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자를 읽는 한의사-146화 (146/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146화

“원장님, 이게 보통 일이 아니네요.”

새 작품 기획안을 맡아서 진행해 보라는 이 작가의 지시에 처음에는 신이 났던 소정은 막내 작가 딱지를 떼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듯 테이블에 널브러졌다.

작가로서 한 단계 위를 올려다보는 것이 이렇게 어렵고 책임감 가져야 하는 일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함께 DR.트루를 해 왔던 인연으로 이재마가 직접 나서서 의료 봉사단을 꾸리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지만, 그 도움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재마가 봉사팀에 합류해 주면 고맙겠지만, 명의 한의원을 전국에 분점을 운영하고 있고 너튜브 촬영뿐 아니라 DR.트루 닥터 군단으로 활동하는 그에게 또 다른 새로운 프로그램을 맡아 달라고 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직접 만나 의료봉사 예능에 대한 의견과 자료를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일단 저희 봉사팀이 갔었던 요양원, 병원 위주로 추린 목록이고요.”

재마의 채널을 처음부터 함께했던 강산도 돕겠다며 나서서 현장에서 느꼈던 것을 정리한 자료를 소정에게 건넸다.

너튜브 채널과 이번에 소정이 맡은 의학 예능과의 차이는 분명할 테지만, 그래도 자료를 소중하게 건네받은 소정이었다.

소정은 빽빽하게 기록해 놓은 그동안의 ‘환자를 읽는 한의사’ 봉사팀의 자료를 보자 절로 감동이 느껴졌다.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할 만한 에피소드들까지, 일반인과 함께 하는 예능은 대본이 무색할 정도로 다양한 그림들이 나오겠지만 직접 현장으로 나가 예능을 찍는 것은 대부분이 처음이라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강산 쌤. 정말 감사해요.”

소정은 자신을 생각해서 자료를 넘겨준 강산에게 울먹이는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건 저희가 봉사팀 뽑을 때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과 심사자료인데요…….”

아무래도 너튜브 채널보다 TV 방송으로 송출되는 의학 예능인 만큼 패널 섭외가 신중해야 했다.

면접은 CP와 국장, 그리고 의학 예능 경험이 있는 재마도 합류해 보겠지만 소정에게 꼭 필요한 자료들이었다.

서류전형과 면접만으로는 지원자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몇 번의 면접을 봐왔고, 사람의 속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는 재마인 만큼 사람을 보는 눈은 다른 사람들보다 탁월했다.

-진짜 이재마 원장님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함께하지 못하는 건 서운하지만 어쩔 수 없지.

소정의 진실 된 속마음이 재마에게 읽혔지만, 그런 순수한 마음은 못 들은 체했다.

아마 그런 마음까지 읽는 것을 안다면 상대방이 불편해할 수 있다는 것은 능력을 깨우친 후 재마의 경험상 느낀 가장 큰 점이었다.

모든 능력은 재마에게 도움도 되었지만, 때로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더 큰 도움을 함께 예능을 찍으며 직접 주면 좋겠지만, 상황상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아쉽기도 한 재마였다.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소정을 도울 생각이었다.

“의료봉사가 다른 봉사활동과는 꽤 많이 까다로워요. 아무래도 지난번 특집 회를 찍을 때 느끼셨죠?”

200회 특집 회 때를 생각하면 아찔한 순간이 많았다.

분명 의미가 있고, 닥터 군단 뿐 아니라 제작진들도 배운 것이 많았던 특집 회였다.

가볍게 노화의 진행단계라 믿고 있었던 증상들이 생각보다 심각한 병의 징조인 경우도 있었고, 지속적인 치료를 요구하는 병이었지만 자식들에게 누를 끼치기 싫다며 치료의 시작을 거부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뿐 아니라 서울에서 내려온 의료봉사자들을 고운 눈빛으로만 받아들이지는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상황을 디디고 탄생한 특집 회 덕에 시청자 반응도 좋았고 후속 예능이 나오는 것이었지만 앞으로도 예상치 못한 상황들은 분명히 제작진들 눈앞에 펼쳐질 것이었다.

“그럼요. 잘 알죠. 저 괜히 나섰나 봐요. 제 역량이 부족할까 봐 너무 걱정돼요.”

선배작가들이 도와주겠지만, 형장에서 나서야 하는 것은 결국 소정일 터였다.

막내 작가 타이틀은 벗겠지만,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고 어르신들의 케어까지도 도와야 하는 것은 새로 들어올 막내와 의학 예능 경험이 있는 소정의 몫이기 때문이었다.

“아뇨. 잘하실 수 있어요. 정 걱정되시면 저희 이번 주에 멀지 않은 진천으로 봉사 가는데 같이 가시겠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봉사팀을 전담으로 맡고 있는 강산의 제안에 소정은 깜짝 놀라며 그래도 되냐며 반색을 했다.

“이 원장님, 소정 작가님 모셔가도 괜찮겠죠?”

강산은 재마를 바라보며 이번 봉사팀에 객원으로 합류해도 괜찮겠냐는 듯 물었다.

* * *

서울에서 2년째 진료를 맡아 했던 강산은 이번 주 진천 봉사를 마지막으로 서울 본원에서의 진료를 마무리했다.

동기인 재마나 정우보다 1년이나 늦게 면허를 딴 그였기에, 아버지가 운영하던 한의원을 당장 맡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재마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아버지의 치료도 놓치고 가업으로 물려받아야 하는 상황의 한의원도 놓칠 뻔했다.

면허 시험을 앞두고 방황을 할 때는 몰랐지만, 막상 한의사 면허를 따고 보니 자신에게 이만큼 잘 맞는 직업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강산이었다.

2년 동안 자신의 환자들을 만났던 진료실의 짐을 정리하며, 환자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아쉬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개중에는 노인학교에서 한글을 뒤늦게 배우셨다며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신 어르신 환자들의 서툰 한글 솜씨로 적혀진 편지들도 있었는데 그런 것은 한의사 생활을 끝마칠 때까지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똑똑.

진료실을 정리 중인 강산의 진료실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네.”

강산은 정리를 멈추고, 대답을 했다.

“정리는 잘 되어가?”

한의대학 시절부터 동고동락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붙어 있었던 재마였다.

물론 재마가 운영하는 명의 한의원이라는 타이틀은 강산도 앞으로 쭉 함께하겠지만 두 친구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은 확실했다.

매일 얼굴을 보던 것을 빨라야 2주에 한 번 얼굴을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냥 그렇지 뭐. 2년 동안 짐이 엄청 늘었다.”

처음에는 몸만 들어오다시피 했던 강산이었지만, 소중한 추억이 담긴 짐들을 정리하니 큰 이사 박스로 두 개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영영 내려가는 것처럼 싹 들고 가게?”

서운한 마음은 강산뿐 아니라 재마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내려가는 김에 다 가져가야지.”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김천 시골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은 만들지 않겠다던 강산이었지만 이제는 제 발로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가는 그였다.

“괜찮지?”

강산의 방황을 모조리 함께 느꼈던 재마는 조심스럽게 느꼈다.

강산이 자처하기도 했지만 이제 서울에서 2년간 진료를 했으면 내려갈 때가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한 것도 재마였다.

또 이제 간경화 집중치료를 어느 정도 마친 강산의 아버지가 서울 병원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셨으니, 아들의 도움이 필요하실 터였다.

적당한 때를 지켜보던 재마의 제안에 강산은 고마운 마음으로 발령을 받아들였다.

“괜찮지 그럼. 그리고 혼자 내려가는 건 아니잖아. 정 실장님도 함께 가시고. 든든하지.”

서울 해인동의 명의 한의원에서만 25년을 근무했던 정 실장이 이번 강산의 발령과 동시에 김천으로 함께 내려가게 되었다.

정년을 앞두고 있던 그녀는 김천에서 멀지 않는 소도시가 고향이라 했다.

정년을 앞둔 만큼 귀향을 생각하고 있는 그녀는 강산이 발령받는다는 소식에 자처해서 귀향의 계획을 앞당겼다.

“해인동에서 오래 근무하시던 분을 내가 뺏어가는 건 아닌가 미안할 정도인데? 마음 바뀌기 전에 모셔가야지.”

강산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고향이었지만 분명 이곳과는 다른 분위기와 다른 상황들의 환자들을 마주할 것이 분명했기에 베테랑인 정 실장의 도움이 간절했다.

“그래도 네가 다시 고향으로 내려간다는 게 대단하다.”

“대단하기는. 고향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도와준 게 다 네 덕인데.”

“내 덕?”

강산이 재마 덕분이라며 어깨를 두드리자, 재마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게 단 한 번도 방황은 그만하고 면허 준비를 다시 해보는 것은 어떻겠냐 이야기한 적이 없었던 그였다.

대신 명의 한의원을 물려받으며 강산의 도움을 받아 미션에 임했을 뿐이었다.

한의원의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려고 시작한 너튜브 채널.

그리고 혼자 가기에는 멀게만 느껴졌던 꿈속 요양원.

오히려 도움을 받았다면 재마가 큰 도움을 받았다.

강산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이뤄왔던 미션들을 성공할 수 있었을지, 명의 한의원의 문화재 지정이 가능했을지 미지수였다.

더구나 한의원을 확장한다고 하면 누구든 대도시나 중소도시의 대형병원을 꿈꾸지만, 2호점을 김천에 있는 강 원장의 한의원으로 선점하게 된 것도 강산의 역할이 컸다.

다른 한의원과 차별화된 시스템으로 분원을 내는 것은 분명 명의 한의원을 알리는 새로운 방식이 되어가고 있었다.

“네 덕이 아니었다면 어렵게만 느껴졌던 환자들과의 만남도 한없이 어려웠을 거고, 관계도 전혀 좁아지지 않았을 거야.”

강산은 한의대학을 졸업했지만, 어렵게만 느껴졌던 환자와의 대면을 한의사가 아닌 봉사 너튜브를 운영하는 채널 운영자로 한 덕에 조금은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었다.

더구나 잊히지 않는 꿈속 요양원의 김 여사의 도움도 컸다.

이제는 누구보다도 명의 한의원에서, 또 의료봉사팀에서 가장 많이 환자들과 소통하고 있는 강산이었다.

환자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건강을 잃고 아들의 도움이 간절했던 강 원장과의 관계도 재마 덕분에 회복이 되었다.

아들과의 관계회복은 아버지 건강 회복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환자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알게 해준 건 내 한의사 생활에 가장 큰 재산이 될 것 같다.”

단 한 번도 재마에게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던 강산이었지만, 귀향을 앞두고는 솔직하게 재마에게 털어놓았다.

조금은 낯부끄러운 말이 될 수도 있었지만, 진심을 전하는 마음은 재마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재마는 자신이 힘들여 도운 것은 없었지만, 자신의 미션을 통해 강산도 한의사로서 한 발 더 앞서 갈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깨우친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아마 한의대학에서 너를 만난 건 내가 한의사로서 부족한 소명의식을 너로 인해 배우라는 뜻이었나 봐.”

“야, 인마. 그렇게까지 말하는 건 우리 사이에 너무 오글거리는 거 아니냐?”

재마는 표현하지 않았던 강산이, 그답지 않게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에 어색한 지 그의 옆구리를 쿡 하고 찔렀다.

“야, 너무 갔냐? 내가?”

조금만 더 말했다면 눈물까지 한 방울 흘렸을지 모르는 강산은 평소처럼 돌아왔다.

“그렇지. 우리한텐 이게 어울리지.”

서로 목덜미를 헤드록 걸며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강산의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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