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128화
“진료 잘 받으셨어요?”
두식이 처치실에서 치료를 다 받고 밖으로 나왔을 때, 정 실장은 기다렸다는 듯 두식에게 눈인사를 하며 물었다.
두식은 침 치료를 하는 사이, 손바닥 안에 들어올 만한 작은 수첩에 무엇인가를 잔뜩 적어 놓았던 것을 정 실장이 보기 전에 옷 안쪽으로 깊숙이 넣었다.
오늘 진료를 받으며 꽤 많은 소득을 올린 것 같아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잘 받았습니다. 선생님들이 친절하시네. 요즘은 한의원에서도 서비스가 좋아야 해서 그런 건가.”
“호호. 그런가요? 환자분들의 평가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저희 선생님들이 모두 착하고 친절하세요. 환자분들도 가족같이 대하다 보니 친절하다고 느끼시는 것 같아요.”
정 실장은 두식의 물음에 직원들의 성격을 치하하며 미소 지었다.
두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한의원 분위기도 좋고. 직원들 관계도 좋은 것 같고.’
아직 딱 한 번 방문한 명의 한의원이었지만, 지금까지 느낀 바로는 환자가 불안함보다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원장님이 처방하신 대로 약 나왔습니다. 하루 두 번 드시면 되고요. 안쪽에 보시면 고지혈증에 좋은 식사법에 대해서도 자세히 적혀 있어요. 확인하시고 식이요법까지 하시면 더욱 좋아지실 거예요.”
“이 늙은이가 좋아지면 뭐 하누. 나이 먹으면 일찍 가야지.”
“어르신도 참. 그런 말씀하시면 안 되죠. 저희 원장님이 얼마나 정성껏 어르신 약을 준비하실 텐데요.”
정 실장은 하루에도 몇 번씩 듣는 연로한 환자들의 단골 멘트에 당황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래, 이런 반응이면 나이 먹는 것도 서러운 환자들한테 위안이 되지.’
두식은 또 한 번 만족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건강검진도 꼭 받으세요. 한의원에서 한약 드시는 것도 좋지만 정확한 수치를 확인하시고 관리하시는 게 더 도움이 될 거예요.”
“귀찮은 데 다른 병원을 또 가라고?”
“한의원에서는 정확한 검사가 안 되니까요.”
“그래도 한의사 양반이 진료를 참 잘 보던데…….”
두식은 조금 귀찮다는 듯, 입술을 비죽였다.
이 질문 또한 정 실장의 반응을 보기 위한 질문이었다.
무조건 한의학에 의존을 하는 것보다 양한방 협진을 하는 것이 환자에게는 더욱 좋은 치료방법이었다.
한의학에 부족한 것은 양방 병원의 도움을 받으라고 안내를 하는 것에 만족스러운 두식이었다.
“원장님이 소견서 써드렸으니까 잘 챙기셨다가 꼭 검사 받아보세요.”
“알았어요. 선생님들이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면 내가 한번 병원을 가야겠구만.”
정 실장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두식을 따라 문 앞까지 배웅했다.
한의원 문을 열고, 처방된 약이 든 봉투를 두식에게 건넸다.
“조심히 가세요.”
“그래요. 우리 또 봅시다.”
아들 집에 온 김에 들렸다던 두식은 또 만날 일이 있을 거라는 듯, 정 실장에게 인사를 하고는 돌아갔다.
* * *
서울의 모처.
3일째 기자들을 피해 자신의 사무실도, 집도 가지 못한 박상도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역력해 있었다.
육체적 피로감뿐 아니라 정신적 피로감에 빼들빼들 말라가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후, 지금 며칠 째야. 도대체 기자들은 할 일이 그렇게 없대? 한의원 하나 잡아서 망하게 하는 게 일이라는 거야?”
박상도는 답답한 듯, 휴대전화를 세게 쥔 상태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한의사 협회에 전화를 걸고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한 곳에 연락을 취했다.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수를 써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협회에 몇 번이고 연락을 해봤지만, 매번 같은 답변만 받고 있었다.
협회장이었던 장정천은 박상도의 연락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다.
박상도의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유 비서는 할 말이 없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하루 종일 장정천에게 전화 연결을 해보았지만, 그마저도 실패를 해 박상도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협회에서는.”
“다른 말 없이 장정천 협회장이 사퇴 의사를 밝혔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허. 지금까지 내가 들인 돈이 얼마인데 장정천 하나 잘라내고 끝을 보겠다는 거야?”
박상도가 밀어주던 장정천이 사퇴했으니, 협회에서도 더 이상 손을 방법도, 생각도 없다는 입장을 둘러 이야기를 한 것이란 걸 깨달은 박상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집어 던졌다.
지금까지 자신과 정한 한방병원에 문제가 생기면 힘이 되어 달라는 뜻으로 여기저기 로비를 해놨지만, 받을 때만 반가워할 뿐 정작 도움이 되는 곳은 하나 없었다.
믿고 있던 장정천도 연락을 받지 않으니 더 이상 협회를 믿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유 비서는 말을 꺼내는 것이 어렵다는 듯, 잠시 뜸을 들였다.
“또 뭐.”
“원로회 측에서 명의 한의원을 눈여겨보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뭐?”
“아무래도…… 바닥에 떨어진 신뢰도를 어떻게 해서든 끌어올리기 위해 선택한…….”
유 비서의 보고를 듣고 있던 박상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유 비서!”
“네. 대표님.”
“지금 유 비서 입에서 바닥에 떨어진 신뢰도라는 말이 나와?”
가뜩이나 기사와 방송에서 신뢰도, 신뢰도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한껏 예민해진 박상도는 유 비서 입에서 정한 한방병원 사건으로 한의학의 신뢰도가 떨어졌다는 이야기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죄송합니다.”
유 비서는 있는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를 했지만, 박상도의 반응에 죄송하다는 말을 할 뿐이었다.
“후.”
다시 자리에 털썩 앉은 박상도는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감았다.
-15년 연속 브랜드 평가 1위, 정한 한방병원.
정한 한방병원 건물에 큼지막하게 써 붙였던 플래카드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브랜드 평가 1위라는 그 한마디가 처음에는 얼마나 가슴을 떨리게 했는지, 그 떨림이 다시 느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다 정한 한방병원이 이렇게 되었는지, 박상도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일을 이렇게 만들어지는 동안 자신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건지, 어디에서부터 잘못을 되돌려놔야 하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25년 가까이 자신이 한의사 생활을 하며, 정한 한방병원을 대한민국 최고의 한방병원을 키우기까지 가장 큰 역경에 맞닥뜨린 것 같았다.
* * *
“강산 님! 오래간만이네요!”
미정은 처치실 마감 청소를 끝냈을 때쯤, 오래간만에 강산이 명의 한의원에 온 걸 보고 손을 번쩍 들어 반가운 척을 했다.
보통 강산을 보면 친한 친구를 보듯 손을 번쩍 들고 인사를 하면, 강산도 손을 흔들며 뛰어오고는 했다.
“미정 님, 오래간만이에요.”
하지만 미정이 반갑게 손을 들고 흔들었지만, 강산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평소처럼 뛰어오는 것도 없었다.
축 처진 어깨로 그저 소극적인 손 흔듦만 있을 뿐이었다.
“왜 이렇게 힘이 없어요? 표정도 안 좋은 것 같고.”
미정은 오래간만에 만난 강산의 안색이 썩 좋지 않은 걸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재마보다도 키도 크고 어깨도 딱 벌어진 강산이 오늘따라 어깨도 움츠러든 모습이었다.
“그러게요. 강산 님, 무슨 일 있어요?”
정 실장도 그제야 하던 청소를 멈추고 강산에게 다가왔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요즘 공부한다고 힘드신 거 아니에요?”
미정이 강산을 걱정하는 말에 강산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미정과 정 실장에게 걱정을 안겨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산이 왔어?”
“어, 이 원장.”
강산이 온 인기척에 재마는 진료실에서 나와 산이를 불렀다.
그렇지 않아도 진료를 마치고 명의 한의원으로 오겠다는 연락을 받았던 상황이었다.
“저 그럼 들어가 볼게요.”
강산은 힘없는 목소리로 들어가겠다는 인사를 하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강산 님이 힘없으니까 너무 이상해요.”
항상 명의 한의원을 올 때마다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했던 산이 조용해지자 미정은 이상하다는 듯 이야기를 했다.
정 실장과 미정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뒤로하고 강산은 진료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 앉았다.
“후.”
강산의 한숨이 땅이 꺼질 정도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결과는 나왔어?”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강산이 오랜 친구인 재마도 어색했다.
아마 부모님의 건강검진 이후, 며칠째 걱정을 한 모양이었다.
“나 어떡하냐.”
강산은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친구, 재마를 올려다보았다.
재마는 강 원장의 상태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강산이 예상한 그 이상으로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왜.”
“재마야. 우리 아버지, 치료 가능할까? 간암 2기에서 3기로 넘어가는 단계래.”
강산은 대학병원에서 결과를 들은 대로 재마에게 전했다.
간 질환은 4기가 되도록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편이라 꾸준한 건강검진으로 추적하지 않는 이상,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질병이었다.
특히 간암의 생존율은 5년간 40%, 절반 이상이 사망으로 이어진다고 해서 환자들은 물론 의료진들도 공포의 질병으로 여기고 있는 병이었다.
간암이라는 소식을 듣자마자, 청천벽력이라도 들은 것처럼 무너졌던 어머니 정심의 울음소리와 오히려 담담했던 강 원장의 모습이 다시금 생각나는지 강산은 힘겹게 이야기를 했다.
오랜 친구가 힘겨워하는 모습에 재마도 힘들었다.
“병원에서는 앞으로 어떻게 하자는데.”
재마는 일단 검진을 한 병원에서 어떤 치료계획을 세웠는지 물었다.
자신의 가까이에 있는 외할아버지인 구 원장도 간암으로 수술 후 회복 중에 있으니 결코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구 원장은 수술 6개월 이후, 경과가 좋아 회복이 잘 되고 있었다.
“간 절제술이랑 고주파 치료를 하자는데, 너도 우리 꼰대 성격 알잖아. 본인 상태는 본인이 더 잘 안다고 치료 계획을 들어도 꿈쩍도 하지 않아.”
“흠.”
“거기에다 치료해도 재발하고 전이가 많다고 비관적인 이야기만 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산은 결과를 듣고도 자신보다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이야기를 했던 강 원장이 답답하다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재마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줄 수밖에 없었다.
“너는 일단 다다음 달에 있을 시험 걱정이나 해.”
“지금 내가 그 시험 걱정하고 있을 때냐. 너도 알잖아. 간암 발병하면 생존율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거.”
강산은 아버지인 강 원장에게 시간이 없듯, 자신에게도 시간이 없다는 듯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어떡하려고. 간암이신 아버지 옆에서 병간호만 하고, 올 시험도 넘길 생각이야?”
재마는 답답하다는 듯, 강산을 나무랐다.
“그럼 우리 아버지는…… 평생 아버지와 한의원만 바라보고 살아온 우리 엄마는…….”
“아버지 서울로 올라와서 치료 받으실 수 있도록 설득까지만 해.”
“그 뒤로는? 아마 죽는 날까지도 한의원 열겠다고 고집일 거다.”
강산은 아버지인 강 원장이 제 목숨보다도 한의원에 대한 애정이 깊은 강 원장의 결정이 뻔하다는 듯, 이야기를 했다.
“그 뒤는 나도 방법을 찾아볼게.”
재마는 자신에게 생각이 있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