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150화
“엄마 한번 봐봐.”
“자, 어때요?”
세중대학교 한의대학 교수직을 받아들인 후, 외할아버지인 구 원장이 직접 양복을 맞춰 주겠다 하시며 매장을 함께 찾았다.
어머니의 말대로, 거울을 등지고 바라보는 재마였다.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함께 지내신 지도 5년 가까이 되었지만, 세 사람이 이렇게 함께 쇼핑을 나온 건 처음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의 아들과 함께 처음 나온 외출이 즐거우신지 내내 미소를 짓고 계셨다. 양복 매장에서 양복을 입고 나온 아들의 모습을 보자 더욱 흐뭇하신지 휴대전화 카메라까지 들이미셨다.
“어떻기는 너무 멋지다.”
“양복을 처음 사는 것도 아닌데, 뭐 그렇게 신나셨어요.”
매장 직원이 바라보고 있었지만, 쉴 새 없이 찰칵찰칵 소리를 내어 사진을 찍는 어머니의 모습에 민망한 웃음을 짓는 재마였다.
대학 입학할 때, 그리고 대학을 졸업할 때도 필요 없다고 해도 대학을 가면 입을 일이 생길 거다, 한방병원 면접을 볼 때는 새 양복을 입어야 한다며 모두 어머니와 함께 양복 매장을 찾아 양복을 사주셨으면서도 또 색다르신 모양이었다.
“양복이 여러 벌 있으면 뭐 하니, 교수님한테 어울리는 양복은 없는데.”
“어머, 교수님이요?”
매장 직원은 아직 한창 젊어 보이는 재마가 교수가 된다는 듯 말을 하는 어머니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네. 우리 아들이 한의대 교수 임용을 앞두고 있어서요.”
“어머. 아, 그러고 보니 이재마 원장님 맞으시죠?”
매장 직원은 긴가민가했었는데, 혹시나 아닐지 몰라 아는 체하지 못했다는 듯 그제야 반가워했다.
“맞아요. 우리 아들.”
재마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어머니는 나서서 직원이 알아보는 이재마 원장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좋으시겠어요. 대단한 아드님 두셔서. 원장님 여기 사인도 부탁드려요. 매장 잘 보이는 데에 걸어둘게요.”
양복을 맞추고 나서는 길까지, 유명한 한의사 원장님이 오셔서 감사하다는 듯 매장 직원은 친절하게 배웅을 했다.
“뭐가 그렇게 좋으냐?”
재마가 양복을 갈아입고 탈의실에서 나올 때도, 매장 직원이 손자인 재마를 알아볼 때도 뒷짐을 지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시던 구 원장은 딸에게 물었다.
“아들이 교수가 되는 것도 좋고,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도 좋죠. 아버지는 안 그러셨어요?”
어머니는 구 원장이 한 점잖은 표정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물었다.
“나야 뭐.”
“재마야, 할아버지가 이렇게 아무 말씀은 안 하셔도 너 교수 된다고 엄청 좋아하셨다. 할아버지도 못 하신 걸 손자가 해냈다고.”
어머니는 한쪽 팔로는 할아버지의 팔을, 다른 팔로는 재마의 팔에 두르며 활짝 웃으셨다.
처음 명의 한의원에 초대되어 황금빛 초대장을 들고 구 원장을 처음 만났을 때는 세상에 어머니와 재마가 단둘이라는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든든한 할아버지인 구 원장도 함께였다.
재마가 한의원을 물려받으며, 봉사활동을 시작할 때도 문화재 지정을 위해 고군분투할 때도 방송활동을 시작할 때도 자신 있게 시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재마의 곁에 있는 든든한 어머니와 할아버지의 존재 덕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응? 갑자기?”
어머니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아들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이렇게 매일 매일 한 발 내디딜 수 있도록 하는 힘은 모두 두 분에게서 나오니까요.”
“어머, 우리 아들 말하는 것 봐. 아버지. 저 아들 잘 키웠죠?”
어머니는 구 원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장하구나.”
구 원장도 홀어머니 밑에서 훌쩍 자라 이제는 자신의 뒤를 이어 그 이상의 것들을 이루고 있는 손자 재마가 장하다는 듯, 허허 웃으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 * *
“김영래 님, 잘 지내고 계시죠?”
“호호. 선생님 감사합니다.”
“아직 진료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뭐가 고마우세요?”
교수 임용을 한 이후, 스케줄을 비우기가 더욱 힘든 재마는 봉사활동을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였다.
나름 이제 경력이 두둑이 쌓인 동기들이 재마를 대신해 봉사활동을 책임지고 있어 마음 놓고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일에 집중을 한다 해도, 초심을 잊지 않기 위해 봉사활동을 한 달에 한 번은 꼭 시간을 내었다.
오래간만에 마주하는 영래를 보자, 반가운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을 들어오는 영래를 반겼다.
“제 이름을 불러주시는 사람은 선생님밖에 없으시니까요.”
“하하. 그래요?”
“어디를 가나 김포댁, 김포 할머니 이렇게 부르지, 누가 내 이름을 불러주겠어요. 우리 아버지가 딸이어도 좋은 이름 지어 주겠다고 고심해서 지어주신 이름인데 결혼을 하고 나이를 먹으니 불러주는 사람도 없더라고요.”
김영래 할머니는 씁쓸한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이 동시에 들면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와, 근데 김포에서 진천까지 오신 거네요.”
“네에. 벌써 65년은 되었어요.”
영래는 자연스럽게 재마에게 손목을 내밀며 이야기했다.
“고향이 멀어서 외로우셨겠어요.”
“예전에는 죽을 때까지 고향은 못 가보는 줄 알았어요. 40년은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나 한번 가보고 못 갔으니까요. 요즘은 교통이 잘 돼서 1년에 한 번은 꼭 가요.”
나이는 들어가지만, 고향 이야기만 나오면 시집오기 전 어린 소녀였을 때의 기억에 화사한 미소를 짓는 영래였다.
재마는 이제 어떤 환자를 만나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며, 환자의 눈동자를 읽었다.
환자의 일상과 일생을 공감하며 환자의 몸 상태를 읽을 수 있는 능력까지 다다랐다.
-환자의 동공을 인식합니다.
이름 : 김영래
나이 : 76
2형당뇨 수치 양호.
자궁 이상 산부인과 검진 필요.
처음 환자의 병을 읽는 능력을 가졌을 때보다 더욱 정확해진 그의 능력에 재마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검붉은 섬광이 영래의 자궁 쪽에 몰려 있는 모습이 산부인과 검진을 필요로 하는 형세였다.
“김영래 님, 당뇨 수치도 좋고 식단이랑 운동도 꾸준히 하시는 것 같네요.”
재마는 일단 지난번에 진료를 했을 때보다 좋아진 영래의 당뇨 수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원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약을 따로 지어 먹지 않아도 먹는 것 신경 쓰고, 동네 할매들이랑 매일 한 바퀴씩만 돌아도 수치가 나쁘지 않아요.”
당뇨를 앓고 난 이후부터 꾸준히 혈당 체크를 해야 한다는 아들의 성화에 아침저녁으로 혈당을 체크 하는 영래였다.
“다만, 폐경을 한 지 오래 되셨어도 산부인과 진료는 보시는 게 좋습니다. 아드님이 확인하시고 병원 모셔갈 수 있도록 소견서 써드릴게요.”
“아유. 병원 가야 할 정도예요? 원장님이 봐주실 수는 없어요?”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작은 시골 마을의 주치의를 자처하는 젊은 한의사들의 봉사에 전적으로 신뢰를 가지고 있는 어르신들이었다.
“한의학으로도 치료가 가능은 하겠지만, 정확한 검사는 큰 병원 가셔서 하시는 게 좋으니까요.”
재마는 항상 그렇듯 어르신들이 건강검진은 꼭 받으실 수 있도록 도왔다.
“원장님이 그러신다면 그래야죠.”
“서울 올라가셔서 오래간만에 손주들 얼굴도 보시고요.”
재마는 이제 어르신들의 사정까지 속속들이 알아 그들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무언가를 잘 알고 있었다.
“원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멀어도 안 갈 수가 없네요.”
영래는 고개를 끄덕이고 고개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한 후 진료실을 빠져나갔다.
“원장님, 오늘 진료 끝났습니다.”
작은 마을의 보건소 한 켠을 내어 준 의료진이 마지막 진료였음을 알렸다.
“수고하셨습니다.”
재마는 제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며 쉬는 날까지 보건소에 나와 진료를 도와준 의료진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아직 임상에는 나서지 않은 공중보건 한의사인 영진은 수고하셨다는 말에 민망한 지 머리를 긁적였다.
“권 선생님, 이번 달이 마지막 근무라고 하셨죠?”
3년간 마을의 어르신들의 건강을 지키던 영진의 군 생활도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네. 원장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공식적인 책임은 영진에게 있었지만, 봉사 때마다 내려와 마을 어르신들의 건강을 살펴주고 조언도 해줬던 재마와 다른 한의사들 덕분에 군 생활이 어렵지 않았던 영진이 감사의 인사를 했다.
“감사하긴요. 임상에 나가셔서도 지금처럼 좋은 한의사가 되시길 바랍니다.”
“저도 원장님처럼 좋은 한의사가 될 수 있을까요?”
영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어느새인가 자신의 롤모델이 된 재마에게 부끄럽게 물었다.
“그동안 저희 마을에 오실 때마다 옆에서 보좌도 해왔고, 원장님의 기사가 나올 때마다 찾아봤거든요. 제 한의사 생활에 롤모델이 되셨어요.”
한의대학에서 수업을 할 때도, 토크 콘서트를 할 때도 재마가 롤모델이라며 이야기하는 예비 한의사나 의사들이 꽤 되었다.
그럴 때마다 감개무량하기도 했지만, 항상 잊지 않는 것이 있었다.
“저보다 더 훌륭한 한의사가 될 수 있으실 거예요.”
언제든 재마를 뛰어넘는, 더 좋은 실력 있는 한의사가 나타날 수도 있었다.
때로는 재마와 다른 길을 걷는 한의사나 의사와 맞부딪힐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과 다르다는 생각에 그를 등질 생각은 전혀 없는 재마였다.
오히려 그의 소신과 능력을 인정하며 자신을 발달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재마였다.
그것이 자신이 물려받은 능력을 한껏 더 발전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에이. 설마요.”
더 좋은 한의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재마의 말에 영진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꼭 더 좋은 한의사가 되어서 연락 주세요.”
재마는 손사래를 치는 영진에게 악수를 청했다.
만남이 있다면 이별이 있는 만큼, 헤어짐의 인연은 또 다른 만남을 이어 줄 것이었다.
이곳에서 만난 인연이었지만, 어디에서 만날 지 아무도 알 수 없었기에 진심을 다해 영진을 응원했다.
“꼭 이재마 원장님처럼 존경받는 한의사가 되겠습니다.”
재마의 진심을 읽은 영진이 두 손으로 재마의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5년간 명의 한의원을 맡고, 의료봉사를 다니며 많은 인연들을 만나고 헤어졌다.
그 헤어짐은 다음을 기약할 수도 있었지만, 기약할 수 없는 이별도 있었다.
하지만 재마는 모든 인연과의 헤어짐을 슬퍼하지 않기로 했다.
아쉬움과 슬픔으로 쌓인 이별을 다른 환자를 위해 발전할 수 있는 한의사의 밑거름으로 삼기로 한 그였다.
진료실에서, 또 밖에서 수많은 환자들을 만났다.
환자의 눈을 마주하는 것이 그의 건강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지만, 환자의 속마음 깊숙이까지 읽을 수 있는 한의사가 되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렸다.
그만큼 성장한 재마는 자신이 겪어 온 성장통만큼 더 많은 환자를 만나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환자를 만날 것이다.
-동공을 인식합니다.
환자를 읽는 한의사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