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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122화 (122/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122화

3년 전 한의학과 실습실.

“너희들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타고난 실력, 보고 자란 이 눈. 따라가기 힘든 게 이렇게 나타나는 거야.”

전주용 교수는 자신의 한의학 수련 시절 동기 중 가장 가까이 지내고 있는 박철중의 아들인 박상연을 칭찬하며 다른 동기들의 기를 죽이고 있었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동기들 대부분은 귀를 닫고, 제 할 일을 할 뿐이었다.

한의학과 동기들 중, 실력이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상연이었지만 이렇게 전 교수가 자신을 띄울 때는 정말 자신의 실력이 뛰어나기라도 하듯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백날 책 파고 이론에서 1등을 해도 실제로 임상 나가서 환자 앞에서 손이나 벌벌 떨면서 침도 못 놓으면 면허 땄다고 한의사라고 얼굴 내밀고 진료 볼 거야?”

마치 재마가 들으라는 듯이 이야기를 한 전 교수는 수업이 끝난 종이 울리자, 칼같이 시간을 지켜 실습실을 빠져나갔다.

재마는 실습을 하며 떨던 손을 숨기듯 책상 아래로 끌어 내렸다.

“야, 조금 전 교수님이 한 말, 우리 과탑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냐?”

“목소리 좀 낮춰. 돌려 깐 것도 아니고 대놓고 깠는데 우리까지 수군거리면 재마가 어떻게 되냐?”

동기들은 자신들도 좋은 소리는 못 들었지만 그중에서도 단 한 사람인 재마를 콕 집어 이야기한 것을 모두 눈치챘다.

재마는 자신의 필기 노트를 가방에 말 없이 넣고 있었다.

실습시간마다 왜 이렇게 이론대로 침이 놓아지지 않는 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이제는 하도 들어서 정말 보고 자란 환경 때문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재마. 실습도 끝났는데 우리 삼겹살에 소주나 하러 갈까?”

강산은 재마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여유로운 소리를 했다.

제일 가까이 지내고 있는 동기였지만, 저 여유로움은 아무래도 강산도 아버지가 한의사시니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이 들릴 뿐이었다.

과탑인 자신은 전 교수 말대로 책을 죽어라 파도 차고 넘치는 한의사들 사이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야 할테고, 적당히 한의학과만 졸업하면 이미 기반을 잡아 놓은 한의원에서 부원장 직함을 달고 진료를 볼 수 있을 것이었다.

“됐어. 나 자취방 가서 오늘 실습한 내용 정리해야 해.”

“야, 이재마. 방금 실습 끝났는데 무슨 또 공부를 하겠다고. 쉬엄쉬엄해. 오늘 고기 이 형님이 쏠 테니까.”

“됐다니까.”

재마는 괜히 강산에게 심술을 부린 재마는 자신의 짐을 챙겨 실습실을 나섰다.

“재마야, 이재마!”

아직 정리 중인 동기들을 뒤로 하고 혼자 나서는 재마의 뒷모습에 대고 강산이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재마는 말없이 발을 옮길 뿐이었다.

3시간 후.

실습한 내용을 다시 머릿속으로 정리를 하며 노트 정리를 한 재마는 기지개를 활짝 켰다.

기지개를 꽤 좁은 자취방이라 방안을 둘러 보면 답답했지만, 공부를 하며 창밖을 내다볼 때마다 재마가 다니고 있는 교정이 내려다보이는 뷰 만큼은 완벽했다.

정신없이 수업을 듣고, 정기적인 시험. 비정기적인 쪽지시험까지 바쁘게 보내다 보면 1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는 데 창밖을 내다보며 계절이 지나가는 것도 느낄 수 있어 조금은 좁아 답답해도 재마가 자취방을 옮기지 않는 이유였다.

똑똑.

재마가 숨을 돌리고 있는 사이 그의 자취방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재마는 혹여 동기들 중 하나가 자취방에 찾아오겠다 연락을 했었나? 하며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밖을 향해 누구인지 확인했다.

“누구세요?”

“형님이다. 문 열어라.”

재마에게 익숙한 강산의 목소리였다.

몇 시간 전 삼겹살 먹으러 가자는 강산의 말을 무시하고 혼자 자취방으로 돌아왔던 재마는 그제야 조금은 미안한 마음으로 자취방 문을 열었다.

“형님이 왔다고 하면 문을 빨리 빨리 열어야지. 다 식는다. 얼른 들어가자.”

강산은 손에 들린 봉지를 흔들었다.

“삼겹살에 소주 먹자는 걸 무시하고 간 동기 생각에 혼자 먹을 수가 없더라.”

“그래서 이걸 포장한거야?”

“그럼. 이모한테 제일 맛있게 구워서 포장해 달랬지. 앉아. 소주잔도 없지? 잔도 사 왔다.”

일회용 소주잔을 꺼내 소주잔을 채우며 강산은 재마의 손을 끌었다.

“고맙다.”

“고맙기는. 너랑 밥먹을 때가 제일 맛있더라.”

강산은 자신이 사 온 고기를 한입 우걱우걱 씹으며 소주를 삼켰다.

“소주도 맛있고.”

“왜?”

“나랑 다르잖아. 너 하는 거 보면 재밌더라.”

“뭐가?”

“뭐든 열심히 하는 거. 나는 그냥 내 길이 이 길이다 생각하고 부모님 뜻에 따라 공부하고 서울에 있는 한의대학 졸업하면 내 자리가 있을 거라는 말에 공부를 해왔는데 넌 아니잖아.”

강산은 자신과 재마의 다른 점을 아무렇지 않게 담백하게 이야기 했다.

“넌 네가 선택한 길을 최선을 다해서 하고 있잖아. 남들보다 더 노력하면서.”

“그럼 너도 노력하면 되지. 맨날 삼겹살에 소주 먹자고 하지나 말고.”

“그냥 널 응원한다고 생각해라. 나는 나보다 잘난 놈 응원하는 게 체질에 맞아. 그리고 나도 너처럼 내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되고.”

강산은 22년 인생 동안 생각지도 않았던 자신의 길을 고민이라도 하고 있다는 듯 피식 웃었다.

* * *

재마는 자신을 응원하던, 자신이 흔들릴 때마다 힘이 되어주던 강산에게 자신도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강산이 한의사 면허 시험에 낙방하고 방황하는 동안 그를 다그치지 않고 그의 옆에서 그가 그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묵묵히 응원했었다.

그사이, 강산의 부모님이 고향에서 애타고 계실 것은 생각지 못했던 재마였다.

그의 부모님도 나이가 들고, 하나뿐인 자식인 강산을 신경 쓰는 것보다 본인의 건강을 더 신경 써야 할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서울로 올라오신 두 분의 눈을 보고 나서 새삼 깨달았다.

-동공을 인식합니다.

강산의 아버지인 강 원장과 악수를 하며 눈을 마주쳤다.

-이름 : 강병진

나이 : 64세

C형 간염에 의한 간 경화. 간 결핍 증후군.

이미 강병진 원장의 눈과 피부는 황색을 띠고 있었다.

소리 없이 다가온다는 간 질환이 40년 가까이 고향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강 원장을 덮쳐오고 있었다.

재마는 강 원장과 악수하던 손을 놓고는 자신도 모르게 어두워진 표정을 관리하려 애썼다.

“그래, 재마 군은 서울에서 한의원 운영 중이라고?”

“네. 기회가 좋았습니다.”

“허허. 이렇게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 이 선생도 있는데 우리 아들놈은 좋은 기회를 두고도 남들보다 멀리 돌아가려고 하니 원.”

강 원장은 재마를 바라보았다. 제 아들과 동기지만, 한 명은 단번에 면허를 붙어 벌써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고, 아들은 한의사 면허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것이 한심스럽다는 듯 혀끝을 내찼다.

그 옆에서 정심은 아들과 남편 사이에서 혹여 분란이 생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산이도 요즘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 옆에서 좋은 모습 많이 보고 있거든요.”

“뭐, 공부는 안 하고 요양원 진료 하는 거 따라다니면서 영상을 만든다는 데 그것도 맘에 안 들고.”

산이의 아버지는 ‘환자를 읽는 한의사’ 편집을 맡아 하던 아들의 지난날들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후.”

강산은 친구인 재마 앞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한심스러운 놈으로 말을 하는 것이 못마땅한 눈치였다.

“제가 옆에서 잘 돕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강산의 표정을 읽고, 재마는 그의 어깨를 톡톡 치며 병진을 안심시켰다.

“이렇게 기회가 돼서 이 원장을 다 보네.”

강산의 엄마인 정심도 아들의 눈치를 봐가며, 다시 한번 재마에게 말을 걸었다.

“서울도 자주 오세요. 건강검진 마치시면 제가 식사 대접하겠습니다.”

“아이고. 아니에요. 무슨 부담스럽게. 그리고 바쁘잖아요.”

“우리도 건강검진 마치자마자 바로 내려가 봐야 해서……. 월요일 진료는 빠질 수 없지.”

재마가 강산의 부모님과 식사 준비를 하겠다고 하자 정심은 두 손을 가로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병진은 금요일 진료도 휴진을 하고 올라왔는데 볼일만 보고 서둘러 내려가야 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재마는 강산의 부모님에게 대접하는 것이 자신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강산과 한 편이 되어주는 방법이었다.

“잠시라도 식사는 하고 가세요. 제 성의니까요.”

“어허. 참.”

병진은 쓰고 있는 안경을 끌어 올리며 퍽 난감한 듯 탄식을 했지만 표정만큼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시간이 늦어서요. 재마는 그럼 그만 보낼게요. 엄마 건강검진 끝나고 내려가시기 전에 남은 이야기 더 하시죠.”

강산은 아버지가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재마를 내보낼 생각으로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 그래. 그래. 시간이 늦었네. 우리가 진료 마치고 늦게 출발을 해서 늦게 올라왔어요. 오늘은 늦었으니까 푹 쉬고 내일도 진료 봐야지.”

정심은 바쁜 사람을 자신들이 잡아두었다는 듯, 그를 배웅했다.

“저 재마 좀 보내고 올게요. 짐 풀던 거 마저 풀고 계세요.”

강산은 재마와 함께 그의 자취방을 빠져나왔다.

“후. 우리 집 꼰대. 진짜 아들을 뭐로 보고.”

강산은 재마에게 민망한 듯, 조금 전 병진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오랜 친구였지만 아버지의 한마디가 민망한 모양이었다.

“늦은 시간에 왔는데 고맙다.”

강산은 늦은 시간 자신의 부모님을 보러 온 재마에게 고맙다며 어깨를 툭툭 쳤다.

“고맙기는. 당연히 와봐야지.”

재마는 별일 아니라는 듯, 자신의 어깨를 치던 손을 어깨에서 내려놓았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 어머니만 건강검진 하시는 거지?”

“어. 왜.”

재마는 혹시 강산이 강 원장의 병을 이미 알고 있는지 넌지시 물을 생각이었다.

“이왕 올라오신 것, 아버지도 한 번 받으시게 하지?”

“우리 꼰대는 꼿꼿해서 어디 아프지도 않아. 병도 무서워서 튕겨 나갈 분이야.”

“음, 내가 보기에 좀 이제 건강에 신경 쓰실 때 같아서 그래.”

“뭐, 왜. 너 또 뭐 네 눈으로 환자를 읽었다 하려고 그래?”

강산은 재마가 환자를 읽듯 환자들의 병을 한눈에 알아본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가끔 보면 인정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걱정 마. 40년을 한의사 생활을 하는데, 제 병 하나 모르시겠어? 아마 때마다 경옥고에 녹용에 좋은 건 혼자 다 해드실 거다.”

강산은 자신의 아버지 걱정은 없다는 듯 이야기했다.

“글쎄. 눈도 피부도 황색으로 보이는 게 좋지 않은 기분이라 그래.”

재마는 넌지시 이야기하려고 했던 걸 강산이 이해 못 하자 답답하다는 듯 이야기를 했다.

“뭐. 눈도 피부도 황색으로 변한 것처럼 느껴지면 간 질환 쪽인데, 간 경화? 간암?”

강산은 재마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피식 웃었지만 환자의 병을 쉽게 입 밖으로 내지 않을 재마라는 걸 알기에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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