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129화
며칠째 회복되지 않은 한의사 협회의 상태를 논하고자 원로들이 모였다.
다들 어두운 얼굴로 모여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십여 년간 이렇게 심각한 상태였던 적이 없었던 상황이었다.
“장 협회장도 갑자기 사퇴하면서 협회장직이 공석이 되었어요. 이렇게 비상상황에 책임감 없이 사퇴 의사만 밝히고 쏙 사라지는 것이 말이 됩니까?”
누군가가 가장 먼저 입을 열어, 상황이 심각한데 해결을 볼 생각을 하지 않고 사퇴서 하나만 달랑 남겨 놓은 책임을 장정천에게 돌리자 다들 혀끝을 내찼다.
“우리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죠. 에잉.”
“처음부터 나는 장정천 그 사람 맘에 들지 않았어요. 영 신뢰가 안 가서…….”
박상도 하나 믿고 그가 추천하는 장정천을 협회장에 걸맞은 인물이라며 나섰던 김중도가 나서자, 다른 원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랬던 분이 장정천 협회장 투표할 때 발 벗고 나서서 밀어줬습니까?”
“내가 그랬던가, 흠.”
괜히 발뺌을 하기 위해 미리 나섰던 김중도는 민망한지, 그 뒤로는 입을 쏙 닫았다.
“지나간 일을 말하면 무엇합니까. 이 상황을 해결하고 앞으로 나가는 게 중요하지.”
매번 만날 때마다 한숨만 내쉬고 뾰족한 방안을 찾지 못하는 원로들은 답답한 마음이었다.
지금까지 박상도를 너무 믿고, 협회의 모든 일을 그가 지휘하는 대로 따랐던 것이 정한 한방병원이 몰락하자 협회 또한 몰락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맞아요. 이제는 우리 원로들이 흔들리지 않고, 믿음직한 사람을 정해서…….”
“최 원장, 명의 한의원 다녀온 건 어땠습니까? 나는 영…… 너튜브에서 인기몰이 하려고 다 짜고 치는 고스톱 같던데.”
강정원은 원로회를 대표해서 해인동에 있는 명의 한의원에 다녀온 최두식을 바라봤다.
처음 박상도도 의학 예능을 통해 인지도를 알리면서 한의학계를 장악했던 것처럼 얕은수를 써 이미지 포장에만 힘쓰는 사람은 아닐지 가장 걱정인 원로들이었다.
다른 원로들과 다르게 두식은 오늘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는지, 옅은 미소를 꾸준히 입에 달고 있었다.
“내 제대로 된 인물을 찾은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원로회에서 밀어주던 박상도를 꽤 탐탁지 않아 하는 편이었던 두식이 이번에는 제대로 된 인물을 찾았다며 미소를 짓는 모습에 원로들은 궁금할 따름이었다.
꽤나 까다로운 양반을 만족시킨 인물이 대체 어떨지 두식의 입에서 나올 평가를 기대했다.
“한의학의 정통은 정통대로, 새로운 세대로 발맞춰 나가는 것은 또 새롭게 나갈 수 있는 인물입디다.”
“아직 임상에 나온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한의사에게 정통이라는 것은 좀…… 이른 것 아닙니까.”
“나도 명의 한의원을 가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너튜브에서 구독자 수 늘리려고 자극적으로 환자를 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진심으로 환자를 대했어요.”
“흠…… 진심이라…….”
두식의 입에서 나오는 칭찬에 아직 이재마를 만나 본 적 없는 원로들은 딱히 동조하지는 않는 얼굴들이었다.
* * *
“나, 원장님 하나 믿고 여기까지 옵니다. 알지요?”
“그럼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들 녀석들이 예전에는 이왕이면 큰 병원 가라고 하는 것도 내가 편하다며 굳이 택시 타고 명의 한의원까지 왔었는데 이제는 또 한의원을 다니지 말고 정형외과나 다니랍디다. 우리 원장님이 얼마나 믿음직스러운 사람인 줄도 모르고.”
오십이 다 되어가는 아들이 갓 걸어 다닐 때부터 구 원장의 진료를 봤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하던 진순은 이제는 재마의 진료를 받지 않으면 하루가 뻐근하다며 올 때마다 그에게 입이 부르트도록 칭찬을 했다.
재마는 믿지만, 승승장구하던 정한 한방병원의 몰락은 며칠째 환자와 환자의 보호자들을 불안하게 했다.
반복되는 질문과 답변에 항상 밝은 모습으로 환자를 대하는 명의 한의원의 직원들도 슬슬 피로감을 보이며, 지치고 있었다.
마지막 환자인 진순을 배웅하고 난 재마는 자신의 탓이 아니었지만 자신을 믿고 따라오는 직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원장님.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정 실장은 자신이 힘든 것 이상의 고단함을 느낄 재마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웬만한 일에서는 재마를 다독여가며 흔들리지 않던 정 실장도 이번에는 꽤 힘든 모양이었다.
“이번 일이 좀 지나가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미정은 재마가 뾰족한 수를 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괴로운 근무환경에 지친 모양이었다.
“글쎄, 그래도 원장님이 곧 방송 시작하시면 지금만큼은 아니지 않을까?”
정 실장도 재마가 새로 시작하는 예능을 한 이후, 환자들의 관심이 예능으로 쏠리지 않을까 적지 않은 기대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예능이 잘 되기를 노력해봐야죠.”
공중파 고정 패널로 출연을 하는 것은 처음인 재마는 예능의 영향이 어떨지는 감이 오지 않았다.
특히나 혼자 또는 협업을 하는 한의사들과 이끌어가던 너튜브나 명의 한의원을 주제로 한 아침방송과는 다른 분위기인 방송이니 재마도 가늠할 수 없었다.
“아, 우리 원장님 또 대박 내셨으면 좋겠다. 어르신들이 질문 마구 쏟아 놓으셔도 되니 부정적인 질문에서만 해방됐으면 좋겠어요.”
미정은 피곤한 몸을 가지고 기지개를 쫙 켜며 자신의 소박한(?) 소망을 비쳤다.
“오늘도 수고했다.”
“쌤이 수고하셨죠. 항상 감사합니다.”
처치실에서 정우와 함께 나오는 지수의 무리가 시끌시끌했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을 네 명이나 끌고 왔던 지수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처음 지수를 만났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였다.
지수가 인사를 하자, 그 무리가 재마와 미정, 정 실장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사춘기라는 핑계로 무엇이든 꽁꽁 숨기고 싶어했던 지수였지만, 이제는 정우를 형처럼 따르며 제 이야기를 곧잘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성격도 밝아졌다.
“오늘도 친구들을 많이 데리고 왔네.”
재마는 고등학생이 있는 학부모들에게 가끔 서비스로 나가는 총명탕 한 포씩을 꺼내 지수의 친구들에게 건넸다.
“이 새끼…… 아니 이 자식. 완전 한의원 홍보대사예요. 운동하다가 조금 삐끗하면 오늘 방과 후에 운동 빼고 한의원 가자고 해요.”
지수의 친구 하나가 고자질이라도 하듯 재마에게 이야기를 했다.
“내가 또 뭐 얼마나 그랬다고 그러냐?”
지수는 민망한지,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뿐 아니에요. 졸고 나면 자기 총명탕 들이밀면서 피곤할 때는 눈을 번쩍 뜨이게 한다나…….”
지난달에는 엄마에게 말해서 총명탕을 지어간 지수가 친구들에게 총명탕을 한 포씩 건네고는 한다는 제보까지…….
친구들은 너도나도 지수의 행각을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지수 먹을 총명탕도 부족하니까 총명탕 궁금하면 언제든 한의원에 와. 맛보기로 한 포씩 줄 수 있으니까.”
정우는 녀석들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다.
“지금 준 약이 정우랑 똑같은 총명탕이야.”
재마도 턱짓을 하며 방금 한 포씩 준 것이 같은 총명탕임을 알려줬다.
“쌤. 이거 먹으면 엄마한테 말해서 사야 되는 거 아니에요?”
자신들에게 맛보기 한 포씩 주며 홍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냐는 듯, 한 아이가 의심스럽게 물었다.
“부모님한테 가서 괜히 조르지 않아도 되니까 안심하고 먹어.”
“정말요?”
아이들은 꼭 총명탕을 사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먹어보고 스스로 느끼기에 공부를 하는 데 눈이 번쩍 뜨인다거나, 아침에 일어날 때 몸이 개운한 게 느껴지면 그때 말씀드려도 안 늦어.”
정우는 아이들이 총명탕을 먹고 몇 가지 효과를 볼 만한 예를 들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재마가 거들었다.
“단, 부모님 부담 느끼지 않으실 정도로만.”
아이들은 정우와 재마의 이야기에 맘 놓고 총명탕 한 포를 쭉 들이켰다.
“야, 지수야. 여기 쌤들은 땅 파서 장사하시나 봐.”
총명탕을 한 포 쭉 들이킨 친구 하나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실실거렸다.
“인마. 땅 파서 장사를 하셔서 그러겠냐. 다 우리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지. 올 때마다 인사나 똑바로 해.”
지수는 진료가 끝난 한의원을 떠들썩하게 장악하고 있는 친구들과 이제 가보겠다며 고개를 꾸벅였다.
중학생이었지만, 이제 어느 정도 성장세인 장정 다섯이 인사를 꾸벅하고 한의원을 나가자 꽉 찼던 한의원이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녀석들. 정신이 쏙 빠지네.”
정우는 아이들이 나서자 그제야 기지개를 켰다.
꼬박 9시간을 근무한 정우의 몸도 고단한 모양이었다.
“정우 선생님, 잠깐 안에서 이야기 좀 할까요?”
진료를 마치고 정우가 나오기를 기다렸던 재마는 그제야 정우에게 자신의 방에서 이야기 좀 하자는 듯 눈짓을 했다.
정우는 대학 동기였지만, 원장인 재마의 제안에 켜던 기지개를 멈추고 진료실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원장님?”
“음, 공적인 부탁이기는 한데……. 그래도 정우 선생님의 의견이 중요하니까 너무 부담스러우면 미리 얘기해 줘.”
재마는 동기인 정우였지만, 조금은 어려운 부탁인지 재마답지 않게 뜸을 들였다.
“명의 한의원 2호점 이야기인데…….”
얼마 전에도 직원들의 의견을 물었던 2호점에 대한 윤곽이 나온 모양이었다.
“혹시 강산의 아버지 한의원을 인수 할까 하는데, 인수하게 된다면 정우 선생님이 내려가서 맡아줄 수 있겠어?”
수도권 지역도 아닌, 지방 한의원을 갑자기 인수하는 것도 의아한 상황에서 본점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 정우에게 갑작스럽게 내려가라는 말이 청천벽력 같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우는 자신이 내려가는 것에 대한 불만이 아닌, 걱정스러운 얼굴로 재마를 바라봤다.
“강산이네 무슨 일 있는 거야?”
자신이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보다 대학 동기인 강산의 집안에 변고가 있는 것은 아닌지 덜컥 걱정이 되는 정우였다.
“음, 당분간은 한의원 운영이 어려우실 것 같아서.”
재마는 잠시 뜸을 들이다, 2호점 확정을 한다면 믿고 내려보낼 수 있는 정우에게는 솔직히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듯 말했다.
“오래는 아닐 거야. 강산이 시험에 붙고 본점에서 몇 개월 근무하다가 고향으로 내려갈 거니까.”
이미 강산과는 이야기가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너에게 부탁하기는 좀 미안하기는 하지만, 산이도 믿을 만한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정우에게 왜 정우가 지방에 있는 한의원으로 내려가야 하는지 상황설명을 정확히 하는 재마였다.
“지금 이 시점에서 2호점을 지방 한의원으로 굳이 결정을 한 네 결정도 있는 데 내가 어떻게 안 내려가겠냐. 난 괜찮으니까 산이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정해줘.”
정우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