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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15화 (15/1,132)

< -- 15 회: Part 1. 디모르포세카, 음지에 피다. -- >

지하 2층의 간이처형장이 아수라장이 되면서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온 모렌 박사는 카렐이 베흔의 손을 벗어나 무사히 달아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말대로 시아푸보다 열배 잔인하게 죽어주기를 바라는 것인지, 자기 스스로의 생각조차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가 저 기분나쁘고 끔찍한 자리에 계속 머물러있어야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는 매사 냉소적인 사람이기는 했지만 누구처럼 찢어지는 비명과 선혈을 즐기는 괴이한 취향의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지하 2층을 빠져나와 황궁 정문으로 나온 그는 타고온 차가 세워져있을 주차장을 향해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늦은 저녁시간이어서 그런지 주변은 어두컴컴했지만 황궁 본관에 비상이 걸리면서 주변은 꽤 소란스러웠다. 그가 황궁 컴플렉스 내 규정속도를 위반하고 자신을 향해 맹렬히 달려오는 차를 발견한 건 그때였다.

차문을 열어젖힌 네피는 어리둥절해진 얼굴의 모렌 박사가 비명을 지를 정도의 상황판단도 채 하기 전에 그의 목덜미를 덥석 움켜쥐었다. 그의 그다지 크지않은 체구는 공중에 한 번 붕 뜨는가 싶더니 어느순간 차 한구석에 얼굴을 처박은 채 쓰러져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조금 치켜든 모렌 박사는 코끝을 파고드는 피비린내와 매서운 시선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달아날 수 있을 줄 알았소?"

카렐의 그 소름끼치는 목소리에 모렌 박사는 순간 자신의 등골이 바싹 얼어붙어오는 것을 느꼈다. 웬 크고 거친 손 하나가 그를 거칠게 잡아당겨 차 상석에 거의 강제로 밀어붙였다.

"여길 나가는데 댁이 좀 도와주셔야겠소. 댁 차 어딨소?"

옆구리에 들어온 싸늘한 단검의 촉감과, 비웃음섞인 네피의 목소리에 모렌 박사는 하늘이 꺼져버리는 것 같았다.

도시 외곽에 세워두었던 자신의 차로 돌아온 카렐은 완전히 망가져버린 몸을 힘겹게 일으켜 차에서 내려섰다. 베흔의 서명이 들어간 특별출입증을 가지고 있던 모렌 박사를 앞세워 그의 차를 빼앗아타고 황궁컴플렉스와 1번 도시를 의기양양하게 빠져나온 네피와 조페는 간만에 있은 작전의 작은 성공을 자축하며 저희들끼리 키득거리고 있었다.

"고마워, 네피. 꼭 보답하지."

무기벨트를 다시 허리에 두르며 카렐이 네피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키득거리던 네피가 그런 카렐을 걱정스레 바라보며 물었다.

"너 그몸으로 움직이기나 하겠나?"

"어디 며칠 처박혀서 좀 쉬던지......"

등을 더듬으며 끄응 소리를 낸 카렐이 결국 자리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저여자는 나한테 줘."

"저 배신자년은 데려가 뭣하게? 그냥 여기서 없애버리자."

차 뒷문을 열어젖힌 네피가 꽁꽁 묶은 모렌 박사를 끄집어내 발밑에 거칠게 동댕이치며 말했다. 차에서 주인을 기다리다가 얼떨결에 '봉변'을 당한 모렌 박사의 두 가디언들도 사지가 묶인 채 자신들의 주인이 당하는 이런 수모를 지켜볼수밖에 없었다. 카렐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들려던 네피의 손을 가로막으며 힘없이 말했다.

"내가 필요해."

몸을 다시 일으킨 카렐이 정든 카타나를 뽑아들자 번쩍거리는 녹색빛 칼날이 그의 얼굴에 달빛을 반사시켰다. 사지가 묶인 채 그의 발밑에 버려진 모렌 박사는 그를 매섭게 노려보며 바닥에 침을 한 번 퉤 뱉었다.

"날 이자리에서 죽일거냐?"

"죽길 바라시오?"

카렐의 칼날이 모렌 박사의 눈에 달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박사는 체념한 듯 다시한번 침을 내뱉었다.

"맘대로 해. 죽이든 말든. 썅, 재수 더럽게 없는 날이군."

악명높은 자신의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않은 채 그 소문난 성깔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고집센 여자를 바라보며 카렐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필요하니까 안되지. 아직은."

카렐이 쓰러져있던 박사를 억지로 일으켜세웠다. 박사는 자신을 바라보는 카렐의 시선을 피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네 코드는 죽어도 못 알려줘."

"그건 두고봅시다."

카렐의 대꾸와 함께 엄청난 충격이 박사의 턱을 직격했다. 턱이 휙 돌아가며 바닥에 나동그라진 모렌 박사는 일어나려 했지만 몸을 가눌수도 없이 제자리에서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모렌 박사의 얼굴을 한 대 후려친 카렐은 평소처럼 손에 가죽장갑을 끼고는 박사의 멱살을 다시 움켜쥐었다.

"속임수에 대한 복수요."

카렐이 눈을 부릅뜨며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박사는 카렐 정도의 힘이면 단 한방의 주먹으로 사람의 머리뼈를 산산조각내버리고 뇌수를 공중에 흩뜨려버릴 수 있음을 잘 알고있었다. 방금전의 일격은 말 그대로 형식적인 복수일 따름이었다.

비틀거리는 카렐이 정신을 못차리고있는 모렌 박사를 땅에 질질 끌고가서는 자기 차 문을 열자 네피가 급히 달려와 물었다.

"어딜 가려고?"

"내 일이 있어."

"그몸으로? 베흔이 뒤를 쫓는데? 너 미쳤냐?"

"어쩔 수 없지."

씁쓸한 웃음을 지은 카렐이 힘없이 대답했다. 훔친 이후로 거의 '카렐의 것'이 되어버린 이 차 안에는 더러워진 담요, 흐뜨러진 약병들과 쓰레기들이 난잡하게 널려있었다. 네피의 마을을 떠난 후 카렐이 어떻게 지내왔는지가 이 차 안의 흉한 꼴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상황을 눈치챈 네피가 조그만 소리로 물었다.

"총리하곤......완전히 째진거냐?"

카렐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수석가디언 카렐의 처형 소식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을 페로가 카렐을 구하기 위한 구조대도 보내지 않았고, 심지어 그를 살리기 위한 정치적인 시도조차도 전혀 하지 않은 것을 네피는 잘 알고 있었다. 한때 가디언 동료로서 누구보다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카렐의 이런 비참해진 모습에 네피가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정도 다치고는 혼자 몸 추스리기 힘들어. 상처가 커서 감염될수도 있어. 나하고 같이 가자."

"내가 가면 네가 위험해져."

"언제는 안 위험했냐. 베흔 그자식 미쳐 날뛰고 있을거 생각하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은걸."

네피가 자기 도끼를 닦아 등에 둘러메며 카렐의 상처입은 등을 툭 쳤다. 카렐이 얼굴을 잔뜩 찡그리자 네피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솔은 이제 어떡할거야?"

"......"

"벌써 두번이나 도망치려는 걸 붙들었어."

카렐이 멀리 도시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네가 어느정도까지 그애를 건드려놓았는지 모르겠지만 저질러논 일은 책임을 져야 할것 아냐."

"아무 일 저지른거 없어."

카렐이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네피가 다시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능청떨지 마. 솔 걔 미모를 보라구. 나 포함해서 눈독들인 녀석들이 한둘이 아냐. 니가 도장 안찍어놓으면 내가 먹어버린다?"

네피의 장난기어린 말에 모렌 박사가 카렐을 홱 돌아보았다.

네피가 카렐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느 정도 사인데? 잠자리까지 한거야?"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

카렐이 짜증스럽게 대꾸했지만 네피는 그 말을 믿을 생각은 전혀 없는지 혼자 떠들어대고 있었다.

"아니긴 뭘......페로 관에서도 너 따르는 여자들 많았다는거 다 아는데. 거 참, 희한하지? 널 도대체 뭘보고 좋아하냐? 니가 다정하기를 하냐, 인간성이 곱기를 하냐? 제대로된 물건도 없는 가디언인데, 킥킥,"

네피의 여전히 능글능글한 농담에 카렐이 눈을 흘겼지만 신경도 쓰지않은 네피가 차 문을 열어보였다.

"빨리 타. 네 차는 따라오게 프로그램할테니까. 누구는 좋~겠다. 기다려주는 사람도 있고."

네피의 차가 마을 부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정이 훨씬 넘은 후였다. 차를 한구석에 잘 숨겨놓은 네피는 악을 쓰며 몸부림치는 모렌 박사와 그의 가디언들을 마중나온 부하들에게 넘기고는 탈진한 카렐을 등에 들쳐업고 가파른 바위절벽을 넘어 예의 그 분지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렌 박사는 내가 잡아놓지. 후후, 하긴 어차피 도망쳐도 이 고원만 나가면 사방팔방 사막이니까 죽느니 여기 머무르는 게 현명할테지만. 조페, 이여잔 독실에 가둬 놔. 위험인물이니까 각별히 조심하고,"

"알았어, 알았어,"

모렌 박사를 어깨에 들쳐멘 조페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네피는 축 처져있는 카렐을 부축해 일으켰다. 모두 다 똑같은 모양의 이동식 조립주택들이 줄을 맞춰 번호만으로 구별되고 있는, 꽤나 삭막해보이는 이곳은 마을이라기보다는 무슨 병영을 연상케하는 꽤나 멋대가리없는 모습이었다.

"하여간, 너같은 단순한 놈이 지도자라고 있으니 마을 꼴이라고 멋대가리없긴......"

긴장이 풀린 카렐의 얼굴에 모처럼의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카렐의 악의없는 핀잔을 웃음으로 들어넘긴 네피는 그의 짐들을 챙겨 손에 들려주며 말했다.

"온몸이 더 아파올거야. 내가 의사 보내줄테니까 치료 끝나거든 아무생각 말고 푹 자. 내일 아침에 더 쑤실테지만 그게 최고지."

"어디서?"

카렐이 얼굴을 찡그린 채 물었다. 아무생각없이 카렐의 등을 짚었던 네피가 멋적은 표정을 지으며 손을 떼었다.

"솔 집은 144호야. 저기 창고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여자 어른 숙소니까. 번호를 잘 찾아봐. 청소년 숙소에서 어제 옮기라고 했거든. 거기까지 데려다주고 싶지만 볼일이 좀 있어. 그정도는 걸어갈 수 있지? 솔 아직 모르고 있을테니까 가서 깜짝 놀래켜줘."

"하지만......"

카렐의 대답도 듣지 않은 네피는 그를 길가에 혼자 놔둔 채 자기 갈곳으로 가 버렸다.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는 환자를 길 한복판에 놔둔 채 가버리는 그 황당한 모습에 카렐이 잠시 기가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여간, 저새끼, 잔정 없는 건 여전하네,"

카렐은 하는 수 없이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길이었지만 가디언들에게는 대낮이나 밤중이나 그 시야에 별다른 차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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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당 길이가 너무 길어 보기 불편하다는 지적이 있어 이번부터 매편 길이를 절반 정도로 줄이기로 했습니다. 당일당일 써서 올리는 것이 아니고 이미 써둔 글을 잘라 올리는 것이어서 (사전제작 이라고 해야하나? ^^;;;) 길이가 전반적으로 길게 나뉘었던 모양입니다. 혹시라도 길게 쓰는 편이 맥이 끊기지 않아 더 낫다면 코멘트를......

<코멘트와 추천은 배고픈 아마추어 작가의 양식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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