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116화
“파킨슨병이요?”
연실은 아버지의 병명을 재마에게 듣고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주변에도 연로하신 분들이 파킨슨병으로 고생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분들은 거동 자체가 힘들어지고 자리보전만 하는 상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에 반해 아버지는 노환으로 인한 운동 능력 저하나 근육량이 떨어지는 정도라고 생각을 해왔던 그녀였다.
형제들도 이제 아버지가 연로하시니 약해지셨다고만 생각했지, 병이 있을 것이라 생각지도 못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억지로 자신이 유명하다는 한의원으로 모시고 온 것이 다행인 것인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처한 불운한 소식을 알게 된 것인지 얼떨떨할 뿐이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이제 연로하셨고…….”
“네. 저희도 그냥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래도 저희 아버지는 여기까지도 버스 타고 모시고 왔어요. 거동이 불편해서 외부 활동이 힘들다거나 하시지는 않다고요. 그래도 파킨슨병이에요?”
연실은 믿기지 않아 아버지의 병을 인정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대부분의 보호자나 당사자들은 자신이 놓인 큰 질병 앞에서 처음에는 인정하지 못하고 부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파킨슨병은 병환마다 나타나는 양상이 조금씩 다르기는 합니다. 한의학적인 치료가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전문내과를 찾아가셔서 치료받으시면 병의 진행 정도를 늦추시는 정도는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정말이에요? 저희 아버지가요?”
아직도 믿기지 않는지, 재마가 소견서를 쓰는 사이에도 연실은 아버지의 상태를 되물었다.
사실 유명하다는 한의사라 찾아오기는 했지만, 연실이 보기에는 재마의 진료가 짧게 진맥을 짚은 정도였다.
‘유명하다고 해서 찾아왔는데, 아닐 수도 있잖아. 기계로 정밀 검사를 한 것도 아니고…… 피검사를 한 것도 아니고…….’
인정하지 못하는 연실의 표정만큼이나 그녀의 속마음도 재마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은 그래도 멀리까지 오셨으니, 침과 물리치료를 받고 귀가하시도록 하겠습니다.”
소견서를 프린트해 연실에게 건네며, 먼저 처치실로 이동해 있는 연실의 아버지 곽정팔이 의심하지 않도록 이야기했다.
“근데 왜 저희 아버지 앞에서는 병명을 이야기하지 않으신 거죠?”
연실은 재마가 정팔의 몸 상태를 알고도 정확히 이야기하지 않고, 처치실로 이동시킨 것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어르신은 분명히 본인의 몸에서 고칠 수 없는 병이 생겨났다고 아신다면 오늘 해드릴 침 치료조차도 받지 않으시고 가신다고 하셨을 겁니다. 아마 전문내과에 가자고 해도 가지 않으실 테죠.”
“그걸 어떻게…….”
재마는 자신이 읽은 정팔의 속마음을 딸에게 전달하고 싶었지만, 그가 읽은 그대로 전달을 할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병 앞에서 자신의 상태보다 자식의 앞날을 걱정하시기 때문이죠.”
평소 어르신을 상대로 진료를 보는 재마였기에 알 수 있고, 보호자에게 설명이 가능한 일이었다.
부모님 중, 한 분을 먼저 보내 드리고 남은 한 분마저 싸우기 힘든 병마를 눈앞에 두게 된 처음 겪는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연실은 재마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병은 인정할 수 없지만, 조금 전 재마가 건넨 이야기는 가슴에 와 박혔다.
“흐흑…….”
잠시간 꾹 참고 있던 눈물이 한번 흐르기 시작하니 연실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하는 참을 수 없는 눈물을 주룩주룩 흐르기 시작했다.
“곽정팔 님 증상에 따른 치료 시간은 45분에서 50분 정도 걸릴 겁니다.”
재마는 갑 티슈를 연실에게 전달하고는 먼저 진료실을 빠져나와 처치실로 향했다.
자신의 앞에 놓인 갑 티슈를 뽑아 얼굴을 파묻은 연실은 주인 없는 진료실에서 눈물이 스스로 그칠 때까지 한없이 울 수밖에 없었다.
* * *
“아 오래간만에 출근해서 내 자리에 앉으려니, 앉기 싫어 죽겠네, 진짜.”
연아는 근 3주 만에 정한한방병원으로 출근을 하는 길의 발이 무거워 잘 떨어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정한한방병원의 이미지를 잘 포장하라고 자신을 홍보팀장 자리에 앉힌 건 작은 아버지였고, 연아는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 일을 한 것밖에 없는 데 책임은 자신이 지고 자숙을 해야 했던 상황이 아직도 이해하기 힘든 연아였다.
결과적으로는 3주간 회사도 나오지 않고 자숙이라는 이름으로 푹 쉬는 기분이기는 했지만, 한방병원 입구에서부터 자신은 잘못한 것도 없는 데 인사를 건네는 직원들을 만날 때마다 불편한 시선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여간 가진 것 없는 것들이 가진 사람을 시샘하지.”
연아는 불편한 시선에 기분이 나빠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새로 산 명품 백을 내팽개쳤다.
“김 대리. 나 아이스 아메리카노 좀. 얼음 왕창 넣어서!!!”
만만한 사람이 김 대리인 연아는 다시 문을 열고 직원들이 있는 쪽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어설프게 자리에서 일어난 정윤주가 말을 더듬으며 연아에게 이야기했다.
“티…… 팀장님? 3주 전에 김대리 님 사표 받으셨잖아요.”
“사표? 아, 김 대리 사표 냈구나. 너무 오래간만에 회사에 나왔더니 깜빡했네. 그럼 정윤주 씨가 내 커피 준비하면 되겠네. 들었지?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얼음 좀 넣어서 가져와. 얼음 가득!”
마치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기라도 하듯 제 할 말만 하고 문을 쾅 닫아버리는 연아의 뒤로 직원들이 수군거렸다.
“김 대리를 그렇게 커피 셔틀 시키더니…… 여기가 카페야 뭐야?”
“윤주 씨. 윤주 씨는 카페 가서 커피를 저렇게 시켜? 우리를 카페 직원으로도 안 보는 거야. 만만한 거지.”
“휴, 자숙인지 휴가인지 3주 동안 박 팀장님 히스테리 안 받아줘도 돼서 편했는데…… 이제 그것도 끝이겠죠?”
윤주는 자신을 콕 집어서 커피를 가져오라고 시킨 탓에 어쩔 수 없이 커피머신이 있는 탕비실로 향했다.
자신이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동안 이 일을 담당했던 김 대리가 보고 싶을 정도였다.
“근데 김 대리는 갑자기 사표 내랜다고 그냥 사표를 내냐, 이의 신청도 없이.”
김 대리와 입사 동기였던 최 대리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간 박연아가 팀장으로 있으면서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4년이나 다닌 직장이니 하루아침에 그만두게 되는 것이 억울할 만도 했는데, 군말 없이 퇴사를 선택한 김 대리였다.
“얼마나 지겨우면 그랬겠어. 하, 다음 타자는 누구인 거지? 우리 중 한 사람을 타깃으로 삼겠지?”
홍보실에 남아 있는 직원 셋 중 한 명은 분명 김대리의 역할을 맡아해야 할 텐데 그것이 누가 될지 조마조마한 눈치였다.
서로의 눈치만 보는 사이, 탕비실에 갔던 윤주가 얼음을 가득 넣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나왔다.
“저는 진짜, 김 대리님처럼 참지는 않을 거예요.”
“참지 않으면?”
그동안 잠자코 시키는 일은 다 했던 김 대리처럼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윤주의 말에 두 사람이 귀를 쫑긋했다.
“차라리 대리 달기 전에 회사를 그만두는 게 낫죠. 월급을 올려주는 것도 아니고.”
보란 듯이 그만둘 것이라는 듯 큰소리를 친 윤주는 연아의 방에 노크를 하고 커피를 건네러 들어갔다.
“어, 윤주 씨.”
“네. 팀장님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얼음 가득 넣어왔어요.”
“응응. 잘 왔어. 잠깐 여기 있어볼래?”
윤주는 커피만 두고 연아의 방을 나서려다 잠깐 서 있으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서 있었다.
“그동안 3주 사이에 뭐 특별한 일 없었어? 3주 동안 어떻게 메일 한 번을 안 보내. 팀장인 내가 알아야 할 특별한 일은 없었던 거야?”
그래도 회사에 나왔으니 일은 해야겠다 싶었는지, 3주 동안 자숙은커녕 여행을 다닌 것을 뻔히 알고 있는 데 일이 없었는지 묻는 연아였다.
“대표실에서 내려온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최 대리님이 들으신 바로는 요즘 새 의학 예능에 출연하실 예정이라고 하십니다.”
“의학 예능?”
상도의 방송 출연 사실이 사실일 때 정한한방병원 소속 한의사들이 방송 출연을 하게 되면 홍보자료를 배포하는 것도 연아가 맡은 팀의 할 일이었으니 그사이 생긴 일이라면 일이었다.
그동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듯, 연아가 되묻자 윤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직원들은 연아의 아버지인 상철을 통해 연아가 알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네. MBX에서 하는 예능이라고…….”
“정확한 거야? 작은아버지가 스케줄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이제 시작하는 의학 예능을 나가셔. 시청률이 어떻게 될 줄 알고.”
만약 신생 프로그램을 나갔다가 몇 회 찍지 못하고 폐지된다면 이미지에 타격이 올 수 있다는 듯 연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된다면 홍보팀에서 홍보 기사를 냈던 것도 민망한 상황이 될 것이 뻔했다.
“다른 한의사가 나가는 거겠지. 3년 차 정도 되는 선생님 중에서…….”
연아는 지금 정한한방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의사들의 목록을 쭈욱 살폈다.
MBX 측에서 한의사 출연 제의가 들어온 것이라면 상도가 아니더래도 다른 한의사가 출연을 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신생 프로그램이니까 얼굴 안 알려진 선생님 중에…….”
연아가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에 윤주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근데 그것도 확정은 아니라고…….”
“뭐? 확정이 아니라고? 확정도 아닌데 대표님이 직접 출연한다는 이야기가 비서실에서 나왔다는 이야기야?”
곰곰이 생각하며 굴리던 펜대를 어이없다는 듯, 연아는 툭 하고 내려놨다.
“네. 인터뷰가 아직 남았다고 하시더라고요.”
“인터뷰?”
들을수록 가관이라는 듯 연아는 콧방귀를 꼈다.
정한한방병원 대표가 신생 프로그램에 출연을 하려면 삼고초려를 해도 모자랄 판에 지금 인터뷰를 통해 붙고 떨어지는 것이 남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PD가 찾아왔는데, 대표님도 알겠다고 응하셨다고…….”
PD와 이미 미팅을 한번 했다는 것을 보니 과연 허투루 나온 이야기는 아닌 모양이었다.
연아는 굴리던 펜을 다시 집어 들며, 윤주를 바라봤다.
“후보 패널이 누구인데?”
신생 프로그램에서 정한한방병원 박상도에게 직접 찾아와 제안을 한 만큼, 상대방도 상도에 견줄 만한 경쟁 상대일 것이라 생각한 박연아가 물었다.
“그…… 그게…….”
윤주는 박 팀장이 얼마나 이재마를 견제하고 있는지 알기에 잠시 뜸을 들였다.
“누구인데, 혹시 뭐 한의사 협회장 이런 거 아니지?”
대한민국에서 박상도와 견줄 만한 한의사가 없지만, 그래도 있다면 감투를 쓰고 있는 협회장 정도는 되겠거니 하며 연아가 물었다.
두 사람이 붙는다면 당연히 상도가 출연을 하는 것이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을 테니 말이었다.
“명의한의원 이재마 원장이라던데요.”
윤주는 자신에게 불똥이 튈지도 몰랐지만, 자신이 전해 들은 대로 전달을 했다.
“뭐? 이재마?”
윤주의 예상처럼 연아는 자신이 들고 있던 펜을 아까와는 다르게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