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 회: Part 1. 디모르포세카, 음지에 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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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페로는 즉시 이십 명의 가디언들을 사랑채에 소집시켰다. 건장한 체구에 살기가 넘치는 모습을 한 페로 수하의 최정예 가디언들이 상석의 페로 앞에 열을 맞추어 꿇어앉아 고개를 숙여 보였다.
"우리의 가장 큰 적은 베흔이다. 수우 그놈은 어차피 생각할 필요도 없어."
페로가 술 한 잔을 들이켰다.
"그런데 말이야......난 솔직히 너희들 중에 베흔을 상대해 이길만한 녀석이 있다고는 믿지 않아."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중앙에 앉은 새 수석가디언 다룬만이 자존심이 상했는지 약간 표정을 일그러뜨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다른 가디언들도 다룬이 근위대장 베흔은 고사하고 그 뒤의 2인자인 시로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의 표정을 힐끗 살핀 페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베흔이면 특급 가디언 중에서도 특급이지. 어쨌든 카렐을 키워냈던 그런 사람이니까. 옛날같이 카렐이나 네피가 있다면 일이 쉽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렇지를 않다. 비록 내게 여섯 명의 특급이 있지만 다룬과 킵, 판을 뺀 3명은 특급으로 승급 한지 채 10년이 되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7명의 베테랑 황제 가디언들을 당해내는 건 기대할만한 싸움이 아니다.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한놈이라도 적을 줄여놓아야겠다."
"알겠습니다!"
네 명의 괴한들이 밤중에 잠시 멈춰있는 차 한대에 살그머니 접근하고 있었다. 안에 타고있던 페로의 집사 로카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밖을 얼른 내다보았다.
"이상한 일이군,"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차체가 조금 흔들리자 불안해진 로카는 기사에게 빨리 차를 출발시키라고 손짓했다.
"차가......움직이지 않습니다."
운전사가 급히 뒷켠를 돌아보았다. 상황을 눈치챈 세 명의 페로 가디언들이 차 밖으로 급히 달려나갔다.
"엇!"
뒤쪽에서 두 명의 가디언들이 이쪽을 향해 돌격해오는 모습이 보이자 겁에 질린 로카는 얼른 차 바닥에 웅크렸다. 고막을 찢는 칼 부딪히는 소리가 밤공기를 울리더니 얼마 못 가 갑자기 잠잠해졌다. 누군가가 차문을 똑똑 두들기자 그때까지도 엎드려있던 로카가 고개를 조금 들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헉!"
"문 열어. 안 그러면 너와 함께 폭파시켜 버리겠다."
낯설지 않은 가디언이었다. 황제 가디언의 금색 팔찌를 한 자가 그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3명이나 되는 중급의 페로 가디언들을 단 몇 합만에 제압한 저 녀석들은 틀림없는 근위대 특급가디언 쿠베와 수에보 녀석이었다.
"제발, 제발 목숨만......"
"다시 말한다. 빨리 문을 열어라. 안 그러면 폭파시키겠다."
로카가 하는 수없이 잠겨있던 문을 열자 수에보가 로카를 한 팔로 번쩍 들어올려 바닥에 거칠게 패댕이쳐 버렸다. 이마가 찢어져 피가 흘렀지만 그것 따위를 생각하고 있을 겨를은 없었다.
로카는 겁에 질린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세 명의 페로 가디언들은 이미 시체가 되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앞쪽에서 운전사를 끌어낸 쿠베는 그대로 운전사의 목을 베어 바닥에 내던졌다.
"제발, 뭣 때문에 이러시는지......."
근위대 가디언에게 둘러싸인 로카는 공포에 질린 표정을 애써 가다듬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로카를 오만하게 내려보던 쿠베와 수에보가 씨익 웃음을 지었다.
대신 한 명을 집까지 호위해주고 돌아오던 근위대 가디언 롭은 갑자기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둘이군......"
롭이 다리를 조금 벌리고 서며 등에 지고있던 칼을 천천히 뽑아들었다. 그의 팔에 채워진 특등급 가디언의 팔찌와 푸르게 빛을 뿜는 눈동자, 그리고 반짝거리는 칼날이 어둠 속에서 빛을 뿜고 있었다. 그런 롭에게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골목에서 모습을 나타낸 건 페로 가디언 킵이었다. 킵이 앞으로 천천히 나서며 들고있던 크래모어를 똑바로 겨누었다.
잠시 서로의 시선을 응시하던 둘은 별다른 말도 없이 무작정 서로에게 공격을 개시했다. 한밤중의 소동에 놀라 창밖을 내다보던 사람들은 기겁을 하고 다시 집안으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거대한 양손검을 거칠게 휘두르는 롭의 공격적인 기세에 킵이 한발 두발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근위대 가디언 중에는 가장 특급 경력이 짧은 롭이었지만 페로 가디언 중에서도 비교적 강자로 꼽히는 킵에게 전혀 주눅들지 않은 모습으로 맹렬하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한 손으로 자루를 바싹 쥐고, 나머지 한 손으로 날 밑의 리카소를 움켜쥔 롭은 어른 키에 맞먹는 그 긴 칼을 마치 창처럼 움켜쥐고 폼멜과 날로 번갈아 가며 킵을 몰아붙였다.
선제 공격을 놓친 킵은 일단은 그의 파괴력 있는 공격을 막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지만 그의 관자놀이 부근의 폼멜에 스친 상처에서는 이미 피가 흐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죽어라!"
승리를 확신하며 킵을 몰아붙이던 롭의 등뒤에서 고함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번쩍 했다. 순간 움찔 하며 자리에 멈춰선 롭이 멍 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롭의 등뒤를 기습한 카인이 피가 묻은 칼을 쥐고 히죽거리며 서 있었다. 눈동자의 초점을 잃은 롭이 몸을 거칠게 떨며 입에서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롭보다 더 놀란 건 그와 지금껏 싸우고 있던 킵이었다.
"카인 네놈! 어딜 끼여들어!"
킵이 이를 빠드득 갈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가디언끼리의 대결에서 1대 1이라는 원칙은 교리에 가까운 절대적인 것이었다.
"규율을......"
등에 치명상을 입은 롭은 결국 자리에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카인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어 롭의 목에 칼을 꽂아 넣으며 힘껏 비틀었다.
킵이 카인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며 붉어진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뭐하는 짓이지? 놈은 나와 싸우던 중이었는데!"
"도와드린 것뿐입니다."
카인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쓰러진 롭의 옷자락에 피묻은 칼을 닦았다. 그의 뻔뻔스런 태도에 격분한 킵이 대뜸 그의 턱을 후려치자 카인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바보 같은 놈! 규율을 어겼잖아! 내가 중간에 싸움을 포기하고 나오거든 지친 적에게 다시 싸움을 걸라고 하지 않았었나!"
"......형님이 그걸 잊어버리신 줄 알았죠."
여전히 뻔뻔스런 웃음을 지은 카인이 키득거리며 일어나 다시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등을 베인 채 바닥에 쓰러져있는 롭을 내려다보며 킵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가 너 같은 쓰레기 놈을 살려서 여기 데려온 이유는,"
어두운 밀실에서 기다리던 베흔이 의자에 결박된 로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냥 몇 가지 물어보고 싶었을 뿐이야."
"제, 제발 목숨만은......"
"아직 죽이지 않았을 때 바른말을 해 주는 게 좋아. 알다시피 카렐에게 사지를 끊어내는 나쁜 습관을 가르친 게 바로 나거든."
베흔이 로카의 오른팔을 천천히 쓰다듬자 로카의 턱이 따닥거리며 떨리기 시작했다.
"내 첫 번째 질문이다. 카렐이 아직 살아있나?"
"카, 카렐이요?"
"그래."
"카렐은 아시다시피 죽었습니다,"
"그래?"
베흔이 씨익 웃었다.
"애석하게도 그 말은 안 믿는 사람들이 많아서 말이야......앙?"
베흔이 로카의 팔을 확 움켜쥐었다. 기겁을 하고 놀란 로카가 지레 놀라 밀실이 떠나가라 째지는 비명을 질렀다.
"아,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초, 총리 각하께서 녀석한테 직접 자살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뭐? 그럼 카렐은 총리 친척을 지키다가 죽은 게 아니란 말인가?"
"예."
로카가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그의 바짓가랑이에서 풍기는 지린내에 베흔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렇다면 카렐은 자살한 건가? 어디서?"
"총리 각하께서 한밤중에 오넷 광장에 카렐을 불러다놓고 직접 눈앞에서 자살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카렐은 그 자리에서 자살했습니다. 정말입니다."
로카가 눈앞의 베흔과, 양옆을 지키고 선 쿠베와 수에보를 번갈아 바라보며 필사적으로 울부짖었다. 베흔이 그의 팔을 쥔 손을 놓으며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그럼 당장 오넷 광장에 가서 시체를 찾아보면 알겠군?"
"그런데......다음날 저희가 확인하러 갔을 땐 숲사람들이 이미 시체를 가져간 후였습니다. 이미 놈들의 밥이 되었을 겁니다."
"상관없어. 혈흔을 채취해 유전자 검사를 하던지, 숲 놈들 족치면 되니까. 그렇다면 총리는 왜 보물 같은 카렐을 제거할 생각을 했나?"
베흔이 로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베흔의 매서운 시선에 잔뜩 긴장한 로카의 호흡이 가빠지고 있었다.
"그, 그건......"
"똑바로 얘기해."
베흔이 갑자기 그의 팔을 조금 비틀자 로카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카렐 녀석이 자기의 유전자 코드를 알아냈습니다!"
로카의 실토에 베흔의 표정이 순간 붉게 상기되었다.
"녀석이 자기 유전자 코드를 찾아다녔다고? 카렐 그놈이?"
"예......"
로카가 더 큰 소리로 울어대기 시작했다. '카렐의 유전자 코드'라는 말에 베흔의 얼굴은 창백해진 수준을 넘어서서 거의 사색이 다 되어 있었다. 그답지 않게 입술을 바들바들 떨던 베흔이 들릴 듯 말듯 중얼거렸다.
"역시......그 녀석답군......그래도......뭔가 이상한데......이유가 부족해......"
그 때,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베흔에게 근위대 병사 한 명이 급히 다가와 무어라 속삭였다. 순간 얼굴 색이 변해버린 베흔이 눈을 감으며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 베흔의 표정에 로카가 잔뜩 불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로카. 널 도저히 살려보낼 수 없는 일이 터졌군."
"예에?"
그 순간, 칼날이 번쩍 하면서 채 비명도 질러보지 못한 로카의 머리가 땅바닥에 툭 떨어지고 말았다.
"롭은?"
아침 문안을 들어온 여섯 명의 가디언들을 보고 수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베흔은 그때까지도 수우 옆에 알몸으로 누워있던 두 명의 여자들에게 나가라 눈짓을 보냈다. 방이 비자 베흔은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죽었습니다."
베흔이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짐짓 태연하게 대답했다.
"무어?"
"페로 가디언의 소행으로 보이옵니다."
믿던 특급가디언 중 한 명이 결국 당했다는 소식에 수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앞으로 저희들은 일체의 개인 행동을 삼가고 함께 다니겠습니다. 페로 가디언과의 개인 충돌도 최대한 피하겠습니다. 대신들의 가택 호위도 1급들에게 전담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윤허해 주시겠습니까?"
"그, 그래야지......당연히 그래야지......"
수우가 침을 삼키며 더듬거리고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페로 가디언 카렐은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오넷 광장에서 발견된 혈흔을 분석한 결과 카렐의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놈들이 꾸민 고도의 연출극일 가능성을 대비해서 계속 조사중입니다."
"그래......그래........"
아직 잠에서 덜 깬 상태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연달아 전해들은 수우는 쌍꺼풀이 진 눈으로 문득 밖을 내다보았다.
"놈들이 로카를 납치한 이유가 뭘까......"
페로가 탁자를 똑똑 두들기며 연신 중얼거렸다.
"로카가 수련장 운영 총괄 책임자였던 만큼......수련장 운영에 관한 노하우를 얻어내려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페로의 집에 모인 대신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아냐 아냐, 그 정도는 황제 수련장 녀석들도 다 알아. 흠......로카를 납치해서 도대체 뭘......"
문이 홱 열리더니 카인이 갑자기 불쑥 들어섰다. 비록 그들 편이었지만 카인의 워낙 거침없고 위협적인 모습에 주눅이 잔뜩 든 대신들이 얼른 그에게서 비켜났다. 페로가 그를 쏘아보며 물었다.
"어떻던가?"
"예상이 맞습니다. 근위대들이 다녀간 흔적이 있습니다."
"그렇군......"
"무슨 말입니까?"
대신 몇 명이 의아한 표정으로 페로와 카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나 페로는 그들에게 상황을 하나하나 설명해줄 정도로 친절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들은 척도 않은 채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잠시동안의 침묵을 마무리한 페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일을 확실히 매듭지어야겠다. 카인. 쓸만한 놈 5명만 데리고 오넷 광장 주변 숲으로 가라."
"으익,"
깜짝 놀란 대신들이 손톱을 깨물었다.
"숲 놈들하고 만나봐. 선물로 소 10마리만 가져가서 최대한 우호적으로 대하도록. 필요하면 약간의 협상도 가능하다. 놈들이 카렐의 시체를 가져갔을 테니 가서 카렐의 머리를 찾아와라. 놈들은 인육을 먹을 땐 그 머리를 따로 잘라 소금에 절여 족장이 몇 년간 보관하니까 그걸 뒤지면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그 사실은 절대 비밀로 한다."
평소 부하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지시를 내리던 페로는 무슨 이유인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말하고 있었다. 명령을 끝낸 페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눈을 내리깔았다.
"알겠습니다!"
카인이 인사를 하고 사라지자 한 대신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럼......카렐의 머리를 찾아서 어떡하실 참이십니까?"
"어떡하다니?"
페로가 그제서야 대신들을 돌아보았다.
"불태워 없애버려야지."
"예?"
"내 말 똑똑히 들어라. 지금 놈들은 우리에게 카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 때문에 선제 공격을 못하고 있는 거다. 그런데 지금 그 뒷조사를 하는 근위대 놈들이 카렐의 머리를 찾아내기라도 한다면 우리 준비가 완료되기도 전에 그놈들에게 선제 공격을 당하고 말아. 그러니 놈들을 조금 더 혼란에 빠뜨리려는 거다. 알았나?"
말을 끝낸 페로는 기분이 심난한지 밖으로 홱 돌아 나가버렸다. 남아있던 대신들까지 자리를 비우자 주변에 서 있던 페로의 특급가디언들만이 남아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각하를 이해할 수가 없어. 저러실 거면 도대체 카렐 누님을 왜 제거하신 거야?......유전자 코드를 찾으러 다니신 게 아무리 중죄라고 해도 시기가 시기니 그냥 눈감고 넘어가든지 적당히 태형 정도로 끝내셨을 수도 있는 건데."
킵이 모두를 돌아보며 중얼거리자 다른 특급들도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옆에 서 있던 엘러가 함께 거들었다.
"솔직히 그날 각하 태도도 조금 이상하셨어요. 할복하시던 카렐 누님 태도도 이상했고......유전자 코드 문제는 그냥 구실이고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 것 아니었을까요?"
엘러의 말을 들은 판이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무슨 비밀스런 얘기라도 하려는 듯 잔뜩 조심스런 목소리로 속삭였다.
"요즘 쫄따구들 사이에 돌고있는 소문 혹시 알아요?"
"소문?"
수석가디언 다룬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각하께서 카렐 누님을 일부러 내보내신 거라구요. 근위대들 눈 속여서 기습할려구요. 카렐 누님하고 각하하고 짜고 한 연극이라구요."
"말도 안돼. 그날 할복하시는 거 눈앞에서 봤잖아?"
"하지만 누님 회복력은 알 사람은 다 알잖아요. 카인 녀석이 목베려고 하는 것도 막으셨고. 누님 우리가 떠나올 때까지도 숨 붙어있었잖아요. 정말로 누님이 저희도 모르게 살아 계신 걸지도 혹시 아나요?"
판의 말이 그럴듯한지 다른 가디언들이 혼란스런 표정으로 서로를 한번씩 마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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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뱀이야! 도마뱀!"
어린 페로가 옷이 망가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흙바닥 위로 몸을 내던졌다. 그물을 가까스로 빠져 나온 크고 못생긴 도마뱀이 수우가 미리 벌려놓은 셔츠 속으로 확 뛰어들었다.
"바보 같은 놈,"
어린 수우가 재빨리 셔츠를 돌돌 말았다. 숨이 붙은 도마뱀이 그 안에서 꾸물거리며 살려고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죽여주는데, 히히히, 카렐한테 사고 치긴."
페로가 입맛을 다시며 수우의 셔츠를 조금 벌리고는 안에 갇혀있는 도마뱀을 들여다보았다.
니그로와 몽골리안, 코카소이드의 훌륭한 장점들만을 그 다양한 조상들에게 골고루 물려받은 페로는 아직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균형 잡히고 탄탄한 갈색빛 나는 몸매와 잘생긴 외모로 함께 있는 허여멀건 수우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장난기로 가득한 페로의 긴 눈매는 언덕 위의 겁 많은 계집아이 놀려줄 기대에 살짝 치켜 올라가고 있었다.
"뭐 잡았니?"
언덕 위 떡갈나무 아래서 혼자 꽃을 따 모으던 어린 카렐이 둘의 자지러지는 고함소리를 듣고는 달려 내려왔다. 동갑내기인 수우나 페로와 동갑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그맣고 비쩍 마른 카렐은 수우의 셔츠 속에서 꾸물거리는 무언가를 보려고 얼굴을 바싹 디밀었다.
"안보여준다아."
수우가 셔츠를 바짓속에 우겨 넣으며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이 꽃 줄께."
카렐이 그 작은 품에 안고있던 꽃무더기를 수우에게 내보였다. 수우 옆에 서 있던 페로가 혀를 쑥 내밀며 카렐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빙신, 그걸 뭐에 쓰니?"
"페로, 그만 좀 때려, 니 손 얼마나 매운데......"
얼떨결에 얻어맞은 카렐의 눈에 눈물이 찔끔 맺혀있었다. 머리를 다시 쥐어박으려던 페로를 수우가 대뜸 막아서자 카렐이 눈치를 보며 자신을 지켜주는 수우 옆에 바싹 붙어 섰다. 자신에게 붙어선 카렐을 바라보며 수우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씨익 웃어 보였다.
"어쭈?"
잠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던 페로가 수우 옆에 있던 카렐의 팔을 자기 쪽으로 억지로 잡아당겼다.
"카렐은 우리 집 꺼야,"
"니네 꺼면 좀 잘해 줘, 맨날 쥐어박기나 하구......울리기나 하는 주제에,"
마치 어른같이 훈계를 늘어놓는 수우를 놀리듯 혀를 쑥 내밀어 보인 페로가 카렐에게 다시 물었다.
"시끄러, 어쨌든, 카렐, 이거 보여주면 뭐줄껀데?"
카렐이 한참을 망설인 끝에 품에 안은 꽃 중에서 하나를 골라 수우에게 내놓았다.
"방금 딴 거야. 아직 봉오리니까......"
"좋아. 이 정도면 받아 줄께."
여전히 제멋대로인 페로가 카렐이 수우 쪽으로 내밀었던 꽃을 중간에서 냉큼 나꿔챘다.
점잖고 어른스러운 태도의 수우에 비하면 정작 카렐의 주인 아들인 페로는 똑같은 열살 동갑내기인데도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지독한 개구쟁이에 심술궂은 악동으로 집안 아랫사람들에게까지 '기피 대상 1순위'로 꼽힐 정도였다.
그런 그의 태도는 어린 카렐에게라고 예외는 아니었지만 조그맣고 허약한데다가 걸핏하면 울어제끼는 순해터진 여자아이에게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그 정도를 조금 낮추는 나름대로의 호의는 보이고 있었다.
카렐이 수우 옷자락에서 꾸물거리는 것을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그거 뭔지 보여준다고 했잖아."
"이거다아!"
페로가 기다렸다는 듯 도마뱀을 냅다 아무 준비도 못하고있던 카렐의 얼굴에 집어던졌다.
"이아악!"
기겁을 하며 놀란 카렐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얼떨결에 공중을 날아간 도마뱀도 정신이 없는지 카렐의 얼굴 위에 잠시 붙어 있다가 재빨리 풀숲으로 사라졌다.
"아앙...."
심하게 놀란 카렐이 결국 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카렐의 우는 모습에 덩달아 당황한 페로가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자 수우가 얼른 셔츠를 벗어 카렐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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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사람들이 자신들의 거주지에 갑자기 들이닥친 이 위협적인 이방인들의 모습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중무장한 6명의 전사들이 마을에 들어서자 겁을 잔뜩 집어먹고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횡행하는 도적떼들을 피해 숲으로 피해버린 옛 화전민 후손들인 이들은 특별히 나쁜 짓을 하는 못된 자들은 아니었지만 도시에서 내버린 행려병자들의 시체나 야생 동물들의 시체를 가져다가 주워먹는 그들의 습성 때문에 보통의 제국민들 사이에는 최악의 야만족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하지만 굳이 이들이 아니고서도 제도의 통제권을 벗어난 황제령의 많지 않은 '촌사람들' 사이에서는 식인이 드물지 않게 행해지고 있었으니 이들에게만 씌워진 야만인이라는 누명도 따지고 보면 조금은 억울한 것이기도 했다. 그나마 페로의 대대적인 도적소탕작전으로 황제령의 치안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난 이후로는 거의 없어져 '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젠 거의 사라져가고 있는 형국이었다.
카인을 선두로 한 가디언들은 거리낌없이 숲사람들의 마을로 향했다. 마을 중앙에 앉아있던 거구의 족장이 별로 달갑지 않은 얼굴로 이 희한한 손님들을 맞았다.
"누구야?"
"도시에서 왔다."
오만하게 대꾸한 카인이 손목의 팔찌를 내보이며 대답했다.
"우린 도시인들은 먹이로밖에 안 보이는데, 헤헤."
족장이 냄새나는 입을 벌리고 웃음을 지었다. 그런 족장에게 카인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려 보였다.
"거래하기 싫다는 건가? 아니면 다 죽고 싶다는 건가?"
카인이 뒤에 몰고 온 소들을 가리키자 정신을 퍼뜩 차린 족장은 그제서야 카인을 안내해 집으로 데리고 갔다. 족장의 움막집에 들어서자마자 함께 온 다섯 명의 가디언들이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꽤 큰 움막집 천장에 걸려있는 방부처리된 사람 머리들에선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풍기고 있었다.
그들의 찡그린 얼굴을 향해 경멸 섞인 미소를 지어 보인 족장이 오만하게 물었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우린 당신 머리 중 한 개가 필요해."
"흥, 요즘 도시에선 머리가 비싸게 거래되는 모양이지, 또 머리를 찾으러오고 말이야,"
"지금 '또' 라고 했나?"
카인의 눈이 번쩍 빛났다.
"오늘 아침에 웬 도시사람들이 다녀갔지."
"무사들?"
"그건 것 같던데. 노란 팔찌를 두른 게 보통사람 같지는 않더군."
"썅, 개 같은 근위대 놈들......"
카인이 이를 악물며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약삭빠른 근위대 놈들이 오넷 광장을 수색하면서 이곳도 함께 뒤졌던 모양이었다.
"놈들이 찾던 머리는?"
"갈색 긴머리에 미녀라더군. 1달 전에 오넷 광장에서 발견하지 않았냐고."
"맞아. 키는 나보다 조금 크고, 어깨가 크고 하체는 날씬한......특이한 점이라면 생식기가 모두 제거된 상태였을 거야. 젖가슴도 없었을 테고."
"흠......"
"손목에 파란 팔찌가 있었을 테고 아마 칼 세 자루가 함께 있었을 거다. 배를 가른 채 죽어있었을 텐데. 놈들이 그 머리를 가져갔나?"
"그런 시체는 애시당초 있지도 않았는걸,"
아침과 똑같은 대답을 반복하기가 귀찮은지 족장이 얼굴을 찡그렸다.
"오넷 광장에서 근래에 주운 안 썩은 시체는 며칠 전에 죽은 남자 떠돌이 시체 뿐이야. 우리도 썩은 시체 가져다먹고 배탈나고싶진 않다고."
"그럴 리가 없어."
"나도 모르겠으니 알아서 하구려. 아침에 온 사람들도 갖고 온 돼지만 버리고 갔으니. 알다시피 우린 사람고기를 먹을 땐 이렇게 머리를 절여 보관하는 게 관습이니까, 혹시 당신이 찾는 머리가 엉뚱하게 발견되었을지도 모르니 한 번 뒤져보구려."
머리들을 뒤져보라는 말에 카인이 얼굴을 찌푸렸다.
카인과 함께 온 5명의 가디언들은 어쩔 수 없이 사다리를 세워놓고 천장에 걸린 수백 개의 냄새나는 사람머리를 하나하나 확인해 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없습니다. 그리고 걸렸던 걸 떼어내 간 흔적도 없습니다."
부하의 보고에 카인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그곳을 도로 나오는 수밖엔 없었다.
"틀림없습니다. 그 시체는 누군가가 가져갔습니다. 그 자리에 썰매 자국이 있었던 걸 똑똑히 보았습니다. 비 때문에 흔적을 추적할 수는 없었지만 누군가가 시체를 거두어 간 건 확실합니다. 아무래도 숲사람 말고 인근의 촌놈들이 식량이나 돈을 위해 집어간 것 같습니다."
난처한 표정의 카인이 주인에게 변명 비슷하게 늘어놓았다. 불쾌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페로는 손을 뻗어 카인의 입을 틀어막았다.
"말로 해결되는 건 아니다."
성을 애써 죽이고 있는 주인의 속내를 미리 파악한 카인이 고개를 더 깊이 숙여 붙였다. 페로는 일시적인 감정에 휩쓸려 카렐을 그 자리에서 '끝내주고' 시체를 거두어오지 못한 것을 이제와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지만 어차피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젠 뒷수습이라도 완벽하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근위대 놈들이 시체를 찾으면 끝이다. 그 부근을 다 뒤지든 어떻게 하든 시체를 먼저 찾아라. 그리고 그 시체를 거둔 놈이나 시체를 본 놈들도 모조리 죽여버려. 알았나?"
"예!"
카인을 내보내고 잠시 눈을 붙이기 위해 사랑방 안쪽에 몸을 뉘였던 페로는 비서 한 명이 들어오는 모습에 짜증스런 얼굴로 휙 돌아누워 버렸다. 잠시 쭈삣거리던 비서가 용기를 내 이 신경질적인 총리에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렘이라는 노예 상인이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한참 졸립던 차에 분위기를 깨는 비서에게 페로가 대뜸 짜증을 부렸다.
"노예 상인? 제기랄, 내가 그따위 놈들 상종하게 생겼어? 네놈 제정신이냐?"
부시시한 모습의 페로는 대뜸 이를 드러내며 비서를 한 번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마도 카렐에 관한 내용 같습니다. 한 번 만나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카렐?"
순간 페로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언제 졸렸냐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잠시 후 조그만 덩치의 렘이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와 상석의 그에게 절을 올렸다.
"할 말이 있다고?"
"저어......전 그냥 뭘 여쭤보러 온 것뿐인데 저분이 갑자기 이리로......"
렘은 뜻밖에 마주하게 된 총리의 모습에 기가 잔뜩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
아직 잠에서 덜 깬 페로가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다.
"알았으니까 빨리 얘기해 봐."
"그으......며칠 전에 조카의 친구인 티틀이란 녀석이 가디언을 팔고 싶다면서 찾아왔었는데......"
"그래서?"
페로의 검고 매서운 눈이 윗목에서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렘을 똑바로 내려보았다.
"파란 손목 띠를 두르고 있다길래 제가 어르신의 가디언인 줄 알게 되었습죠."
"우리 집안에서 길러서 시장에 내놓은 가디언은 만 명이 넘어."
페로가 입을 씰룩거렸다.
"예, 예, 그런데 그놈은 촌놈인데다가 제 밥 빌어먹기도 힘든 천하의 가난뱅이라서 그 비싼 어르신의 가디언을 데리고있다는 게 좀 이상하기도 했습죠......게다가 등급하고 이름이 없는 팔찌를 하고 있었다는 말도 의심스럽고 해서......"
기겁을 하고 놀란 페로는 겉으로는 최대한 표를 내지 않은 채 괜한 헛기침을 한 번 내뱉었다. 계속 삐딱하게 앉았던 페로가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똑바로 앉으며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페로의 눈치를 힐끗 본 렘이 말을 이었다.
"어떻게 구했냐고 했더니 뭐, 오넷 광장에서 다 죽어가던 걸 구해주었다고 하던데 믿기도 뭣하고 해서 그냥 돌려보냈습니다만 잘 생각해보니 혹시 불법 거래로 얻은 녀석일지도 모를 것 같아서......"
입술이 부들부들 떨려오기 시작한 페로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렘에게 돈 한 뭉치를 던졌다.
"알았다. 그럼 놈이 사는 곳을 알겠지?"
"그, 그게.....제 조카 놈도 의료사고를 치고 도망친 녀석이어서......근교의 촌놈들하고 어울려 산다는 건 압니다만 정확히 어디 사는지는......"
"제길,"
페로가 탁자를 쾅 내리치며 고개를 돌렸다. 총리의 그 무서운 태도에 깜짝 놀란 렘이 머리를 잔뜩 조아렸다.
"네 조카 놈의 이름은?"
"와튼이라고......도시에서 의사이었습죠."
"알았다. 돌아가도 좋아. 이젠 내 부하들이 조사할거다."
돈을 손에 쥔 뎀은 기뻐하며 그곳을 나섰다. 그의 뒷모습을 일그러든 얼굴로 노려보던 페로가 작은 목소리로 비서에게 속삭였다.
"놈을 미행해라. 다른데도 발설하지 않나 조사하고 오늘밤에 조용히 없애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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