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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1화 (1/1,132)

< -- 1 회: [혈맥 제1부 : 근본을 향해] -서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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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를 바라보는 누런 황무지에 차 두 대가 문득 멈추어 섰다.

해는 이미 지평선 너머로 뉘엿뉘엿 져가고 있었지만 아직 남아있는 한낮의 열기는 차의 지붕에서 여전히 기류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바닥에 구르던 수십의 해골 중 몇 개가 차의 하부에서 뿜어 나오는 강한 압력에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잠시 아무 기척도 비치지 않던 차안에서는 해가 지평선 뒤로 완전히 넘어가자 그제서야 무언가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차안에 앉아있던 푸른 비단옷 차림의 귀족 남자는 많이 긴장되는지 연신 물을 들이키며 사방으로 뻥 뚫린 지평선만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옆 차에서 내려서는 다섯 명의 자신의 건장한 가디언들을 바라보며 낮은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저마다 각각 다른 색깔의, 손바닥 길이 정도의 금속제 팔찌를 한 가디언들은 주인의 긴장한 모습을 짐짓 못 본 척 자기들끼리 어깨를 두들겨주기도 하고 서로의 무기도 챙겨주며 곧 다가올 '일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충분히 승산이 있어. 내 정보만 옳다면."

그들 다섯 명의 가디언들의 주인인 귀족 테오는 스스로를 격려하듯 같은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다시 돌아본 남쪽 지평선 너머에서는 이 황량한 벌판과는 대조적으로 갖은 색깔의 조명이 영롱하게 빛나는 화려한 '도시'의 야경이 조금씩 그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가고 있었다.

그도 지금 자신이 바라보는 이 야경이 생애 마지막 즐거움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있게 될 '일전'이 이전에도 얼마나 많은 자신 같은 야심가들의 집안을 통째로 멸문의 길에 끌어들였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정말로 혹시라도 자신이 이겼을 때 얻게 될 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의 재산전 상대는 그만큼 '거물'이었다.

제국 전체가 한때 통제 불능 상태까지 갔던 1차 혼란기 때 고만고만한 호족 가문들이 이합집산하는 한 수단으로 등장했던 '재산 결투'가 세월이 지나면서 변형된 형태인 이 속칭 '재산전'의 규칙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다.

양쪽은 총 6명, 그중 주인을 제외하면 쓸 수 있는 가디언은 5명이 한계였고 제국 내에 몇 되지는 않지만 특급 가디언들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5명의 가디언은 정해진 순서대로 상대방의 가디언과 1대 1 대결을 벌여야 하며, 한 번 나온 가디언의 '교체'는 금지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디언이 모두 죽으면 그 다음 타겟은 주인이었고, 주인의 죽음과 동시에 그에게 소유되었던 모든 재산은 승자의 소유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 규칙의 전부였다.

기원 400년을 기점으로 '재산전'은 공식적으로는 자취를 감췄지만 이렇게 해가 진 뒤, 도시 밖에서 공공연히 벌어지는 재산전에 대해서는 근위대도 사실상 통제의 손길을 놓고 있었고, 심지어 재산전에 패한 뒤 한 푼이라도 빼돌리려는 유족들의 마지막 발악에 도리어 승자들의 재산압류 대리인 역할까지도 충실히 수행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테오는 이번의 '상대'는 그런 근위대의 도움조차 전혀 필요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옵니다!"

가디언의 고함소리에 테오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밖으로 나섰다. 어둑어둑해져가는 지평선 너머에서 두 대의 은회색 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이 타고 온 두 대의 검은 차보다 훨씬 크고 화려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그보다 테오를 더 겁에 질리게 한 것은 그 차 앞머리에 붙어있는, 중앙귀족 최고 명문 자이센 가를 상징하는 붉은 황소의 문장이었다.

마음을 다잡은 테오는 자신의 다섯 가디언들을 정렬시키며 짐짓 당당한 태도로 두 대의 차를 맞았다. 삼십 보 정도 앞에 멈춰선 차에서 잘 차려입은 하인 한 명이 뛰어내리며 두 대의 차 문을 급히 열고는 한구석으로 피하며 고개를 숙여 붙였다. 뒤쪽 차에서 파란색의 팔찌를 찬 가디언 1명이 내려섰다.

"뭐야, 한 명이라니?"

테오가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그와 동시에 가디언이 타고 온 차 앞의 은회색의 최고급 허큘리스 승용차 상석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모습을 나타냈다. 짧게 깎은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 가무잡잡한 피부와 수려한 용모를 갖춘 귀족 남자가 테오를 돌아보며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표정을 한 번 지었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희고 화려한 비단포에 붉은 황소가 수놓인 머플러와 흰빛의 다소 요란스런 케이프는 물론이고 멀리서도 확 눈에 띄는 다이아몬드 귀걸이와 목걸이, 팔찌는 이 상대방의 '격'을 너무나 잘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물론 그가 스스로를 소개하지 않아도 테오는 그가 누구라는 것을 --- 제국 내의 거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황제의 사후 제국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한 페로 슈트란 자이센 총리는 자신을 보고서도 고개 한 번 숙이지 않는 이 괘씸한 귀족의 태도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와 턱도 없는 기세 싸움을 벌이려고 오기를 부리던 테오는 총리와 같은 차를 타고 온 검은 옷차림의 한 사람이 총리 바로 옆의 상석에서 조용히 내리고 있는 것을 미처 볼 여유가 없었다.

테오는 상대방의 가디언을 가리키며 자기 옆에 선 가디언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녀석 등급 보이나?"

"50등급입니다."

"뭐? 잘못 본 거 아냐?"

"맞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잠시 기가 찬 표정을 한 테오의 표정에 금새 자신감이 충만해 올랐지만 그렇다고 해도 절대 방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근위대 부설의 황실 가디언 부대에 필적하는 막강한 사설 가디언 부대를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 페로 자이센 총리가 목숨을 건 재산전에 최하 등급인 50등급 달랑 한 명을 데리고 나왔다는 것은 쉽사리 믿을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망할 놈,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정작 페로 자이센 총리는 무슨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지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앞에 선 가디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붉은 전포 차림에 아직 앳된 얼굴을 한 그 50등급 가디언은 약간 긴장한 듯한 표정으로 팔을 가볍게 풀고 있었다.

총리의 옆자리에 타고 온 검은 망토 차림의 정체 불명의 사람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차 뒤에 말없이 서 있었다.

가디언이 감히 주인과 상석에 나란히 타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테오는 그자의 정체에 관해서는 관심조차도 없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테오가 중간에 있던 한 거구의 가디언을 불러냈다.

"네담. 네가 1번이다."

"예!"

상대방 가디언이 나오는 모습을 본 페로 자이센 총리는 무표정하게 옆에 서 있던 이 어린 가디언을 내보냈다.

"포프, 나가라."

총리의 지시에 그 50등급 가디언이 날렵한 검은 색 시미터를 뽑아들며 '정말로' 뛰쳐나왔다.

"이보십시오. 우리 네담이 어떤 친구인지 아십니까? 저 젖먹이 애송이를 데뷔부터 저 세상으로 보내시려고요??"

아무리 목숨을 건 일전이라지만 무려 100살이나 된 자신의 20등급 가디언의 상대로 이제 겨우 데뷔하는 최하 등급 가디언이 나오자 너무도 기가 찬 테오가 결국 한마디 하고 말았다.

"언제 죽어도 죽는 거지."

총리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죽여보게나."

대담하기로 치면 제국에서 감히 따를 자가 없다고 알려진 페로 자이센 총리였지만 이런 짓은 그냥 졸부 귀족에 불과한 테오 눈에도 '미친 짓'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순간, 흰옷의 네담이 큰 소리를 지르며 포프에게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차 뒤에 조용히 서 있던 검은 망토가 두 손을 꼭 모아 쥐었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네담의 양손검이 큰 궤적을 그리며 땅바닥을 내리찍었다. 하지만 웬만한 50등급이라면 오금이 저려 나동그라졌을 그 무시무시한 공격을 가볍게 몸을 돌려 피해버린 포프는 몇 발짝 뒤로 물러나며 옆에 보이는 그 검은 망토 차림의 사람을 잠시 힐끗 바라보았다.

"젠장!"

네담은 상대의 주의가 흐뜨러진 사이를 포착해 다시 칼을 휘둘렀지만 포프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공격을 눈으로 확인하지도 않은 채 '감'만으로 너무도 손쉽게 피해버렸다. 절대 50등급의 수준이 아님을 깨달은 테오의 표정이 조금씩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역시 총리는 '믿는 구석'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칼 한번 쓰지 않고 재빠른 몸놀림만으로 네담의 다소 둔한 공격을 놀리듯 이리저리 피하던 그 가디언은 어느 순간 네담의 옆에 들어와 있었다. 순간 당황한 네담의 옆구리로 포프의 날랜 시미터 날이 스쳐지나갔다.

"악!"

네담이 피가 솟구치는 옆구리를 붙들고 뒤로 몇 발을 물러났다. 기회를 잡은 포프가 그대로 몸을 휙 돌려 적의 옆머리를 정확히 후려쳤다.

"으익,"

테오가 기겁을 하며 한발 물러났다. 머리가 두 조각난 네담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흙먼지와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페로가 가볍게 박수를 치며 중얼거렸다.

"축하한다, 포프. 데뷔부터 승급하는군."

"감사합니다!"

얼굴에 피를 뒤집어쓴 포프가 기뻐하며 주인 페로 자이센 총리의 앞에 꿇어앉았다.

잔뜩 일그러든 표정의 테오가 다른 무사를 가리키며 소리질렀다.

"펠! 나가!"

테오의 다음 가디언이 뛰쳐나오자 포프가 다시 달려나가 맞붙었다. 하지만 테오의 가디언은 너무도 허무하게 채 5합도 못 가 포프의 날쌘 칼에 그대로 목이 달아버리고 말았다.

겁에 질린 테오가 가디언들을 계속해 내보냈지만 이 50등급의 소년은 자신보다 한참 윗 등급의 가디언들을 특유의 날쌘 몸놀림으로 차례대로 바닥에 쓰러뜨렸다. 페로 자이센 총리는 자신의 새 가디언의 데뷔전이 무척 흡족한지 뒤에서 박수를 치는 여유까지 부리고 있었다.

테오에게 남은 가디언은 이제 단 한 명뿐이었다.

거의 거인 수준의 우람한 덩치를 가진 그 가디언은 아주 느릿느릿하게 칼을 뽑아들었다. 지금까지 4명을 연이어 죽이고 자신감을 얻은 포프는 칼을 높이 들고 그에게 큰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 거인 가디언이 내리치는 둔하고 큰 칼을 피해 약점인 옆구리를 파고들려던 포프는 몸을 휙 돌려 거인의 옆구리를 향해 칼을 내질렀다. 하지만 상대는 이미 네담이 당한 바 있던 같은 수법에 다시 말려들지는 않았다. 녀석은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빠른 몸놀림으로 몸을 옆으로 꺾었다.

"이힉,"

순간적으로 당황한 포프가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거인의 큰 칼을 피해 급히 몸을 낮추었다. 순간 무언가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가 한 번 울렸다. 태연하던 페로 자이센 총리의 얼굴에도 순간 약간의 긴장감이 떠올랐다.

맥없이 자리에 주저앉은 포프의 입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목이 반쯤 베어진 그는 자신을 벤 적의 히죽거리는 얼굴을 올려보며 조금씩 옆으로 무너져버리고 있었다.

"이씨,"

잘 싸우던 가디언이 쓰러지자 총리가 입가를 씰룩거렸다. 총리의 일그러든 표정을 확인한 테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 재산이 가히 황실에 맞먹는다는 자이센 가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생각한 테오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며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페로 자이센 총리를 손가락으로 똑바로 가리켰다.

"참 실망이군요, 최고의 가디언들을 거느렸다는 천하의 페로 경 수준이 겨우 그 정도 였나요?? 앙? 푸하하, 이 녀석이 누군지 알려줄까요? 백만이나 주고 암시장에서 사들인 1등급 입죠! 자! 이제 어떡하시렵니까? 아하, 칼 차고 계시군요? 직접 싸우실 건가요?"

차 뒤에서 처음부터 지켜만 보고있던 검은 망토가 천천히 앞으로 나선 건 그때였다. '감히' 주인인 페로와 나란히 앉아있던 그 자 역시 가디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테오는 순간 발이 땅바닥에 붙어버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확실했다.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페로가 일개 가디언과 차의 상석에 나란히 타고 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지금까지 차마 생각하고싶지도 않았던 바로 그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혹시....."

테오에게 경멸의 미소를 지어 보인 페로가 무표정하게 그 가디언의 등뒤로 몸을 감추었다. 주인의 공포감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거구의 가디언이 칼을 옷 속에 감춘 채 그에게 빠르게 접근해왔지만 그 검은 옷 차림의 가디언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상대가 바로 코앞까지 오자 그는 그제서야 옆으로 한 발짝을 옮겼다.

"아악!"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그 거구 가디언의 한쪽 팔이 잘려 날아갔다. 잘려나간 큰 손바닥 안에는 포프의 눈을 속이고 목을 기습했던 작은 단검이 숨겨져 있었다.

"그깟 잔 속임수로 누굴......"

검은 망토가 들릴 듯 말듯 중얼거렸다. 팔이 잘린 가디언이 기를 쓰며 다시 달려들었지만 그 정체 불명의 상대는 여전히 자리에서 한 발짝 이상은 움직이지 않은 채 무언가가 한 번 번쩍 하는, 짧은 공격을 했을 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테오의 마지막 가디언의 남아있던 한쪽 팔도 그대로 바닥에 툭 떨어져버렸다. 그 '검은 가디언'은 망토 자락 사이로 반짝거리는 칼끝이 조금 내보였을 뿐 거의 움직임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포프의 복수다."

검은 망토가 경멸 섞인 말과 함께 칼을 쥔 손을 이미 저항 불능이 된 상대를 향해 천천히 들어올리자 큰 칼과 칼집이 그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과 보석으로 칼집이 장식된, 칼날이 약간 뒤로 굽은 녹색빛의 거대한 카타나였다. 그리고 제국 내에 저런 카타나를 쓰는 가디언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순간 테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저건....."

그 큰 대도가 공중에 번쩍이는 거대한 반원을 그리며 상대의 몸을 위아래로, 자로 잰 듯 두 동강을 내 버렸다.

두 동강난 거대한 살덩이가 되어버린 상대를 잠시 무표정하게 내려보던 그 '검은 가디언'은 온몸에 붉은 피를 뒤집어쓴 채 테오를 문득 돌아보았다.

"맙소사!"

사색이 되어 자기 차에 뛰어오르는 테오의 모습에 페로가 그를 가리키며 째지는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잡아!"

막 달아나려던 테오의 차가 육중한 저항에 갑자기 덜컹 하고 흔들리며 요란스런 쇳소리 같은 소름을 내기 시작했다.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 막 출발하려는 차의 뒤 프레임을 한 손으로 붙든 그 가디언은 주먹으로 차 유리를 박살내고는 운전석의 테오를 끄집어내 바닥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쳐버렸다.

"으아악!"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던 테오가 버둥거리며 고개를 들고는 살려달라며 계속 울부짖었다. 그제서야 테오의 앞에 천천히 다가간 페로 자이센 총리는 더러워진 그의 얼굴에 침을 한 번 퉤 뱉었다.

"실력이 이 정도라고? 지금 네 뒤에 선 게 누군지는 알겠지?"

"설마.....카렐......"

"푸훗, 알긴 아는군......"

총리가 가디언 '카렐'에게 눈짓을 보내는 모습에 순간 모든 판단력을, 심지어 공포까지도 잊어버린 테오가 얼굴을 감싸쥐었다. 겁에 질린 테오가 채 자신의 눈을 가릴 여유도 없이, 동강나 떨어진 그의 목은 이미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쳇,"

페로가 다시 침을 뱉으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바닥엔 6구의 처참한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페로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지 입가를 조금 씰룩거리며 바닥에 나뒹군 테오의 머리를 한 번 힘껏 걷어찼다.

"감히 내 빚을 안 갚고......"

"......하지만 주인님......"

입고있던 검은 망토에 온통 피를 뒤집어쓴 채 묵묵히 주인의 옆에 서 있던 카렐이 입을 열었다. 깊은 울림이 있는, 사람 목소리라기보다는 동물의 울음소리 같은 기괴할 정도로 탁한 목소리였다.

페로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왜?"

"포프의 목숨이 아직......"

"그래서?"

페로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지만 카렐은 다시 용기를 내어 말했다.

"잘 치료해주면 목숨을 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필요 없어."

"하지만......"

"뭐야?"

페로가 성난 눈길로 카렐을 홱 돌아보았다. 카렐이 고개를 숙이며 몸을 움츠렸다.

"이번에 완전히 실망했다. 최악이야."

"......"

"천하의 페로 가디언이 저깟 지방 유지 놈의 가디언들 하나 한 놈이 다 처리하지 못하고.....제길할, 가디언들은 많아. 그 벌이다."

페로는 바닥에 떨어져있던 피묻은 칼을 집어들더니 그때까지 살아 움찔거리던 포프의 가슴에 그대로 내리꽂았다. 갑자기 튀어 오른 피에 카렐이 움찔 했다.

"그리고, 네가 하는 게임은 너무 일찍 끝나서 재미도 없어."

카렐은 그 자리에 멍 하니 굳어있었다. 페로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차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느새 어두워진 황량한 벌판에 선선한 모래 바람이 조금씩 불었다.

바닥에 쓰러져 가는 호흡을 몰아쉬던 포프는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 카렐에게 손을 뻗었다.

"누님......"

포프의 떨리는 손이 힘없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광경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지켜본 카렐은 그대로 그의 시체 앞에 털썩 꿇어앉았다.

"미안하다......"

그는 이미 피범벅이 된 자신의 손으로 핏발이 선 채 부릅뜨고 있던 포프의 눈을 조심스럽게 감겨주었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그의 얼굴을 가린 피묻은 후드가 뒤로 벗겨져 버렸다. 갈색의 윤기 흐르는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그의 깊은 회색빛 눈동자에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포프......"

갈색빛 긴 속눈썹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포프의 시체 위에 떨어졌다.

이유야 어쨌든 주인이 손수 죽인 가디언을 위해 슬퍼한다는 건 주인에 대한 이만저만한 불경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을 주인 페로는 카렐의 이런 건방진 모습을 아까부터 차에 앉아 무표정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가디언 차에 남아있던 두 명의 노예들이 달려나와 죽은 포프의 시체를 차에 실었다.

그리고 큰 한숨을 내쉬며 눈물을 애써 닦아낸 카렐은 다시 망토를 눌러쓰며 주인 페로의 차로 향했다.

"아무리 미인이어도 그 여잔 너무 소름끼쳐."

친구들의 농담에 페로가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거대한 욕탕 안엔 페로와 십여 명의 친구들, 알몸의 여자 노예들 수십 명이 농탕질을 벌이고 있었다.

"그래도......"

페로는 자신의 말에 뭐라 사족을 붙이려는 친구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대뜸 째려보았다. 욕탕 안의 다른 친구들과 족이 비교됨직한 다부지고 잘 다듬어진 완벽한 몸매와 두드러질 정도로 빼어난 외모를 갖춘 페로는 이 안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누구보다 눈길이 먼저 가는 사람이었다.

제일 위쪽의 고급스런 돌 침상 위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비스듬하게 누운 페로는 미녀 둘이 해주는 마사지를 받으며 한참 전부터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페로의 그런 심각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친구 혹은 손님들은 저희들끼리 희희낙락하며 농담 따먹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솔직히 이년들보다 생긴 건 훨씬 낫던데."

친구 한 명이 자기 팔을 주물러주던 여자의 가슴을 덥석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그럼 뭐해, 가죽이 아마 철갑일껄! 하하하!"

"벗겨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나? 하긴, 목소리도 좀 이상하긴 해, 무슨 맹수 울음소리 같지 않아? 혹시 정말로 짐승 아닌가? 혹시 안 보이는 곳엔 털이 숭숭 돋았던지 비늘이라도 나있는 것 아냐?"

"그런가? 우리 내기 한번 할까? 그 여자 벗은 몸 확인하는 놈한테 내 전 재산 절반 줄께."

"니 재산 다 준대도 싫어."

그때까지도 친구들의 저질스러운 농담을 듣고만 있던 페로는 돌 침상 위에 몸을 쭉 뻗으며 자기 옆을 지키던 가디언 카인에게 물었다.

"카렐은 지금 뭐하나?"

"숙소에서 쉬고 계십니다."

"들어올 때 아무 말 없었나?"

"조금 풀이 죽어 계신 듯 했습니다. 저녁 식사도 안하시고....."

"지깟 것이......"

페로가 얼굴을 찌푸리며 술잔을 집어들었다.

"이리로 오라고 해."

희뿌연 욕탕 안에 들어선 카렐의 존재는 눈에 확 띄는 검은 망토와 항상 그의 주변을 감도는 서늘한 살기, 그리고 엄청난 키로도 이곳의 모든 사람을 압도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도 열심히 농담을 떠들던 페로의 친구들은 정작 그 대상의 출현에 겁에 질린 듯 갑자기 조용해지고 있었다.

"잘 왔다."

페로가 여전히 삐딱하게 누운 채 술 한 모금을 들이키며 중얼거렸다.

"네 기분 전환이라도 시켜주려고 불렀어."

"......"

미녀 한 명이 갑자기 달려들어 그의 어깨에 걸쳐있던 그 시커먼 망토를 벗겨 내리자 카렐이 당혹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몸에 붙는 검은 가죽 수트를 입은 그의 잘록한 허리에는 어깨에서 내려 걸은 화려하게 장식된 거대한 대도 외에도 중간 크기의 소도와 짧은 단검까지 무려 3개의 칼이 채워져 있었다. 붉은빛이 약간 도는 갈색 머리카락이 그의 넓은 어깨를 스쳐 흘러내렸다.

카렐의 드러난 몸을 처음으로 눈앞에서 본 페로의 친구들이 일순간 환호성을 올렸다.

"우와우, 정말로 벗은 몸 보여주려는 거야?"

"입 닥쳐,"

페로가 그 친구를 홱 돌아보았다.

"난 카렐을 즐겁게 해주려는 것 뿐이야. 너희 놈들 눈이 아니고."

카렐이 고개를 떨구었다. 미녀가 계속 그의 어깨와 팔을 더듬었지만 카렐은 얼음같이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꿇어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년 들여보내라."

페로의 손짓과 함께 문 뒤에서 한 명의 여자가 더 나와 카렐의 옆에 끓어 앉으며 그의 허리를 갑자기 부드럽게 껴안아왔다.

그 여자를 문득 바라본 카렐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지고 말았다. 짙은 검은 색 머리칼에 하얗고 매끈한 피부, 크고 푸르게 반짝이는 유난히 맑고 선한 눈동자를 한, 아직 앳되어 보이는 그 미녀는 욕탕에 모인 여자들 중에서도 눈에 확 띌 정도로 두드러지고 있었다.

낮은 한숨을 내쉰 카렐은 자신을 애타게 바라보는 그 여자의 시선을 철저하게 무시하며 땅바닥만을 바라보았다.

"후와, 저런 여자가 있었어? 맙소사, 저런 여자를 겨우 가디언한테나 줄려고? 나한테 줘, 돈은 얼마든 낼께."

"닥치라고 그랬다."

계속 입을 놀리는 친구들을 또 한번 째려본 페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약간은 침통한 표정으로 있는 카렐과 그런 카렐을 자극적으로 어루만지고 있는 그 미녀를 번갈아 쳐다보며 이해할 수 없는 묘한 미소를 띠어 보이고는 손에 들고있던 술잔을 휘휘 돌리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건 미녀들뿐이니 네게 줄 것도 미녀뿐이군. 내 잘생긴 미소년 들여보내 주고도 싶지만 네 몸이 그 모양이니.....일부러 여색을 밝히는 여자들도 있으니 오늘은 저것들하고 한 번 어울려 놀고 기분 좀 풀어 봐. 명색이 내 수석 가디언인데 저 정도 녀석은 데리고 놀아야 제격 아니겠나? 그리고......오늘이 네 161번째 생일이었지?"

"하지만......전......"

"지금 말대꾸하려는 건가?"

페로의 언성이 높아지자 카렐이 앞에 있는 페로에게 들릴 듯 말듯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페로가 카렐에게서 시선을 돌려버리며 사뭇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알았나? 그 여자들과 어울려 놀라는 내 명령이다. 남쪽 사랑채 접객실을 비워 놓았으니까. 알았나? 내 명령이다."

"......알겠습니다."

힘없이 대답한 카렐은 그 두 여자와 함께 욕탕을 나섰다. 그를 내보낸 페로는 부하 한 명을 불러 귀에 무어라 속삭이기 시작했다.

황궁과는 약간 떨어진 3번 도시의 근교에 동부 양식으로 지어진 자이센 가의 종가는 그 주인의 이름을 따 세칭 '페로 관'이라 더 잘 알려져 있었고, 그 가문의 위세와 더불어 제국 내에서도 귀족 저택으로서 최고임을 아무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웬만한 귀족 가문이라면 치안이 불안한 도시 외곽을 피하는 것이 상례였지만 이 배짱 좋은 가문은 한때 도적의 소굴이기도 했던 이곳에 떡 하니 종가를 지어놓고 지금까지 끊임없이 확장까지 해 온 터였다.

하지만 그다지 명예롭지는 못했던 시조로부터 5대를 거쳐 내려오는 동안 이들은 감히 도적 따위는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할 힘과 아울러 핏줄을 타고 내려오는 가문 특유의 호전적인 기질을 키워왔고, 이젠 제국 전체를 뒤흔들 만큼의 영향력을 지닌 무서운 존재로 성장해 있었다.

4대 종장  페로 자이센이 가문을 물려받고 난 후로도 곱절 이상 그 규모를 다시 키워온 '페로 관'은 동서남북 각 방향으로 하나씩 있는 안채와 사랑채가 4개의 축을 이루고 있었고 그에 부속해서 오백 여명에 달하는 친위 가디언들을 수용하는 동, 서 방향의 행랑과 병영, 오백 여명의 노예들을 수용하는 남측 행랑, 그리고 하인들과 페로의 측근 요원들이 기거하는 북측 행랑이 그 모서리를 채우고 있었다.

물론 이 집에서도 최고의 핵심 지역은 주인인 페로 자이센의 침소이며 집무실이기도 한 북측 사랑채였고 항상 오십 명이 넘는 최고 수준의 가디언들이 교대로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저택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병영에 가까운 이 '페로 관'의 긴축은 한쪽 끝부터 반대편까지 걷는 데만도 10분이 넘게 걸린다는 사실은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이미 널리 알려진 터였다.

하지만 이 가문의 힘은 실상 그 요란스런 종가가 아닌, 그 약간 남쪽에 떨어져서 위치한 '자이센 가문 수련장'에서 나오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사막 경계의 덥고 건조한 곳에 위치한 이곳은 제국 최초의 사설 가디언 양성소였고 황실 수련장에 이어 제국 내에서 두 번째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7명에 달하는 특등급 가디언을 배출한 바 있는, 그 수준으로도 가히 최고임은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또한 이 가문이 제국 전체, 심지어 황실까지도 공포에 떨게 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이곳 주인인 페로 자이센 소유의 총 만 여명의 가디언 부대를 총지휘하는 '등급 없는 가디언' 카렐의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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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한마디>

* 무료 연재본의 전반부는 제가 20여년 전부터 쓴 글입니다. 지금 보면 틀린 표현이나 맞춤법이 틀린 곳도 있습니다. 제가 잘못 쓴 부분도 있고, 그간 맞춤법 규칙이 바뀐 부분도 있어서 그렇습니다. 출판본에서는 모두 손을 보았지만 연재분은 편수가 많아 하나하나 고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반부의 문법적 오류나 오기는 너그럽게 넘어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제 글은 기본적으로 성인을 대상으로 하여 처음 쓰기 시작했던 글입니다. 글 중간중간 상식이나 터부에 벗어나는 내용들이 등장하며 아직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청소년분들께는 혼란스러운 내용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가능한 청소년분들보다는 성인분들께서 제 글을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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