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 회: Part 1. 디모르포세카, 음지에 피다. -- >
카렐은 양지바른 언덕의 나무 밑에서 맑은 날씨를 만끽하며 누워있었다. 따사로운 햇빛과 산들바람이 유난히 하얀 그의 얼굴을 간지럽히며 스쳐지나갔다.
"베흔이 또 사고를 친 모양이야."
귀에익은 목소리에 카렐이 그제서야 눈을 조금 떴다. 네피가 우뚝 서서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듣고싶지 않은 얘기로군."
카렐이 얼굴을 찌푸리며 네피에게 등을 돌려보였다.
"들어야 돼."
네피가 그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두 가디언이 모렌 박사를 끌어다가 카렐 앞에 꿇어앉힌 건 그때였다. 카렐의 저 지독함에 혀를 내두르고 있는 건 끌려온 모렌 박사는 물론이고 네피도 마찬가지였다. 카렐은 마을 외곽, 감방에 갇혀있는 모렌 박사를 하루에도 대여섯번씩 자기 있는 곳으로 끌어내 묻고 되돌려보내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매번 똑같은 질문을 하는 질문을 하는 카렐이나, 받는 박사나 진절머리치기는 매한가지겠지만 이 상황에서 더 지쳐가고 있는 건 한가롭게 꽃놀이나 하고 있는 카렐이 아니고 죄수 신세인 모렌 박사였다.
"지금은 내 시간이야. 안그렇소? 모렌 박사?"
모렌 박사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전보다 한결 노글노글해졌지. 화려한 도시에서만 살아왔으니 이런데가 이젠 지긋지긋해지기도 할 테니까. 후후. 오늘도 또 묻겠소. 내 유전자의 억세스 코드를 알려주시오. 그럼 도시로 고이 돌려보내줄테니."
카렐이 또다시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어차피 돌아가도 베흔 손에 죽을텐데? 날 없앨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어차피 네게 협조했다는 핑게로 날 죽일게 뻔해."
"그럼 총리한테나 가시구려."
카렐이 아무렇지않게 대꾸했다.
"안그래도 수련장 책임자 로카가 베흔에게 살해당해서 사람이 절실히 필요할테니."
"페로도 날 좋아하지 않아."
"흠, 그럼 여기 계속 있던지. 보다시피 도시보다 공기도 좋고."
"언제죽을지도 모르는 이런 떠돌이생활은 싫다."
"하여간, 까다롭기는.....내 원."
카렐이 몸을 조금 일으켜 나무에 기대앉더니 옆에 피어있는 흰 꽃 한송이를 꺾어 코에 가져가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데이지 변종, 디모르포세카. 그늘보다 사막의 뜨거운 열기에서 잘 자라지. 하지만 페로 관 부근에서도 본 적 있어. 그것도 나무 그늘에서.......아주 어릴때였지."
그의 유난히 긴 속눈썹이 붉은 핏빛어린 갈색 머릿결과 함께 산들바람에 흔들렸다. 가끔씩은 너무 심각하게, 가끔씩은 아주 딴사람같이 능청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이 '등급없는 가디언'의 극단적인 별난 성격은 네피도 전부터 잘 알고있었다. 하지만 이곳 마을에 온 이후 솔과 함께 지낸 몇십일동안 카렐의 얼굴이 처음보다 한결 밝아졌다는 것은 둔한 네피도 이미 충분히 눈치채고 있었다.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는 카렐의 태도에 짜증을 내던 네피가 카렐의 어깨를 툭 쳤다.
"카렐. 이건 급한 일이야. 네가 꼭 들어야 돼."
"뭔데 그렇게 호들갑이야."
"베흔이 다섯 왕녀들을 잡아다 감금한 모양이야."
카렐이 조금 움찔 했다. 모렌 박사가 갑자기 카렐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유가 뭘까? 종친들을 몽땅 적으로 만들려는 건가?"
"그 반대겠지."
카렐이 흰 꽃잎을 살랑살랑 흔들며 나즈막하게 중얼거렸다.
"아니라니? 무슨 소리야?"
"아다시피 S혈통의 유전자 발현이 워낙 제멋대로다보니까 정신지체가 보통사람보다는 훨씬 많이나오잖아. 그래도 사실 이번 공주들은 좀 심하긴 했어. 그래도 다섯 왕녀는 명색이 제위 승계권자들인데 셋이 정신지체에 둘이 심각한 결함있는 보통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선대황제로서도 막막하긴 했을거야."
카렐이 피익 웃음을 터뜨리자 모렌 박사가 그를 힐끗 한 번 바라보았다.
"어쨌든 수우를 사윗감으로 삼은데는 종친들의 동의도 있었고, 종친들 입장에서도 최소한 선대황제가 수우를 내친다고 공포를 해놓지 않은 이상 수우가 그 공주들 중 한명과 결혼만 해 준다면야 새 종친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게 전혀 관계가 없는 페로를 황제로 옹립하는것보다는 손해를 덜보는 셈이지. 결국 공주들을 강제로라도 데려온 건 종친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한 수작이란 말씀이야."
"황족들 신세도 영 불쌍하게 됐네?"
네피가 킬킬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렐이 씽긋 웃음지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종친들 소원은 황족 중 한명이 제위를 잇는 것이겠지만......글쎄, 황족 중에 최고순위라면 선대황제 장조카인 코리온 대군 정도? 하지만 그 원리주의 사이코 유학자 선생은 아직 아무 움직임이 없고......나머지 선택은 페로 뿐인데 페로도 부인이 죽고 없으니 S-7세대 직계를 황후로 삼는 편법도 있겠지만.....그래봤자 이미 '지명'이라는 공식 절차를 걸친 수우에 비한다면 종친들 입장에서 보기좋은 모양은 아니지."
"불쌍한 다섯공주들이구만, 쯔쯔,"
네피가 혀를 끌끌 찼다.
카렐이 씨익 웃어보이며 계속 설명했다.
"원래 종친들은 세네피스 카파키 전 황후가 명문가 출신에 고위급 유학자 출신이라 좀 더 호의적이었잖아. 그런데 자식 없이 쫓겨났으니 그렇고......실리페 베로 황후는 출신이 천박하다고 종친들이 거의 벌레 취급했었지. 그런 엄마한테서 태어난 딸들이니 납치되었건 말건 자기들 이득에만 부합한다면 종친들의 신경 밖일거야. 다섯공주 중 한명은 어쨌든 수우와 결혼해야 하겠지. 그나마 제일 결함이 적고 외모도 그럴싸한 막내 라이공주가 되지 않을까."
마치 남의 일처럼 별 생각없이 지껄여놓은 카렐은 마른 풀 위에 다리를 쭉 뻗으며 크게 하품과 기지개를 했다. 그의 옆에 꿇어앉은 모렌 박사는 여전히 카렐을 힐끗힐끗 바라보고 있었다.
"나머지들은 어떻게될까?"
네피가 카렐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베흔이라면......"
카렐이 네피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피익 웃어보이자 네피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맙소사......다?"
"뭐, 지금까지 황제의 형제자매들 중에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는 건 너도 잘 알잖아? 기껏 레곤 대공주정도? 항상 제거 제1순위였잖아? 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 글쎄, 어쩌면 정신박약이 너무 심한 공주들은 놔둬도 별 해가 될 일도 없을테니 그대로 살려둘지도 모르고."
카렐이 도로 눈을 감으며 또한번 기지개를 켰다. 카렐의 말이 끝난 듯 싶자 모렌 박사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내게 할말이 생긴 모양이구려. 모렌 박사."
카렐이 눈을 감은 채 나즈막하게 중얼거렸지만 모렌 박사의 굳게 다물어진 입은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몇시간 이따가 또 봅시다."
능청스럽게 웃어보인 카렐의 손짓에 가디언들이 다시 모렌 박사를 끌고 돌아갔다.
"그건 그렇고, 우리 마을 위치를 옮겨야 할 것 같아."
"왜?"
카렐이 그제서야 조금 긴장된 얼굴로 네피를 휙 돌아보았다.
"근위대들이 이 부근을 뒤지고있어."
"흠."
카렐이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며 다시 물었다.
"목적지 정해놓은곳이라도?"
"아직 생각중이야. 혹시 괜찮은데 알아?"
네피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카렐이 손가락으로 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ㅤㅋㅞㄹ크 정글지대가 사막보다는 나을걸. 너도 거기서 전투 많이 해봐서 잘 알잖아?"
"ㅤㅋㅞㄹ크?......좀 기분나쁜 곳인데. 전쟁터였던 곳 아냐."
"이젠 생태도 많이 살아났을테고. 정글이어서 토벌대 들어오기도 아주 고약하지. 원주민들하고 적당히 섞여살면 신분 숨기기도 제격이고. 시체가 사람 잡아먹지는 않아. 네가 언제부터 시체 무서워했냐?"
키득거리는 카렐의 흰 망토가 사막바람에 가볍게 펄럭였다. 카렐의 선택이 그럴듯한 듯 네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황제령의 허파'로 일컬어지는 ㅤㅋㅞㄹ크는 프라임 지역의 엔간한 도시권역 두세개정도의 거대한 면적에 빽빽한 산악과 열대우림이 펼쳐져있는, 게릴라의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다. 네피가 카렐을 따라 옷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 카렐과 나란히 섰다.
"선발대를 먼저 보내서 그 부근 탐색이라도 먼저 해 보자. 조페한테 한 이백명쯤 딸려보내서 살펴볼 겸 현장정리도 좀 시키면 되겠지."
"신경쓸 거 없어."
페로가 술잔을 들이키며 중얼거렸다.
"수우같은 놈이 결혼을 한다고? 한 여자하곤 절대 하룻밤이상 보내본일이 없는 녀석이 결혼을 해? 후훗,"
페로가 껄껄거리고 웃음을 터뜨리며 연회실 구석구석에 읍하고 선 미녀들을 한명씩 쳐다보았다. 페로 관에 모여든 '페로 파' 대신들은 걱정스런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정상적이든 비정상적이든 녀석이 후계자로서의 명분을 하나 더 얻는 셈입니다."
대신 한명이 언성을 높이자 페로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쏘아붙였다.
"그땐 결혼하기 싫다고 도망쳤다가 이제와서 결혼하겠다고 설치는 꼴이 더 웃긴거지. 명분은 무슨,"
페로가 그깟것에는 별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대꾸했다.
"모후인 실리페 베로 황후는 어떡할까요?"
"그게 문제인데......지금 황후는 어디있나?"
"남부 루게의 사가에 있다가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오는 중이라 합니다."
페로는 손에 든 작은 단검을 빙빙 돌리며 한참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베로 황후를 포섭해야겠군......"
"예?"
"황후는 지금까지 후계 문제에 관해 철저하게 함구하고 있었는데......일이 이렇게 꼬였으니 더이상 가만히있을 처지가 아니지."
"황후에겐 아무 권한이 없습니다. 그리고 딸들이 근위대에 인질로 잡혔는데 저희쪽에 기울겠습니까?"
"글쎄, 그럴까? 그여자 그 돌대가리 딸들보단 훨씬 똑똑하거든. 아니, 상당히 영리해. 어쩌다 그런 딸들만 낳아놓았는지 이해가 안될 정도로. 어쨌건,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인 건 사실이지만 최소한 그런 자기 위치를 파악할 정도로는 현명하니까......그 여자가 뭘 타고오지?"
페로는 평소 습관대로 거친 막말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대신들에게 물었다.
"공용 여객선을 타고오는 길이라고 합니다."
비서의 대답에 페로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전 황후정도 되는 사람이 상급귀족들도 다 가지고 있는 개인 셔틀이 아닌, 공용 여객선을 타고 온다는 것이 꽤나 우스꽝스런 상황이었다. 그 여자에게 무언가 다른 속내가 있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페로가 자기 가디언들을 죽 돌아보았다. 주인의 시선에 다룬 이하 6명의 특급 가디언들이 일제히 자세를 잡아보였다.
"다룬. 카인과 함께 공용 터미널로 나가. 1등급 5명 정도만 데리고. 아마 근위대들도 나와있을거다. 하지만 무시하고 영접해.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서. 그리고 황후가 어떤 선택을 한다해도 순순히 따라라. 최대한 우호적으로 대하도록."
시로가 공용 터미널을 찾아온 페로 가디언 일행들을 곱지않은 시선으로 홱 돌아보았다. 페로의 명령대로, 먼저 와 있는 근위대 일행들을 철저하게 무시하며 다룬과 카인은 1등석 출구 앞에 그들과 나란히 섰다.
"망할 놈들,"
시로가 중얼거렸다. 무어라 더 궁시렁거리려던 시로는 함께온 제파의 한마디에 얼른 자세를 가다듬었다. 남부 루게에서 온 공용여객선이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장내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나옵니다."
빨간불과 함께 출구가 열리더니 붉은 비단포, 황룡이 새겨진 금빛 머플러로 성장을 한 큰 키의 여자가 뚜벅거리며 걸어나왔다. 갈색 눈동자에 긴 갈색머리, 가무잡잡한 피부의 원숙한 여인이었지만 황후로서의 위엄보다는 농염함과 총명함이 유난히 색기로 번득이는 날카로운 시선 속에 더 강하게 꿈틀대고 있었다.
"오호, 이게 누구들이신가?"
황후는 자신을 마중나와있는 두 '세력'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가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가 빤히 있는 자신의 개인셔틀을 놔두고 공용여객선을 타고 찾아온 이유는 이런 두 놈들간의 '충성경쟁'에서 오는 짜릿함과 또한번의 선택의 기회를 가져보기 위함이었다.
"황궁에서 공주저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희를 따라가시죠."
시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페로 경께서 황후폐하를 매우 뵙고싶어하시옵니다. 함께가시죠."
다룬의 한마디에 황후는 입가에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추스렸다. 이 상황에서 황후는 자신의 안전과 딸들의 운명, 그리고 앞으로의 이해득실을 저울질하며 따질 수 있을만큼 충분히 영악스러운 여인이었다.
세나우스 3세 황제의 후처인 실리페 베로 황후는 첫 부인이었던 세네피스 카파키 황후의 가문이 130여년 전 역모 주동세력으로 몰려 멸문되면서 하급귀족출신의 시녀장 신분에서 일약 제국의 황후로 뛰어올라 세간의 좋지않는 눈초리와 부러움을 동시에 샀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제위 후계자로 삼을만한 자식은 단 한명도 낳지 못한 건 어쨌거나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든 그가 황제의 서거 직후 황궁을 도망친 것은 그 나름대로 꽤 현명한 선택임엔 틀림없었다. 지금껏 전 황제의 배우자, 아니 황제의 어머니 혹은 아버지치고 배우자의 죽음 후에 목숨을 제대로 건사한 예는 단 한명도 없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의 친자식들은 어차피 황제가 되기는 틀려버렸고, 최소한 '전 황후'라는 간판만으로 잘만 한다면 실속을 챙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이 똑똑한 여인의 가슴속에 스물스물 들기 시작한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실리페 베로 황후는 아무말 없이 다룬과 시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참다못한 시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황후폐하. 황궁에서 공주저하들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황후가 갑자기 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다룬과 카인은 말없이 머리를 조아리고만 있었다. 다섯 딸들을 납치한 베흔이 황후인 자신의 말이라고 들어먹을 인간은 틀림없이 아니었다. 명분을 위해 딸들을 납치했으니 자신이 가던말던 딸들은 베흔 손에 묶여있을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그럴바에는 처음부터 베흔에게 백기를 들고 들어가 모든 패를 제손으로 다 내버릴 필요는 없었다.
"공주들? 내가 그런 다 큰 것들까지 챙겨야 하나?"
황후의 쌀쌀맞은 대답에 시로가 조금 충격을 받은 듯 움찔 하고 말았다.
페로 가디언 쪽으로 서슴없이 다가간 실리페 황후는 다룬과 카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 이,"
이를 악문 다혈질의 제파가 황후 뒤를 ㅤㅉㅗㅈ아가려 들자 시로가 그를 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 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