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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120화 (120/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120화

“오빠, 오래간만이야.”

MBX 로비를 빠져나오는 재마의 앞으로 나타난 박연아는 헤어진 전 연인이라는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당당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만남이라 재마는 당황스러웠지만, 연아는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잠시 연아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해야 할지 고민을 했다.

연아와 악수를 하면 그녀의 속마음을 고스란히 읽게 될 텐데, 오래간만에 마주한 전 연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좋은 것일지 나쁜 것일지 알 수 없었다.

속마음을 읽게 된 능력이 좋을 때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왔던 재마는 이런 상황이 올지는 몰랐다.

“촌스럽게 악수도 거부하는 거야?”

날카로운 연아의 음성이 자신이 손이 민망한지, 재마의 마음을 쿡 하고 찔렀다.

손을 내밀은 연아 뒤로 지나치는 사람들이 슬쩍슬쩍 바라보고 있는 것이 그냥 무시를 하기에는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그래. 오래간만이다.”

재마는 연아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MBX에서 마주칠지 몰랐던 만남이었지만, 정한 한방병원 대표와 경쟁을 시작한 만큼 언젠가는 마주칠 것이라고는 생각했던 재마였다.

더구나 방금 인터뷰를 하고 온 예능국에서 다음 인터뷰자가 정한 한방병원 박상도 대표라는 것을 이미 들은 재마였다.

“오빠가 이렇게 빨리 유명해질 줄은 몰랐네. 이런 데 관심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재마와 헤어질 때, 정한 한방병원의 입사를 앞두고 낡고 오래된 한의원을 인수 받는다고 했을 때 미친 것 아니냐며 소리를 쳤던 연아의 모습이 재마의 머리에 다시 떠올렸다.

그때 야망을 드러냈다면 자신도 재마와 그렇게 끝내지는 않았을지도 몰랐다.

재마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나도 내가 이렇게 유명해질 줄은 몰랐어.”

서른이 다 되도록 공부와 한의학 수련밖에 몰랐던 재마였기에 자신도 정말 몰랐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야. 너튜브부터 시작해서 공중파 방송까지 한의학 홍보에 발 벗고 나섰으면서 이제 와서.’

병원홍보를 맡고 있는 연아였으니, 홍보를 위해서 어떤 일들을 해야 너튜브 떡상을 할지 방송국 관계자들과 관계를 이어갈지 다 알고 있었다.

재마가 아닌 척하고 있지만, 아마 뒤로는 다 수를 쓰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재마가 예상했던 것처럼, 조금 전 두 사람이 악수하였기에 연아의 속마음을 재마가 읽게 되었다.

역시나 연아는 재마가 이 위치까지 올라온 것에 대한 못마땅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빠에게 이런 야망이 있는지 미리 말해주지. 그랬으면 우리가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게 끝나지 않았으면?”

연아는 애써 떨리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재마의 물음에 대답을 했다.

“오빠도 알잖아. 이 바닥이 생각보다 좁고, 끈끈해. 이번 인터뷰도 오빠는 그저 구색 맞추기겠지.”

연아는 새로 시작하는 의학 예능이 당연히 자신의 작은 아버지이자, 정한 한방병원의 대표인 박상도의 차지라는 듯 피식 웃었다.

만약 정한 한방병원에서 계획대로 근무를 하며 방송 의사만 밝혔어도 굳이 인터뷰 없이 예능에 꽂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라는 듯한 이야기였다.

‘첫 의학 예능 경쟁상대가 박상도 대표라니, 자기도 경쟁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건 알지 않나?’

아직 한의사가 된 지, 1년도 되지 않은 이재마가 공중파 의학 예능의 패널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 연아에게도, 방송국의 임원들에게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걸 이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재마 앞에서 구색 맞추기로 온 것 알지 않냐는 듯 말을 하는 전 연인인 연아의 이야기를 듣자, 재마는 오기가 차올랐다.

“그야 그렇지만, 그 좁고 끈끈한 길. 나도 한번 걸어보려고 해.”

“그러니까. 오빠가 이상한 짓만 하지 않았어도 우리 한방병원에서 오빠의 야망을 이뤄줄 수 있었겠지.”

재마의 오기의 한 마디에 연아는 역시나 자신의 생각처럼 재마의 야욕을 채워줄 만한 적당한 파트너였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어떻게든 홍보를 해보려 시골구석에 있는 요양원을 찾아 환자들을 진료를 보지 않아도 됐을 것이고, 다 쓰러져 가는 한의원을 문화재 지정을 시키겠다고 시장 상인들과 불화를 일으키는 데 신경을 쓸 일도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완벽히 이루다시피 한 정한 한방병원에서 실크로드를 걷기만 했어도 의학 예능만큼은 큰 힘 없이 출연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재마는 연아의 생각을 읽고도 그녀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나는 너나 정한 한방병원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길을 개척해 나가는 거야. 서로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끼리 오래 이야기했다. 오후 진료는 가봐야 해서. 먼저 간다.”

재마는 손목시계를 확인한 후, 연아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제멋대로 이야기를 끊고 자신을 지나쳐 간 재마의 뒤를 한참을 바라본 연아는 그의 말을 곱씹었다.

“지금, 내 말 끝까지 안 듣고 두고 간 거야? 지만 바빠? 허. 진짜 어이가 없어서!”

재마와 연애를 했던 2년간 단 한 번도 이런 대우를 받았던 적이 없었던 연아는 부아가 끓어오르는지,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표출했다.

“으…… 으! 진짜 이재마 뭐를 잘못 먹은 거야? 왜 저래?”

연아가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내는 사이, 그녀와 약속이 있는 예능국 작가가 로비로 내려왔다.

몇 번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었던 정한 한방병원 홍보팀장이 직접 방송국으로 찾아오겠다는 이야기에 의아했지만, 아무래도 새로운 예능 때문에 볼일이 있는 것 같아 약속을 잡은 작가였다.

사람들이 꽤 지나다니는 로비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모습이 자신이 약속을 한 홍보팀장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정한 한방병원장의 조카이자 젊은 팀장이라는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던 작가는 연아를 한눈에 알아봤다.

“박연아 팀장님?”

다가가 살며시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동동 구르던 발을 멈추고 뒤를 획하고 돌아봤다.

“네. 제가 박연아인데요?”

“아, 안녕하세요. 연락받았던 연정희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명함을 연아에게 건네며 인사했다.

“빨리 오셨네요? 흠.”

연아는 조금 전 자신의 모습이 민망한지, 머리를 매만지며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괜찮아요. 조금 전 봤던 건 모른 척해 드릴게요.”

충분히 이상할 만도 했지만, 정희는 괜찮다는 듯 빙긋 웃었다.

“우리 이렇게 서서 이야기 하나요?”

먼저 약속을 잡겠다고 찾아온 연아는 자신을 그대로 로비에 세워둘 거냐는 듯, 날카롭게 물었다.

“아…… 잠시 카페에서 이야기할까요? 요즘 아시다시피 저희 예능국에서 인터뷰가 많아서요.”

정희는 예상치 못했던 미팅이라, 가볍게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는 듯 손짓을 했다.

“흠. 그러죠. 그럼.”

정한 한방병원 팀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방송국을 찾아왔지만 예능국까지 올라가지도 못하고 카페에서 미팅을 해야 한다는 것이 못마땅한 연아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아메리카노 두 잔을 가져와 테이블에 앉은 정희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는 듯 물었다.

“이번 예능 캐스팅 과정에서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아서요.”

“문제요?”

연희는 작가팀에서 미리 선정했던 패널 후보들에 문제가 있다는 듯한 이야기에 의아한 얼굴이었다.

“저희 정한 한방병원은 홍보팀 쪽으로 미리 연락을 주셨어야 해요. 지금까지 몇 번 저랑 통화해 보셨잖아요.”

지금까지 몇 번 홍보팀장에게 공식적으로 연락을 했지만 매번 거절을 당했던 작가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홍보팀을 거치지 않고, 직접 비서실 쪽으로 연락을 취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건 모두 국장과 박상도 사이에 이야기가 되어서 이뤄진 것이라는 건 박연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이번 예능은 저희도 박상도 대표님 캐스팅은 저희 작가 쪽 제안이 아니었어요.”

“네?”

생각지도 못했던 답변을 들은 연아가 당황한 눈치였다.

“저희 작가나 PD들은 한의사 패널로 이재마 원장님 추천이 많았어요. 근데 국장님이나 다른 윗선에서 박상도 대표님을 언급하셨죠.”

“음. 아무튼 캐스팅 과정이 어떻게 되었던, 저희 대표님이 출연 의사를 밝힌 만큼 인터뷰는 큰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요? 저희 쪽에서도 미리 홍보 기사를 준비해야 해서요. 새 예능이 언제 시작할지, 어떤 패널들이 출연하시는지 정보는 미리미리 부탁드려요.”

박연아는 당연히 자신의 작은 아버지가 출연이 확정된 것처럼 이야기를 했다.

“아, 그건 저희도 아직 캐스팅이 완료되지 않아서요. 박상도 대표님도 아직 인터뷰도 안 하셨고…….”

정희는 출연이 당연한 듯 이야기를 하는 연아의 행동에 조금 난감한 얼굴을 하며 말끝을 흐렸다.

“저희 팀에서도 신중히 생각해 보고 이재마 원장님과 박상도 대표님을…….”

“지금 대한민국 제1의 정한 한방병원이랑 동네 한방병원이랑 비교가 된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연아는 비교 자체가 거북하다는 듯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처음부터 이야기가 자신이 뜻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은 것에 대한 히스테리였다.

“아, 아니. 팀장님. 무엇인가 오해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연정희는 자신들이 기획하고 있는 기획 의도와는 다르게 한방병원의 큰 몸집으로 해결을 하려는 박연아의 생각이 이해 가지 않는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저희 예능은 박상도 원장님의 유명세나 명예를 뒤에 업고 시작하는 예능이 아니라서요.”

“정한 한방병원 출신 한의사가 예능에 출연한다고 하면 적어도 신뢰도 면에서는 예능 측에서 더 긍정적인 효과를 보는 것도 사실이지 않나요?”

“그럴 수는 있겠지만…….”

세간에 정한 한방병원에 대한 불미스러운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고 있지만,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 연아의 행동이 과연 정정당당함에서 오는 당당함일지, 아니면 뻔뻔함일지 구분이 되지 않는 정희였다.

“정확한 이야기는 모든 패널 후보분들과 인터뷰 후, 출연 확정이 된 이후 말씀드리는 게 낫겠네요. 오늘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는 어떻게 알고 계셨을지 모르겠지만 이번만큼은 보다 새롭고, 신뢰 있는 내용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마음으로 스탭들이 의기투합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연정희는 더 이상 박연아 팀장과 할 이야기가 없다는 듯,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아는 오늘 MBX 에서만 두 번째 뒷모습을 본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만요. 제가 먼저 갈게요.”

“네?”

“새로 시작하는 예능이 정한 한방병원 덕을 보는지, 안 보는지는 두고 보세요. 분명히 홍보 효과는 충분할 테니까요.”

연아는 이번만큼은 제 할 말을 끝냈다는 듯, 연정희 작가를 두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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