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142화
오래된 시골집에 홀로 사는 기봉의 집을 둘러 본 근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적어도 7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낡고 허름한 시골집이었다.
일 없다며 마을 회관까지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기봉의 뒷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상황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근수의 표정만큼이나 카메라를 들고 따라온 막내 PD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시골집에 들어가는 것이 맞을지, 도시에서만 자란 막내 PD 준영의 눈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CP가 따라가서 영상 좀 따 오라고 시켜서 카메라를 들고 왔지만, 영 찍을 만한 곳이 없었다.
흉가 체험이라고 해도 믿을 만할 정도로 어르신의 거처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상황이었다.
근수의 표정이 좋지 않자, 이장이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했다.
기봉에게는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였다.
“돌봐줄 자식이 없는 불쌍한 분이요. 내가 가끔 들여다보기는 허는디.”
이장이 가끔 와서 챙긴다며, 익숙한 듯 집안 곳곳을 살폈다.
여러 번 고친 듯한 오래된 문고리가 세월의 흔적을 나타내듯 남아 있었다.
찢어진 벽지들도 풀을 묻혀 보수를 한 사람의 손길이 닿은 티가 났다.
하지만 모두 허술해서 수리의 흔적이 모두 드러나 있었다.
“어르신, 여기 이제 전등은 잘 들어오지요?”
“그럼그럼. 그런데 여기까지 저 선상님은 뭐 허러 모시고 왔어. 드릴 것두 없는디.”
기봉은 작고 간신히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작은 냉장고 안에서 오렌지 주스를 따라 근수와 PD 앞에 내놓았다.
집은 낡고 오래됐지만, 자신을 찾아온 손님에게 주스 한 잔 내어줄 여력은 있는 기봉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근수는 신경 쓰실 필요 없다고 사양했지만, 이장도 자신의 몫과 나머지 두 잔을 근수 앞으로 뒀다.
막내 PD까지 챙기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찾아온 것에 대한 어르신 성의니까 한 잔씩들 해요.”
“네.”
근수는 눈치껏 잔을 들어 오렌지 주스를 넘겼지만, 예상했던 것만큼이나 상태가 좋지 않은 냉장고 속에 들어가 있었어서 영 시원하지 않은 상태였다.
눈치를 보던 PD도 제 몫의 오렌지 주스를 쭉 들이켰다.
“어르신. 이 의사 선생님이 어르신이 오셨다가 그냥 돌아가셔서 마음이 쓰여서 날 찾아왔어요.”
“뭐어?”
“그러니께. 왜 갔다가 그냥 오셔. 진료도 받고 약도 챙겨서 오시지. 선생님이 바쁘신데 여기까지 오셨잖아요. 시내 병원까지 가시기 편하지도 않은데.”
“약 받아 오믄 뭐 혀. 하루 이틀 약 먹고 끝날 것도 아니고, 계속 먹어야재. 그럼 결국에 시내까지 나가야 허는디.”
기봉은 필요 없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돌아앉았다.
시내를 나가려면 하루는 꼬박 다 써야 해서 기가 빨릴 정도였다.
“어르신. 그래도 진료 한번 받으시고 검사도 하셔야 어디가 편찮으신지 알죠. 그냥 불편하게 생활하시겠어요?”
전립선 쪽 문제가 있다면 여간 생활이 불편한 것이 아닐 것이다.
물을 마셔도 언제 화장실을 갈지 불안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느낄 것이고, 화장실을 가도 볼일을 시원찮게 볼 것이며, 그마저도 통증이 있을 수 있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이런다면 삶의 질이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제가 이곳에 봉사 온 이유가 다 어르신 같은 분들 하나하나 찾아뵙고 불편한 곳 들어드리고 약도 지어드리고 그러려고 온 건데 이렇게 치료도 안 받고 가시면…….”
“아 글쎄…… 나는…….”
“어르신.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허는디, 치료 안 받는 이유가 정말 그게 다예요?”
근수가 나섰지만, 영 의사를 꺾지 않는 기봉의 모습에 이장이 답답한 듯 물었다.
고집을 꺾지 않는 모습에 막내 PD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카메라만 매만지며 근수를 바라봤다.
“원장님, 어쩌죠?”
현장 경험이 별로 없는 PD는 자신이 도움을 주고 싶어도, 이야기도 거들 수 없었다.
“조금 있어 봐요.”
근수는 이장과 자신이 설득할 테니, PD는 아직 걱정하지 말라는 듯 이야기를 했다.
“그래도 내가 명색의 마을 이장인디, 어르신 어디 아픈 줄도 다 아는디, 모른 채 넘어가면 자격이 있는 거요. 없는 거요.”
이장은 자신과 근수가 직접 이렇게 찾아왔는데도 치료를 받지 않는 기봉에게 되레 따져 묻듯 이야기를 했다.
“근수 자네도 잘 알잖는가.”
“알기는 뭘 알아요. 산 사람은 살아야재.”
이제는 이장마저 돌아앉았다.
근수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이장의 편에서 기봉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부추겼다.
“어르신 치료 받으시죠. 제가 다시 마을 회관에 가지 않아도 되도록 다 준비해 왔습니다.”
“서울에서 오신 바쁜 양반들이 뭐 그런 수고까지 했어요. 그냥 시골 노인네들 어디 한 곳 아프다고 병원 다 가는 것도 아닌데.”
“아프셔도 병원을 못 가니까 저희 같은 의사들이 찾아오는 거죠.”
PD는 입사 이후 지난 1년간 자신이 알아 온 근수의 모습과 다른 모습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카메라를 자연스럽게 켜서 어르신을 설득하는 근수의 모습을 담았다.
“어르신 주변 분들도 다 힘들게 생활하시는 것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럴 때 몸이 불편하신 곳 말씀하시고 저희 이용하시라고 이렇게 왔으니까 꼭 진료 받으세요. 그리고 여기 제 명함입니다. 조금 멀기는 한데 오실 수 있으면 저희 병원에 오셔서 검사도 받으세요. 오늘은 제가 검사할 수 있는 부분만 검사하고, 저희 병원으로 어르신 소변만 받아가서 검사하고 결과는 일주일 후에 알려드릴게요.”
“아휴. 서울까지 못 갑니다. 시내 한번 나가기도 힘든데요.”
기봉이 손사래를 치자, 근수는 안 되겠는지 휴대 전화를 꺼냈다.
“원장님, 잠깐 영상 멈출까요?”
어디다 전화를 거는지 알 수 없는 PD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금방 끝납니다. 아니면 나중에 편집해도 좋고.”
근수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 반갑게 인사를 했다.
“추 원장. 잘 지내지? 나 장근수야.”
-아니, 장 원장이 웬일로 전화를 다 했어?
오래간만에 하는 통화인지 근수의 전화를 반가워하는 상대방의 목소리가 휴대 전화를 새어 나왔다.
“다른 게 아니고 내가 환자를 한 분 추 원장 소개해 드릴까 하는데.”
-환자?
“응, 여기가 지금 물야면이거든.”
-물야면? 아니 청담에 있는 금손 의사가 어떻게 물야면까지 왔어?
“혹시 환자가 봉화에 있는 추 원장 병원으로 가신다면 잘 봐주실 수 있나? 내 얼굴을 봐서라도 신경을 특별히 써줘야 해.”
-오시기만 한다면 내가 신경만 쓰나? VIP로 모셔야지.
장 원장의 대학 동기인 추 원장은 오래간만에 하는 동기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 줄 것처럼 흔쾌히 허락을 했다.
“내가 일단 비스테로이드제를 처방할 건데, 혹시 차도가 없으시다 싶으면 알파차단시술을 부탁해.”
-걱정 말게. 그런데 물야면까지는 어떻게 온 거야? 무슨 일이라도 있어?
연고도 없는 물야면의 어르신을 봉화까지 소개를 할 테니 잘 봐달라는 근수의 부탁이 의아하다는 듯 추 원장이 물었다.
“아냐, 일은 무슨. 그냥 좋은 인연이 생겼는데 내가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그래.”
-사람 참.
추 원장은 근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겠다며 얼굴에 먹칠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어르신. 전화통화 다 들으셨죠?”
“아이고.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해주시는데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이쪽에 소변만 받아 오세요. 간이 키트로 검사 한 번 진행하고 다른 소변은 서울로 올라가서 검사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봉은 그제야 근수가 내민 검사 용기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장님.”
“네네. 원장님.”
기봉을 설득하는 근수를 지켜보고 있던 이장은 근수의 물음에 곧장 대답을 했다.
“혹시 제가 일주일 후에 연락을 드려서 병원 진료가 필요하다 싶으실 때는 봉화군에 있는 병원으로 가시면 됩니다. 제가 연락은 미리 해놨고 치료비도 제가 부담할 테니 이장님이 신경만 조금 써주십쇼.”
“네?”
이장은 치료비까지도 근수가 부담한다는 말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제가 자주 찾아뵈면 좋겠지만, 방송도 하랴 병원도 운영하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는 상황입니다. 대신 봉화군에 믿을 만한 선생님이시니까 찾아가시면 될 겁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장은 자신의 일도 아닌데, 근수가 적어준 메모지를 들고 감사하다고 고개를 조아렸다.
“이장님은 어디 불편하신 곳 없으시죠?”
근수는 혹여 이장도 자신의 도움이 필요할까 물었다.
* * *
“원장님, 어디 가셨었어요?”
요양원 진료를 모두 마친 닥터 군단과 마을 회관에서 진료를 봤던 닥터 군단들이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모여 있었다.
뒤늦게 합류를 한 근수와 막내 PD.
근수가 오자 미리 준비해 둔 수저와 음식을 근수 앞에 소아과 전문의 수연이 가져다 놓았다.
“볼일이 있어서.”
“여기서요?”
기봉의 집까지 직접 다녀온 것이 민망한지, 근수는 볼일이 있었다고 핑계를 댔고, 오히려 다른 출연진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저는 오늘부터 장 원장님 팬입니다.”
“엥? 준영 씨는 갑자기 또 왜?”
막내 PD가 오늘부터 근수의 팬을 할거라며 근수의 어깨를 주무르자 수연이 의아하게 물었다.
“원장님 조금 전에 동네 어르신 댁에 직접 가셨어요. 진료만 받고 약을 처방 받지 않고 가셨는데 직접 가서 치료하시라고 말씀도 드리고 검사체도 받아 오고 그것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치료 받으실 수 있도록 봉화군 병원도 연결해 주시고……. 정말 리스펙.”
준영이 양 엄지를 치켜들며 대단하다는 듯 근수를 칭찬했다.
근수의 결단에 다른 출연진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오, 원장님.”
“역시 장 원장님이십니다.”
“진짜 본받아야 해요. 존경합니다.”
가장 연장자인 출연진이자 방송경력, 임상 경력이 많은 근수가 앞장서서 마을 어르신의 건강을 좀 더 신경 썼다는 것에 다들 감격한 모양이었다.
“매번 좋은 일은 이재마 원장이 혼자 다 하는 걸로 소문이 나는데 이 정도는 해야 나도 미담이 생기지 않겠어?”
“원장님도 너튜브 채널 한번 갑시다.”
“너튜브. 너튜브!”
출연진들은 근수를 응원하기라도 하듯 환호했다.
“자자, 진정들 하시고 식사 맛있게 하자고. 오후에도 바쁘니까.”
“네!”
모두들 근수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점심 식사를 시작했다.
재마는 자신의 영향력으로 방송에서 만난 인연들이지만 이렇게 멀리 물야면까지 함께 내려와 새로운 인연이 되어 준 닥터 군단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때, 재마의 눈앞에 번쩍이는 미션 성공 멘트가 오래간만에 떠올랐다.
[영향력 끝을 없이 뻗쳐라.]
아무래도 오늘 한의학뿐 아니라 피부과, 비뇨기과를 시작으로 다양한 전공의들이 재마와 함께 환자들을 직접 만나 영향력을 끼쳐서 나타난 멘트가 아닌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