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0화 (20/1,132)

< -- 20 회: Part 1. 디모르포세카, 음지에 피다. -- >

9.

"대장! 대장!"

근위대가 고원 인근에 모습을 나타냈다는 보고에 ㅤㅋㅞㄹ크로의 이사준비를 서둘러 독려하던 네피는 체이호 녀석의 고함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왜그래?"

"근위대 수색셔틀이야! 70스타디아 밖에 있으니까 몇분 이내로 여기도 잡아낼거야!"

"벌써?"

네피가 기겁을 하고 말았다. 바로 몇시간 전 근위대 수천명이 탄 것으로 보이는 병력수송셔틀과 수송선이 대사막에 진입했다는 소식에 뒤이어 녀석들이 바로 이곳까지 쳐온 것을 보아서는 녀석들이 이미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던가 누군가 내통하는 녀석이 있음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셔틀 스무대하고 수송선 한대라는 거 보니까 적어도 만 명은 되는 모양이야."

"제기랄,"

긴장한 네피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아무래도 녀석들 들이닥치기 전까지 모두 철수하는 건 힘들 것 같다. 체이호, 네가 철수를 지휘해. 에너지장벽 작동시키고 가디언들 즉시 집합시켜. 거리내로 접근하면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는수밖에."

주민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고원에 아직 남아있던 이동식 주택들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고 분해되어 대기중인 수송선에 차례대로 실렸고 각 가구별로 정리된 살림살이가 들은 큰 콘테이너박스들도 수송선 캐빈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솔과 함께 첫번째 수송선에 올랐던 카렐은 밖에서 가디언들을 이끌고 부산히 움직이는 네피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나섰다.

"무슨 일 있어? 왜 가디언들이 무장하고 저래?"

"놈들이 이쪽으로 직격해오는 모양이야."

"맘먹고 덤비는군."

지난번 자신을 구해준 일 때문에 네피가 낭패에 처하게 되었음을 깨달은 카렐은 조금 민망한 얼굴로 네피를 힐끔 바라보았다.

"난 가디언들 데리고 시간을 끌어볼테니까 넌 수송선 타고 빨리 ㅤㅋㅞㄹ크로 빠져나가."

네피가 그런 카렐의 눈치를 짐짓 못본 척 쥐고있던 도끼를 툭툭 털며 말했다. 그 때, 무언가를 느낀 듯 카렐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고원 북동쪽에서 날아온 자그만 무인 수색셔틀이 방향을 이쪽으로 트는가 싶더니 미리 설치한 공중 에너지장벽에 충돌하며 큰 소리를 내며 폭발해버렸다.

"드디어 오셨구만."

네피가 침을 퉤 뱉으며 중얼거렸다. 조만간 근위대 가디언들이 몰려올 건 뻔한 일이었다. 더딘 철수상황에 답답해진 네피가 체이호 쪽에 대고 이것저것 잔소리섞인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카렐은 근위대들이 몰려오고있을 고원 입구를 바라보며 네피에게 물었다.

"지상 에너지장벽 등급은?"

"1300급."

"근위대 장비면 10분이면 뚫리겠군. 왜그렇게 싸구려를 설치했냐?"

"알아, 알아, 내가 페로 그새끼같은 갑부인줄 아냐. 그래도 10분이 어디야."

궁시렁거린 네피가 카렐의 등을 거칠게 떠밀었다.

"너도 빨랑 타. 넌 여기 있어봐야 걸르적거리기만 한단 말이야. 몸도 성치않은 주제에 깝죽대지 말고."

"그러지......"

힘없이 방향을 돌린 카렐은 솔이 타고있는 수송선으로 다시 향했다. 마을이 있던 자리는 이미 깨끗이 치워져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나다를까 몇분 후, 근위대 정찰조로 보이는 몇몇 가디언들과 정규군 병사들이 조심스럽게 고원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네피가 가디언과 병사들을 주변에 배치시키고 있는 가운데 체이호가 이끄는 팀이 탑승이 끝난 수송선을 이륙시키기 위해 부산을 떨고 있었다.

"잠깐,"

카렐이 네피에게 다시 다가갔다.

"모렌 박사는?"

"몰라. 체이호가 대피시켰을걸."

이래저래 정신이 없던 네피가 건성 대답했다. 그의 말에 깜짝 놀란 카렐은 급히 체이호에게로 다시 달려갔다.

3대나 되는 수송선들을 이륙시키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체이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카렐의 모습을 짐짓 못본 척 그냥 지나가려 했다. 카렐이 그의 팔을 거칠게 붙들었다.

"이봐, 모렌 박사 어쨌어?"

"모렌 박사? 나도 몰라, 네피 대장한테 별 지시 못들었어."

체이호가 카렐의 눈을 피하며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무어? 그럼 굴에 계속 갇혀있단 말이야?"

"그렇겠지 뭐."

"망할! 마을터엔 불지르기로 되어있잖아!"

"그랬던가?"

카렐의 팔을 떨군 체이호는 신경도 안 쓰고 멀어져가고 있었다. 체이호 녀석의 태도에서 무언가 미심쩍은 것을 발견못한 건 아니었지만 일단은 모렌 박사를 구하는것이 우선이었다. 마을쪽을 잠시 돌아보았던 카렐은 자기가 타기로 되어있는 수송선으로 급히 돌아갔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솔이 빈 자리를 가리키며 카렐을 재촉했다.

"빨리 앉으세요, 카렐 님 때문에 못떠나고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먼저 가라."

"예?"

"할일이 생겼다. 곧 따라갈테니 먼저 가."

짐 속에서 무기들을 꺼내드는 카렐을 보고 기겁을 한 솔이 그의 팔을 붙들었다.

"맙소사, 아직 몸도 안나으셨잖아요! 또 이러시면......"

솔의 손을 뿌리친 카렐은 그 시커먼 망토를 어깨에 홱 두르고 무기들을 허리에 차더니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카렐 님!"

입구까지 쫓아 달려나온 솔이 외쳤다. 카렐이 해치 밖에서 솔을 문득 돌아보고는 조종석 쪽에 이륙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의 긴 갈색머리가 수송선에서 몰아쳐오는 기류에 거칠게 펄럭거렸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솔에게 카렐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라. 곧 돌아갈테니까."

솔이 그제서야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해치가 닫히고 천천히 이륙한 첫번째 수송선은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카렐은 주민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폐허만 남은 마을 절벽 쪽으로 혼자 달려가기 시작했다.

"셈입니다. 저새끼가 직접 나왔는데요."

가디언 한 명이 망원경을 눈에 대고 네피에게 말했다. 갈대밭에 몸을 숨긴 네피와 4백여명의 가디언들은 절벽을 넘어들어와 에너지장벽을 해체하고 있는 근위대들을 사뭇 긴장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셈 뿐이 아닌데? 수에보까지 있는걸. 제기랄, 잽이 안되네....."

네피가 투덜대며 좌우의 가디언들을 돌아보았다. 아직까지 탈출행렬이 이어지고 있는 수송선 착륙지 부근은 3천여명의 시민병사들이 자신들을 향해 공격해오는 근위대들을 벌써부터 겁에 질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제후군 혹은 용병대에서 10년 이상의 경력을 지닌 정예만을 선발해서 뽑는 황실 근위대 정규군은 그 정예도는 접어두고라고 일단 무장상태부터 네피의 시민병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급소만 가린 허름한 경갑주에 칼, 도끼 정도의 주무장과 방패, 단검 하나씩이 고작인 시민병들은 은빛 무광처리된 탄탄한 중갑주와 경면처리된 반투명한 방패, 장검 혹은 할버드와 위력적인 투창, 개인별 전투통제장치로 중무장한 저들 근위대의 모습에 처음부터 주눅이 들어가고 있었다.

적어도 2천명은 되는듯한 그들 근위대 선봉의 뒤로 거대한 병력수송선 한 대가 더 내려앉고 있었다.

"안되겠다, 괜히 기습했다가 휩쓸려 몰살당하겠다."

4백명밖에 되지 않는 자신의 가디언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네피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물러나자. 수송선 있는데만이라도 최대한 지켜봐야지."

"훗, 역시 셈 네 정보가 정확했는걸. 새끼들, 빨리도 내빼는군. 지금까지 도망친 수송선은?"

4천여명의 본대와 함께 수송선에서 내려선 베흔이 막 뚫리기 시작한 에너지장벽을 바라보며 쓴 입맛을 다셨다. 셈이 한손에 칼을 뽑아들며 대답했다.

"한 대입니다. 아직 2대가 남았고 셔틀도 몇대 있군요."

"네피놈은 마지막으로 탈출할거야. 한 대면 아직 민간인들도 다 못내보냈다는 거니까 아직 시간은 있다. 셈은 본대를 이끌고 마을을 수색하고 수에보는 나하고 저 오합지졸 새끼들 쓸어버려야겠다. 모두 조심해. 네피놈이 이 주변 어딘가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을거다."

베흔이 사방을 둘러보며 지시했다.

카렐의 말대로 10여분만에 파괴된 에너지장벽을 통해 병사들이 대오를 맞춰 안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수송선 착륙장 부근만을 동그랗게 에워싼 네피의 시민병들은 무서운 기세로 마을터를 향해 몰려드는 근위대들의 앞을 차마 가로막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사방에 산개한 경보병들의 엄호를 받으며 2백명 단위씩의 쐐기꼴 예진을 이룬 근위대 중장보병들은 낮으막한 언덕 위에 5열 원진을 치고 대기중인 시민병들을 향해 거침없이 간격을 좁혀나갔다.

참모 한 명이 급히 달려와 수에보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이자 그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베흔에게 물었다.

"자그룰라 모렌 박사는 어쩔까요?"

"지시대로 했겠지?"

"물론입니다. 토굴에 얌전히 버려져있다고 합니다."

베흔의 질문에 수에보가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귀찮다. 없애버려."

베흔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의 대답과 거의 동시에 마을터 한쪽에서 큰 폭음과 함께 불길이 솟아올랐다. 미리 마을터 곳곳에 인화물질을 설치해두었던 모양이었다. 시민병들을 향해 돌격하다가 날벼락을 맞은 병사들이 갑주에 옮겨붙은 불을 끄느라 수선을 떨기 시작했지만 베흔은 그쪽에서도 바로 신경을 꺼버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네피 새끼, 아주 생 발악을 하는구나."

적들의 진영이 가까와지자 베흔이 차고있던 플람베르쥬를 천천히 뽑아들었다.

"시작해."

베흔의 크지않은 목소리와 함께 각 소대 지휘관들이 병사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돌격!"

거의 동시에 목이 터져라 큰 함성을 내지른 근위대 중장보병 선두와 네피의 시민병무리가 서로에게 돌진하며 거세게 충돌했다. 돌격과 함께 치솟아오른 사막의 흙먼지로 전방이 거의 분간못할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 때 베흔의 귀에 꽂은 개인 통신장비인 할룩스로 뜻밖의 보고가 날아들어왔다.

"대장님! 적 수괴 네피가 경보병들에게 포착되었습니다! 본대로 돌아가려 했던 모양입니다! 지금 14소대에서 묶어두고 교전중입니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절벽을 본대에서 떨어져나온 근위대 경보병 세 명이 바삐 뛰어올라가고 있었다. 회색빛 라멜라갑옷에 가벼운 캡, 검과 원형방패로 무장한 이들은 한때 네피 무리에서 감옥으로 쓰였던 절벽 동굴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저기다,"

앞장선 상등보병의 한마디에 병사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들었다. 단단한 금속 파이프로 보강된 투명한 문으로 덮힌 동굴 안에는 초췌해진 몰골의 모렌 박사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벌벌 떨고있었다. 그는 저 근위대원들이 자신을 구하러 온 구세주가 아닐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어디서 났는지 상등병이 품 속에서 미리 준비해온 보안카드를 꺼내들더니 아직 작동되고 있는 잠금장치에 들이댔다. 작지않은 경보음과 함께 동굴 문이 천천히 입을 벌렸다. 상등병이 갇혀있던 모렌 박사를 살기띤 눈으로 노려보며 칼을 쥔 손에 힘을 바싹 주었다.

"오호, 고맙군, 어떻게 열어야하나 고민중이었어."

"뭐야?"

웬 듣기싫은 갈라진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위를 올려다본 상등병은 순간 무슨 폭탄이라도 맞은 양 굴 안으로 튕겨들어갔다. 바위 위에 매달려있다가 뛰어내린 카렐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려는 나머지 두 보병의 머리를 붙들고는 그대로 뒤로 홱 꺾어버리고 말았다.

"쳇,"

시체를 절벽 밑으로 동댕이쳐버린 카렐이 동굴 안으로 튕겨들어간 근위대 병사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놈 죽었습니까?"

"으, 응......그런 것 같애."

동굴 안에서 바싹 얼어붙어있던 모렌 박사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카렐에게 목 뒤을 채인 병사는 이미 한참 안쪽에 피를 토하며 죽어 있었다. 공포에 질려있던 모렌 박사가 갑자기 주저앉으며 카렐의 다리를 꽉 껴안았다. 기묘하게 엉켜버린 이 상황에서 그가 당장 기댈 사람은 지난 며칠간 자신을 그리도 들들 볶아온, 아니 갖은 애증이 뒤엉켜있는 이 자식같은 가디언 뿐이었다. 카렐이 그 앞에 쭈그려앉아 박사의 어깨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많이 무서웠죠?"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카렐이 그의 등을 또한번 토닥거려주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나가죠."

카렐은 칼을 숨긴 채 조심스럽게 다시 굴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모렌 박사를 이끌고 잽싸게 굴을 빠져나간 카렐은 헐떡거리는 그를 이끌고 일단 절벽 꼭대기까지 기어올라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체이호가 이끄는 이편 시민병들이 두배가 넘는 근위대들에 계속 밀려나고 있었다. 3대의 수송선 중 2대기 이륙하고 이제 마지막 한 대와 병사들이 탈 셔틀 4대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다행히 뼈대를 이루고 있는 가디언들 덕분에 아직까지 진형이 무너지지는 않고 있었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진형이 무너지고 난전으로 간다면 저 3천여명의 시민병들은 물론이고 네피의 가디언들까지 모두 몰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송선 착륙장을 둘러싼 시민병의 원진은 이미 근위대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꼼짝도 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모렌 박사가 카렐을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 어떻게 수송선을 타지? 저대로는 도저히 저쪽으로 갈수가 없어."

잠시 망설이던 카렐이 가지고있던 단검을 뽑아 모렌 박사의 손에 쥐여주었다.

"저 절벽 계곡을 계속 타고 내려가면 오아시스가 하나 나옵니다. 험한 길이니까 바위를 붙들고 조심해 내려가셔야 합니다. 둘이 만나는 곳에서 왼쪽으로 돌면 오아시스에 연결된 작은 연못이 있는데 그 옆에 버려진 토굴이 하나 있습니다. 그 안에 제가 타고온 차가 있습니다. 거기서 기다리십시오."

"......내가 배신하고 먼저 가버리면?"

모렌 박사가 자신에게 차 있는 곳을 순순히 알려주는 카렐에게 조금 놀랐는지 머뭇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그런 모렌 박사를 바라보며 갑자기 피식 웃음지은 카렐이 냉큼 대답했다.

"제가 배신하고 혼자 가버릴수도 있습니다. 그 차 키는 제게 있거든요. 빨리요."

카렐의 재촉에 모렌 박사는 단검을 품에 꼭 껴안고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잘 내려가고 있는것을 확인한 카렐은 망토 안에서 자신의 정든 카타나를 천천히 뽑아들었다. 멀리 북쪽에서 들려온 큰 함성소리에 문득 고개를 돌린 카렐은 무슨 이유엔지 소란스런 난전이 벌어져 있는 한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잘 만났다. 오랫만이구만. 아니, 별로 오랫만도 아니군."

베흔이 싱글거리며 칼을 뽑았다. 순식간에 근위대에게 뒤를 막힌 네피는 사방을 에워싸고 좁혀오는 근위대에 단 4명의 부하들만을 거느린 채 포위되어 있었다. 이주행렬에서 뒤처진 주민가족을 지켜주다가 본대와 떨어지고 만 네피는 그를 알아보고 순식간에 포위해온 정규군 백여명에 사방을 둘러싸인 채 한참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선 목전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장인 네피를 구하기 위해 몰려든 이쪽 가디언들과 근위대 가디언, 정규군과의 난전으로 이미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피묻은 도끼를 쥔 네피가 숨을 헐떡거리며 자기를 사방에서 포위한 근위대원들을 한번씩 쏘아보았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수에보가 칼을 뽑아들고 나서자 베흔이 그를 단호하게 가로막았다.

"네 상대가 아냐. 둘 사이의 싸움에 끼어드는 놈은 내가 목을 베어버릴테다."

대장의 명령에 근위대들이 한발씩 뒤로 물러났다. 네피도 도끼를 쥔 오른손에 힘을 주며 침을 내뱉었다.

"좋아, 재밌겠군,"

베흔이 씨익 웃으며 수에보를 돌아보았다.

"저녀석이 날 꺾으면 저 다섯을 보내줘라. 알았나?"

"하지만......"

"항명하나?"

"아닙니다."

수에보가 즉시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다운 오만한 여유를 있는대로 부린 베흔이 여전히 싱글거리며 네피를 향해 그 불꽃모양의 섬뜩한 칼을 똑바로 겨누었다. 푸른색으로 살벌하게 번득이는 베흔의 플람베르주 날과 네피의 검고 묵직한 도끼날이 햇빛 밑에서 서로를 향해 빛을 뿜어냈다.

네피는 오른손에 쥔 도끼와, 왼쪽 팔뚝에 고정시켜놓은 크지않은 버클러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베흔이 두 손으로 단단히 움켜쥔 플람베르주 끝을 슬슬 돌리며 여전히 말을 떠들어댔다.

"지난번에 감쪽같이 속여넘기고 도망쳤더군, 후후, 이번엔 안돼. 그리고 쿠베도 그지경으로 만들어놓고 말이지."

"이아앗!"

네피가 먼저 도끼를 치켜들며 선제공격을 가하자 베흔이 칼을 치켜들며 네피의 도끼를 힘껏 쳐냈다. 날이 맞닿으며 번쩍이는 불꽃과 굉음이 일자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그 묵직한 선제공격을 받아낸 베흔은 순간 움찔 하고 말았다. 첫합에서 보여준 녀석의 근력은 틀림없이 자신보다 한 수 위였다.

"이 썩을놈!"

자신의 힘이 상대보다 우세하다는 것을 깨달은 네피가 버클러로 얼굴을 가린 채 엄청난 충격력을 가하며 베흔의 팔을 들이받자 주춤 한 베흔이 뒤로 조금 밀려나고 말았다. 기회를 잡은 네피가 도끼를 힘껏 올려쳤지만 재빠른 베흔은 칼날로 도끼를 내리찍으며 얼른 뒤로 물러났다. 저 술통같이 생긴 거구 네피녀석이 힘은 좋은지 모르겠지만 순발력과 스피드는 온몸이 고르게 잘 발달한 베흔을 따라올 수 없었다.

"제법이네!"

긴 칼을 가진 베흔은 네피와의 거리를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그의 주변을 빙빙 돌았고 짧고 위력있는 도끼를 쥔 네피는 기습적인 근접공격과 완전히 빠지기를 반복하며 기회를 노렸다. 네피의 버클러에 타격을 당해 찢어진 베흔의 오른팔 소매 사이로 드러난 피부는 벌겋게 변해 있었다.

"조만간 시커멓게 멍들겠구나. 망신스러워서 어쩐다냐?"

네피가 키득거리며 베흔을 도발했지만 그정도에 쉽게 넘어갈 베흔이 결코 아니었다.

"니 버클러 찌그러든 건 안보이나보지? 그런 싸구려를 쓰다니.....너희도 돈 어지간히 없구나. 하나 사주랴?"

"사주면야 고맙지. 근데 네가 죽고나면 누가 사주는거냐?"

네피가 얼핏 버클러를 쳐다보는 척 눈동자를 아래로 내렸다. 공격을 유도하기 위한 녀석의 의도된 행동임을 모르지 않았지만 베흔은 네피의 도끼와 최대한의 거리를 유지하며 멀리서 칼을 힘껏 휘둘렀다. 그 틈새로 상대의 옆구리를 덮치려던 네피는 베흔이 스냅을 주며 칼의 방향을 홱 틀자 기겁을 하며 도끼로 급히 그의 칼을 내리쳤다.

"걸렸다!"

플람베르주의 움푹한 홈에 도끼날이 걸리자 베흔이 팔꿈치를 비틀며 네피의 도끼를 홱 비틀었다. 엔간한 가디언이라면 그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도끼를 떨어뜨렸겠지만 네피는 칼과 엉켜버린 자신의 도끼를 엄청난 손아귀힘으로 꽉 움켜잡으며 베흔에게 몸을 밀착시킨 채 반바퀴를 휙 돌아 베흔의 턱을 팔꿈치로 사정없이 후려쳤다. 하마터면 네피가 아닌, 베흔이 칼을 떨어뜨릴 뻔하고 말았다. 둘은 급히 다시 떨어져 섰다. 제대로 턱을 얻어맞은 베흔이 얼굴을 찌푸리며 턱을 한 번 비틀더니 피가섞인 침을 퉤 뱉어냈다.

"꽤 쓸만한걸. 무식한 힘 하나는 죽여주는구나. 쯔쯔, 네가 근위대였다면 정말 대단했을텐데."

"엉, 그럼 지금 네자리에 있었겠지?"

그때 갑자기 뒷편에서 비명과 함께 고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비명에 가까운 처절한 외침이 들려왔다.

"카렐이다!"

네피를 둘러싸고 있던 근위대원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리며 대오가 일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몇몇 근위대 정규군 병사들은 반대편으로 부리나케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베흔은 이미 네피와 붙기 시작한 싸움이라 물러설수가 없었다. 흩어지는 부하들의 모습에 당황한 수에보가 칼을 뽑아들고 그편으로 내달리자 베흔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가지마!"

명령을 무시하고 달려가던 수에보가 우뚝 멈춰섰다. 거의 십여구의 근위대원들의 시체가 바닥에 군데군데 흩어져 있었다. 난전이 벌어지면서 사방에 흩어져있던 병사들과 가디언들이 발빠르게 숨어들어온 카렐의 기습에 대오를 이루고 대항해볼 새도 없이 맥도못추고 당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 피를 뒤집어쓴 채 서 있던 카렐이 눈을 치켜뜨며 수에보를 노려보았다.

"네깟놈과 놀 시간 없다."

카렐이 몸을 숙인 채 앞으로 확 내달았다. 수에보가 반사적으로 칼을 치켜들려했지만 순식간에 허리를 들이받는 카렐의 무지막지한 어깨힘에 밀려 뒤로 붕 날아가 바닥에 볼쌍사납게 나딩굴고 말았다. 끝이 부러진 그의 양손검이 공중을 빙 돌아 바닥에 맥없이 떨어졌다.

"으아악!"

바닥에 쓰러진 수에보가 잘려나간 오른팔을 붙들고 비명을 올렸다. 갈길이 급한 카렐은 대장을 지키기 위해 몰려드는 수에보의 부하 가디언들의 모습에 확인사살을 포기하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에선 체이호가 셈을 상대로 힘겹게 싸움을 이끌어나가는 중이었고 반대편에서는 네피가 베흔과 팽팽한 대결을 계속하고 있었다. 양편의 싸움을 지켜본 카렐이 셈과 체이호쪽으로 내달았다.

"이, 이런!"

셈은 자기 쪽으로 무서운 기세로 돌진해오는 카렐을 보고는 겁에질려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셈! 네녀석!"

카렐이 달려오며 칼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 기세에 놀란 셈은 부상을 입어 흐느적거리는 체이호를 내버려두고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 대장이 달아나자 그의 부대원들이 우왕좌왕하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몸 곳곳에 잔부상를 입은 체이호가 부하들의 손에 겨우 부축을 받아 뒤쪽으로 옮겨졌다.

"네놈은 내가 죽여주마!"

카렐이 끼면서 난전 상황이 한결 나아지자 힘을 얻은 네피가 베흔에게 무서운 기세로 돌진하며 힘껏 도끼를 휘둘렀다. 지금껏 신경전만 벌이다가 갑작스런 강공을 퍼붓자 깜짝 놀란 베흔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러나 곧 틈을잡고 네피의 겨드랑이를 향해 칼을 힘껏 내질렀다.

"으익!"

네피와 베흔이 동시에 자리에 주저앉았다. 거세게 올려치는 네피의 도끼날 끄트머리에 찍힌 베흔의 왼쪽 가슴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플람베르주의 톱날같은 홈에 찢겨나간 네피의 왼쪽 겨드랑이와 가슴 한쪽도 쩍 갈라져 있었다. 나란히 중상을 입은 두 특등급 가디언이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바닥에 무너져내렸다.

"대장을 구해!"

달아났던 셈과 부하들이 둘을 향해 급히 달려들자 카렐도 총알같이 네피를 나꿔채 급히 본진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피를 흘리며 거의 의식을 잃어가는 네피를 가슴에 꽉 껴안으며 카렐이 주변에 모여드는 가디언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제부터 내가 지휘한다! 시민병들은 즉시 퇴각한다! 가디언들이 탈 4번 셔틀 한 대만 남기고 모두 퇴각해! 가디언들은 2선에 3열 원진을 형성하고 최대한 시간을 번다!

빨리! 빨리!"

4백여명의 가디언들이 마지막 수송선이 떠난 이륙장 주변에 2선을 형성하며 엷게 둘러서자 지금껏 시간을 끌어준 1선의 시민병들이 허둥지둥 퇴각해 대기중인 셔틀에 뛰어올랐다. 근위대장 베흔과 수에보가 쓰러지자 근위대들 역시 술렁이면서 그 공격의 기세가 한풀 꺾이고 있었다. 길지는 않겠지만 카렐로서는 이 천금같은 시간을 놓칠수는 없었다. 사방에서 쳐오는 근위대들의 공격을 가디언들이 필사적으로 막아주는 가운데 시민병들이 탄 마지막 셔틀이 공중으로 이륙해올랐다.

"퇴각! 퇴각!"

감히 발칙하게 자신에게 덤벼온 근위대 가디언의 목을 베어 공중에 내던지며 카렐이 뒤에 착륙한 4번 셔틀을 가리켰다. 그의 명령에 마지막까지 이곳을 지킨 가디언들이 차례대로 셔틀에 뛰쳐올랐다.

부분적으로 대오가 무너지면서 곳곳에 흩어진 몇몇 시민 낙오병들과 미처 챙기지 못한 부상병들, 수백구의 시체들이 보였지만 저들을 다 챙겨줄 여력까지는 없었다. 이륙하는 셔틀에 펄쩍 뛰어올라 해치를 붙들고 매달린 카렐은 근위대들의 손에 산산히 박살나고 무너져가는 분지의 마을들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망연하게 바라볼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바로 자신 때문이었다.

"난 절벽 위에 내리겠다."

해치로 기어오른 카렐이 셔틀 조종사에게 힘없이 말했다. 지치고 부상을 입은 가디언들은 이 병력수송셔틀 곳곳에 거의 녹초가 되어 뻗어있었다. 카렐이 그들에게 애써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좀 쉬어라. ㅤㅋㅞㄹ크까진 얼마 되지 않으니 곧 안전한 곳에 도착할거다."

"네피 대장도 저리되었는데......카렐 님이라도 함께가서......"

가디언 지휘관 한 명이 걱정어린 얼굴로 중얼거리자 카렐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ㅤㅋㅞㄹ크에 이미 조페가 가 있으니 괜찮을거다. 체이호도 부상이 별로 심하지 않고......난 다른 볼일이 있으니 일 끝나는대로 나도 그리로 돌아가지."

가디언들 하나하나의 어깨를 힘있게 두들겨준 카렐은 그들의 섭섭해하는 얼굴을 뒤로하고 꼭대기 바위 위에 잠시 멈춰선 셔틀에서 서슴없이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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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효, 결국은 또 길어졌네요,

반으로 자를까 했다가 전투신 중간에서 맥을 끊지 않으려고 일부러 안잘랐습니다. 너무 길다고 짱돌던지지 마시길...... (짱돌 말고 애정어린 코멘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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