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113화
오전 9시.
삐걱 소리를 내며 오늘도 어김없이 갑순이 명의 한의원에 출석 도장을 찍었다.
“어서 오세요.”
매일같이 찾는 갑순에게 항상 같은 인사를 하는 정 실장이 눈인사를 건넸다.
하루라도 갑순이 한의원에 오지 않으면 그녀의 안부가 궁금할 정도였다.
“지난번에 왔던 눈 퍼런 외국인 양반은 어디가 아파서 왔디야?”
명의 한의원의 일이라면 빠삭하게 알아야 속이 시원한 갑순은 오늘도 어김없이 한의원에 와서 정 실장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동안 몇 번이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당연히 정 실장이 안 된다고 할 것을 잘 알기에 물을지 말지 고민했지만 역시나 묻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얼굴이었다.
“네?”
“그 있잖어. 지난번에 나 있을 때 왔던 외국인. 외국인도 한의원에 오고 참말로 신기해서…….”
며칠 전부터 한의원을 찾은 패트릭을 뜻하는 것을 알아챈 정 실장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 진갑순 님 아시면서. 환자 정보는 말씀드릴 수 없어서요.”
“에이. 누가 정보 알려달라고 했나. 어디 아픈가 궁금해서 그렇지. 외국인이 한의원까지 오고.”
서양인인 외국인이 한의원을 제 발로 찾아온 것이 신기하지 않냐는 듯 갑순은 오히려 되물었다.
한의원을 십수 년간 내 집처럼 드나드는 그녀였지만 외국인을 본 건 처음이기에 꼭 물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외국인이라고 다른가요. 환자는 다 똑같죠.”
정 실장은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웃어 넘기려 했다.
자신도 환자로 외국인을 상대하는 것은 처음이라 처음에 놀랐지만, 오히려 진료를 보는 이재마 원장은 당황하지도 않고 다른 환자들과 똑같이 진료를 보았다.
더구나 처방도 특별하지 않았다.
“하여간 우리 원장님이 참말로 용혀. 용혀. 그렇지?”
아직 명의 한의원을 물려받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자리를 잡은 것은 물론, 너튜브 방송 운영으로 이름을 알리고 이제는 외국인까지 명의 한의원을 일부러 찾아오는 것이 꽤나 갑순은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런디, 요즘 강산 총각이 잘 안 보이네?”
갑순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한의원을 둘러보며 조용한 것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 강산 님은 요즘 한의사 시험 때문에 바쁘셔서 한의원에는 잘 안 오세요.”
“아, 시험 준비한다고? 아이고. 잘 되었네. 나는 또 어렵게 한의사 공부해 놓고 안 허는 줄 알았더니.”
“설마요.”
“부모 속이 얼마나 타겄어. 동기들은 한의원 원장도 하고, 또 새로 오신 원장님도 동기라며. 다 제 밥값 허는디.”
갑순은 매일 한의원에 올 때마다 자신을 친구처럼 반겼던 강산이 없는 것은 서운한 일이었지만, 그의 부모를 생각하면 그가 이번에는 꼭 한의사 면허시험에 붙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휴. 시간 날 때 내가 몸에 좋은 음식 좀 해줘야겠구먼.”
갑순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음식밖에 없으니 그런 것으로라도 마음을 전해줘야겠다며 혼잣말을 했다.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이제는 자연스럽게 진료실이 아닌 처치실 1로 들어가 이재마 원장이 오기를 기다리는 갑순이었다.
* * *
아침 일찍 남편보다 더 먼저 준비를 해서 집을 나선 공정심은 28년째 오가는 집과 한의원 길을 오늘도 어김없이 걸었다.
평소에는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점심 준비까지 해서 집을 나섰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눈이 늦게 떠져 점심 준비는 하지 못한 그녀였다.
점심을 준비하지 못한 탓에 마음이 찝찝해서일까. 정말 몸이 좋지 않은 걸까 심상치 않은 기운이었다.
“휴. 나도 늙나. 매일 같이 걷는 이 길이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 건지…….”
정심은 자신의 걸음으로 5분이면 걸어가는 한의원까지 가는 길이 오늘따라 멀게만 느껴졌다.
쉬었다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조그마한 동네에서 자신의 얼굴을 훤히 다 아는데 길바닥에 앉아 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한의원 오픈 시간도 되기 전에 줄지어 서 있는 대기 환자들을 생각하면 여유 있게 걸을 시간도 없었다.
환자들 생각에 다시 마음이 급해진 정심은 무거운 발을 억지로 떼어 속도를 내어 걸었다.
“일찍 오셨네요.”
한의원이 보이자마자, 밖에서 기다리는 환자들의 모습에 더욱 속도를 낼 수밖에 없었던 정심은 항상 숨이 차는 상태로 한의원에 도착했다.
한의원 유리문에 까치발을 들고 열쇠를 끼워 넣은 정심은 힘껏 돌려 문을 열었다.
“우리는 일찌감치 왔지.”
“공 실장. 어디 안 좋아? 안색이 안 좋네.”
“저요? 아뇨. 아침 일찍이라 조금 피곤해서 그렇죠.”
문을 열자마자 대기하던 환자들은 정심이 안으로 들기도 전에 앞다투어 한의원으로 들어갔다.
빨리 가야 자신이 원하는 베드를 차지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매일같이 얼굴을 보는 탓에 정심의 안색이 안 좋은 걸 알아채는 환자들은 안색이 많이 안 좋다며 무슨 일이냐며 한 마디씩 물어봤다.
정심은 까칠한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매만지며 어색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환자들이 먼저 알아보고 한마디씩을 하는 걸 보니 ‘평소에 안보던 거울이라도 봐야 하나.’라는 생각이 드는 정심이었다.
“하이고. 한의원 사모도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여. 그렇지?”
벌써 십수 년을 봐온 환자들은 쉬는 날도 없이 꼬박꼬박 한의원 문을 열고 닫는 역할을 모두 해내는 정심을 보며 안타깝다는 듯 혀끝을 내찼다.
사실 정심에게는 한의원 문을 열고 닫는 일보다 환자들이 알게 모르게 해야 할 일이 더 많은 정심이었다.
시골 마을에 있는 한의원이라 그런지 직원 구하기도 쉽지 않아 한 명 있는 직원이 그만두면 그 몫이 고스란히 정심의 몫이었다.
“원장님이 때마다 약도 좀 지어주시고 건강도 챙겨주시지?”
“아이고. 그걸 말해 뭐해. 안사람 챙기는 건 원장님밖에 없겠지.”
정심이 무엇이라 대답하기도 전에 당연한 말을 한다며 서로 하하 호호 이야기를 하며 각자 처치실로 들어가 베드로 눕는 환자들이었다.
이제는 워낙 많이 다녀서 문만 열어도 직접 빈 베드를 찾아 들어가 장판도 스스로 켜고 원장이 출근할 때까지 기다리는 환자들이었다.
그래도 직접 환자를 안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일거리가 줄어들었다고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정심이었다.
“휴.”
하루의 시작을 어김없이 시작했다는 생각에 정심은 한숨이 절로 쉬어졌다.
문을 열었다고 일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자리인 데스크에 앉기 전에 진료실인 원장실부터 물걸레질을 하고 와야 했다.
그래야 남편인 원장이 출근을 해 환자를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문득 한의원 시계를 올려다보니 9시 5분 전이었다.
5분 후면 남편인 강 원장이 도착할 시간이었다.
힘든 몸이었지만, 손걸레를 들고 화장실로 간 정심은 아직 걸레를 빨기에는 조금 찬물이었지만 손으로 걸레를 비벼 빨아 나왔다.
“아이고. 내가 오늘은 좀 늦었네.”
평소 정심이 한의원 문을 열기도 전에 미리 대기를 하던 어르신이 오늘은 늦게 온 탓에 다른 환자들이 먼저 베드를 차지한 것이 안타까운지 한의원 문을 열자마자, 안타까운 한마디를 내뱉었다.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
대기실에 앉아서 기다려야 된다는 말에 의기소침한 얼굴을 한 환자의 모습을 보는 것이 정심의 마음엔 좋지 않았다.
환자에게 안내를 하고, 이제 원장실로 들어갈 생각이었던 정심이 돌아서는 순간 눈앞이 핑하고 도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 몸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데 역시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라 느끼는 찰나 눈앞이 캄캄해지며 정심은 자신도 모르게 쓰러졌다.
“오메. 이게 무슨 일이여. 아이고. 여기 사람 쓰러졌어요!!!”
대기실에 앉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려던 환자는 정심이 쓰러진 모습에 숨이 넘어갈 듯 도움을 요청했다.
각자 베드에 자리를 차지하고 누워 뜨거운 매트에 몸을 녹이고 있던 환자들은 밖에서 일어난 소동에 화들짝 놀라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공 실장! 이게 무슨 일이야.”
“아이고. 누가 원장님 번호 아는 사람 없어?”
“원장님은 무슨, 쓰러졌는데 119 불러야 하는 거 아니여?”
우왕좌왕하는 사이, 한의원 원장이 한의원에 도착했고 자신의 한의원에서 소란이 일어난 모습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 인파 속을 뚫고 들어왔다.
“아이고. 원장님 오셨네. 공 실장이 쓰러졌어요.”
“안색이 안 좋아 뵈드니, 이게 무슨 일이래.”
“네. 알겠습니다. 누가 119에 좀 연락 좀 해주세요.”
원장은 자신의 안사람이자, 한의원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정심이 쓰러진 모습에 당황해 상태를 살폈지만, 마냥 정심만 챙길 수는 없는 그였다.
“병원으로 옮기면 그때 진료 보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원장인 강병진이 환자들을 둘러보며 괜찮냐는 의사를 물어오자 환자들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안사람이 쓰러졌는데도 진료를 볼 생각을 하는 병진이 대단하면서도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아, 네. 그러셔야죠. 에고. 그런데 공 실장 괜찮겠죠?”
공 실장이 걱정이 되는 환자들이 그녀의 상태를 걱정되는 얼굴로 살피며 물었다.
“병원만 가면 괜찮을 겁니다.”
병진의 표정은 정심이 걱정이 되어 어두웠지만 괜찮을 것이라 환자들을 진정시켰다.
* * *
강산은 오래간만에 고향으로 오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오래간만에 가는 길이었지만, 설레는 마음을 가질 새도 없이 조마조마했다.
이른 아침부터 어머니가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곧장 고속터미널로 달려온 그였다.
“하…….”
버스에 자리를 잡고 나서야 그제야 조금 숨을 돌릴 수 있는 그는 어머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지금 버스 탔어요. 조금만 기다리고 계세요.”
-오기는 뭘 와. 그냥 잠깐 피로해서 쓰러진 거야. 너 시험도 얼마 안 남았잖아.
정심은 외아들인 산이가 지난해 한의사 시험에 불합격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올해 다시 준비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내심 안심을 하던 차였다.
시험을 한 달 남짓 앞뒀는데, 자신 때문에 시간을 내서 고향을 내려온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럼 하나뿐인 아들이 엄마가 병원에 입원했는데 안 가요?”
강산은 병원에 올 필요가 없다며 공부를 하라는 어머니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목에 힘이 들어갔다.
-어휴. 공부하는 데 시간 뺏고 정신 뺏어서 그렇지.
“후…….”
강산은 자신의 상태보다 아들을 먼저 살피는 어머니의 한마디에 한숨과 눈물이 절로 나왔다.
그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며 전화를 끊었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일상을 시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수없이 해 왔던 강산이었다.
작년 시험에 불합격하고, 다른 일을 찾으며 방황했던 것도 그 탓이었다. 그래도 마음을 잡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지만 어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에 다시 마음이 흔들리는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