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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126화 (126/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126화

연아는 대표실로 올라가는 그 길이 길게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을 피할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몇 번의 사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대형사고가 일어난 적은 없었다.

모두 홍보팀과 비서팀에서 해결할 수 있을 만한 상황들이었지만, 박상도가 직접 연관되어 있다고 영상이 올라온 이상 박상도도 피해 갈 수 없는 상황일 것이었다.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문화재’ 개인 거래, 가능한 일인가?

-‘병합경훈 원주인’ 박 씨 측, 모든 물리적 보상 돌려주겠다. ‘병합경훈’의 소유주 자격 돌려달라.

연아는 자신에게 들어오는 기사들의 헤드라인만 봐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병합경훈’을 매입하기까지 자신의 아버지인 박상철은 물론 작은아버지인 박상도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고, 다른 곳에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얼마나 조심스럽게 움직인 줄 잘 알고 있었다.

그뿐 아니었다. 소유주 자격이 바뀌자마자 서울시 문화재 지정을 위해 박상도가 시장과 문화재 팀장과 비밀스러운 만남이 있었다는 것까지 모두 영상에 담겨 있었다.

어디에서부터 해명을 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느 정도 상황파악이 끝나면, 홍보팀을 통해 배포자료를 내보내야 할 텐데 도대체 무슨 말을 배포해야 할지 도무지 연아의 머리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연아가 대표실로 올라오자, 그녀가 예상했던 것처럼 비서실은 상황파악과 함께 대처를 해내기 위해 정신이 없어 보였다.

분주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며 전화를 받는 상황이 홍보팀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유비서. 대표님 안에 계시지? 지금 상황 어떻게 된 거야?”

“아, 박 팀장님. 대표님은 안에 계시고 저희도 지금 상황 파악 중입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셔서…”

정신이 없는 상황에 유 비서에게 말을 걸자, 그녀는 한쪽 손으로는 유선 전화를 한쪽 손으로는 메모지를 들고 연아에게 대답은 했지만, 혼은 이미 나가 있는 모습이었다.

박 대표가 안에 있다는 말에 연아는 문을 열고 대표실로 들어가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도착해 있는 연아의 아버지 박상철도 있었다.

“지난번에 왔던 그 젊은 여기자가 김성은이지? 도대체 그 기자는 우리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박 대표. 혹시 사적인 감정이 섞인 사이인 거는 아니지?”

지금까지 정한 한방병원을 이렇게 파고든 기자는 없었기에 박상철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이리저리 발을 분주하게 움직이며 이 상황을 추측하고 있었다.

사적인 감정이라는 것은 혹여 박상도와 김성은이 비밀스러운 남녀관계였다 관계가 틀어져 악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지금 문제가 된 영상을 배포했다는 이야기였다. 연아는 말도 안 되는 아버지의 추측에 헛웃음이 날 뿐이었다.

“아닙니다.”

“그럼 그 여자가 도대체 박 대표가 움직인 것까지 어떻게 알아. 아무도 모르게 조심스럽게 움직였는데. 원래 무슨 일이든 베갯머리 송사가…….”

“형님!!!!”

박상도는 복잡한 머리에 쪼아대듯 몰아붙이는 박상철의 목소리가 거슬리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까지 박상철에게 고함을 친 적은 없었던 상도였기에 박상철은 놀라 하려던 말이 입안으로 쏙 들어갔다.

박상도도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고 싶은지, 넥타이마저 풀어헤치고 창 앞에 서서 이마를 짚고 서 있었다.

“저 들어왔어요. 작은아버지.”

“어, 연아야. 너희 팀에서도 지금 정신없지?”

“네. 기자들도 그렇고, 여기저기에서 전화가 빗발쳐서 직원들도 전화 받느라 정신없고요. 아무래도 이번 일은 쉽게 넘어가기 힘들 것 같아. 공식적인 보도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박연아는 박상도의 눈치를 봐가며, 박상도가 대표로서 어떤 결단을 내려줘야 한다는 듯 이야기를 했다.

조금 전 박상도의 고함에 한껏 위축돼 보이는 박상철이었다.

하지만 공식적인 보도를 위해 박상도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올라왔다는 자신의 딸의 이야기를 듣자, 박상철은 다시 날카롭게 반응했다.

“공식적인 보도? 우리랑은 전혀 상의 없이 이야기들이 퍼져 나갔는데 무슨 공식적인 말을 하라는 거냐. 네 작은 아버지도 지금 머리가 복잡할 텐데.”

박상철도 대표이자 동생인 박상도의 눈치를 봐가며, 자신의 딸에게 적당히 하라는 듯 나무랐다.

“이번에도 적당히 둘러댈 것이 없는지 그것부터 생각해 보자. 상도가 집안 어른인 박 씨 쪽을 찾아간 것일 뿐 어떤 금전적인 보상은 없었다고 말을 한다거나…….”

“이미 원주인이 금전적인 보상은 모두 돌려주겠다는 기사를 냈어요.”

연아는 그사이 올라온 기사를 박상철에게 내보였다.

“그럼 박 대표도 모르는 사이에 비서가 자리를 만들었다고 발뺌을 하고, 비서를 정리를 하는 것이…….”

“지금처럼 잠자코 지나가거나, 직원 몇 명 해고하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아요. 저쪽에서는 이미 ‘병합경훈’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대표님이 직접 찾아가셨다는 것, 물질적인 보상을 했다는 것을 다 밝혀낸 상황이라서요.”

“그럼 어쩌자는 거야?”

“아무래도 인정할 부분은 인정하고…….”

“인정? 됐다. 네 작은 아버지인 박 대표는 그 집에 간 것도 딱 한 번뿐이니 모든 것은 내가 했다고, 내가 돈도 주고 ‘병합경훈’을 사겠다고 했다고 하면 그만이다.”

연아는 자신도 복잡한 머리였지만, 최선의 방법으로 이 상황을 돌파해 내기 위해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까지 네 작은아버지가 쌓아놓은 것을 한순간에 다 무너뜨릴 수는 없지.”

박상철은 박상도가 자신의 딸에게 무슨 엄포를 놓기 전에 먼저 나서서 말도 안 된다는 듯 말을 딱 잘라냈다.

“박 대표. 아무래도 이 상황은 박 대표까지 나서서 인정할 필요는 없고 내가 나설 테니 걱정하지 말게.”

박상철은 자신 동생의 잘못까지 희생해 처리하겠다는 듯 동생의 어깨를 감쌌다.

“어디까지 형님이 인정하시겠다는 뜻입니까. 해인동 주민들 회유를 위해 시위자들 모집을 했다는 이야기요? 아니면 조카에게 지시해서 지금까지 정한 한방병원에 거슬리는 인물들을 쳐내기 위해 지저분한 소문까지 퍼뜨렸다는 것이요?”

박상도는 다 끝났다는 듯, 소파에 스르르 앉아 버렸다.

김성은 측에서 박상도가 ‘병합경훈’을 매입했다는 영상을 퍼뜨린 것이 끝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가장 큰 사건인 ‘병합경훈’을 터뜨리고, 정한 측에서 발뺌한다면 후속 보도를 통해 지금까지의 일들을 하나씩 터뜨릴 것이었다.

지난번 홍보팀 김 대리를 해고 한 이후에 비서실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이미 유 비서에게 보고를 받은 상도였다.

그뿐 아니었다.

여기저기에서 전화를 받은 박상도였다.

지난번 영상으로 훼손된 정한 한방병원의 이미지를 살려보겠다고 그만뒀던 방송을 시작하기 위해 손을 쓰고 있던 MBX에서도 박상도를 출연시킬 수 없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또 정한 한방병원과 손을 잡고, 키즈 라인부터 시니어 라인까지 영양제 라인업을 모두 생산하고 있는 공장에서도 이대로 공장을 돌리면 반품이 많이 나올 것이라며 어떻게 할 것인지 확답을 달라고 했다.

너튜브 영상이 올라간 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정한 한방병원의 사업들은 올스톱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줄줄이 광고 해지와 함께 진행 중이던 사업 피해 보상까지 해내라는 압박에 시달릴 것이 눈에 훤한 상도였다.

그때, 대표실 밖에서 유 비서가 안쪽으로 들어왔다.

“대표님. 아무래도 기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이동을 하시는 편이…….”

“여기가 어디라고 온다는 거야? 아주 기자들이 제집인 줄 알고 드나들겠다고 하겠구만.”

가뜩이나 복잡한 상황에서 박상철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박상도의 심기를 거스를 뿐이었다.

박상도는 나설 채비를 했다.

풀어헤쳐 던져 버린 넥타이를 다시 목에 둘렀고, 대충 벗어놨던 재킷은 유 비서를 통해 내보냈고 말끔히 다려진 정장 셋업을 차려입었다.

최대한 기자들을 피해 움직이겠지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박 대표. 이쪽 일은 나랑 연아랑 알아서 할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말게.”

박상철은 동생이 혹여 나쁜 마음을 먹고 자신과 연아를 내치지 않도록 동생 앞에서 몸을 한껏 낮췄다.

상철은 이 고난을 자신의 대단한 동생이 헤쳐 나가고 분명 새로운 길을 돌파해 낼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새로운 길로 또다시 해결했을 때 정한 한방병원에 자신과 연아의 자리를 보전하려면 지금 힘이 들더라도 박상도에게 힘이 되어야 했다.

연아는 지금 상황에서 도대체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대표님. 이쪽으로 오시죠.”

유 비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가는 로비에서 기자들과 마주할 것을 대비해 박상도를 비상구 쪽으로 안내했다.

박상도는 어쩌다 자신이 자신의 건물에서 엘리베이터도 타지 못하고 비상구를 통해 도망치듯 움직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별도리가 없었다.

앞장서는 유 비서를 따라 비상구 계단을 모두 내려온 박상도는 숨을 몰아쉬었다.

잠깐 쉬었다 가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로비를 지날 때는 시끌시끌한 소리가 비상구를 통해 모두 들렸지만, 미리 배치해 둔 경호팀에서 비상구 입구를 막은 탓에 무리 없이 내려온 박상도였다.

주차장 유리문 너머로 박상도의 모습이 들리자마자, 여기저기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한 말씀만 해주시죠. 지금까지 정한 한방병원과 관련된 일에 대표님이 모두 관여되어 있으셨습니까?”

“4대째 가업을 이어 한의원을 해오셨다는 것은 진실입니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거짓입니까?”

“한의학의 신뢰도가 정한 한방병원 때문에 바닥에 떨어진 것 알고 계십니까?”

박상도가 기자들을 피해 주차장으로 내려온 박상도는 이미 장악해 버린 기자들 사이에 휩싸였다.

모두 직접 박상도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몰려든 기자들이었다.

주차장 문을 열자, 이미 경호팀이 막아서기 전 주차장으로 들어와 있던 기자들이 박상도와 유 비서를 보자마자 눈에 불을 켜고 달려왔다.

“잠시만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상도의 비서가 그를 막아섰지만, 상도에게 진실을 들어야겠다는 일념으로 밀어대는 기자들의 힘을 이겨낼 수 없었다.

수십 명의 기자들을 뚫고 가까스로 차에 올라탄 비서는 뒤를 돌아 상도를 바라봤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정한 한방병원의 대표, 박상도였지만 기자들에게 휩싸여 이리 밀쳐지고 저리 밀쳐진 상황이라 옷매무새며 머리도 모두 엉망이었다.

박상도는 지금 자신의 모습을 돌볼 여유조차 없어보였다.

“대표님, 댁으로 모실까요?”

“지금 집으로 가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가? 아마 거기에도 이미 기자들이 몰려들었을 텐데.”

“그럼…….”

“일단 여기를 빠져나가기나 해.”

박상도를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밖에서 차 안쪽을 향해 플래시를 터뜨려가며 사진을 찍어보려는 기자들을 피하고 있었다.

“네.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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