 도주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천여명의 근위대 추가병력이 위세등등하게 모습을 나타냈다.

우익쪽에서 말을 타고 급히 달려온 아메스가 큰 소리로 알렸다.

"시로의 부대가 위험합니다!"

"왜!"

"토로 로버넬 경의 기사단 병력이 명령을 어기고 적진에 돌격해들어갔다가 고립되었습니다! 적 우회기동으로 위험한 상황입니다!"

"썅! 토로 그새끼!"

자신의 명령에 처음부터 시큰둥한 태도를 짓던 토로 경의 얼굴을 떠올린 페로가 대뜸 상소리를 내뱉었다.

"제네르 경! 귀환해 우익을 그대가 지휘한다!

"예. 알겠습니다."

언제 들어도 거의 동요가 없는 제네르의 밋밋한 대답이 들려왔다. 도대체 흥분하는 일이 있을까 싶어보이는 이 유학자 겸 기병장교의 얼음장같은 태도를 지켜보며 페로는 카렐이 사람 하나는 제대로 골라냈다며 내심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아군 추가병력입니다!"

아메스가 큰 소리를 지르며 손으로 남쪽을 가리켰다. 페로는 먼지앉은 스코프를 털어내며 밝은 해를 등지고 접근해오는 다섯대의 병력수송셔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명령대로 헨지 휘하 8백명은 우측 후방에, 페다이 휘하 7백명은 좌측 후방에 상륙합니다. 적을 양쪽에서부터 조여가겠습니다."

"알았다."

막 1진과 합류한 카인과 쿠베의 부대는 느닷없는 대병력의 강습에 당혹해하며 후방을 틀어막는 데 급급할수밖에 없었다. 아예 처음부터 예비대로 대기상태였다면 모르지만 총력전을 위해 마을에 기동하던 상황에서 대규모 후방강습을 당했으니 이도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황에 처해버리고 말았다.

3천명의 근위대 가디언부대는 눈 깜짝할새 2천이 조금 넘는 페로와 코아 전사단 연합병력에 3면공격을 받게 된 셈이었다. 이 상황에서 저 험한 북극해는 마을을 지키는 페로의 가디언들을 패닉상태로 몰아넣는 장애물이 아니라 뒤를 지켜주는 자연방벽의 노릇을 하고 있었다.

다친 어깨를 응급치료받던 베흔은 남쪽에서 갑자기 나타난 대병력에 깜짝 놀라 다 끝나지않은 치료도 마다하고 일단 칼을 쥐고 뛰쳐나왔다.

"뭔가! 무슨 병력이야!"

"페로의 셔틀 같습니다!"

페로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차마 생각지도 못했던 베흔은 순간 당혹스러울수밖에 없었다. 추가병력을 더 투입해서라도 이 전투에서 끝장을 보던지, 아니면 일단 후퇴해야 하는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포위당하는 것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추가병력을 동원할 때까지 버티어줄 여유가 있는지는 그로서도 확신이 서지를 않았다.

"적 우익은?"

"방금 기병 100여기가 투입되면서 다시 혼전상태입니다. 하지만 몰아치면 뚫릴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베흔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싸쥐었다. 대공주와 제롬 공이 계속 자신을 찾아대고 있는 것을 보아 이 전투를 더 확대시키는 건 상당한 정치적인 위험성까지 동반하고 있었다. 그는 맘먹고 덤빈 이번의 공격이 또한번 실패로 돌아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근위대 통제구역을 무단침입한 무장세력에 대한 정당한 공격이라는 얼핏 그럴싸한 명분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적에게 박살이 난 후에는 그런 명분 따위로 입막음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카인! 전 병력을 모아 동쪽을 돌파해! "

베흔은 제네르가 합류하면서 가까스로 현상유지만 하고 있는 페로의 우익쪽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토로 경의 기사단이 무너지면서 잠시 뚫렸던 그곳은 새로 강습한 헨지의 부대가 투입되었지만 아직 근위대들을 포위해 압박할 정도로 수습되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베흔의 명령에 카인이 데려온 기운넘치는 새 근위대 가디언들이 일제히 동쪽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저런 머저리같은! 썅 토로 그 개새끼!"

포위망이 어처구니없이 돌파되는 모습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페로가 입에 붙다시피 한 독설을 마구 내ㅤㅁㅐㅌ었다. 토로 경이 적진에 멋대로 돌격해서 우익을 뒤흔들어놓지만 않았어도, 아니 베흔 저놈이 단 몇분만 결단을 미루었어도 4천명의 근위대들을 사방에서 포위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얻어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다룬과 킵은 본대를 지킨다! 헨지! 페다이! 너희는 양익에 산개해 적의 재공격에 대비하고 네피! 조페! 기사단은 나와 함께 적을 쫓는다!"

창을 꼰아든 페로가 말에 박차를 가하며 동쪽을 향해 달려나갔다. 어차피 적 섬멸은 불가능해졌으니 이제 도망치는 적을 쫓아 최대한의 타격을 입히는 정도로 만족하는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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