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121화
매일 한의원을 찾는 환자들 사이로 이제는 루게릭병 환자인 성팔도 출석을 했다.
여든이 넘은 아버지를 매일 30분 거리의 한의원까지 모시고 왔다가 모셔가는 게 쉽지 않겠지만 아버지가 치료 의사를 보인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지 성팔의 보호자인 연실은 힘든 기색 하나 없어 보였다.
익숙하게 명의 한의원으로 들어와 접수를 하고, 성팔의 차례가 올 때까지 대기를 했다가 그의 차례가 오면 성팔은 떨리는 다리로 힘을 내어 처치실까지 걸어 들어갔다.
퇴행성 루게릭병에 완치라는 희망은 없고, 이미 노쇠해 버린 성팔의 건강이 더 좋아지기는 힘들겠지만 딸인 연실의 효심 덕인지 성팔은 떨리는 손과 다리에 힘을 주기 위해 물리치료도 성실히 받고 있었다.
* * *
“한의사 선생님이 유명하신 분이라면서?”
“네?”
좀처럼 말수가 적은 성팔이 재마에게 진료를 보고, 침을 놓자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다.
재마에게 말을 걸기까지 그가 몇 번이고 재마에 대한 생각을 되짚었을 것이 분명했다.
“우리 딸이 내가 여기가 너무 멀다 가까운데 로 다니자 하니까 아들, 며느리, 손자들까지 난리더라고. 이왕 다니는 것 유명하고 훌륭한 한의사 찾아가서 치료받으라고.”
“아…….”
딸이 고생할까 봐 가까운 한의원으로 치료를 받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성팔의 마음을 녹인 것이 아무래도 가족들의 설득이었던 모양이었다.
뜻하지 않게 너튜브 활동을 하고 있는 재마의 활동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 뭐야. 핸드폰으로 보는 걸로 한의사 선생님이라면서 보여주던데…….”
“너튜브요.”
요즘 젊은 세대들은 너튜브가 익숙했지만, 그런 것에 익숙하지 못한 성팔은 손자가 보여준 것이 처음인 모양이었다.
“맞아요. 맞아. 너…… 암튼 그런 데에서 선생님이 좋은 일도 많이 하시는 분이라고 아주, 며느리도 그렇고 손자도 그렇고 사인 받아 오라고 성화야. 우리 손자는 나한테 관심도 없다가 원장님한테 진료받고 왔다니까 몇 번이고 원장님에 대해 물어본다니까요.”
자신 때문에 바뀌어 버릴 가족들의 심려를 생각해 치료를 거부했던 성팔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의 표정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제가 진료 끝나고 사인해 드릴게요.”
“정말? 정말 해주실 거예요?”
성팔은 사인을 해주겠다는 재마의 시원한 대답에 눈빛을 번뜩였다.
사인을 받고 나서 손자에게 전화를 걸어 소원하던 사인을 대신 받았다고 자랑스레 말할 생각이었다.
“어려운 것도 아니고요. 얼마든지 해드리겠습니다.”
“허허. 손자가 정말 좋아하겠어요. 학교 가서 자랑한다고 할 텐데.”
누구보다도 손자에게 좋은 기억을 전해줄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은 성팔의 얼굴에 어린아이처럼 설렘이 가득 차 있었다.
“대신 곽성팔 님, 치료 빠지지 않으시고 꾸준히 오셔야 합니다.”
“그럼, 그럼요. 내가 우리 딸 고생할까 봐 안 오겠다고 했던 거지. 그래도 올 때마다 사위가 데려다주기로 해서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이미 병 때문에 작아진 목소리였지만, 목소리에 생기도 돌기 시작했고 표정도 많이 좋아진 성팔이었다.
“운동도 꾸준히 하시고요.”
“내 인생 80년간 하루에 30분은 꼬박 걸어요. 요즘은 몸이 안 좋다고 그것마저 쉬었었는데 아들이 퇴근하고 저녁에 하천길 걷기라도 시작하자 해서 지난주부터 다시 걷기 시작했어요.”
“오래오래 건강하게 생활하셔야죠.”
성팔은 매일 한의원을 모시고 오는 효심 깊은 딸의 이야기 다음으로 아들의 효성도 빠뜨리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
“암요. 이 나이에 자식들 고생 안 시키려면 마지막 가는 날까지 건강하게 지내다 가는 게 최고예요.”
마지막 침 하나 놓을 때까지 오늘은 자신의 이야기, 가족의 이야기까지 쉴 틈 없이 이야기를 하는 성팔이었다.
재마는 말수가 없이 차분하던 성팔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그의 마음속에 치료 의지가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족을 위해서라도 힘을 내본다는 그의 의지가 긍정적이었다.
* * *
목요일까지 한의원 진료를 마친 강산은 퇴근을 하고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저녁이면 5일간 지내던 고향 집을 떠날 수 있었다.
어머니의 건강검진을 앞둬 마음은 무거웠지만, 아버지와 함께였던 숨 쉴 틈 없었던 5일이 모두 지나갔다는 생각에 시원스러웠다.
집으로 들어와 쉬고 계셨을 엄마를 찾아 강산은 방과 주방을 오갔다.
쉴 줄만 알았던 엄마는 그새 무엇을 준비하셨는지, 주방 가득 반찬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엄마, 2박 3일 입원하는 거예요. 뭘 그렇게 챙기세요.”
대충 가짓수를 세어봐도 8가지는 되는 반찬들이 찬합에 가득가득 들어가 있었다.
“내가 병원 가져가려고 챙기니. 네 자취방에 가져가라고 챙기는 거지. 공부하는 데 5일이나 여기 와서 시간 뺏겼으니까 서울 올라가면 나 신경 쓰지 말고. 가서 공부해.”
정심은 서울 대학병원으로 건강검진이 예약이 되어 있어, 아들인 강산과 서울로 함께 올라갈 계획을 세웠다.
강산은 그래도 건강이 편치 않은 어머니가 혼자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지 않고 자신과 함께 갈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을 했는데 이렇게 반찬을 준비하실 줄은 몰랐다.
2박 3일 입원을 하는데, 아직도 모자란지 냉장고를 열어 반찬들을 꺼내놓는 정심의 바쁜 손놀림에 기함을 하던 강산은 그 반찬들이 모두 자신의 것이라는 이야기에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엄마, 이거 버스 타고 다 못 가져가요. 그리고 서울에서도 잘 해먹기도 하고 먹고 싶은 것 있으면 사 먹기도 하고. 괜찮아요.”
“네가 자주 내려오기나 하면 이러지나 않지. 한번 올라가면 1년은 감감무소식인데, 1년에 한 번이라도 내려와서 엄마 밥 먹고, 반찬 가져가고 해야지.”
1년에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든 외동아들에게 서운한지, 정심은 이것이라도 챙겨 가라고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아들의 손을 쏙 하고 빼냈다.
정심은 아들인 강산을 챙길 생각에 자신이 아프다는 것은 이미 잊은 모양이었다.
아들이 내려온 김에 자신의 손맛이 담긴 음식을 가져가라고 강산이 한의원을 나가 있는 사이 이미 참 많이도 준비해 놓았다.
이틀간 병원에 입원해 있으며 수액도 맞고, 쉬었더니 힘든지도 몰랐다.
“엄마 그런데 이거 다 못 들고 간다니까? 내 손은 두 개인데 버스 타고 이걸 어떻게 가져가요.”
강산은 엄마의 정성을 자신이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 모든 반찬을 가져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듯 이야기를 했다.
자신을 생각해 주는 어머니의 마음은 알았지만, 모두 가져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차에 실으면 되니 그건 걱정하지 마라.”
강산이 어머니와 실랑이를 하고 있는 사이, 아버지인 강 원장이 주방으로 들어오며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바리바리 반찬을 싸던 정심의 손이 강 원장의 목소리에 놀라 멈췄다.
“당신도 서울 가시게요?”
정심이 물었지만, 강 원장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싸놓은 짐 두 개를 손에 쥐었다.
“이 보따리 가져간다는 거지? 나 먼저 나올 테니까 서울 가지고 갈 짐 있으면 당신이 들지 말고 이 녀석 들려서 내보내.”
강 원장은 다른 대답은 하지 않고, 이미 정심이 싸놓은 반찬 보따리를 양손에 들고 먼저 밖으로 나섰다.
“아니, 네 아버지가 웬일이니. 진료는 어쩌고 가신다고.”
강산은 조금 전 한의원 퇴근을 하며, 할 일이 있으니 먼저 나서라는 아버지의 말에 먼저 퇴근을 했던 것을 떠 올렸다.
매일 진료에만 모든 신경이 향해 있는 강 원장이니, 혼자 볼일이 있겠거니 하고 무슨 일이냐 묻지 않았던 강산 또한, 아버지가 서울로 가실 거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
아무래도 강 원장은 자신의 안사람인 정심의 서울행을 따라나서기 위해 공지 사항을 적어 놓고 퇴근을 한 모양이었다.
놀란 강산은 어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엄마, 한의원 개인 사정으로 쉰 적 있어요?”
“우리한테 개인 사정이랄게 뭐 있겠니.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금요일 저녁이라 금토일 장례 치르고 월요일에 바로 출근하셨던 네 아버지인데.”
중학교 1학년이었던 강산의 기억 속에도 뚜렷한 기억이었다.
모친의 장례를 치르고도 쉬지 않고 곧장 진료를 봤던 강 원장은 동네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다.
그의 책임감과 성실함에 환자들이 더욱 그를 찾기도 했다.
“아마 네 아버지 개원한 이래로 개인 사정으로 쉬시는 건 처음일 거야.”
정심과 결혼을 한 해에 개원을 했던 강 원장은 지금까지 공식적인 휴무를 빼고는 휴진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에 휴진까지 결정을 한 남편의 마음에 감동을 받은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데려다주신다니까, 그럼 이것도 가져가. 지난겨울에 한 김장김치 아주 맛있게 됐어.”
어머니는 이 기회에 하나라도 더 챙겨 보낼 생각으로 냉장고 깊숙이 있는 김장김치까지 꺼내놓았다.
“엄마, 이걸 제가 어떻게 다 먹어요.”
“너 혼자 먹지 말고, 재마도 좀 나눠주고.”
강산의 만류에도 정심은 서울에 올려보낼 짐을 바리바리 싸놓았다.
세 가족은 오래간만에 강산이 운전하는 한 차에 올라타 서울로 향했다.
병원 방문이라는 것이 무거웠지만, 정심은 남편과 장성한 아들과 한 공간에서 있는 시간이 소중한지 뿌듯한 얼굴로 서울까지 올 수 있었다.
* * *
“짜식. 형님 서울 왔다니까 그 새에 보고 싶어서 찾아왔어?”
강산은 일주일 만에 얼굴을 보는 재마를 보자, 손을 번쩍 들었다.
목요일 늦은 시간, 서울로 올라온 강산은 내일 있을 어머니 입원을 위해 자취방에 짐을 풀었다.
자취방에 있는 혼자 쓰기는 충분했던 냉장고가 어머니의 반찬에 가득 차서 더 이상 반찬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 급하게 재마에게 연락을 한 그였다.
“어머니랑 아버지 올라오셨다는데 인사라도 드려야지.”
서울까지 올라오는 일이 드문 강산의 부모님의 얼굴을 뵙고 인사를 드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재마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찾아왔다.
“그래. 들어가자. 아버지도 웬일로 한의원 휴진까지 하시고 서울로 올라오셨다.”
목요일에 아버지와 서울 하늘 아래 함께 있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한 강산의 얼굴이었다.
그와 가장 친한 친구인 재마를 부모님께 보여드릴 생각에 강산은 재마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 * *
“엄마, 아버지. 대학 동기 재마예요.”
“아이고. 오래간만이에요.”
강산이 재마와 함께 자취방으로 들어가자, 짐을 풀고 계시던 정심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두 손으로 재마를 맞이했다.
“요즘 할아버지 한의원 물려받아 진료 보고 있다면서요?”
아들인 강산에게 재마의 근황을 미리 들었던 정심은 부럽다는 듯, 재마를 우러러봤다.
“말씀 편히 하세요. 동네 작은 한의원이에요.”
“작은 한의원이기는, 이미 유명하다는 이야기 들었는걸요.”
정심은 자신의 아들인 강산도 얼른 면허를 붙고 서울에서 근무를 하거나, 고향을 내려오면 얼마나 좋겠냐는 뜻을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