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111화
-시대를 거스른 서울의 한의원.
-5대째 이어오는 가업, 한의학의 긍지를 가지고 환자와 매일 만나는 이재마 원장.
비서가 가져다준 스크랩을 읽은 박상도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구겨 버렸다.
결국 이렇게 명의 한의원이 5대째 대를 이어오는 한의원이라는 이야기가 퍼져 버렸다.
지금까지 4대를 이어 한의원을 운영한다는 것을 시작으로 정한 한방병원을 25년 가까이 맡아 확장시켜 온 그였다.
불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쌓아온 이미지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는데 6개월 전부터 어디에서부터인가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시작이 이재마인지, 구 원장인지 알 수 없었지만, 치밀어 오르는 화가 박상도의 얼굴을 검붉게 만들 정도였다.
“대표님, 저희 쪽도 이제 잠잠해졌으니 다시 기사를 준비하면 되지 않을까요?”
“뭐. 저쪽은 5대째 이어오고 있다는데 우리는 4대째라는 이야기로 저 앞에서 주름이라도 잡게?”
가까스로 화를 참고 있는 듯 보이는 박상도에게 본전도 찾지 못할 이야기를 한 비서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지금까지 전통을 이어 왔다는 이미지는 이제 쓸 수 없게 된 상황이었다.
박상도는 화를 참으며 한참 고민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오래간만에 의학 방송이라도 좀 잡아봐.”
“의학 방송이요?”
박상도는 처음 한방병원을 확장하며 톡톡히 덕을 봤던 의학 방송을 다시 찾을 생각이었다.
아직까지 정한 한방병원 소속 의사들이 종종 TV에 얼굴을 비추기는 하지만, 대표 원장인 자신이 직접 나가서 한마디를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거기에다 방송 생활을 모두 접고 경영에 집중하겠다 발표한 이후에도 그를 섭외하려는 연락이 쇄도했었으니 마음만 먹으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박상도의 말에 비서는 조금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 그게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
“왜? 또 뭐가 문제야?”
“지난번에 고정으로 출연하던 프로그램 하차하시면서 PD들 사이에서 반응이 좋지 못했었어요. 거기에다 경영에 집중하신다고 들어왔던 섭외들도 모두 거절한 지 오래된 상황이라…….”
“PD들이 무슨 상관이야. 내가 직접 국장한테 전화라도 넣어야 돼?”
박상도는 자신이 직접 나서야겠냐는 듯, 비서에게 되물었다.
안 되면 되게 하겠다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듯, 박상도는 눈썹을 휘었다.
“제가 일단 먼저 알아보고 스케줄 잡겠습니다.”
비서는 박상도의 지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게 다 형님 때문이야. 괜히 면허증에 잉크도 안 마른 녀석 신경 쓰느라…….”
“박연아 팀장은 어떻게 할까요?”
비서는 지난 번 일로 아직까지 딱히 일이라는 것을 하지 못하고 있는 연아를 어떻게 할지 물었다.
지난번 일이 지난 지 3주가 다 되어가지만, 자숙을 하라는 말에 회사에 얼굴을 비추기는커녕 정한 한방병원 근처로는 발도 디디지 않는다는 연아였다.
오히려 오래간만에 얻은 휴가라도 되는 듯 SNS에는 전국 핫플을 다니며 사진을 올리고, 쇼핑을 하며 즐기고 지내는 것 같았다.
“그 정도 쉬었으면 됐으니까 다음 주부터는 정상 출근 하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정 비서는 박상도에게 박연아의 SNS 상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하고 싶었지만, 그런 마음을 꾹 눌렀다.
비서가 나가자, 박상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강남 한복판에 24층 빌딩을 올리며 한방병원 간판을 달기까지 꽤 많은 일이 있던 것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상철과 연아가 면허증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녀석에 흔들리고 있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 자신도 불안함에 쫓겨 항상 정한 한방병원을 포장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더 나은 한의원이 될지.’
‘어떻게 하면 한의사들이 우러러보는 한의사가 될지.’
급급해하며 거짓도 불사하던 그였다.
처음 할아버지에게 출신의 비밀을 들었을 때, 다짐했던 것을 떠올리는 상도였다.
* * *
“아이고. 아침방송에 이어 기사들도 많이 나왔는데 이거 그 뭐냐…… 신문지라도 오려서 액자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정 실장?”
폴더폰을 사용하는 갑순이었지만 노인정 동기가 보내 준 인터넷 기사 캡쳐본을 들고 명의 한의원 데스크를 떠나지 않고 한참을 이야기했다.
“요즘은 인터넷 기사는 지면 신문으로는 실리지 않아서요.”
“그래? 그럼 신문지로는 못 보는 겨? 우리 아들한테도 자랑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겠구만.”
신문으로는 볼 수 없다는 말에 갑순은 실망했는지, 의기소침해졌다.
“대신에 이걸 이렇게 꾹 눌러서 저장하시면 다음에 또 확인할 수도 있고…….”
정 실장은 갑순의 폴더폰을 손에 쥐고, 캡쳐 본을 저장하고 큰아들과 작은아들의 전화번호를 찾아 메시지를 보냈다.
“이렇게 보내면 아드님들도 확인할 수 있어요.”
“오메. 참말인가? 어렵긴 해도 동시에 아들들이 다 볼 수 있겠구만.”
갑순은 정 실장이 보낸 메시지에 재마의 기사가 실린 기사가 쏙 들어가 있는 걸 보고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여기가…… 명의 한의원 맞습니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정 실장과 갑순의 뒤로 어색한 한국어가 들렸다.
명의 한의원에 환자들이 많아졌지만 대부분의 환자들이 한국인이다. 외국인 손님을 맞이할 것이라 예상도 하지 못했던 정 실장은 당황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아니, 외국인 양반이 여기를 어떻게 왔댜?”
“네. 명의 한의원은 맞는데…….”
정 실장은 외국인이 들어오며 물은 질문에 답은 했지만 자신이 한국어로 대답하는 것이 맞는 일인지 몰라 그녀 또한 어색한 대답이었다.
“접수? 하겠습니다. Petric.”
“네? 아…… 네. 페트릭.”
“P.E.T.R.I.C”
처음 맞는 서양인 환자에 당황한 정 실장이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자 갑순은 그녀의 그런 모습이 처음이라 웃음을 참지 못했다.
“명의 한의원 살림을 그렇게 오래 맡고도 서양 양반이 오니까 정 실장도 당황을 하는구먼. 나는 이만 갈 테니까 수고하셔요. 페…….”
“제 이름. 페트릭입니다.”
처음 보는 서양인이었지만, 아는 척을 하려던 갑순에게 페트릭이 다시 한번 자신의 이름을 천천히 읊었다.
“페트릭 양반, 치료 잘 받고 가셔요. 여기 원장님 실력 최고. 오케이?”
갑순은 엄지를 척들어 보이며 재마의 실력이 좋다는 것을 손짓으로 표현했다.
“네. 캄사…… 합니다. THANK YOU.”
패트릭도 갑순을 처음 봤지만, 친절하게 자신에게 말을 거는 한국인 노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워…… 원장님.”
밖에서 외국인이 온 듯한 소리가 들리자, 재마가 진료실에서 나왔다.
정 실장은 처음 겪는 당황스러운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재마를 바라봤다.
“페트릭, 반갑습니다. 명의 한의원 원장 이재마 입니다.”
“오, Mr. LEE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Petric입니다.”
페트릭은 자신에게 안내차 다가온 재마에게 자신을 소개하며 손을 내밀었다.
“말씀 많이들었습니다. 오신다는 연락을 듣고 기다렸습니다.”
“감사합니다. Mr. Jeong 소개로 왔습니다.”
류마티스로 고생했던 영원의 직장 상사인 페트릭은 영원의 병세가 호전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앓고 있는 루게릭병에 대해서 검사를 받고 싶은 마음에 명의 한의원을 찾았다.
지금까지 고국인 스웨덴에서도, 한국에서도 대형 병원에서 정기적인 검사와 치료를 받고 있어 병의 진행은 막고 있었지만 병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은 줄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영원의 치료를 한 후, 직장 상사에게 소개를 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의 직장 상사가 외국인이라는 것은 최근에야 알게 된 재마는 미리 루게릭병에 대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외국인을 상대하는 치료도, 루게릭병 환자도 생소한 그였지만 타지에 나와 낯선 한의학에라도 의지하고 싶은 마음으로 명의 한의원을 찾는 페트릭에게 어떻게 해서든 도움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재마는 낯선 환경에 페트릭이 긴장하지 않도록 진료실로 들어가 정 실장이 가져온 쌍화차를 건넸다.
“쌍화차입니다.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지만 드셔 보세요.”
“감사합니다. 쌍화차 좋아합니다.”
한국에 들어와 오랜 시간 근무를 하며 한국 정통차인 쌍화차를 마셔본 경험이 있는 페트릭은 낯설어하지 않고 쌍화차를 한 모금했다.
그의 행동에서 조금은 낯설고 생소한 치료방법인 한의학에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것 같아, 재마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내 병, 고치기 어려운 병이라는 것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Mr. Jeong이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 나도 희망을 가졌습니다. Dr. Lee 내 병도 도와줄 수 있습니까?”
“정영원 환자를 담당하면서도 말씀드렸지만 치료라는 것이 장담을 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나 루게릭병처럼 난치병은 더더욱이요. 하지만 환자분께서 믿음을 갖고 치료를 해보고자 하는 열정이 강하시다면 희망적이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겠네요.”
운동 뉴런의 이상 현상으로 나타나는 루게릭병은 여러 가지 운동장애로 병이 나타나기에 페트릭이 어떤 장애를 가지고 있는 지 재마는 확실치 않았다.
더구나 스웨덴인인 그와 의사소통을 하는 데도 한계가 있을 수 있었다.
“손 한번 주시겠습니까?”
페트릭에게는 낯선 한의학 검진 방법인 맥을 짚었다.
페트릭은 정말 간단하게 손목에 손가락을 얹는 방법으로 자신의 상태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재마는 맥과 함께 패트릭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에메랄드 빛과 짙은 파란 색이 섞인 매혹적인 페트릭의 눈동자였다.
그와 동공을 마주치자, 여느 환자와 마찬가지로 동공인식이 시작되었다.
-이름 : Petric hugeman
나이 : 46세
상지의 근력 약화와 근위축으로 양 손 사용이 힘든 상태.
근력 약화와 근섬유가 자발적으로 수축하는 근섬유속성 연축 발생.
아직 초기 상태를 지나치지 않은 상태라 다행이었지만, 때때로 나타나는 근위축 상태와 근섬유속성 연축 상태가 나타나면서 일상생활에는 충분히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상태 같아 보였다.
“페트릭?”
“Yes. Dr. Lee.”
“종종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필기구를 짚지 못한다거나 하나요?”
“오, 맞아요. 내 병, 손힘이 빠지는 병이에요. 숟가락도 펜도 짚기 쉽지 않아요.”
한 가지 증상만 이야기했을 뿐인테 페트릭은 놀랍다는 듯 두 눈을 번쩍 떴다.
“뉴런에서 나오는 신경에 이상이 생겨서 그렇습니다.”
“내 병도, Dr. Lee 치료할 수 있습니까?”
손만 짚고도 자신의 상태를 파악한 재마에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걸고 싶은지, 패트릭은 간절한 얼굴로 재마를 바라봤다.
“쉽지 않겠지만, 치료해 보겠습니다. 실장님이 안내해 주시는 처치실에서 한번 다시 볼까요?”
재마는 정 실장에게 호출을 해, 페트릭을 처치실로 안내할 수 있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