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115화
정성주 PD는 해인동 명의 한의원에서 이재마와 짧은 미팅을 갖고, 곧장 정한 한방병원 본원으로 움직였다.
전국 각지에 사람이 모인다 하는 곳에는 정한 한방병원이 자리하고 있듯, 그 대표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미리 비서실에 연락을 취하고, 박상도의 스케줄을 맞춰 딱 한 시간 남짓의 미팅시간을 뺄 수 있었다.
‘이렇게 바쁜 양반이 격주로 촬영을 어떻게 하시려고…….’
사실 격주로 촬영을 하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을 수 있겠지만, 방송이라는 것이 상황이 어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드물지만 다른 패널의 사정으로 촬영 날짜를 옮길 수도, 촬영 시간이 길어질 수도 있었다.
최악의 상황에는 재촬영도 감수해야 했는데, 이 스케줄을 박상도가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일단 국장의 지시도 있었고, 꽤 오래 방송을 했었던 박상도인 만큼 어느 정도 감당할 생각이 있으니 인터뷰도 받아들였다는 생각을 가지고 미팅 장소로 향하는 성주였다.
“MBX 정성주 PD입니다. 박 대표님 뵈러 왔는데요.”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비서는 성주를 잠시 대기시키고 대표실로 연락을 취했다.
잠시 임원실 복도를 통해 보이는 서울 전경을 내려다보며 성주는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 미팅을 하고 온 명의 한의원과 지금 자신의 눈을 호강시켜주듯 서울 시내 전경을 모두 보여주는 정한 한방병원.
같은 의학으로 환자들을 대면하고 있지만 두 한의사가 지향하고 있는 바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PD님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성주가 창밖으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는 사이, 박상도의 비서는 성주를 안내하겠다며 인기척을 냈다.
박상도와 첫 대면을 하는 성주는 괜스레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대표실 안쪽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정 PD님.”
“안녕하십니까. MBX 정성주입니다.”
“네. 국장에게 연락 미리 받았습니다.
미리 국장과 이야기가 되어 있던 박상도라 오늘 그의 방문이 미리 국장에게 보고가 돼 있는 모양이었다.
직접 발로 뛰어 패널을 만나고 있는 성주로서는 꽤나 불편한 상황이었다.
“박상도 대표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성주는 임원실 복도보다도, 더 넓게 펼쳐지는 서울 전경이 보이는 대표실을 등지고 있는 박상도의 모습을 보니 영광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허허. 정 PD도 참, 영광까지야. 이쪽으로 앉으세요.”
“네.”
상도가 손짓하는 자리에 앉은 성주는 앞 미팅과는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국장님 말씀을 듣고, 저뿐 아니라 다른 제작진들도 살짝 의아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신 박상도 대표님이 굳이 의학 예능에 출연을 하신다고 해서요.”
성주가 질문한다고, 사실대로 자신의 본심을 내놓지는 않을 테지만 질문을 한 성주였다.
“별소리를 다 하십니다. 정 PD. 대한민국에서 모든 것을 다 이뤘다니요. 아직도 앞으로 갈 길이 먼데요.”
전국에 체인 한방병원을 가지고 있고, 서울 한복판에 전경을 내다보이는 곳에 대표실을 가진 만큼 모든 것을 다 가진 상도가 하는 대답이었다.
이 한마디로 박상도의 열정과 열망이 얼마나 큰지 성주는 알 수 있었다.
“요즘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환자들과 직접 대면을 한 지 오래된 탓도 있고, 너무 한방병원 몸집 부풀리기에 힘만 써서 그런지 문제점이 드러나더군요.”
상도는 사업 중심으로 움직이던 자신이 다시 방송 활동을 준비하는 이유를 성주에게 털어놓았다.
“이 자리, 어떻게 생각합니까?”
상도는 자신의 소파 팔걸이를 탁탁 치며 성주에게 물었다.
“글쎄요. 회사에 입사해 열심히 주어진 일을 하고 있는 저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자리죠.”
“이 자리라는 것이 참 묘해요. 남들은 부러워하는 자리지만 올라오기도, 지키기도 힘들죠.”
상도는 자신이 그 자리를 오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또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또 다른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하는 부담감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내포했다.
“예전에 의학 예능도 출연하시고 방송도 많이 하셨으니 하시겠지만, 저희 목표는 하나입니다. 얼마나 시청자들의 시선을 끌어 올 수 있느냐. 그리고 시청자들에게 얼마나 유익한 의학 정보를 제공하느냐.”
“물론 잘 알죠.”
성주의 말에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 상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의학 한 길로 정한 한의원을 대한민국 제1의 한방병원인 정한 한방병원으로 키워내신 박 대표님에 대해 궁금해하는 시청자들이 많을 겁니다.”
“하하. 그럼 제가 적임자겠군요.”
“다만, 저희 제작진이 걱정하는 부분은 시청자들의 관심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시청자들의 니즈(needs)를 잘 읽는 지도 중요하죠. 저희가 우려하는 것은 대면 진료를 하신 지 꽤 되어…….”
“환자들의 니즈를 몰랐다면 지금의 정한 한방병원이 어떻게 있겠습니까.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박상도는 정 PD가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한 가지 미리 말씀드릴 게 있는 데…….”
“편하게 말씀하세요.”
또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하다는 듯, 들고 있던 찻잔을 내린 박상도가 성주를 바라보았다.
“패널 후보가 한 명 더 있습니다.”
“하하. 제가 그 후보자랑 경쟁을 해야 한다, 이 말씀이군요.”
“다른 건 아니고 다른 제작진들과 인터뷰를 한번 해보셔야 합니다. 저희 프로그램에 어떤 분이 더 잘 맞을지 다른 제작진들과 협의를 해야 해서요.”
“그럼 다른 후보자는 어떤 인사인가요?”
박상도는 자신과 경쟁을 할 만한 한의사가 있겠나 하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대표님이 아실지 모르겠지만, 명의 한의원 이재마 원장님이십니다.”
성주의 입에서 명의 한의원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성주를 바라보던 박상도의 이마에 균열이 일었다.
이야기를 들은 박상도는 애써 담담하게 또 허허 웃어넘겼다.
“하하. 나도 알지요. 요즘 잘 나간다는 젊은 한의사 아니십니까.”
“아시는군요. 아무래도 시청 층을 다양화하는 것도 패널 후보를 뽑는 데 영향이 있었습니다.”
상도는 내려놓았던 찻잔을 다시 들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좋습니다. 젊은 피랑도 경쟁도 해보고 해야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금 전, 자신이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도전도 불사하고 있다는 뜻을 이야기했던 박상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 * *
“한의사 양반, 내가 나이도 이제 있고 온몸이 성한 게 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80 가까이 되어 보이는 어르신이 진료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으면서 한탄을 하듯 재마에게 자신의 몸 상태를 털어놓았다.
어르신을 모시고 온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성은 자신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것을 처음 보는 한의사에게 털어놓는 아버지의 모습에 울컥해 눈물이 와락 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참는 모습이었다.
“네. 이제 저희 한의원에 찾아오셨으니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내 살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도 없으니 괜히 자식들 걱정 시키고 싶지는 않아서 안 오겠다는데도 억지로 오자고 해서…….”
자신의 몸이 성치 않은 곳을 꼽자니 한두 군데가 아니고 그곳을 모두 치료하자니 돈도 걱정, 자식들에게 폐를 끼칠까 걱정이라 참고 지내던 날들을 보낸 어르신은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아버지. 그런 소리 하시지 말라니까요. 하루를 살아도 건강하게 사셔야지.”
딸은 끌어 오르는 눈물을 애써 꾹 누르며 아버지에게 건강하신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자식들에게 폐끼치지 않고,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찾아오시는 곳이 이곳입니다. 제가 어르신 건강 잘 봐드리고 치료해야 할 곳 콕 집어서 그곳만 말씀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나이가 많다고, 여기 저기 성한 곳이 없다고 과잉 진료로 치료비만 많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 연세가 있는 어르신들이 가장 걱정하는 부분이었다.
재마는 어르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를 바라보며 따뜻하게 이야기를 했다.
“어디 한번 봐보시오.”
어르신은 자연스럽게 왼쪽 팔목을 재마에게 건네며 이야기했다.
-환자의 동공을 인식합니다.
이름 : 곽성팔
나이 : 87세
중뇌의 흑색질, 도파민 세포 사멸 진행 중.
안정떨림, 운동완서 진행 중
이곳저곳 성한 곳이 없다 말을 했던 성팔의 건강상태를 읽은 재마는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이 읽어낸 그의 건강상태를 다시 한번 속으로 읊었다.
이미 연로해 몸의 굴곡된 상태가 꽤나 진행되어 있고, 힘이 없어 작아진 목소리.
나이 탓을 하던 힘 없는 손과 다리. 그리고 손과 다리의 떨림.
전형적인 퇴행성 질환인 파킨슨병의 증상이었지만 환자도 보호자도 그저 나이 탓으로 넘겼던 증상들이었다.
재마는 자신의 상태가 혹여 나쁘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는 환자와 보호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의사의 특성상 연로하신 어르신들을 많이 진료하고 있지만 이런 순간이 가장 어려운 순간이었다.
“어떻습니까. 내 상태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휴식하실 때 손과 발이 규칙적으로 떨리시는 경우가 있죠?”
“그야 이제 먹을 대로 먹었으니 손에 힘이 안 들어가니 그렇지.”
“네. 그렇죠.”
역시나 노환으로 인한 증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정팔이었다.
“아버님, 목소리가 작아지신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재마는 이번에는 보호자를 올려다 보며 물었다.
“목소리요?”
노환의 자연스러운 증상으로 인식하고,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묻자 딸은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그…… 글쎄요. 워낙 자식들에게 말수도 적으시고 조용하신 분이라……. 거기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말을 더 아끼셨거든요.”
어머니는 돌아가셨어도 아버지라도 잘 돌봐드려야 한다는 마음에 신경을 쓴다고 했지만, 아버지의 목소리까지 신경 쓰지 못했던 딸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르신 말씀처럼 연세가 있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모습들입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되겠어요.”
재마는 일단 정팔에게는 그의 상태를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어쩌면 퇴행성 질환이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질환일 수 있겠지만 환자에게는 연로한 노인에게는 사형 선고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살아온 날보다 죽을 날이 가깝다며 입버릇처럼 말한다 해도 점점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쉽겠는가.
재마는 정 실장에게 곽정팔 환자를 처치실로 안내하게 하고, 그의 딸과 단둘이 진료실에 남았다.
“저희 아버지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가요?”
연로한 아버지를 모시고 한의원을 오기까지 오랜 노력과 고민을 했던 것이 눈에 보이는 딸에게 재마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한의학적인 검사로는 정확한 진단을 하기에 다소 어려움이 있습니다.”
정확한 기계로 확인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만 믿으라고 할 수 없는 재마는 솔직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