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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117화 (117/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117화

“이재마?”

“네. 이재마랑 작은아버지를 함께 후보로 두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방송국 놈들. 그걸 말이라고. 둘이 비벼볼 그림이나 돼?”

오래간만에 출근해 직원에게 보고받은 이야기를 이사인 아버지에게 바로 전달하는 연아였다.

딸인 연아에게 박상도와 이재마가 새 의학 예능 패널로 거론되고 있다는 소리를 들은 상철은 어이가 없다는 듯 쓰고 있던 안경을 신경질적으로 벗었다.

전국에 한방병원을 늘려가면서 좀처럼 방송할 만한 스케줄이 나오지 않아 최근 몇 년간은 직접 방송 활동을 하지 않았던 박상도였다.

갑작스럽게 다시 방송 활동을 하겠다는 것이 최근 들어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 것들을 만회해 보고자, 대표인 박상도가 직접 나서는 것 같아 맘이 편치 않은 상철이었다.

근 20년간 승승장구해 오던 정한 한방병원이 요즘 기를 도통 쓰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자신은 비록 집안에서 기대가 없었던 아들이라 정한 한방병원에 기여를 하지 못했지만, 밖을 나돌 때도 정한 한방병원의 승승장구가 자신의 기를 살려주고는 했었다.

상도는 동생이었지만, 형보다 나았고 자신의 든든한 뒷배경이 되어주는 인물이었다.

그랬던 정한 한방병원이 한의사 면허 잉크도 마르지 못한 젊은 녀석과 비교를 당하고 있다니 자존심이 상하는 박상철이었다.

“작은아버지도 참, 요즘 방송 활동 안 하시더니, 갑자기 왜 하신다고…….”

연아는 괜히 지금까지 쌓아온 이미지가 있는데, 신출내기 한의사와 경쟁에서 밀려 이미지에 타격이나 오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자신이 홍보팀장이니, 정한 한방병원의 이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보통 신생프로그램은 정한 한방병원에서 간판으로 밀어주는 한의사들이 나가고는 했다.

연아는 다음 타자로 약혼자였던 최중기를 밀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지난한 일이 되었다.

박상도가 정한 한방병원 대표로 의학 예능을 하게 된다 해도 매주 본원에서 직접 기사도 관리해야 하니 일거리가 늘어나는 것도 당연했다.

“설마 네 작은아버지가 어떤 사람인데 밀리겠냐. 이 모든 게, 요즘 일어난 일 때문이야.”

상도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국장이나 내부에서는 박상도가 하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을 것이었다.

상철은 자신의 동생이 마음이 쓰여 편치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힘이 되어주고 싶었지만, 요즘 좀처럼 기를 펴지 못하는 상철이었다.

“밀리지 않더라도요. 같이 언급된다는 것 자체가…….”

연아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재마와 같이 언급된다는 것이 찜찜한 얼굴이었다.

신출내기 한의사인 것도 그렇지만 하필이면 자신과 사귀었던 재마와 비교를 당한다니 괜히 기분이 나빴다.

“제가 좀 더 알아볼게요.”

연아는 이번만큼은 자신이 좀 나서서 해결해 보겠다는 듯 말을 했다.

“그래, 그렇잖아도 요즘 네 작은아버지가 신경 쓸 것이 많으니 네가 좀 나서서 움직여 봐라. 명색이 정한 한방병원 오너 일가인데.”

연아가 이번에 일 처리를 부디 잘해서 다시 상철의 기를 살려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 * *

곽정팔은 치료를 받고 나왔을 때 대기실에 기다리고 있어야 할 연실이 보이지 않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곽정팔 님, 따님 잠시 자리를 비우신 것 같아요. 앉아서 기다리시겠어요?”

정 실장은 정팔이 당황하지 않도록 그의 손을 잡아끌어 소파에 몸을 앉혔다.

소파에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던 패트릭은 한 칸 자리를 옮겨 앉으며 어르신에게 인사를 했다.

한국에서건, 그의 고향 스웨덴에서건 눈이 마주치면 먼저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였다.

“안녕하세요.”

“어? 어…… 외국인 양반이 한국어를 하는구만.”

곽정팔은 어색하게 외국인 옆에 자리를 잡았다가 먼저 인사를 하는 모습에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일지 아닐지 고민을 잠시 했다.

인사 이후에 그가 또 이야기를 해온다면 그다음 이야기를 어떻게 이어갈지 어려울 터였으니 말이었다.

곽정팔이 인사를 하지도 다른 이야기를 이어가지도 못하며 어색하게 웃자, 패트릭도 활짝 웃었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패트릭은 정 실장이 가져다준 쌍화차를 홀짝홀짝 마셨지만, 손에 힘이 없어 손에 든 종이컵마저 무겁게 느껴졌다.

손에 점점 힘이 없어지는 상태인 정팔은 외국인이었지만 남 일 같지 않아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젊은 사람이 어쩌다. 쯧쯧.”

자신은 여든이 넘어 쓸 대로 다 써버린 몸이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외국인 남성은 아직 마흔다섯도 되어 보이지 않았다.

마흔다섯이면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라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내가…… 아니, 제가 외국인이지만 이재마 원장님이 내 몸을 잘 봐줘서 많이 좋아졌습니다.”

패트릭은 정팔의 이야기도, 눈빛도 읽고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이미 익숙한 시선이었다.

한때는 다른 사람들의 안타까움이 자신에 대한 조롱이라는 생각도 했지만 이제는 마음이 많이 유해졌다.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라 생각하고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면 자신의 마음도 오히려 편해졌다.

“신통방통한 일일세.”

이재마의 치료를 받고, 많이 좋아졌다는 말에 긴장을 하고 있었던 정팔의 표정도 활짝 피었다.

진심으로 패트릭을 걱정했고, 다행이라는 뜻이었다.

* * *

연실은 자신이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처치실에서 치료를 마치고 나온 아버지가 소파에 앉아 생전 처음 보는 외국인과 이야기를 하는 모습에 놀라, 다가왔다.

좀처럼 말수가 적은 정팔이었는 데, 낯선 이, 특히 외국인 남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생소했다.

“아버지!”

“어, 연실이 왔냐.”

조금 전까지 외국인과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두 사람이 한참을 이야기했지만 딸 연실의 목소리가 들리자, 아버지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딸을 올려다보았다.

재마의 이야기를 들은 탓인지, 갑작스럽게 아버지의 목소리가 더 작게 들렸고 이제 곧 그 목소리마저 듣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연실에게 현실로 다가왔다.

연실은 울컥하는 울음을 꾹 눌러 담고 힘겹게 목소리를 내었다.

아버지 앞에서 울 수는 없었다.

“네. 화장실 다녀왔는데…… 치료는 어떠셨어요?”

연실은 침 치료 직전 이재마 원장에게 아버지인 정팔이 파킨슨병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달받았지만 아버지가 치료받는 40분간 아버지 앞에서 티 내지 않기 위해 마음을 굳게 먹은 참이었다.

막상 치료를 받고 나오신 아버지를 보니 마음먹은 것처럼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울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 늙어서 치료가 다 무슨 소용이겠니. 너도 괜히 먼 여기까지 날 데리고 올 생각일랑 말아라.”

이재마 원장의 치료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정팔은 딸이 괜히 자신 때문에 고생을 할까 봐 치료도 필요 없다는 듯 이야기했다.

따뜻한 찜질을 하고, 물리치료를 하는 것이 시간도 금방 가고 몸도 노곤노곤 풀리는 기분이었지만 치료가 필요하다면 집 앞에 있는 한의원을 가면 그만이었다.

딸의 시간을 뺏어 버스를 타고, 서울 끝자락에 있는 한의원까지 다닐 생각은 없었다.

딸이 사정을 해, 딱 한 번 와서 유명한 원장 얼굴을 한번 본 것으로 만족한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병명을 알지도 못하고, 그저 노환이라 생각하며 흘러가는 대로 흘려보낼 생각이라는 듯한 아버지의 이야기에 연실은 침을 꼴깍 삼키고 입을 열었다.

“고생은요. 그리고 이제 버스 타고 안 와도 돼요. 아까 노 서방한테 연락했어요. 다음부터 아버지 치료 있는 날은 노 서방이 시간 빼서 모시고 온대요.”

“노 서방한테? 아니, 왜. 왜 바쁜 사람한테 부담을 줘.”

“부담은요. 당연하죠. 시어머니 치매 수발도 7년간 본 게 저예요. 노 서방은 그건 아니라도 아버지 병원 모시는 건 할 수 있어요.”

연실은 지난 7년간 치매 시어머니를 손수 모셨던 것을 당연한 도리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사이 자신의 아버지인 정팔이 파킨슨병으로 점점 몸이 쇠약해지는 것도 모른 채 말이었다.

“에잉. 별 쓸데없는.”

“Mr. 곽. 따님 말대로 또 오세요.”

“나, 여기 또 오라고?”

연실이 화장실을 가 있는 사이 대화를 나누던 패트릭이 정팔의 어깨를 톡톡 치고는 다음에 또 오라며 이야기를 했다.

“누구…….”

“안녕하세요. 내 이름은 패트릭입니다.”

80이 넘은 자신의 노부와 한국말로 대화를 하고 있는 외국인의 모습에 연실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한눈에 보아도 서양 사람이었는 데, 능숙한 발음으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젊은 양반인데 몸이 안 좋아서 한의원에 온대. 뭐…… 뭐라더라.”

그사이 패트릭과 통성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눈 정팔은 별거 아니라는 듯 이야기를 했다.

“내 병, 파킨슨병입니다.”

패트릭 또한 자신의 병이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를 했다.

“파킨슨병이요?”

“나는 파킨슨병이면 걷지도, 손을 쓰지도 못하는 줄 알았는데 젊은 양반이…… 에잉…….”

정팔은 안타깝다는 듯 혀를 내찼다.

아직 자신이 파킨슨병이라는 것은 모르고, 주변에서 파킨슨병으로 고생하다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들을 떠올리는 정팔이었다.

혀끝을 내차는 정팔의 행동에, 혹여 패트릭에게 실례가 되는 행동일까 연실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해요. 저희 아버지가…….”

“오, 노노. 괜찮아요. 내 병, 힘든 병 맞아요.”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는 연실에게 패트릭은 두 손을 가로저으며 괜찮다 이야기를 했다.

“힘든 병이지만, 지금 나는 이겨내고 있어요. Mr. 이, 똑똑한 한의사예요. 내가 살던 나라에는 한의학 없어서 낯설지만, 큰 힘이 되고 있어요.”

패트릭은 연실에게 자신은 힘든 병을 앓고 있지만, 괜찮다며 이재마에게 큰 도움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Mr. 곽. 그러니까 또 만나요.”

“또 만나기는. 나는 늙어서 치료를 받으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똑같어.”

정팔은 또 만나자는 패트릭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조금 전까지 아버지가 파킨슨병이라는 말에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절망스러웠지만 낯선 한의원 치료까지 받으며 꿋꿋하게 이겨내고 있는 패트릭을 보니 희망이 조금 생긴 것 같은 연실이었다.

“아버지. 우리 또 와요. 네?”

“뭐, 병원이 좋은 곳이라고 또 오재.”

“아버지 이제 패트릭도 사귀셨잖아요. 또 보자고 하시는 데 거절하실 거예요?”

한사코 또 오지 않겠다는 정팔과 팔짱까지 끼워가며 설득을 하는 연실의 모습에 패트릭도 정팔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이제 친구. 오케이?”

“오케이는 무슨. 내가 새파랗게 젊은 서양 사람하고 친구는 무슨.”

정팔은 못마땅한 듯 연실의 팔짱을 빼내며 앞장서서 명의 한의원을 나섰다.

하지만 한편으로 자신을 생각해 주는 딸, 연실의 모습에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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