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125화
진료를 보고 있던 정우는 환자 진료가 끝난 틈을 타, 조금 전 들어왔던 메시지를 확인했다.
보통 자신이 다쳤거나, 부상을 당한 친구가 있으면 오늘 한의원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연락을 하는 지수의 메시지였다.
“이 녀석. 또 발목이 속 썩이나.”
하루가 멀다 하고 농구를 하니, 부상이 잦은 지수를 말릴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반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농구를 포기하지 못하던 지수였지만 이제는 스스로 즐기고 있었다.
다만 예전처럼 학업을 제쳐두고 농구를 하지는 않기로 정우와 약속을 해서인지 학원 갈 시간을 빼고 농구를 하는 시간은 많이 줄어들었다.
예전처럼 몸이 부상을 당해도 숨겨가며 꾸역꾸역하고 있지는 않지만 간간이 피할 수 없는 부상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부상은 숨기지 말고 부담 없이 오라는 정우의 말을 착실히 듣고 있는 지수였다.
정우는 지수의 메시지를 확인하며 못 말린다는 듯, 입꼬리가 비싯 올라갔다. 그러나 이어지는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입꼬리가 다시 내려왔다.
-쌤, 기사 보셨어요? 학교에서 애들이 난리에요. 한의사들 다 사기꾼 아니냐고.
정우는 지수의 메시지 하나에 자신을 인터뷰했던 김 기자가 움직였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정우는 너튜브를 들어가 정한 한방병원을 검색했다.
영상이 올라간 지 1시간 남짓이었지만,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영상을 시청했고 댓글들이 넘쳐났다.
박상도 대표가 직접 ‘병합경훈’을 금전적으로 매입해 자신의 소유로 만든 후 문화재 지정을 했다는 것에 대한 영상이었다.
김성은 기자가 얼마나 끈기 있게 취재를 하는지, 정우는 자신을 인터뷰 할 때도 느꼈지만 박상도 대표를 타깃으로 직접적인 움직임을 찾아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대단한 사람이네. 역시.”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20분 남짓의 영상에는 정한 한방병원의 비리를 다 담을 수는 없었겠지만, 지난번 영상처럼 직원을 해고하는 데에서 그칠 수 없는 확실한 물증을 잡은 것은 분명해 보였다.
앞으로 정한 한방병원이 어떻게 나올지, 흥미진진할 정도였다.
하지만 정우는 흥미로 정한 한방병원의 진실을 영상으로만 볼 수만은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 침으로 병을 고친다니.
-제1의 한방병원이라는 데가 이 정도인데, 다른 한의사들은 믿을 수 있는 건가?
-한의사가 아니라 사기구만. 아니. 한방병원이 아니라 사기 집단.
역시나 정한 한방병원뿐 아니라 한의사, 더 나아가 한의학의 신뢰도까지 바닥으로 치닫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 될 수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정우는 진료실을 나와, 정 실장 쪽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이 원장님 어디 계세요?”
“원장님이요? 지금은 처치실 2에 계시죠. 왜요?”
정 실장은 갑자기 재마를 찾는 정우에게 무슨 일이냐는 듯, 되물었다.
“아뇨. 잠깐…….”
정우는 재마가 처치실 2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처치실로 들어섰다.
아직 어리고 철이 없는 중학생들이 한의사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대수롭지 않게 농담으로 넘길 수도 있었지만, 그 문제는 단연 중학생들에게만 있을 일은 아니었다.
담당 환자에게 침을 놓은 재마가 커튼을 젖히고 나오자, 정우는 조용하게 재마를 불렀다.
아무리 급하다 하더라도 처치실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원장님, 잠깐 이야기 좀.”
진료시간에는 환자를 보느라 서로 바빠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일이 드문 두 사람이었다.
정우가 처치실까지 따라 들어와 재마를 찾자, 재마는 의아한 눈이었다.
“지금 너튜브에 김 기자님이 준비한 영상이 뜬 것 같아.”
“그래?”
재마와 정우는 처치실을 나와 재마의 진료실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근데 아무래도 네가 걱정했던 것처럼 대한민국 제1의 한방병원이 논란에 휩싸이니 정한 한방병원만의 일은 아닐 것 같아.”
정우는 정한 한방병원 폭로 영상 밑으로 달린 댓글들을 재마가 확인할 수 있도록 보여줬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재마는 자신이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정한 한방병원의 후폭풍으로 다른 한의원들이 피해가 가는 일들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정한 한방병원의 폐해를 묵과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아마 아직까지는 명의 한의원을 찾는 환자들은 이 영상을 보지 못해 조용하겠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본다면 재마를 찾는 환자들도 한마디씩 물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받고 있는 치료가 신뢰할 수 있는 치료인지부터 시작해 도대체 큰 대형 한방병원에서 왜 그런 일을 벌인지 아느냐는 이야기까지 재마나 정우에게 쏟아 놓을 것이었다.
“너도 마음 단단히 먹어.”
“나?”
“그래. 아무래도 환자들이 불안해할 수 있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고.”
정우는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재마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정우는 그뿐 아니라, 아마 후속 보도가 나간다면 그 후 후폭풍이 더 쎌 것이었다.
물론 성은이 익명을 보호해 준다고 확답을 했지만, 정한 한방병원에서 전 직원이었던 정우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몰랐다.
이건 정우뿐 아니라, 물리치료사인 효주에게도 당부할 이야기였다.
재마는 자신이 그 둘의 방패막이가 될 수 있다면 충분히 돼줄 생각이었다.
심각한 표정의 재마의 팔을 정우가 툭 건드렸다.
자신을 너무 걱정하지는 말라는 뜻이었다.
“MBX에서는 아직 연락 안 왔어?”
정우는 최근 재마가 인터뷰를 하고 온 MBX 새 예능 프로그램에 대해 물었다.
물론 너튜브로도 ‘환자를 읽는 한의사’의 이재마는 한의학의 이미지 회복을 위해 지금처럼 지속적으로 봉사활동을 진행하고 해인동에서는 매일같이 환자를 만나겠지만, 가장 효과적인 건 공중파일 것이었다.
“아직은?”
박상도와 이재마의 인지도를 따진다면 아직까지는 정한 한방병원 대표원장을 지낸 박상도를 이길 수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정한 한방병원에 대한 구설수가 터진 이상, 새 예능 프로그램에 박상도를 출연시키는 것은 무리일 것이었다.
“그래도 MBX에서도 논란이 터진 박상도 대표를 출연시키지는 않겠지. 안 그래?”
정우는 MBX 새 의학 예능의 패널에 이재마가 출연하는 것은 따 놓은 당상이 아니냐는 듯 그제야 웃었다.
“공중파 데뷔하면 사인 좀 먼저 해주고.”
시답지 않는 농담을 하는 정우였지만, 그런 농담이 심각한 표정의 재마의 마음을 풀기 위한 것이라는 걸 재마는 잘 알았다.
* * *
미리 어머니의 건강검진을 위해 예약해 놓은 대학병원으로 차를 몰아 온 강산은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으로 들어섰다.
아침에 작은 실랑이가 있었지만, 두 분은 뒷좌석에서 편안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고 계셨다.
“예전에 저쪽 돌담길 왔던 거 기억나요?”
“언제?”
“예전에요. 한, 30년 전에?”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몇 없는 서울에서의 추억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30년 전의 일이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오래도록 서울 구경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딱히 이렇다 저렇다 대답이 없으셨다.
“기억 안 나요? 결혼 전이었는데.”
“에이. 엄마 30년 전이면 기억 못 하실 수도 있죠.”
강산은 실망한듯한 정심에게 실망하지 말라는 듯 이야기를 했다.
자주 올라오지 않는 서울의 거리를 내다보시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표정의 정심을 보니 강산의 마음이 흐뭇했다.
어머니가 아프시기 전 진작에 강산이 신경을 썼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밀려들었다.
로비 앞에서 강산은 부모님을 바라봤다.
“엄마는 저쪽으로 가서 안내 받으시면 될 거예요.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뭐 하러 기다려. 여기까지 데려다줬으면 됐지. 그리고 끝나고서는 아버지랑 바로 차 타고 내려갈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서 공부해. 응?”
정심은 자신 때문에 오늘까지도 공부할 시간을 뺏겨서는 안 된다는 듯 아들 강산의 등을 떠밀었다.
자신은 더 이상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아뇨. 오늘 두 분 못 내려가실 거예요.”
“응?”
갑작스러운 아들의 말에 어머니는 물론, 아버지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휴진까지 하고 서울에 올라갔지만 건강검진만 잘 마치고 서둘러 내려갈 생각이었다.
강산은 건강검진을 마치고 바로 고향으로 내려가겠다는 부모님에게 오늘 하루 더 서울에 계셔야 한다는 듯 이야기했다.
“아버지. 아버지도 접수 마치고 건강검진 하고 내일 내려가세요.”
“나?”
“네. 아버지도 올라오신 김에 건강검진 하세요. 예약해 놨으니까요.”
강산은 어제 밤새 고민을 하고, 이른 아침 급하게 아버지의 건강검진을 예약했다는 이야기를 그제야 했다.
아들이 아버지를 신경 써 예약을 했다는 말에, 정심의 표정은 안도와 고마움에 가득 찼지만, 아버지의 강 원장의 미간은 잔뜩 구겨졌다.
“됐다. 건강검진은 무슨. 나는 됐어. 네 엄마 끝나면 얼른 내려갈 거야. 주말이라 차 막힌다.”
강 원장은 아들이 갑작스럽게 건강검진을 하라는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됐다는 듯 몸을 돌려 등지고 섰다.
굳이 서울까지 올라와 대학병원에서 건강검진을 할 만큼 자신의 상태가 안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고집부리지 마시고요. 이제 2년에 한 번은 서울로 올라와서 건강검진 하세요.”
“됐대도, 네 아버지 한의사 생활만 30년이다. 내 몸은 내가 더 잘 알아.”
강원장은 걱정이 없다는 듯, 고집을 부릴 태세였다.
강산은 어제 재마에게 들었던 말이 밤새, 그리고 지금까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재마가 진맥도 짚지 않고, 스캔만 하듯 환자를 살폈다 해도 단 한 번도 오진을 내린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강산도 믿지 않았지만, 이제는 재마의 검안이라면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어제 정확히 어떤 병인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건강에 이상 신호가 있는 것은 분명했으니 말했을 터였다.
“아버지는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아직은 모르거든요. 하나뿐인 아들 걱정시키실 거예요?”
“그러니까 너는 멀었다는 거야.”
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을 걱정시킬 거냐는 강산의 말에, 고집을 세우던 걸 조금 굽힐 생각이신지 강산을 슬쩍 바라봤다.
요 며칠 고생을 한 건지, 수척해진 아들 강산의 얼굴이 신경 쓰였다.
“예약해 뒀으니까 일단 들어가세요.”
“괜찮대도.”
강산은 아버지의 등을 떠밀었다.
옆에 있던 정심은 한번 고집을 부리면 아무도 꺾을 수 없는 남편이었지만, 하나뿐인 아들에게는 꺾이는 모습에 남편의 손을 잡아끌었다.
“여보. 들어가요. 아들이 예약했다잖아요.”
“당신까지 왜 그래.”
“왜 그러긴요. 하나뿐인 아들이 걱정한다는 데, 걱정시킬 거예요? 다른 건 몰라도 그건 못 보겠네요.”
정심은 강산에게 아버지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잡아끌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들, 아버지는 내가 모시고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
“네. 이따가 끝나실 시간에 맞춰서 다시 올게요. 잘 받고 나오세요.”
강산은 예전에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큰 키였던 아버지의 굽은 어깨를 한참을 바라보다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