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6화 (46/1,132)

< -- 46 회: Part 2. 나를 잊지 말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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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대로 제베스 도적집단의 토벌을 단 3일만에 끝내고 금의환향한 페로가 황제가 '특별한 선물'로 준비해두었던 부마위를 고사하고 카렐을 택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은 순식간에 황궁 전체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페로의 발언이 있는 순간 근위대장 베흔의 표정은 순식간에 백짓장이 되어버렸고 그 바로 옆에 있던 당사자 카렐은 그답지않은 넋나간 표정을 짓고말았다. 충격을 받은 실리페 황후는 옆에 있던 물을 몇컵씩이나 허겁지겁 들이켰다.

세나우스 3세 황제가 실망감을 애써 감추며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카렐에게 눈짓을 해 보이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카렐이 황제 앞에 고개를 숙였다.

"약속은 약속이니......널 자이센 가문에 보내야 하겠다.....그동안 근위대에서 수고 많았다. 오늘부로 네 새 주인은 저기 있는 페로 자이센 부총리다. 하지만 부총리 역시 황실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이니 너 역시 제국의 수장인 황제의 발밑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명심하겠사옵니다. 폐하."

카렐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성난 표정을 애써 감춘 황제는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와 함께 접견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베흔이 페로에게 바싹 다가오더니 끓어오르는 부아를 최대한 억누르며 중얼거렸다.

"부총리답지않은 바보짓을 하셨군요."

당사자 페로는 베흔의 일갈에 가벼운 미소만 지어보였을 따름이었다.

"카렐이 내 소유건 근위대 소유건 결국은 황실을 위해 일하게 될 건 매한가지 아니겠는가. 내가 후계자가 된다면 말일세."

페로가 베흔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쏘아붙였다. 페로의 '계산'에 베흔이 내심 치를 떨고 있었다. 카렐을 가진다면 페로의 세력은 더더욱 막강해질테고, 황제로서는 그를 끌어들여야 할 필요성이 더 커지는 셈이었다. 베흔에게 비웃음을 던진 페로는 뒤로 휙 돌아서며 함께 온 부하들과 함께 접견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카렐의 짐싸는것을 도와주던 시로가 한숨을 한 번 푹 내쉬었다. 카렐은 섭섭한 표정이 그득한 그의 손을 꼭 쥐어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니가 죄송할게 뭐있냐......차라리 잘됐는지도 모르지......여기서 베흔 대장 그 심술 다 받아주느라 몸성한날이 없었는데......예정대로 남부에 돌아가면 이번엔 정말로 살아남기 힘들지 몰라. 페로 그사람 성깔은 그모양이어도 자기 가디언들 제대로 아끼기로 소문난 사람이니까......여기서처럼 다른 수련장 출신이라고 눈치보이는 일도 없을테고."

가방의 뚜껑을 닫은 카렐이 한숨을 내쉬며 시로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시로가 두 팔을 벌려보이자 카렐이 그의 가슴을 가볍게 껴안았다. 시로는 카렐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거려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제발 너하고 안좋게 다시만나는 일이 없어야 할텐데......"

시로와 함께 몇 개의 가방을 들고 나오는 카렐의 앞에 베흔이 불쑥 모습을 나타냈다. 시로가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카렐과 베흔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럼.....나 먼저 가있을테니 따라와."

시로가 총총걸음으로 멀어져가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카렐이 그다지 곱지않은 눈길로 베흔을 돌아보았다. 베흔이 비웃음섞인 미소를 보내며 중얼거렸다.

"좋아 죽을지경이지?"

"......별로 적합하지 않은 표현인 듯 싶습니다."

"남부에서 있었던 일은 나도 참 유감이야."

베흔의 사과같지도않은 사과에 카렐이 대뜸 그를 째려보았다.

요즘들이 사이가 부쩍 안좋아진 이 둘은 만날때마다 이런 눈싸움을 주고받기가 일쑤였고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기왕 떠나는 김에 카렐은 아예 대놓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베흔 역시 그간 쌓인 감정이 많은 듯 카렐의 멱살을 움켜쥐며 쏘아붙였다.

"하지만 네 주제를 알았어야지?......오르지도 못할 나무를 바라보다니......지원군 안 보내준 건 그 댓가라고 생각해 둬."

"후훗, 오르지도 못할 나무라......그건 같은 가디언인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요. 여자 하나 때문에 그렇게 유치한 방법으로 날 죽이려 하셨다?......당신도 결국 '그냥 남자'셨군요."

카렐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려버리자 베흔이 눈을 치켜뜨며 중얼거렸다.

"푸훗, 여자 하나때문이라고? 모르면 잠자코나 있으라고."

멱살을 쥔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그냥 지나가려는 카렐의 팔을 베흔이 홱 붙들었다.

"알아둬.......넌 더이상 옛날의 너가 아니란 걸 말이야. 그걸 상기하지 않으면 큰코다칠거야."

베흔의 손을 또다시 뿌리친 카렐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뒤에 남겨진 베흔은 멀어지는 카렐을 바라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 망할 녀석을 죽일 기회가 너무도 어처구니없이 조금씩 사그러들어가고 있었다.

시로와 함께 서너개의 가방을 들고 주차장으로 내려온 카렐의 앞에 먼저 온 페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페로의 눈짓에 노예 둘이 달려와 카렐의 짐을 받아주었다.

"카렐의 칩입니다. 이전기록도 마쳤습니다."

시로가 손에 쥐고있던 자그만 상자를 열어보이자 그 안에 있던 두 장의 화려한 금색 칩이 반짝이며 모습을 나타냈다. 가디언 소유자임을 상장하는 그 '칩'은 가디언의 팔에서 팔찌를 뽑아낼 수 있는, 일종의 소유문서와도 같은 것이었다. 살아있는 가디언에게서 팔찌를 뽑아낸다는 건 그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의미였고, 죽은 후에는 그 기록을 회수한다는 뜻이었다.

"X-11-1 카렐......후훗.......바로 이거로군......"

"그리고 이건 카렐 합성과 훈련에 관련된 특별보고서입니다. 극비사항이지만 베흔 대장이 부총리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한 관리 부탁드리겠습니다."

입가가득 환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페로가 칩 상자와 책을 받아들었다. 먼저 차에 오른 페로가 자기 옆자리, 상석을 카렐에게 가리켰다. 페로의 뜻밖의 태도에 놀란 시로가 어깨를 으쓱 했다. 가디언이 감히 주인과 나란히 상석에 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카렐이 그동안 자신에게 가장 다정하게 대해주었던 시로를 돌아보았다.

"좋겠다. 가서 잘 지내라. 나중에 또 보게 되겠지."

시로가 웃음띤 얼굴로 손을 흔들어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카렐은 페로의 바로 옆에 자리잡고 앉았다. 그가 앉기가 무섭게 페로의 전용차는 다른 몇대의 차의 호위를 받으며 황궁 주차장을 떠났다.

근위대 가디언 카렐은 이제 페로 가디언 카렐로의 새 인생을 맞이하고 있었다.

페로의 전용차 상석에 페로와 단둘이 앉은 카렐은 사뭇 긴장한 표정으로 창밖과 무릎 위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꽤 한참을 달릴동안 둘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카렐의 손을 먼저 살며시 잡은 건 페로였다.

"널 되찾아서 너무 행복해."

예전과 다름없는 페로의 다정한 태도에 카렐이 엷은 미소를 띠며 이 옛 친구의 손을 조용히 맞쥐었다. 카렐을 쥐어박곤 했던 그 개구장이의 손은 이제 훨씬 더 커진 카렐의 손 안에 쥐여있었다. 페로는 카렐의 굳어진 손등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페로가 뭐라 막 말하려는 때 운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각하, 거의 도착했습니다."

"알았다......언덕 위에 잠깐 세워."

"알겠습니다."

차에서 내려선 카렐과 페로는 양지바른 떡갈나무 그늘에 나란히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카렐이 떠났을 때에 비해 몇 배는 커진 이 자이센 종가, 아니 페로 관은 새 종장인 페로가 얼마나 의욕넘치게 세력을 키워왔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페로가 얼굴로 언덕 밑의 집을 가리키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100년이 넘게 지났지만 이 부근은 여전해. 우리 집은 내가 많이 확장했고......수련장은 남쪽 사막 경계에 따로 건물을 지어서 옮겼어. 물론......넌 계속 나하고 집에서 같이있게 될거야. 어때?"

카렐은 별 대답없이 약간의 웃음만을 지어보일 따름이었다. 페로는 카렐의 머리 위에 떨어진 떡갈나무 잎사귀를 발돋움을 해 떼어내고는 그의 긴 갈색 머리카락과 약간 붉어진 갸름한 얼굴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긴장이 풀린 카렐이 웃음을 띠며 조그맣게 물었다.

"'그 여자들'은?"

페로가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페로가 그다지 쉽게 가문의 후계권을 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카렐도 익히 들어 알고있었다.

"한 여자는 죽여버렸지. 한패거리였던 그 자식들하고 같이. 나머지들은 알아서 짐싸서 도망치더군. 한짓이 괘씸하지만 그냥 봐주기로 했어."

카렐이 피익 웃으며 페로의 옆에 똑바로 섰다. 문란하던 아버지로 인해 비롯되었던 페로의 복잡하던 가정사는 아들 페로의 손에 피를 묻히고 나서야 정리된 셈이었다.카렐은 앞장서는 페로의 뒤를 따라 언덕 아래 멀리 보이는 페로 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휘하 가디언들을 사랑채에 집결시킨 페로는 그들의 맨 앞에 서 있는 다룬과 네피, 그리고 자신의 바로 옆에 선 카렐에게 약간 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다른 녀석들이야 등급이 낮으니 별 말이 없겠지만 가디언부대의 최고참들인 다룬과 네피, 저 둘이 문제였다. 특히 매사 낙천적인 네피 녀석보다 다혈질에 자존심도 강한 다룬 녀석이 걱정이었다.

페로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아다시피, 일찌기 우리 수련장에서 자랐던 가디언 카렐이 다시 이곳에 돌아오게 되었다. 잘 알려진대로 카렐은 가디언중에도 가히 상대할 자가 없는 강자니 우리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네피의 표정은 여전했지만 다룬의 표정은 아니나다를까 약간 일그러들어 있었다. 그런 낌새를 모를 리 없는 페로는 그 둘을 똑바로 가리키며 약간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피! 다룬!"

"예!"

페로의 지명에 둘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너희 둘이 카렐보다 60년이나 먼저 합성된건 잘 안다. 하지만 아다시피 카렐은 황실의 프로젝트에 의해 만들어진 특별한 존재다. 그리고 등급은 사실상 너희보다 높다. 가디언은 등급으로 서열이 매겨짐을 너희들도 잘 알테니 명심하도록 해라. 앞으로 카렐은 너희와 동급 혹은 상급에서 일하게 될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다룬이 애써 섭섭함을 감추며 네피와 함께 대답했다. 페로가 다른 가디언들에게도 큰 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너희들 모두에게 카렐은 상급자가 된다. 알겠나?"

"예!"

수백명의 가디언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대답했다. 페로의 옆에 있던 카렐은 마당으로 내려가 네피 옆에 서서 페로를 향해 고개를 깊이 숙여보였다.

카렐이 자신 앞에 서서 충성을 맹세하는, 너무도 흐뭇한 광경에 입가에서 웃음을 감추지 못하던 페로는 방으로 들어가며 네피와 카렐에게 마지막으로 말을 던졌다.

"카렐은 앞으로 이곳 경비를 총괄할테니 숙소에서 제일 좋은 방을 배정해주도록 해라. 네피 네가 안내해주도록 해. 그리고 카렐은 짐정리 끝내고 저녁식사 전에 내 방으로 오도록 해. 내 할 말이 있으니."

페로가 사랑채 안으로 사라지자 네피가 넉살좋게 휘파람을 불며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노예들이 몇 개나 되는 카렐의 가방들을 들고 그의 뒤를 따랐다.

"휴, 기껏 원정 끝내고 좀 쉬나 했더니.....제기랄, 배고파 죽겠는데, 따라와. 방 알려줄테니."

서쪽 행랑을 향해 걸으며 네피가 입을 열었다.

"뭐 어느정도는 알겠지만 제대로 소개하지. 난 X-6-9461이고 이름은 네피야. 동기들은 밥통이라고 불러. 아까 옆에 있던놈은 X-6-9510 다룬이고 가디언 주제에 여자라면 환장하는 별종이야. 그녀석 뚱 해있는 건 신경쓰지 마. 단순한 녀석이라서 좋은말 몇마디 해주면 금새 풀릴테니까. 게다가 여자한테는 무지 약하거든. 히히. 특히 너같이 이쁜 여자한테는 말이야."

"흠......"

네피의 생각외의 친절한 태도에 긴장감이 풀어진 카렐의 입가에도 약간의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옛날에 너 어릴때 봤던 기억 나. 언제였더라? 한 백년 쫌 넘게 전이었던 것 같은데.....내가 7등급 때였나? 그때 수련장 교관이었는데 동기들이 여자 가디언이 왔다길래 신기해서 구경한다고 난리났었지. 근데 막상 보니 이쁘장하기만 하지 쬐끄맣고 비실비실한게 하나도 가디언 안같더라구. 참, 나 근데 그런 여자애가 이렇게 됐다니......잠깐, 지금보니까 나보다 키가 더 큰거아냐?"

행랑채에 들어선 네피는 '지도가디언 전용숙소'라고 쓰여진 안쪽의 조그만 별채로 가 문을 열어보였다.

"여기야. 옆방은 내방이고 그 옆은 다룬꺼야. 특급들 묵는 별채인데 방 5개중에 달랑 두개 쓰고있었지 뭐야. 뭐 황궁 숙소보다는 못할지 모르지만 노예들이 따로 불때주는 등 따땃하고 널찍한 욕실딸린 독방이 어디야. 제일 쫄따구녀석들은 한방에 서너명씩 자는데."

작은 욕실이 딸린 꽤 큰 방 안에는 작은 책상과 침구들, 옷장과 무기를 걸 수 있는 꽤 큰 장이 놓여있었다. 바닥은 난방이 되는지 꽤 따뜻했다.

"여기 직전엔 남부 파견군 사령관으로 있느라 황궁에 없었어."

카렐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카렐의 그 희한한 목소리를 들은 네피가 무릎을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전에는 신경질내느라 몰랐는데 니 목소리 정말 걸작이다. 어떻게 사람 목소리가 그러냐? 너 혹시 곰 모가지 떼어다가 붙인거 아니냐?"

약점을 잡힌 카렐의 얼굴이 붉어지자 말실수를 깨달은 네피가 무안한지 머리를 긁적거리며 얼른 달려들어가 창문들을 활짝 열어젖혔다.

"어휴, 안썼던 방이라 냄새가 좀 난다. 환기 좀 시켜야지. 앞으론 이 방에 향긋한 여자 냄새가 배겠지? 히히히."

"사람들이 나한테선 피냄새가 난다던데."

카렐이 어깨를 으쓱 해보이며 가방들을 안에 들여놓았다.

"그래도 내방에서 나는 악취만 하겠어."

네피가 바닥에 주저앉아 꼬질꼬질해진 양말에서 풍겨오는 자기 발냄새를 맡아보고는 기겁을 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아침식사시간은 7시부터 9시까지고 점심은 12시부터 2시, 저녁은 7시부터 9시까지인데, 자기 되는시간에 소속 행랑 주방에 가면 줘. 근데 이 특급행랑엔 주방이 없거든. 특별한 일 없는때는 우린 사랑채 별실에서 주인님하고 같이 식사해."

페로와 함께 식사를 해야 한다는 말에 카렐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확 얼어붙었다.

"식사는......누가 미리 차려두는거야?"

"응. 주방 요리사가 주인님꺼하고 우리들꺼는 미리 개인상 봐서 차려놔. 우린 그냥 부르면 가서 먹으면 돼. 특급식탁은 쫄따구들 비하면 수라상이지. 근데 왜? 못먹는거라도 있어?  미리 주방에 얘기해놓으면 챙겨줄거야. 낯설어서 뭣하면 내가 말해줄께. 딴데는 몰라도 주방은 꽉쥐고 있거든. 히히"

카렐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뭐라 말하려던 카렐은 입을 다물며 작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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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오셨군요."

일찍 카렐의 막사를 찾아온 토로 경이 제일 먼저 도착해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아메스에게 가벼운 목례를 해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메스도 토로 경에게 평소처럼 최대한의 예의를 내보였다. 토로 경의 뒤를 이어 들어온 제네르 하크로딘 교수는 처음 들어와본 막사 분위기가 낯설은지 약간 긴장한 표정이었다.

"교수님?"

십경과정 교수였던 제네르를 알아본 아메스가 즉시 그에게 공손히 절을 올렸다. 제네르 역시 온통 모르는 사람뿐인 이 와중에 간만에 보인 낯익은 얼굴에 환한 미소로 답례하고 있었다.

간만에 만난 그 두 여자들의 수다 사이로 보좌관 우베가 시간맞춰 들어왔고 잠이 한참 덜 깬 얼굴의 네피가 마지막으로 헐레벌떡 모습을 나타냈다.

"에이씨, 난 역시 아침조회 체질이 아니란 말야......배고파 죽을지경인데......"

큭 하고 한 번 웃어보였던 아메스가 포장지에 잘 싸 한구석에 챙겨놓았던 구운 닭 한마리를 내놓았다.

"주방에서 협박반으로 뺏아왔어요. 지금은 말고 끝나거든 드세요."

"하하하, 이거 고마와서 어쩌나,"

네피는 사양도 않고 아메스가 내민 닭을 냉큼 받아 품 속에 우겨넣었다.

잠시 후 검은 수트에 황금자수가 새겨진 화려한 검은 망토를 어깨에 걸친 카렐이 모습을 나타내자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명이 없군."

카렐이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그때 막사문이 빠끔히 열리며 누군가가 조용히 안에 들어섰다. 네피와 토로 경이 순간 경악스런 얼굴로 카렐을 한 번 바라보았다. 어두웠던 카렐의 얼굴에 그제서야 미소가 떠올랐다.

"잘 왔네. 시로. 몸은 좀 어떤가?"

"......많이......나아졌.....습니다."

시로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운 듯 고개를 떨구며 겨우 대답을 뱉어냈다.

"응?"

한구석에 앉아있던 제네르가 고개를 갸우뚱 하며 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로 역시 그의 얼굴이 어딘지 낯이 익은지 그의 열굴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황궁 북쪽별관, 78층. 198년 2월."

제네르가 씨익 웃으며 먼저 입을 열자 시로가 손뼉을 치며 제네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네르 역시 밝은 표정으로 시로가 내민 손을 힘있게 맞쥐었다.

"아는 사이인가보지?"

카렐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자 제네르가 냉큼 대답했다.

"같이 근위대에 포로가 되었었죠."

"아하, 그러고보니 4차 혼란기 때 둘 다 로노 장태자군 소속이었군."

"그날 그곳에서 로노 장태자전하하고.....주페 태자저하, 타니토 공주저하까지 세 분이 모두 체포당하셨습니다, 며칠 후에......모두 참수당하셨고......"

제네르가 옛 생각이 떠오르는지 어두워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형제들 셋을 죽이고 제위에 올랐던 선대황제가 남긴 비극적인 사건의 현장에 저 두 사람이 모두 있었던 모양이었다.

순간 카렐은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카렐은 반대편에 앉아있는 토로 경의 눈치를 재빨리 살폈다. 당시 3명의 태자들에 대한 처형을 주도했던 것이 자신의 어머니, 세네피스 황후와 그 심복이었던 토로 경을 비롯한 북부 세력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옛 일을 되새기며 울적해져있는 제네르를 토로 경이 곱지않은 시선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카렐로서는 마음먹고 영입한 저 개혁파 유학자가 시작부터 토로 경을 비롯한 북부 세력과 삐걱거리기 시작하자 내심 난감해하고 있었다.

갑자기 서먹해진 분위기를 돌리려는 듯 카렐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토로 경."

"예. 전하."

"이곳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요. 오늘 오후나 내일중으로는 떠날 것이니 미리 준비하고, 시로 대장을 포함한 부상자들을 수송선까지 불편없이 옮길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는 문제를 옆에 있는 아메스 아씨와 상의해 처리하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전하 분부대로 거행하겠나이다."

"그리고 우베는 ㅤㅋㅞㄹ크와 연락해 내일 이곳 근방으로 올 수송선을 미리 확보하도록 하고 네피는 이동에 위험이 될지도 모를 적들이 있는지 미리 파악하게."

"예!"

보좌관 우베가 눈을 반짝이며 힘있게 대답했다. 카렐의 시선은 한구석에 여전히 시무룩하게 앉아있는 제네르에게 향했다.

"그리고, 토로 경."

"예."

"거기있는 제네르 하크로딘 경을 좀 빌려주게."

"예?......무슨 말씀이시온지......"

"제네르 하크로딘 경을 내 참모로 삼고자 하네. 명망높은 개혁파 경세학자에 남극성당 직제학이니 그 격이 충분하지 않겠는가?"

입술을 굳게 다문 토로 경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네피스 황후의 적인 로노 장태자를 지지했던 동부 출신의 유학자가 카렐의 최측근을 차지하고 앉는다는 사실에 그도 속에서 불만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음이 확실했다. 하지만 카렐은 선대황제처럼 어머니와 북부를 등지고 야심을 이룰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물론 그들을 적당한 선에서 '이용할' 필요는 있겠지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카렐이 싸늘해진 분위기에 잽싸게 종지부를 찍었다.

"그럼 오늘 아침 조회는 이대로 접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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