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1화 (11/1,132)

< -- 11 회: Part 1. 디모르포세카, 음지에 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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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0부락 근처에서 오늘아침 카렐이 목격되었다고 합니다."

점심식사를 하는 수우를 보좌하던 베흔에게 근위대원 하나가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 카렐의 소식에 수우가 베흔을 문득 바라보았다. 쓴웃음을 지은 베흔이 되물었다.

"3410부락?......멀리 도망가지는 못했었군. 누가 목격했나?"

"타르서스로 가던 상인과 두 명의 가디언이 두 남녀와 함께 있던 카렐에게 차를 빼앗겼다고 합니다."

차를 빼앗기며 공포에 떨었을 그 상인을 머리에 떠올리며 베흔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추적장치는 물론 곧바로 파괴되었겠지?"

"그렇습니다."

"어느 쪽으로 갔다고 하나?"

"도망치느라 그것까지는 미처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두 남녀라면 누구지?"

"남자는 지난번에 카렐이 지키던 그 청년인 듯 하고 여자는 파악이 안됩니다."

"녀석 페로 관으로 돌아갔겠지?"

"그게.......없어진 그 차가 페로 관에 들어갔다는 보고나 페로 관 주변에서 카렐을 보았다는 보고는 없습니다."

부하의 보고에 무언가 의아한 듯 베흔의 양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흠......이상한 일이군. 놈이 왜 페로 가디언 숙소로 돌아오지 않는 거지? 차를 훔쳐 돌아왔다면 페로 관 주변에서 목격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아직 카렐이 페로의 수하라고 알고있는 베흔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의문을 품으며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이상해......카렐은 차를 웬만해선 잘 타지 않는데......"

페로가 턱을 고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페로 주위에 둘러앉은 가디언들도 어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사건에 많이 당혹스러워하는 표정들이 역력했다.

근위대에 심어놓은 세작들을 통해 베흔이 접하는 엔간한 정보들은 거의 동시에 입수하고 있는 페로는 카렐이 차를 빼앗아 타고 남쪽으로 달아났다는 소식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그리고......외람된 말씀이지만......"

카인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동행하고있다던 여자의 용모가 아무래도 옛날에 주인님이 팔아버리신 솔하고 너무 흡사해서......"

"뭐!"

페로가 평소 같지 않은 극도로 흥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곧 표정을 가다듬으며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인님이 전날 밤에 솔과 동침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혹시 둘이 어떤......"

"말도 안되는 소리.......카렐은 그 계집애는 건드리지 않았어. 아니, 건드렸을 리가 없어. 하지만......설마, 그 녀석한테?"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페로는 그대로 방안으로 모습을 감추어버리고 말았다.

"페로 관에 있었다고?"

네피가 방안에 혼자 웅크려 앉은 솔에게 나름대로 다정하려고 꽤나 애쓰며 질문을 던졌다. 낮 내내 계속 울기만 하던 솔은 이젠 아예 지쳐 웅크린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솔의 얼굴을 앞뒤로 훑어보던 네피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 바람둥이 다룬녀석 너보고 침 꽤나 흘렸겠다. 훗, 그러면 뭘해, 중요한 게 없는데, 마음만 바람둥이지, 크크크,"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내내 침묵을 지키던 솔이 결국 퉁명스럽게나마 입을 열었다. 솔의 질문에 네피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페로 가디언이었으니까. 다룬 녀석하고 동기야."

"......"

"그런데......당신들은 뭐하는 사람이요?"

이번엔 솔과 함께 있던 티틀이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후후, 억울한 거 많은 시민들하고 주인에게서 도망친 가디언들, 패잔병들, 노예들, 그리고.....뭐, 귀족출신도 좀 있긴 해. 다 망한 귀족들이어서 탈이지. 여기 있는 건 만 명쯤 되고 흩어져 있는 놈들까지 합치면 한 삼만 명쯤 되고."

네피가 자신의 손목에 아직 채워져 있는 파란색 가디언 팔찌를 내보였다.

"근위대 놈들이 소탕한답시고 얼맛동안 난리를 쳤었는데 안되지. 우리에게도 특등급 가디언 출신이 셋이나 되거든. 나를 포함해서. 어쨌든 우린 이대로 자급자족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어. 이 산 속에서."

"혹시 카렐 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알아요?"

솔의 질문에 네피가 문득 그를  돌아보았다.

"왜? 알면 따라가기라도 하게?"

"......"

"궁금하다면 알려주지. 아까 너희가 타고 온 차로 돌아가더니 다시 북쪽으로 가버리더군. 그 뒤론 몰라. 내, 참. 푹 빠진 모양이네.....고를 인간이 따로 있지......아니, 짐승인가? 어쨌든 그 녀석은 절대 길들일 수 없는 놈이야. 웬만하면 다른 놈 골라."

네피가 여전히 빈정거리는 말투로 중얼거리자 솔이 약간 성질난 표정으로 언성을 높여 대꾸했다.

"그분을 내게 길들인다는 건 꿈에도 생각 안했어요."

솔의 철없는 소리에 네피가 대뜸 솔에게 얼굴을 들이댔다.

"알아? 놈은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야. 자그마치 100년을 짐승 털을 벗겨 입고 늑대나 호랑이들하고 싸우면서 날고기에 사람고기까지 먹고 자란 놈이라구. 맘에 안 드는 적은 산채로 팔다리를 비틀어 끊어내 버리는 그런 녀석이야. 뭐, 동료로는 쓸만했지만......"

"하지만 원래는 다정하신 분이라구요."

카렐이 짐승이라는 말에 순간 발끈 한 솔이 네피에게 얼굴을 맞들이대며 목소리를 높였다.

"관둬야지......빠진 걸 어쩌겠어. 쯧쯧, 애는 애구만."

기가 막혀진 네피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한때 페로 수하에서 가디언이었다는 이 거친 남자는 막말을 늘어놓는 거친 사내이기는 했지만 그다지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고 있었다. 그리고 카렐이 악당에게 자신의 안전을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라 솔도 굳게 믿고있었다.

네피가 도끼를 등에 둘러메며 조금 갈라진 굵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카렐과의 약속이니 일단은 지킨다. 너희들을 보호해주겠어. 대신 이곳의 규칙을 지켜야 해. 맘대로 밖에 나가는 건 절대금지다. 우리에겐 가디언 출신만 삼백 명이 넘어. 거기다가 군인 출신들까지 합하면 만 명이 넘어. 그러니까 안전 따위는 걱정할 것 없어."

네피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티틀은 언젠가 소문으로 들어본 일 있는 '대사막의 무장패거리'가 바로 이들임을 깨달았다. 약 3만 명에 달하는 이들 패거리는 대사막 이곳저곳을 떠돌며 근위대들을 골탕먹이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그들의 지도자라는 거구의 남자는 돼지 한 마리를 그 자리에서 먹어치우고 술 서너통 정도는 음료수처럼 들이키는 호걸중의 호걸이라는 말도 들은 바 있었다.

그 '호걸'이라는 사내가 바로 자신의 코앞에 있는 이 거구의 가디언임에 틀림없었다.

왠지 고막에는 영 거슬리는---물론 머리통을 뒤흔드는 카렐의 쇳소리에 비한다면야 천상의 울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만---네피의 듣기 싫은 목소리가 또 한번 울려 퍼졌다.

"너희같이 싸울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마을을 정리하고 전사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돼. 넌 글쟁이라고 했나?"

네피의 눈길이 자기를 똑바로 향하자 기겁을 하고 놀란 티틀의 어깨가 들썩했다.

"저, 저요?"

"그래. 티틀이라고 했지?"

"예, 예,"

풀죽은 얼굴의 티틀이 고개를 숙였다.

얼떨결에 오넷 광장에서 사람하나 구한 것이 이렇게 황당한 결과가 되리라고는 예상도 못했지만 따져보니 나쁜 것만도 아니라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던 차였다. 어쨌든 팔자에 없이 가디언을 데리고 있어본 경험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던 입장에서 부담스러웠던 카렐이 다시 사라져준 것이 내심 고맙기까지 했다.

"뭘 하면 될라나......잘됐다. 여기 노예 출신들은 글을 거의 읽을 줄 몰라. 네가 그 사람들한테 글 좀 가르쳐."

"......예."

"너, 솔."

"......"

"입 좀 열어. 카렐은 이제 떠났어. 너 페로 저택에서 뭐했어?"

기분이 잔뜩 상해있던 솔은 네피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약간 부아가 난 네피의 언성이 높아졌다.

"반반한 거 보니까 장난감이었어?"

네피의 막말에 솔의 얼굴이 그나마 더 일그러들었다. 말실수를 뒤늦게 깨달은 네피가 다시 물었다.

"음식이든 빨래든 뭐 했을 거 아냐."

"......"

단단히 삐진 솔의 모습에 네피가 하는 수 없다는 듯 뒤로 돌아섰다.

"알았다, 알았어. 넌 처음부터 가르쳐야겠다. 너도 글 못 읽지?"

"글은 읽어요."

솔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카렐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아온 솔은 '나중을 대비해서 공부를 해 두어야 된다'는 그의 유별난 닥달 덕에 읽고 쓰기는 물론이고 엔간한 기초교육과정까지 따로 배울 수 있었던 터였다. 노예인 솔이 글을 읽는다는 말에 조금 놀랐는지 어깨를 한 번 으쓱 한 네피가 말했다.

"좋아, 좋아. 네 주인, 아니, 이젠 아니지. 저 티틀친구 조수나 해.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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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와 두근거림에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페로는 애써 피곤한 모습을 가다듬고 오늘의 행사가 예정되어 있는 아레나에 들어섰다. 며칠 전부터 큰 행사가 예고되어온 황궁 옆 거대한 아레나 부근엔 묘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근위대장 베흔은 며칠 전부터 100년 동안 '특수훈련'된 사상최악의 무시무시한 가디언이 처음 공개된다며 꼭 나오라는 '당부'를 몇 번이나 해왔던 터였고, 어릴 때의 기억을 잊을 리가 없는 페로는 그것이 누구를 뜻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한구석엔 오늘 행사의 제물이 될 거구의 가디언이 큰 우리 안에 갇혀 있었다.

페로는 귀빈석에 올라가 세나우스 3세 황제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110세의. 젊다못해 어린 나이에 제국의 부총리라는 어마어마한 직책에 올라있는 페로는 카렐을 떠나보낸 이후 100여년 동안 제국 제일의 야심가로서의 꿈을 차곡차곡 키워오고 있었다.

황실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페로는 제국 제일의 교육기관인 남극성당에서 육서과정 학부와 박사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황제령 프라임 지역의 두 번째 대도시인 3번 도시의 시장을 거쳐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페로가 조만간 5명의 공주들 중 한 명과 혼인해 제국의 부마가 될 것이라는 소문도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었다.

5명이나 되는 공주들 모두가 정신이상자로 판명나 후계 부적격판정을 받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지면서, 행여나 있을지 모르는 후계문제에 불안감을 느낀 황실 종친들은 남부 최고제후가의 아들이며 페로의 친구이기도 한 수우를 공주 중 한 명과 혼인시켜 후계로 삼는 극단적인 타협안까지 내놓았지만, 이 역시 수우 녀석이 잠적해버리면서 난관에 봉착한 후였다.

그리고 이제 그 자리를 대신할 젊고 능력 있는 인재로 이 야심만만한 젊은 페로에게 주위의 시선이 쏠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페로에게 가장 큰 적은 황실 중앙정부의 실권을 쥐고 있는 남부와의 알력이었다. 페로는 비록 중앙귀족이었지만 동부 최고제후 샤자한 슈트란 공의 종손자였고, 귀족들 사이에서는 거의 '동부에 기운 중앙귀족' 쯤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남부가 장악하고 있는 중앙정부 기득권세력과의 싸움은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실 줄 알았죠."

황제와 황후를 보좌하던 베흔이 젊은 페로에게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베흔과 무언가 귓속말을 주고받던 실리페 베로 황후도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연신 싱글거리는 중이었다.

자신에게 보내는 베흔의 기분 나쁜 미소를 의도적으로 무시해버린 페로는 앞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옆에서 술을 들이키던 황제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페로에게 말을 건넸다.

"자이센 부총리, 솔직히 나도 좀 믿기지를 않는데 110살이면 다른 가디언들이면 잘해야 3,4등급 올랐을 나이인데 그런 녀석이 저기 있는 1등급 가디언하고 붙어서 이길 수 있겠소? 근위대장이 하도 졸라서 마지못해 이렇게 거창하게 하긴 했는데 사실 걱정이 많이 된다오. 괜히 지면 황실 입장에서는 큰 망신 아니겠소?"

페로는 자신을 보자마자 넋두리부터 늘어놓는 한심한 황제를 올려보며 겉으로는 짐짓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명색이 황실과 근위대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열었다는 이 행사장에서 저 속 좁은 황제는 큰소리를 쳐도 부족한 이판에 벌써부터 질 걱정에 빠져 있었다.

어떤 이는 폭군으로, 어떤 이는 가장 강력하고 현명한 통치자로 기억하고 있는 세나우스 2세 황제의 세째아들로서 170여년 전 제위를 물려받은 이 남자는 조금 마른 보통체구에 귀공자 같은 뽀얀 얼굴을 지닌, 얼핏 좋은 인상의 사내였다. 하지만 그런 인상은 접어두고 제국의 지도자인 황제로서 보자면 한마디로 빵점에 가까운 것이 문제였다. 어떻게 이런 인간이 황제가 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세나우스 2세 사후, 제위경쟁기였던 4차 혼란기를 살아보지 않은 페로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나이든 사람들의 말을 빌어보자면 세나우스 2세 황제의 6명의 자녀들 중 세 번째인 이 남자만 제외한 나머지 5명은 모두 황제로 손색이 없는 훌륭한 태자들이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역사라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해서 그 다섯 중 한 명은 자결했고, 3명은 제위경쟁에 패해 이 멍청이 황제의 손에 참수당했고, 잽싸게 제위경쟁에서 발을 빼버린 공주 1명만 아직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물론 어머니의 지도력과 현명함은 거의 물려받지 못한 이 한심한 세째태자가 제위경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던 것도 본인의 능력이 아닌, 북부 카파키 가문 출신 태자빈의 공로였다. 하지만 주색잡기에 열중하느라 정사에는 도통 관심 없던 이 남자의 치세 초반에는 똑똑하고 야심만만한 황후의 지도력으로 제국이 제법 모양을 갖추어가며 돌아가던 때도 있었다.

무식하고 부지런한 자보다는 무식하고 게으른 자가 차라리 사회에 '해가 덜 된다는' 된다는 누군가의 말이 사실로 증명된 셈이었다.

하지만 80여년 전, 기원 291년에 있었던 큰 정변으로 그 황후마저도 쫓겨나 유폐된 이후로는 나라꼴이 제대로 돌아간 일이 없었다. 중앙정부는 남부 출신 지방 제후세력들이 판치고 있었고, 치안이 불안해지면서 도적떼는 사방에서 들끓고 있었다.

"어휴, 저 가디언 하나를 키워내는 데 들은 돈이 얼만데......"

황제의 이어지는 넋두리에 페로의 입에서 하마터면 욕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평소같다면 저런 한심한 황제를 속으로라도 실컷 비웃어주었을 페로였지만 오늘만은 페로의 심정도 저 밴댕이 속의 사내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페로가 짐짓 고개를 끄덕거려보이며 황제에게 얼굴을 바싹 가져갔다.

"알아보니 맞서 싸울 시아푸라는 1등급 녀석 실력이 상당하다고 합니다. 저 녀석을 누가 합성했는지는 이미 잘 아실 테고......성장속도로 보아서 지금까지 만들어진 가디언들 중 가히 최강이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데스매치는 중단하시고 근위대 특급으로 싸우게 하심이 타당할 것 같사옵니다......망신도 망신이지만 엄청난 투자가 들어간 새 가디언을 첫날부터 저런 녀석 제물로 삼으시느니....."

페로의 속보이는 간언에 베흔이 큭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페로가 베흔을 무섭게 쏘아보았지만 베흔은 입가에 미소만 띤 채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술잔을 들이켰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벌려놓은 걸 거두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거대한 아레나엔 이미 여러 가디언 수련장의 주인들이나 관계자들하며 가디언들, 일반 시민들로 북새통이었다. 노예들이 벌이는 피비린내 나는 투기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마지막 노예들의 대결이 끝나고 노예들이 피로 물든 땅바닥을 갈아엎고 그 위에 톱밥을 뿌렸다.

장내 진행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알려드린 대로 오늘은 가디언으로서의 규칙을 어기고 신성한 귀족여성과 음탕한 행각을 벌인 가디언 시아푸의 공개처형이 있겠습니다. 오늘의 처형은 결투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며 규칙은 없습니다. 만약 여기서 시아푸가 상대방을 죽인다면 이 자리에서 황제 폐하께서 그에게 사면을 내리시어 다시 가디언으로 복귀될 것입니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야유를 퍼부었다. 큰 철창문이 열리자 단정한 구레나룻을 기른 당당한 체구의 미남자 한 명이 성큼 걸어나왔다. 흰색 가디언팔찌가 끼워진 그의 손에는 큰 크레모어가 들려있었고 깨끗한 복장에 기름기가 도는 좋은 혈색이었다.

아레나 중간으로 당당하게 걸어나온 그는 칼을 치켜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주인님께 명예를!"

가디언을 복원시켜 음탕한 짓을 한 주인에게 그다지 맞지 않을 듯한 '명예' 라는 단어이기는 했지만 시아푸에게는 별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곧 벌어질 데스매치에 대해 그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자신의 상대로 나와봤자 딱 한 등급 높은 특급이겠지만 특급 중에서도 최고수로 꼽히는 베흔은 귀빈석에 황제와 함께 앉아있었다.

근위대 자존심에 페로 가디언은 동원하지 않을 것을 생각한다면 나올 경우의 수는 빤한 셈이었고 그나마 근위대의 2, 3인자인 시로와 제파 역시 귀빈석 양옆을 지키고 있으니 쿠베나 셈 둘 중의 하나가 나오는 것이 최악이라면 최악이었고 어쩌면 그 이하의 등급이 나오는 행운이 따라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간 '최강의 유망가디언'이라는 찬사를 들어온 그로서는 그 정도 특급이라면 한 번 붙어볼 만 하겠다는 자신감도 내심 품고있었다.

진행자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오늘의 처형을 집행할 가디언 카렐은 현재나이 110세, 페로 수련장에서 합성되었고 황실 수련장에서 훈련되었으며 아직 등급은 없습니다."

시아푸의 상대로 뜻밖의 이름이 호명되자 관중들이 갑자기 웅성대기 시작했다. 맞붙어 싸울 시아푸도 잠시 자기 귀를 의심하는 듯 진행자 쪽을 돌아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한구석의 큰 철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온몸을 시커먼 망토로 감싼 한 사람이 느릿한 걸음걸이로 나타났다. 순간 지켜보던 페로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온몸을 완전히 가리고있는 터라 얼굴은 물론이고 몸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카렐의 얼굴이 도무지 보이지 않자 답답해진 페로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칼을 치켜들었던 시아푸는 망토의 그늘 밑에 가려진 카렐의 눈을 쏘아보고는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설마......여자......???"

카렐이 고개를 조금 치켜들자 얼굴의 절반 정도가 바로 앞에 선 시아푸의 눈에 희미하게 드러났다.

"뭐야! 여자잖아!"

시아푸가 큰 소리로 외치자 장내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와하하하!"

몇 사람이 폭소와 함께 관중석의 분위기가 크게 흐트러지기 시작했지만 카렐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잔뜩 긴장하고있던 시아푸는 여자인 상대방을 확인하고는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시작을 울리는 긴 나팔소리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관중들의 웃음소리와 야유로 잘 들리지도 않고 있었다.

"길을 잘못 찾아온 모양인데요, 이쁘장한 아가씨, 관중석은 저 윕니다."

시아푸의 놀림에도 카렐은 칼을 뽑지 않고 있었다. 시아푸는 씨익 웃으면서 카렐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하지만 그리 여유 만만하던 시아푸의 표정이 조금 굳은 건 카렐의 키가 자기보다도 거의 반뼘은 더 크다는 것을 깨달은 때였다.

카렐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상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예쁘고 불쌍해도 죽일 수밖에 없으니 날 용서하시지."

시아푸가 대뜸 칼을 치켜들며 돌진해 들어가기 시작하자 관중석에서 큰 환호성이 올랐다.

"으악!"

시아푸가 벽에 쿵 하고 부딪혔다. 칼을 들고 맹렬히 돌진하던 그 기세가 무색해질 정도로 어처구니없이 카렐의 주먹에 턱을 얻어맞은 시아푸는 한참을 밀려나 아레나와 관중석의 경계를 이루는 벽돌벽에 그대로 부딪혀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천천히 다가온 카렐은 바닥에 쓰러진 그의 가슴을 움켜잡아 한 손으로 벽에 올려붙였다.

"으, 으악!"

가슴이 짓눌리는 고통에 시아푸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시아푸의 갈비뼈가 부서지고 있었다. 카렐의 특이한 목소리가 그 위에 나지막이 깔렸다.

"네가 감히 날 놀렸나?"

카렐이 손을 놓자 시아푸가 피를 토하며 땅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시아푸를 바닥에 팽개치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난 카렐은 그제서야 칼을 뽑아들며 시아푸에게 오라 손짓해 보였다.

"썅! 저년이 봐주려고 했더니!"

시아푸가 칼을 꽉 쥐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크게 외치고는 카렐을 향해 내달았다. 순간 무언가가 번쩍 하더니 칼 한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한 시아푸의 머리가 그대로 잘려 날아갔다.

"날 무시한 죄다!"

카렐이 계속 칼을 휘둘렀다. 머리가 없는 그의 몸통이 채 바닥에 쓰러지기도 전에 그의 사지가 온통 조각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관중석이 벼락이라도 맞은 양 조용해져 있었다.

"아, 아홉 조각입니다......"

정리를 위해 달려나온 근위대 가디언 하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겨우 소리쳤다. 그는 피를 뒤집어쓴 카렐이 자기를 쳐다보자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멀찌감치 떨어졌다. 긴장하고 있던 황제의 표정이 순식간에 희색이 감돌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크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와하하하! 축하한다, 카렐! 황제 가디언의 위신을 네가 세우는구나! 정말 훌륭하군! 네게 등급을 주어야 하는데 특등급을 주는 것도 네겐 수치스러울 것 같은 생각까지 드는구나! 네겐 등급을 매기지 않겠다! 앞으로 내 곁을 지킬 훌륭한 가디언이 되도록 해라!"

전율과 공포감을 느낀 관중들이 얼떨결에 '황제폐하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멍해진 표정의 페로는 그리도 고대하던 카렐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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