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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144화 (144/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144화

정우는 모니터에 환자의 상태를 적어 넣다가 고개를 돌려 환자를 바라봤다.

단골 환자라 건강 상태는 자신이 꽤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나지 않던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환자였다.

아무래도 지난주, 명절이라고 서울까지 아들과 손주를 보러 다녀오신다고 자랑을 하시더니 고령의 나이에 무리를 하신 모양이었다.

고령이라 항상 조심하셔야 한다고 말씀은 항상 드리고 있었지만, 먼 장거리를 이동해 자식을 만나러 가겠다는 즐거움까지 한의사인 정우가 막을 수는 없었다.

“어르신, 오늘 진료 받으셨으니까 당분간은 아침에 일어나실 때도 개운하실 거예요. 처치실에서 대기하시면 제가 금방 가겠습니다.”

정우는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단골 환자의 눈을 마주치고, 친절하게 설명을 했다.

장거리의 이동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자신을 믿고 찾아오는 환자들을 최선을 다해 진료를 하는 것이 그의 한의사로서의 역할이었다.

환자는 평소에도 정우의 진료를 신뢰하고 있어 고개를 끄덕이며 진료실을 나섰다.

차트를 정리하는 정우는 3년 전 김천의 작은 마을로 내려와 처음에는 적응도 하기 힘들고 어수선했지만, 이제는 일상이 되어 버렸다.

서울에서보다도 더 반복적인 치료와 일상이었지만, 지겹기보다는 오히려 책임감이 더 생기는 것 같았다.

더구나 동기인 강산의 고향이라 어느새 정우에게도 꽤 정이 든 마을이었다.

내년쯤, 서울에서 근무하고 있는 강산이 김천으로 내려오겠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렇게 된다면 정우는 서울로 근무지를 옮길 수도 있었다.

그전까지는 자신의 책임을 다할 생각이었다.

“선생님, 다음 환자 정지수 님이십니다.”

“정지수요?”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익숙한 이름을 들은 정우는 지수가 김천마을까지 내려왔을 리가 없었지만 이름만으로도 괜스레 반가웠다.

좋지 못한 이유로 정한 한방병원에 사표를 내고 한의사로서 나아갈 길을 방황하고 있을 때 이재마 원장이 손을 내밀어 용기를 내었고, 그다음으로 자신이 한의사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환자들에게 진심으로 대할 수 있게 가르침을 준 것이 서울에서 만났던 중2 학생인 지수였다.

중학교 2학년한테 한의사가 무슨 가르침을 받을까,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지만, 정우는 분명 지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김천 명의 한의원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젊은 남성의 목소리였다.

지수라는 이름도, 남성의 목소리도 김천 명의 한의원에서 낯설었지만 정우는 항상 환자를 맞이하는 그 마음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환자를 맞이했다.

“네. 어서 오…….”

“선생님! 아니, 여기서는 원장님이시죠?”

“네가 여기까지 웬일이야?”

김천에서 낯선 환자를 맞이 한 정우와는 달리, 지수는 자신에게 반가운 정우를 만나러 온 표정이 화색이 돌고 있었다.

“웬일은요. 쌤 보러 왔죠.”

“여기까지?”

정우는 진료실에 들어오자마자 제 덩치만한 큰 가방을 내려 놓았다.

자신이 못올 곳이라도 왔냐는 듯, 의아해 하는 정우를 바라보며 당당하게 자리에 앉았다.

김천에서 진료를 보며 서울을 종종 가기는 했지만, 지수를 만난 건 1년 만이었다.

수험생이 된 지수의 시간을 맞출 수도 없을뿐더러 서울까지 올라가서 보고 싶은 환자인 지수를 아무 때나 불러낼 수가 없었다.

“쌤 그간 연락도 안 주시고…….”

서운하다는 듯, 이제는 장성한 지수에게 중2 청소년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정우에게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특히 서운함을 티 내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 조카 같은 느낌이었다.

“이럴 게 아니지. 나 처치실에서 환자가 대기 중이거든.”

“네. 그럼 좀 기다릴게요.”

“지금이 다섯 시 반이니까 아마 다음 환자는 없을 거야. 처치만 하고 나올 테니 기다려.”

서울에서 김천까지 꽤 먼 거리를 찾아온 지수에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양해를 한 정우는 조금 전 처치실로 안내를 했던 환자의 침술을 위해 처치실로 자리를 옮겼다.

정우가 처치실로 들어가고 지수는 대기실로 나와서 김천의 한의원을 둘러보았다.

직원들은 멀리서부터 정우를 찾아온 환자가 의아했지만, 티는 내지 못하고 흘끔흘끔 볼뿐 이었다.

대기실에 앉아서 다리를 쭉 펴고 발목을 까딱거리며 정우의 진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 지수.

서울에서 김천까지 먼 거리였지만, 자신의 인생의 멘토나 다름없는 정우를 만나러 오는 길은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더구나 서울에서 느낄 수 없는 작고 소박해 보이는 한의원.

마치 시대극 드라마에서 보는 세트장에 들어온 기분까지 들었다.

“지수야!”

“쌤.”

“오래 기다렸지? 이제 퇴근만 하면 된다. 그런데 너 여기까지 정말 웬일이야. 이 근처에는 맛있는 거 사줄 데가 없는데 시내까지 나갈까?”

급한 마음에 진료복을 대기실에서 벗으며 정우는 먹고 싶은 게 있냐는 듯 지수에게 물었다.

“맛있는 거 많이 얻어 먹으러 먼 길 왔는 데 시내로 되시겠어요?”

이제는 키 184㎝인 정우보다도 키가 더 큰 지수였다.

큰 키만큼이나 한번 먹는 식사량이 대단했는데 익히 알고 있는 정우는 김천에서 어디를 데리고 가야 지수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 고민에 빠졌다.

아무래도 지수는 단단하게 벼르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쌤. 어서 가요.”

“그래.”

정우는 마감을 할 직원들에게 당부할 것을 간단하게 당부를 하고, 지수와 함께 나와 자신의 차에 올랐다.

“그런데 정말 여기까지 웬일이야?”

“수능도 끝났겠다. 여행 한번 할까 했거든요. 대학생이니까 전국 일주를 좀 해보고 싶기도 했고.”

그렇지 않아도 정우의 등에 멘 가방의 크기가 보통이 아니라 생각을 했는데, 아무래도 수능을 끝난 기념으로 전국 일주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야, 대학 입학 전, 바쁜 시간 쪼개서 쌤도 만나러 와주고 고마운데?”

그냥 지나치는 말이 아니라, 정우는 정말 먼 길을 온 지수에게 감동한 모습이었다.

“쌤, 쌤한테 전해드릴 것도 있고요.”

“나한테?”

찾아온 것도 고마운데 전해 줄 것이 있다고 가방을 뒤적거리는 지수의 모습에 정우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제 몸만큼이나 큰 가방을 뒤적거린 지수는 앞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저 대학 합격했어요.”

“오! 발표 났구나!”

중2 때부터 봐 온 지수이니,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친조카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그런 지수가 대학 합격을 했다고 합격통보서를 가져오다니, 정우는 반색을 하며 종이를 펼쳤다.

“쌤. 저도 한의사 되려고요.”

“뭐?”

정우는 종이의 내용이 궁금했다가, 지수의 말이 믿기지 않아 통보서와 지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쌤 덕분이예요. 쌤 아니었다면 학교 다니는 것도 흥미도 못 느끼고 공부도 안 했을 텐데…….”

지수는 중학교 2학년 때 공부와 수업보다도 우선이었던 농구에 빠져 있었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어떻게서든 한 번이라도 농구 경기를 더 뛰기 위해 다친 발목을 하고서 치료도 받지 않고 엄마에게도 숨기고 학교를 다녔던 모습이 떠올랐다.

“녀석. 이런 반가운 이야기를 지금까지 숨기고 있고.”

“합격하면 그때 알려드리려고요. 이것 보세요. 서프라이즈로 알려드리니까 반가움과 기쁨이 한 백 배 정도 되지 않아요?”

지금까지 정우에게 비밀로 했던 것이 다 큰 그림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수는 어깨를 으쓱였다.

“공부는 안 하고 농구만 하는 줄 알았더니,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었구나?”

“쌤이 저 중2 때 그러셨잖아요. 쌤은 공부도 잘하고 농구도 잘했다고. 몸 망치면 농구도, 공부도 다 놓친다고. 그러니까 언제든 진료 받으러 한의원에 와서 몸부터 챙기라고 신신당부하셨잖아요.”

자신이 했던 이야기를 잊지 않고 모두 기억을 하고 있는 지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정우의 마음을 울리는 기분이었다.

“쌤 덕에 건강도 챙기고 공부도 열심히 할 수 있었어요. 거기에다 작년에는 총명탕까지 보내주시고…….”

고3이라 바빠서 얼굴은 못보지만, 아쉬운 마음에 직접 총명탕을 다려서 해인동의 지수네로 보냈던 정우였다.

멀리서나마 응원을 하는 정우만의 방법이었다.

“쌤 근데 실력이 꽤 느셨던데요? 그거 먹으니까 좀 똑똑해진 것 같기도?”

지수는 정우를 놀리기라도 하듯 두 눈을 찡긋거렸다.

기대하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짜식. 이제 다 커서 쌤을 놀리기도 하고. 오늘 기분이다. 쌤이 쏠 거니까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정우는 김천 시내로 지수를 데려가 든든히 먹일 작정이었다.

“오늘 만요? 쌤 서울 오실 때마다 이제 다 뜯어 먹을 거예요.”

“어쭈.”

“이제 쌤 후배니까 그 정도는 해주실 거죠?”

지수는 이제 벼르고 정우에게 얻어 먹을 심산이었다.

정우는 자신을 벗겨 먹을 생각에 단꿈을 꾸고 있는 지수였지만, 그가 밉지 않은지 흐뭇하게 바라봤다.

아마 지수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명의 한의원에서도 한의사로서의 소명을 찾지 못하고 방황을 계속했을지도 몰랐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지수가 자신의 인생의 멘토라며 한의대학 입학 통보서를 들고 감사하다며 그를 찾아왔지만, 이런 좋은 소식이 아니더라도 정우는 지수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쌤, 그런데 이렇게 조용한 동네에서 근무하시는 건 어때요?”

“왜?”

지수가 해도 금방 져버려서 이제는 칠흑 같은 어둠이 되어 버린 마을을 빠져나가는 정우의 차창 밖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뇨. 이재마 원장님은 꼭 분점을 내셔도 지방으로만 내시더라고요. 그 이유가 아무리 소외된 어르신들을 위한 치료 서비스를 위한 거라고는 하지만 고생은 더 하잖아요.”

아직 한의대학에 입학도 하지 않은 지수였지만,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네가 직접 와보니 어떤데? 이런 데에서 근무할 수 있겠어?”

중학교 2학년 공부도 학교생활에도 흥미가 없어서 다루기 어려웠던 지수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이제는 장성한 한의대학 입학을 앞둔 후배였다.

“저야, 졸업하면 서울에서 근무하고 싶겠죠.”

당연하다고 말을 하는 지수의 얼굴에 순수함이 묻어났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 지도 모르겠다.

정한 한방병원에 입사를 할 때도, 이왕이면 큰 한방병원에 입사를 소원했던 정우였다.

부산으로 발령받아 내려갔을 때는 한 가지 일이라도 남들보다 더 해서 얼른 서울로 오는 것을 원했었다.

하지만 어느새 작게 시작한 명의 한의원에 자리를 잡았고,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근무를 하는 정우였다.

정우의 마음을 지수가 한의대학을 졸업한다고 이해할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수가 정우는 자신을 쫓아 한의사가 된 만큼 재마와 자신의 뜻을 지수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나랑 찐하게 마시면서 이야기해 보자. 왜 서울이 아닌 김천까지 내려오면서까지 이재마 원장이랑 함께 일하고 있는지.”

기대하라는 듯, 정우는 시내로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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