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38화 (38/1,132)

< -- 38 회: Part 2. 나를 잊지 말기를....... -- >

옛 제니안이 비밀집회를 위해 썼던 카타콤베는 황제령 북동쪽의 6번도시 험준한 산골짜기에 위치해 있었다.

원래 제니안은 비폭력과 도덕정치를 주장하는 비교적 온건한 유교 정치철학 세력이었다. 하지만 그 4대 수반이며 현 황실의 시조인 리 리쿠 이후 그 노선을 급변해 당시 무자비한 종교재판을 행했던 다신교단 '침묵의 자매들' 에 대한 반(半)폭력적 저항방식을 택했고, 그는 자신의 그 과격함의 댓가를 지금의 남극성당이 있는 자리에서 사지를 찢는 거열형을 당함으로서 갚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의 사후 TSG와 전략적으로 손을 잡음으로서 제국의 성립에 기여했고, 현재 제국의 주도세력을 이루고 있는 유학적 지식인층의 뿌리가 되기도 했다.

평소 드나드는 사람도 거의 없던 이 황무지엔 오늘따라 백여명의 근위대 가디언들이 철통같은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역시 백여명의 가디언들을 대동하고 자리에 나타난 페로는 구석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근위대들을 보고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기분이 안좋은걸......."

"아버님, 지금이라도 돌아가시는 편이......"

함께 온 아메스가 아버지의 팔을 붙들었지만 그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다, 이정도는 어차피 생각했으니까."

페로는 동행한 카인과 엘러에게 있을 위치를 귓속말로 알려주고는 다룬과 킵을 대동한 채 카타콤베의 어두운 굴 안으로 들어섰다. 사뭇 불안한 표정의 아메스가 서류가방을 든 채 그 뒤를 따랐다.

"오랫만이다."

맨 안쪽의 밀실에서 기다리던 수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 어둡고 축축한 밀실 안에는 촛불 몇개만 켜 있을 뿐이었다. 그와 형식적으로 악수를 나눈 페로의 시선은 한구석에 말없이 서 있는 베흔에게 가서 멎었다.

"근위대장은 그간 무고하셨나?"

"걱정해주신덕에."

베흔이 또한번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대답했다. 페로가 피익 하고 웃으며 가져온 서류상자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자아, 그럼 할 말이 있으면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합시다."

페로가 냉담한 표정으로 수우와 베흔을 돌아보았다. 수우가 약간 더듬거리며 가져온 자료를 펼쳐들었다.

"비록 지금 제위가 공석이긴 하지만.......어쨌든 국가기강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활동은 필요하니까......"

"최소한의 활동?"

수우의 입에서 '국가기강' 운운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 가소로운지 페로가 비웃듯 되물었다. 그런 페로의 눈치를 못본 척 하며 수우가 말을 이었다.

"ㅤㅋㅞㄹ크의 반란무리들을 속히 쓸어버릴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 같은데."

"그건 근위대 소관이 아니신가? ㅤㅋㅞㄹ크는 황제령에 속하니까 근위대가 소탕을 위해 출동한다면 총리로서 내 기꺼이 인가해줄 예정이네."

페로의 천연덕스런 대꾸에 수우가 약간 당혹스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 상황이 근위대만으로는 힘들다는 거야.......그래서......자네 도움을 빌리고싶네. 자네도 도적소탕엔 근위대와 손잡겠다고 공언한 바 있지않나?"

"그네들은 애석하게도 도적은 아닌데."

페로가 잔뜩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의자 위에 몸을 뻗었다. 아메스가 약간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도적소탕이야 직접 민생문제지만 이건 민감한 정치적인 문제야. 게다가 그쪽엔 꽤 많은 귀족출신들과 전 관료들에 심지어 전 황후까지 있네. 이런 정치적인 문제는 일개 사병부대인 우리 가디언부대가 끼어들 게재가 아닌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네. 내가 총리로서 할 수 있는 건 근위대가 출동할 때 그걸 인가해주는 것 뿐이야."

보다못한 베흔이 천천히 탁자 앞으로 나서더니 페로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총리각하, 솔직하게 털어놓죠. 근위대가 출동했을 때 추산되는 손실은 상등급 가디언의 절반 정도의 전사입니다. 물론 카렐과 네피에게 당하겠죠. 게다가 ㅤㅋㅞㄹ크는 밀림지역이라 대대적인 소탕작전이 극도로 어려운 곳입니다. 70년 전에 있었던 노예잔당 소탕작전때 일을 잘 기억하시겠죠?"

페로는 그제야 탁자 앞으로 바싹 당겨앉았다.

"그때도 2만명의 잔당을 괴멸시키느라 근위대와 제후군 5만이 전사했습니다. 이번엔 노예잔당 수준이 아니라 훈련된 가디언과 어느정도 정규군 수준으로 편제된 준국가집단입니다. 이들을 소탕하는 건 저희와 경과의 사이에 제위문제를 논하기 전에 미리 해결하고 들어가야 할 문젭니다. 누가 제위에 오르더라도 이녀석들을 소탕하는 건 제위 초기에 엄청난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겁니다. 그러니 아예 문제의 소재를 지금 없애버리는 편이 양쪽의 이익에 부합됩니다."

베흔의 핵심을 찌르는 한마디에 페로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약간 당황한 아메스가 아버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내게 어느정도의 협조를 바라는거지?"

페로가 나즈막히 물었다. 아메스는 하마터면 악 하고 비명을 지를 뻔 했다. 페로의 태도가 누그러들기 시작하자 약간 자신감이 오른 베흔이 힘있게 대답했다.

"특급 3명이 지휘하는 가디언 3천."

"흠......"

"근위대에서도 특급 4명과 가디언 4천을 동원하고, 그리고 근위대 정규군 2만과 제후군에서도 정규군 5만을 징발하겠습니다."

베흔이 페로의 얼굴에 바싹 들이대고 낮게 속삭였다. 페로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현재 녀석들의 병력은 가디언 8백여명에 시민군 2만 정도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으로서는 가디언들의 수준은 대체로 낮은 편이고 정규군 중 제대로 무장하고 훈련받은 병력은 8천 정도로 추산됩니다."

"하지만......내 알기로 녀석들의 병력은 집중되어있는것이 아니고 밀림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고 하는데......결국 장기전이 되겠군."

"카렐과 세네피스 황후만 잡으면 됩니다. 그 이상은 필요없습니다. 구심점을 잃으니 스스로 자멸할겁니다."

"왜 그렇게 카렐에게 집착하지?"

페로가 베흔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뭐라 더 말하려던 베흔의 입술이 딱 멈췄다. 페로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카렐은 코아 전사단의 식객일 뿐이야. 전사단의 수장은 전 내무장관이던 구완 슈벨과 네피인데......왜 그리 카렐한테 집착하지?"

"저도 총리각하께 묻고싶군요."

베흔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지금 카렐과 총리각하와 어떤 관계입니까? 총리께서 구 대신들을 모아 제3의 세력을 만들라고 일부러 내보낸 겁니까? 아니면 네피처럼 총리각하로부터 도망친 겁니까?"

"벼르던 질문이 이제야 나오는군,"

페로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하자 베흔과 수우가 당혹스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페로는 황제령에 무려 5만의 제후군이 들어온다는 것이 무얼 뜻하는 것인지 잘 알고있었다. 그 5만 중 적어도 절반 이상은 수우의 절대적인 지지세력인 남부 세력으로 채워질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에게 얌전히 '폭도사냥'이나 맡겨두고 있을 베흔이 절대 아니었다.

"제후군이 감히 황제령에 들어오는 건 황실의 위엄에 악영향만 미칠 뿐이야. 제후군 없이 근위대 정규군 5만으로 진행한다면 동의하겠네."

페로의 그럴싸한 대답은 사실상 거절의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22만에 달하는 황실 근위대의 원래 목적은 황제령의 치안이 아닌, 제후지역의 단속이었다. 그렇다보니 정규군 20만 중 무려 13만은 제후지역에 파견군으로 주둔하고 있었고, 황제령에는 만여명의 보안국 요원을 제외한 6만의 정규군이 각 도시와 지역별로 흩어져 주둔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5만을 동원하라는 건 한마디로 어불성설이었다.

"그렇다면 3만......"

"됐네."

딱 잘라 거절한 페로는 그대로 가방을 다시 챙기고 있었다. 가까스로 가진 비밀회의가 결렬임을 깨달은 베흔은 자기도모르게 턱을 꽉 악물고 있었다.

막 밖으로 돌아나가려는 그들의 귀에 밖에서 들리는 묘한 굉음이 들어왔다.

"뭐지?"

굉음이 놀란 다룬과 킵이 급히 페로의 양옆을 막아섰다. 입구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이씨!"

페로가 베흔을 노려보았다. 안전을 보장하고 페로를 불러들였던 베흔 역시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입구쪽으로 허둥지둥 달려나갔다.

"뭐냐!"

베흔이 밑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엘러 형님이 다쳤습니다!"

카인이 입구에 모습을 나타낸 페로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피묻은 칼을 쥐고있던 제파의 발밑에 상처를 입은 엘러가 쓰러져 있었다. 사방에 흩어져있던 근위대와 페로 가디언들은 벌써부터 칼을 뽑아들고 싸울 태세에 돌입해 있었다. 급히 무기를 내려놓은 제파가 변명하듯 소리쳤다.

"엘러 저놈이 제게 먼저 돌을 굴렸습니다!"

"말도안되는 소리! 더럽게 뒤에서 기습한 건 너잖아!"

엘러가 상처의 고통을 참으며 있는힘을 다해 소리쳤다.

"그만그만!"

페로와 베흔이 동시에 소리쳤다. 신경이 잔뜩 곤두서있던 이들 가디언들이 절벽에서 어쩌다 굴러내려온 돌덩이 따위에 어린애같이 칼부림을 벌인 모양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친목을 하자며 모인 이 자리가 더더욱 엉망진창이 되어가고 있었다.

"모두 가자!"

페로가 기분이 적잖이 상한 듯 수우와 베흔에게 인삿말 한마디 없이 휙 돌아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이이....바보새끼같으니!"

베흔이 이를 악물며 바보짓으로 회동을 망쳐놓은 제파를 노려보았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새벽에 잡아온 멧돼지로 아침식사를 마친 카렐은 꽤 많이 남은 멧돼지고기를 토굴 옆 나무 밑에 작은 구덩이를 파고 묻어버렸다. 지저분하던 토굴 안의 청소는 이미 밤새도록 하고 또 하고를 반복해온 터라 따로 손댈곳도 보이지 않았고 차가운 냇물에서 목욕도 새벽부터 도대체 몇번이나 했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전날 베흔이 던져주고 간 가죽수트와 망토를 차려입은 카렐은 나무침상 위에 단정하게 펼쳐진 털가죽에 코를 들이대고 그 익숙한 냄새를 한 번 죽 들어켰다.

"이젠 정말 마지막이다."

정든 동굴 안을 한 번 빙 둘러본 카렐은 갑자기 가지고있던 단검을 꺼내들고는 평소 달력 겸 메모판으로 쓰던 무른 흙벽에 무언가 글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짧지않은 문장을 적어넣은 카렐은 그 앞에 서서 몇번이나 고개를 좌우로 꺾어가며 보고 또 보았다.

카렐은 스스로도 무척이나 만족스러운지 한 번 웃어보이고는 자잘한 소지품이 들은 가죽가방을 어깨에 질끈 동여매고 토굴 밖으로 나섰다. 별로 새로울것도 없는 바깥공기를 가슴 속에 한 번 깊숙이 불어넣은 카렐은 경쾌한 걸음걸이로 평소 베흔을 기다리던 연병장 중간으로 나갔다.

"됐어, 이젠 정말 끝이야."

평소 그리도 야속하게 빨리 나타나던 셔틀은 그날따라 도무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괜히 발도 굴러보고 제자리뜀뛰기도 하던 카렐은 멀리서 들리는 셔틀소리에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 남쪽하늘을 응시했다. 잠시 후 근위대마크가 새겨진 작은 셔틀이 그의 앞에 천천히 내려서더니 익숙한 얼굴의 시로가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다.

"타."

짐을 들고 셔틀에 훌쩍 올라탄 카렐의 어깨를 가볍게 안아주며 시로가 말했다.

"이제부턴 '동료'구나. 후후, 그동안 고생 정말 많았다."

카렐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발밑에 멀어져가는 GOE병영과 북극의 푸엘 숲을 내려다보았다. 묘한 아쉬움과 기대가 교차하는 듯 카렐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다신.......돌아오지 않을겁니다......절대로......"

"이젠 올 일도 없을거야."

웃음띤 얼굴의 시로가 카렐의 어깨를 두들기며 그를 달래주듯 말했다.

"아참, 이거,"

시로가 붉은 비단주머니에 싸인 긴 무언가를 내밀었다. 벗겨낸 주머니 속에서는 검은빛 칼집을 지닌, 날 길이만 4척 정도의 유난히 긴 장도에 가까운 카타나와 와카자시가 모습을 나타냈다. 손에 느껴지는 적당한 무게감에 카렐의 입가에도 미소가 감돌았다.

"보통 무기에 쓰는 강재로는 그 무게가 나오지 않아서 말이야......오스뮴하고 이리.....머시기? 뭐 어쨌든 이상한 합금이 들어갔다는군. 몇십만 겹이라나 몇백만 겹이라나 뭐 어쨌든 무지하게 접어뚜들겨 만들었나봐. 동부 나라 가 녀석들이 칼만드는 솜씨 하나는 끝내주잖아. 귀한거니까 잘써."

"예."

아름답기까지 한 그 녹색빛 코팅칼날을 어루만지며 카렐은 마치 무언가에 취한 듯 넋이 빠져 있었다. 검은빛 어피로 만들어진 집 역시 섬세한 세공과 보석장식이 보통 물건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참, 오늘 일정은 알지?"

"일정......이라뇨?"

카렐의 얼굴에 갑자기 긴장감이 조금 감돌았다.

"몰랐어? 어제 베흔 대장이 얘기 안했나?"

시로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가지고있던 서류를 조금 뒤적거렸다.

"오늘......행사가 있어......뭐, 행사라고 하기도 좀 뭣하지만......네 데뷔식이라고 해야되나?"

시로는 파일에 꽂혀있던 서류 한 장을 카렐에게 내밀었다.

"시아푸. 100살에 1등급. 꽤 뛰어난 놈이야. 주무기는 크래모어고 키는 너보다 조금 작아. 꽤 미남이지?"

"그런......데요?"

카렐이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녀석을 죽여."

"예?"

"귀족여자하고 놀아난 놈이야. 말하자면 공개처형이지. 오늘의 네 역할이다."

들릴듯말듯 한숨을 내쉰 카렐은 자기 손에 쥐여진 시아푸의 신상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최대한 잔혹하게 죽이라는 명령이다. 알았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지팡이를 짚은 토로 경이 카렐의 숙소에 직접 찾아와 꿇어앉으며 물었다.

"부르셨사옵니까."

"기사단 재건작업은?"

"갑주 마련에 애를 먹고 있습니다. 중장기병 갑주는 제작할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는데 모두 근위대의 통제를 받고 있어서......지금 타르서스의 밀수업자를 통해서 동부에서 중장기병대 퇴역분 4백벌을 밀반출해오는 방안을 추진중입니다. 그편이 값도 싸고....."

"참 기사단이라고 꼴이 말이 아니네."

함께있던 네피가 또한번 생각없이 내뱉었다가 토로 경의 매서운 눈총에 직면하고 있었다. 뭐 그의 말이 아주 틀린것도 아니었다. 한때 만여명에 달하며 위세등등했던 황실 직속 중장기병대 슈로 기사단은 3백 정도로 턱도없이 줄어버린 숫자는 접어두고라도 이제와 동부에서 쓰다버린 갑주를 입고 북부에서 훔쳐온 말을 타고 싸워야 하는 한심한 신세로 전락해 있었다.

"뭐 폼으로 전쟁하는것도 아니니......"

카렐이 민망한 듯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최대한 빨리 실전에 투입할 수 있게 준비를 마쳐두게나. 우리 쪽으로 움직이든, 페로 쪽으로 움직이든 베흔 녀석이 조만간 움직이기는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에그머니,"

여느때처럼 깜짝 놀랄 정도로 대답한 토로 경의 큰 목소리에 네피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카타콤베에서의 회의를 마치고 페로 관으로 돌아온 카인은 아까부터 베흔이 자신에게 보내던 묘한 눈빛에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차에 오르는 카인에게 사무적인 악수를 청하던 베흔이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팔찌 속에 무언가를 집어넣었다는 것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개인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옷을 벗어던진 카인은 작은 꼬챙이로 팔찌와 살 틈새에 박힌 '무언가'를 겨우 끄집어냈다. 그 '무언가'는 손가락만한 필름에 손으로 갈겨쓴 짤막한 메모였다.

'오넷 광장. 6일 20시. 롭의 살인자에게.'

순간 당황한 카인은 자기도모르게 좌우를 둘러보고 있었다. 가디언이 정당하게 싸워 이겼을때는 '살인'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것이 상식이었다. 지난번 킵과 롭의 싸움에 끼어들어 그를 '정당하지 않게 살해' 했던 카인으로서는 이 뜻밖의 문장에 당황할수밖에 없었다.

필름을 들고 잠시 방안을 서성이던 카인은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급히 그것을 주머니 안에 감추었다. 방문을 열어제낀 건 평소같은 표정의 킵이었다. 킵은 그의 방 안에 머리만 조금 디밀고 말했다.

"엘러 녀석 생각보다 부상이 심해. 아무래도 네가 그녀석 수련장 검술수업 대신 맡아줘야겠어. 불침번은 판 녀석이 대신 해주기로 했고. 상부상조해야지."

"예?......예, 알겠습니다."

카인의 평소같지않은 태도에 킵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어디 아파? 얼굴빛이 안좋은데?"

"아, 아닙니다. 좀 피곤해서요."

"그래? 오늘은 너 불침번도 없으니까 좀 쉬어."

"예."

킵을 내보낸 카인은 다시 방 안을 서성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적의 수장인 베흔이 자신을 개인적으로 만나자는 것이었다. 가서 무슨 대화가 오가던간에, 만났다는 그 자체만으로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와질수도 있다는 사실을 카인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