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118화
허름하고 오래되었지만, 그의 어린 시절을 보낸 아버지의 한의원 데스크에 앉은 강산이 차트를 살폈다.
조금 전, 처치실에서 진료실로 원장인 아버지가 들어가셨으니 다음 환자를 안내할 차례였다.
차트를 보며 익숙하지 않은 이름들을 살피고, 그 맨 위에 있는 이름을 호명했다.
“김복순 님.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아이고. 우리 산이 매니 컸구마잉. 이렇게 고향에 내려와서 원장 슨상님도 도와 드리고.”
강산이 고향에 내려온 지, 4일.
병원에 입원하셨던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오셨고,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있어야 하는 강산을 붙잡아 두는 것 같다며 서둘러 서울로 올라가라 하셨지만, 강산은 일주일을 고향에서 보내고 어머니 건강검진 날짜에 맞춰 같이 올라가겠다 고집을 부렸다.
덕분에 어머니는 조금 여유 있게 요양을 하실 수 있게 되었고, 강산은 아버지의 한의원에서 어머니의 몫을 다해야 했다.
강산은 자신을 알아보는 환자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드렸다.
동네 어르신이라 얼굴은 익숙하지만, 역시나 어르신의 이름은 낯설었다.
“서울에서 한의대 다닌다믄서.”
“네네.”
“졸업은 아직이고?”
작은 동네에서 한의사 집, 외아들까지 한의대를 갔다고 경사라며 동네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했으니 아버지의 한의원에 찾아오는 환자 모두, 그가 서울에서 한의학과를 졸업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어쩌면 작년 한의사 시험에서 불합격을 하고 재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뇨. 올 초에 졸업했습니다.”
“그럼, 우리 산이도 벌써 한의사여? 근데 왜 여기 앉아서 접수나 보는 거여. 아부지한테 진료실 하나 내어달라 해야지.”
한의학과를 졸업해 한의사인데 왜 한의사인 아버지 역할이 아닌, 어머니를 돕고 있냐는 듯 어르신은 의아하게 물었다.
한의학과를 졸업했다는 말에 자신의 손주는 아니었지만, 제 손주라도 되는 듯 뿌듯한 얼굴을 하는 복순이었다.
“저…… 김복순 님. 안쪽으로 들어가셔야 하는데…….”
곧이곧대로 대답을 하기도 민망하고, 다른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진료를 미루고 강산에게 궁금한 것을 쏟아붓고 있는 어르신에게 강산은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
이야기를 시작하면 점점 할 이야기가 늘어나는 것이 어르신들과의 대화의 패턴이었다.
빨리 끊고 진료실로 안내를 해야 했다.
“아이고. 이 늙은이가 너무 눈치가 없었네.”
복순은 자신의 뒤로 대기를 하는 환자들을 둘러보았다.
“나 금방 들어갈 테니까, 기둘러.”
복순이 한의원을 훑자 매일 얼굴을 보내는 친숙한 얼굴이라 그녀는 웃음으로 때웠다.
“그리고 산이, 너.”
“네?”
진료실로 들어가려다 다시 한번 뒤를 돌아 강산을 바라보며 그를 부르는 복순의 목소리에 산이 대답했다.
“김복순 님이 뭐여. 할매지. 할매.”
“아…….”
재마의 한의원과 다른 분위기인 고향 한의원은 모두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어릴 때부터 강산이 자라는 것을 모두 지켜봐 온 환자들은 강산을 자신의 손주처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고, 그에 맞게 자신들을 한동네 가족처럼 대해주길 바랐다.
“서울 가서 서울 깍쟁이 다 되어부렀구만.”
복순은 강산이 다시 한번 진료실로 들어가라 이야기를 하기 전에 들어가겠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걸어 들어갔다.
등이 한참 굽은 복순의 허리를 바라보며 강산은 다시 데스크에 앉아 보고 있던 책을 펼쳤다.
“저기요.”
“네?”
강산이 다음 환자를 안내하기 전까지, 어머니의 자리에 앉아 책을 보는 사이 처치실에서 제 할 일을 하던 간호조무사 영진이 대기실로 나왔다.
한동네에서 자란 영진은 강산보다는 네 살이나 위였지만, 이제는 영진이 근무하는 한의원 원장댁 예비 한의사인 강산을 편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실장님은 몸이 많이 안 좋으세요?”
벌써 4일째 자리를 비운 정심이 걱정되는 영진이었다.
지금까지 일 년 중, 단 한 번도 한의원을 비운 적이 없었던 정심이 4일이나 한의원을 비우고 서울에서 공부를 하는 아들까지 불러내려 데스크를 보게 하는 것이 심상치 않다 느낀 모양이었다.
“집에서 쉬시라고 했어요. 쉬신 적이 없으시니…….”
“그렇기는 하지만……. 어디 많이 안 좋으신 건 아니죠?”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 보고 일을 했던 정심이 자리를 비우자 한의원에 환자들은 가득 찼지만,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영진이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서울에서 검사 받으시고 내려오시면 출근하실 거예요. 이번 주까지는 내가 있고.”
“다음 주요?”
“왜요?”
어머니의 역할은 최대한 강산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
정심은 한의원을 찾는 환자들 걱정도 많았지만, 자신이 없는 한의원에서 고군분투해야 할 직원 영진도 걱정을 했다.
강산은 자신이 한의원 돌아가는 것은 어느 정도 파악하기 쉽고, 어머니가 맡아 하던 탕재 관리, 탕약 관리도 모두 할 수 있다고 큰소리 뻥뻥 쳐둔 상태였다.
최대한 영진에게 피해를 가지 않도록 하려고 했던 강산이었는데, 영진이 놀라는 모습에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 아뇨. 평소에 고생만 하시다가 서울로 검사 받으시러 간다고 하니 큰일이라도 난 건가 싶어서요.”
“걱정하실 일은 없을 거예요.”
강산은 어머니를 쉬게 하고 싶은 마음에 자신이 내려와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변화에 환자들도 직원인 영진도 난색을 표하는 모습에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럼 이거…….”
영진은 고민을 하다가 꺼내는 건지, 자신의 주머니에서 접힌 흰 봉투를 꺼냈다.
“실장님 과일이라도 사다 드리세요.”
“괜찮습니다. 어머니가 이런 거 받으시는 거 불편하실 거예요.”
“아니에요. 저번에 저희 엄마 급체했다고 급하게 퇴근할 때도, 아버지 더위 잡숴서 한의원에 왔다가 돌아가실 때도 실장님이 많이 챙겨주셨었어요. 제가 이래야 마음이 편해요.”
영진은 한사코 거절을 하는 강산의 손에 흰 봉투를 억지로 찔러 넣었다.
* * *
“이재마 원장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너튜브 잘 보고 있습니다. 혹시 사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됩니다.”
재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다렸다는 듯, MBX 예능팀 작가, PD들은 줄지어 섰다.
“원장님 너튜브 보면서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났어요.”
“요양원에 계시는 할아버지께 한 번이라도 더 연락 드려야겠다는 생각했어요.”
“저희 부모님이 연로하신데, 진료받으러 방문해도 되나요?”
사인을 받겠다고 줄지어 서 있던 스탭들은 제 차례가 되자 너도나도 하고 싶던 이야기를 건넸다.
재마는 그들의 이야기를 가볍게 넘기지 않고, 한마디 한마디 정성껏 대답했다.
“저 양반이야?”
새로 들어가는 의학 예능의 패널 인터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예능국장은 소란스러운 예능국의 분위기에 국장실에서 나와 직원들이 몰려 있는 곳을 바라봤다.
“네. 해인동에서 5대째 한의원을 하시는 분이랍니다.”
“젊은 양반인데 운이 좋구만, 한의사 집안에 태어나서 면허 따자마자 이름 알리고.”
국장은 이재마가 이름을 알리고, 요즘 소위 핫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모두 집안 탓이라는 듯 이야기를 했다.
“물론 그것도 그렇지만…….”
정 PD는 재마에 대해서 관심도 없던 국장이 혀끝을 내 차며 다시 국장실로 들어가는 것을 따라 들어갔다.
“작가들과 PD들 사이에서는 요즘 너튜브 채널 때문에도 인기가 많습니다.”
정 PD는 자신의 휴대전화로 이재마의 채널을 찾아 국장에게 들이밀었다.
“환자를 읽는 한의사?”
“네. 보시면 아시겠지만 해인동 한의원에서 진료하는 브이로그라던가, 요양원 봉사팀을 꾸려 다니는 영상들이 올라옵니다.”
“지난번에 요양원 보호자들과 트러블 있었던 그 양반이구만?”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제 무릎을 탁 치는 국장이었다.
지난번 타 방송국 시사 프로그램에도 언급될 정도로 떠들썩했던 사건들이었다.
지금은 현장에서 프로그램을 지휘하고 있지 않지만, 프로그램을 제작 할 때 PD였다면 누구라도 재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인터뷰나 촬영을 모두 마치고, 영상이 방영됐을 때, 일반인과 트러블은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개인 방송이 늘어난 시대라 해도 그런 일은 피해 갈 수 없었다.
“방송 데뷔도 하기 전에 트러블이 있었던 양반이랑 일할 수 있겠어?”
국장은 PD였다면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마치 이재마가 트러블 메이커라도 되기라도 하는 듯 이야기를 했다.
“그런 일은 저희 쪽도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고, 일반인 상대로 그림 좀 만들려면 항상 있는 일 아닙니까.”
“그래도 이왕이면 정한 한방병원 박상도 대표처럼 인지도도 있고 신뢰도도 높은 사람이면 그런 문제 있을 일은 현저히 낮아지지.”
내부에서 밀고 있는 박상도를 이야기하는 국장의 말에 정 PD는 말이 없어졌다.
현장을 이끌어갈 스탭들과 임원과의 의견 차이였다.
“일단 인터뷰하겠다고 날을 잡아놨으니, 인터뷰부터 보자고.”
국장은 책상에서 돋보기를 찾아 쓰며 인터뷰에 필요한 서류와 필기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저렇게 인기몰이 하는 사람들은 특히 조심해야 해. 알아?”
아직까지도 예능국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이재마를 국장실 안에서 손가락질한 국장은 못마땅한 듯 이야기를 하며 앞장서서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MBX 예능국 국장 박강훈입니다.”
국장이 나서서 인사를 하자, 재마를 둘러싸고 있던 직원들은 하나둘 눈치를 보며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안녕하세요. 이재마 입니다.”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요즘 인기몰이 하시는 한의사이시라고…….”
“과찬입니다.”
국장이 나서서 인사를 하며, 손을 내밀자 재마는 그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그와 동시에 재마는 박강훈 국장의 건강상태를 동공으로 읽기 시작했다.
-동공을 인식합니다.
이름 : 박강훈
나이 : 53세
고혈압과 2형당뇨 초기.
고지혈증 위험수치.
뒷목에서부터 승모근까지 내려온 흑갈색 섬광은 그의 어깨를 짓누르듯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높은 혈압을 표현하듯 붉은 섬광이 머리 위쪽까지 뻗쳐 있는 모습이 위험한 국장의 건강상태를 나타내고 있었다.
진료실에서 그를 마주했다면 혈압과 당뇨, 고지혈증까지 건강상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겠지만 진료를 위해 온 것이 아닌 재마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눈만 봐도 환자의 상태를 읽으신다니, 저도 원장님께 꽤 호기심이 가는군요.”
정 PD가 건넸던 재마의 채널을 떠올리며 국장은 허허 웃었다.
방금 인사를 하는 동안 자신의 건강이 재마에게 읽혔다고는 생각도 못 하는 모양이었다.
“스캔을 하듯 환자들을 읽는 능력이 실제 한다면 좋겠죠.”
자신의 능력을 솔직히 말하지 못하는 재마는 그저 빙긋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매번 환자들을 대할 때마다 환자들의 몸 상태를 최대한 자세히, 정확히 캐치해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직 젊으셔서 그런지 패기가 넘치시네.”
국장은 재마와 악수하던 손을 빼내며, 인터뷰가 있을 회의실 쪽으로 손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