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145화
Dr.트루 200회 특집 이후, 지금까지 Dr.트루 제작사에는 겪어보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네. 네. 잘 알겠습니다. 아직까지는 저희가 후원을 받고 있지는 않아서요. 모두 바쁜 선생님들이시고 개인적으로 의료봉사를 가시는 거라…….”
하루에도 수십 통씩 전화가 사무실로 걸려왔는데.
전화를 끊는 막내작가의 목소리에 CP가 물었다.
“무슨 전화?”
묻기는 했지만, 묻지 않아도 어떤 전화인지 예상은 되는 얼굴이었다.
방송이 나간 이후, 많은 사람들이 닥터 군단이 주기적으로 의료봉사를 간다면 조금이나마 뜻을 함께하고 싶으니 후원 계좌를 알고 싶다는 뜻을 보내왔다.
“후원 계좌 물어보는 전화요. 이러다가 우리 진짜 후원 계좌 열고 주기적으로 의료봉사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막내작가는 메인작가인 이 작가를 바라보며 물었다.
요즘 계속 전화가 걸려오는 통에 이 작가도 고민이 많았다.
매번 거절 의사를 예의 있게 표현했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 Dr.트루 출연진분들은 워낙 바쁘신 분들인데 주기적으로 봉사가 가능하겠어? 이 원장님이야 워낙 그 쪽으로 뜻이 깊으신 분이니까 그렇지.”
이 작가는 노트북 모니터를 켠 채, 볼펜을 책상 위에서 굴리며며 고민에 빠진 얼굴이었다.
“CP님, 개편 때 새 프로그램 하나 하셔야 하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도 Dr.트루가 200회를 넘기면서 장수 프로그램 반열에 오르게 되었고, 방송국에서는 성공적으로 Dr.트루를 이끌었던 CP와 그 제작진들에게 새 프로그램을 기대하고 있었다.
자리를 단단하게 굳힌 프로그램이니 새 팀을 어느 정도 꾸려 나와도 충분히 양쪽 프로그램 모두 성공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기는 한데…….”
Dr.트루를 성공으로 이끌었으니, 이왕이면 의학 예능을 또다시 한번 제작하기를 바라는 방송국의 바람을 CP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 번 연속 예능을 성공적으로 이끌기는 쉽지 않았다.
더구나 다시 한번 의학 예능을 제작한다면 비슷한 내용을 찍어내듯 제작했다는 평을 받을 수 있었다.
이번 프로그램을 성공으로 이끌면 차기 예능국장까지 노릴 수 있다는 국장의 말에 CP는 다음 프로그램에 대한 부담감이 없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된 거, 의료봉사 가는 프로그램은 어때요?”
“의료봉사?”
막내작가는 고민에 빠진 이 작가와 CP를 바라보며 자신의 의견이 어떻냐는 듯 물었다.
“예전에 그런 예능 있었잖아요. 시골 마을 돌아다니면서 아이돌들이 생활도 하고, 농촌 봉사도 다니고요.”
막내작가는 예전에 한창 시청률을 견인했던 예능의 이야기를 꺼냈다.
“저희는 의학 예능을 키웠던 것처럼, 시골 마을을 찾아가서 의료봉사도 하고 의료봉사 뒷이야기들을 하면서 회포도 푸는 친근한 예능…… 음…… 이건 아닌가.”
CP와 이 작가의 표정이 막내 작가 소정의 이야기에도 미동도 않자, 소정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음…….”
한참을 입을 열고 있지 않았던 CP가 입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소정 작가, 조금 전에 했던 구상 좀 더 구체적으로 준비할 수 있겠어요?”
“네?”
반응이 없던 CP였지만, 지면으로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면 자세한 이야기를 해보자는 뜻이었다.
지금까지 1년간 막내 작가 일을 했던 소정은 자신의 의견에 CP가 구체적인 기획안을 만들어보라고 직접 맡길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작가님…….”
소정은 얼떨떨한 얼굴로 이 작가를 바라봤다.
“그래, 좋은 것 같으니까 이번에 소정이가 맡아서 기획안 작성해 봐. 해보고 부족한 부분은 내가 도와줄 테니까. 일단 자신감을 가지고 만들어봐.”
“정말요. 작가님?”
“메인작가까지는 멀었어도, 구성까지는 이제 어느 정도 할 수 있잖아. 아, 그리고 이재마 원장한테 연락해 둘 테니까 자문 좀 구하고.”
“네!”
소정은 어쩌면 막내 타이틀을 벗을 수도 있다는 것에 신이 나서 잰걸음으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 * *
“강이슬 님?”
이슬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고개를 끄덕였다.
이슬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엄마는 이슬의 이름에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진료실로 들어갔다.
주변에서 해인동에 있는 명의 한의원을 한번 찾아가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할 때 처음에는 그냥 넘겼지만, 계속해서 나타나는 증상에 더 이상 가만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슬과 엄마는 서로의 손을 붙잡고, 열려 있는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너튜브로 찾아봤던 원장 이재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모녀를 반겼다.
“이슬 님?”
이슬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재마 원장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재마는 다른 것을 더 묻지 않고, 이슬의 왼손을 진맥을 시작하며 이슬의 동공을 살폈다.
-동공을 인식합니다.
이름 : 강이슬
나이 : 29세
지금까지 진료실로 들어와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이슬이었지만 동공을 읽는 것만으로 그녀의 상태를 읽을 수 있었다.
이슬의 옆에서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어머니의 얼굴도 재마의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재마는 두 모녀가 자신의 입 모양을 읽을 수 있게 또박또박 이야기를 했다.
“오늘 저희 한의원에 찾아오신 이유가 알 수 없는 소화불량이 지속되서 찾아오신 거죠?”
이슬과 엄마는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지만 고개를 동시에 끄덕였다.
두 사람이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아도, 그녀의 가장 고민인 부분을 재마가 캐치했다는 것에 안도의 모습을 보였다.
“음, 제가 보기에는 이슬 님이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은 데…….”
재마는 자신의 눈에 비친 보랏빛 섬광이 그녀의 가슴 쪽에 뭉쳐 있는 것이 보였다.
소화불량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이슬의 문제는 마음의 병이 자리를 잡은 것 같이 보였다.
더구나 빈맥으로 보이는 걸로 진맥이 되었고, 이 부분도 항상 무엇에 쫓긴다거나 스트레스 수치가 높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직장을 다니고 계신가요?”
이슬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눌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지만, 자신의 이야기가 재마에게 전해질 것 같지 않은지 답답한 얼굴이었다.
재마는 펜과 종이를 이슬의 쪽으로 옮겼다.
종종 재마를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필요할 때가 있어 구비해 놓은 것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성하지 않은 몸으로 직장을 다니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도 3년간 버티고 다녔는데 경력이 쌓이고 밑에 후배들도 생기고 하니 더 어려워졌어요.
이슬은 자신이 청각 장애를 가진 상태로 일반인들과 함께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퍽 어려운지 처음 만나는 한의사였지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제 직업은 개발자예요. 솔직히 제 장애를 가지고는 쉽지 않은 일이 많죠. 많은 사람들과 소통을 해야 하는 직업이니까요. 많은 분들이 배려를 해주셔서 일을 해오고 있었지만, 그 배려를 받는 만큼 제 능률이 오르지 않는 것에 스트레스가 많은 것 같아요.
이슬은 자신이 소화불량으로 한의원을 찾아와 이런 이야기까지 해도 될 지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고개를 끄덕이는 재마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이야기가 계속해 늘어갔다.
이슬의 어머니는 자신에게 물려받은 장애로 고생을 하는 딸을 지켜보는 것이 안타까운지 눈물을 찍어내셨다.
소화가 잘 안 되어 회사만 다녀오면 밥도 잘 먹지 못하고, 그나마 먹은 것도 게워내기 일쑤인 딸의 모습을 보며 속앓이만 해왔던 어머니는 딸이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더욱 울컥했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제가 진맥을 해보니 큰 병은 아니에요.”
한의원을 함께 찾아올 때까지 어머니가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을지 알겠다는 듯, 재마는 어머니를 안심시키듯 이야기를 했다.
재마의 이야기를 알아들은 이슬의 엄마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감사하다는 뜻을 전했다.
“쉽지 않으시겠지만, 일단 소화불량과 불안증에 필요한 치료는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의학적으로 치료가 부족한 부분은 분명히 있을 겁니다. 정신과 상담이 필요하실 수도 있어요.”
어쩌면 오랜 시간 참고, 견뎌내 온 긴 시간들이 이슬에게 마음의 병을 만들어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재마는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하게 자신이 치료를 해줄 수 있는 부분과 해줄 수 없는 부분을 구분지어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필요했다.
재마의 설명에 이슬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침 치료와 뜸 치료로 약해진 소화기관을 보강하는 치료를 할겁니다. 이미 마음이 오랫동안 지쳐 있어 몸도 많이 지쳐 있는 것으로 보이거든요.”
재마는 이슬의 처방 또한 다른 환자들 그 이상으로 상세하게 알려줬다.
“그리고 뜸과 침은 최소의 장비로 피부에 통로를 만드는 작업입니다. 순환을 촉진하고 신체에 스트레스로 쌓인 과도한 체액을 배출하는 기능을 합니다. 신체의 자연치유를 돕죠.”
재마는 치료에 쓸 뜸쑥과 침을 이슬에게 보여줬다.
이슬은 한의원은 처음이었지만, 정성껏 자신의 상태를 설명해 주는 재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슬님이 해주실 것은 저를 믿어주시고, 제 치료에 잘 따라오시는 것. 그리고 명상입니다.”
명상이라는 이야기에 이슬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명상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자신도 책을 통해서나 매체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귀가 불편한 자신에게는 남 이야기처럼 느껴졌던 행위였다.
“물론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명상이 이슬 님에게는 처음에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는 명상을 해보세요.”
재마는 이슬의 앞으로 작은 대접만 한 무엇인가를 올려놨다.
“사실 저도 싱잉벨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이슬 님에게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재마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싱잉벨을 이슬의 쪽으로 밀었다.
“이 기구는 저음을 내는 기구인데 공명으로 명상에 도움을 주는 것이라 그 파장만큼은 이슬 님에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안해지죠.”
-이걸 제게 주시는 건가요?
“네. 선물로 드릴게요. 다음에 오실 때 이 싱잉벨이 얼마나 도움이 되셨는지, 제게 꼭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재마는 자신의 도움으로 이슬이 꼭 어려움을 극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이슬과 이슬의 엄마는 서로를 바라보다, 동시에 재마에게 감사하다는 듯 머리를 조아렸다.
“자 그럼 강이슬 환자, 처치실로 자리 옮기실까요?”
재마는 이슬의 동공을 읽고 보라색 섬광을 읽어냈을 때 자신에게 전해졌던 답답함이 시원하게 풀리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의 병이라는 것은 재마에게 남아 있는 속마음을 읽는 능력으로는 치유하기 쉽지 않은 부분인 것은 분명했다.
처치실을 갈 때까지, 두 손을 꼭 잡은 이슬과 그녀의 어머니를 재마는 한참을 바라봤다.
앞으로 이슬뿐 아니라, 속앓이를 하며 찾아오는 환자들의 마음을 읽는 연습을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