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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110화 (110/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110화

“평소에 명의 한의원 자주 오시잖아요. 저도 몇 번 보고.”

“그…… 그럼. 우리 구면이재.”

갑순은 정성주 PD가 카메라를 들이밀고 말을 걸자, 평소처럼 명의 한의원에 대해 빠삭하게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정 PD는 막상 카메라를 들이밀면 아무 말도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기에 이해가 갔지만, 그렇게 몇 번이고 명의 한의원을 자신에게 자랑하던, 가장 믿던 환자인 진갑순이 카메라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자 답답한 모양이었다.

“떨지 마시고, 평소에 저한테 하시던 것처럼 명의 한의원 자랑해 주시면 됩니다.”

지난 몇 주간 명의 한의원 주변만 서성이던 사내가 드디어 재마의 허락을 받고 명의 한의원을 촬영한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온 갑순이었다.

성주는 갑순을 진정시키기 위해 두 손을 차분하게 잡았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성주를 바라보던 작가는 인터뷰가 가능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이만큼 명의 한의원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없으리라는 것이 성주의 생각이었다.

“자라앙?”

“네. 자랑이요. 왜 명의 한의원만 찾으시는지, 다른 환자분들은 또 왜 이렇게 멀리서 오셔서 대기도 오래 하시는지. 명의 한의원에 대해 느끼신 것 그대로 이야기하시면 돼요.”

성주는 방금 전, 촬영을 하기 전에도 갑순에게 설명했던 것을 다시 차분히 설명했다.

하지만 갑순은 설명을 생전 처음 듣는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명의 한의원에 대해 할 말이 워낙 많아서…… 말 많이 해도 되나?”

“많이 하세요. 편집할 부분은 저희가 잘 편집할게요.”

한마디도 못 하는 것보다 오히려 말을 많이 해서 편집을 잘하는 게 낫다는 듯 성주가 대답했다.

“편집하면 안 되지. 늙은 노인네가 말 한마디 한마디 하기가 얼마나 힘든데.”

“아, 네. 그럼 길어도 다 말씀해 주세요. 저희가 잘 들어드릴게요.”

“편집 없이 나가야 돼요. 알았죠? PD 선생?”

카메라가 돌아가면 한마디도 못 하면서, 갑순은 자신의 이야기는 편집 없이 쭉 내보내 달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진갑순 어르신 진짜 소문 빠르세요. 해인동에서 제일 빠른 것 같아요.”

미정은 인터뷰를 하는 갑순을 바라보며 소곤거렸다.

“우리 명의 한의원 일에 진갑순님이 빠지면 섭하잖아.”

“명의 한의원에 대해 제일 잘 아시니까, 인터뷰 잘하시겠죠?”

“그럼. 잘하시겠지.”

너튜브도, 지방 방송도 아닌 공중파에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된 경사스러운 일로 방송을 나가게 된다는 생각에 정 실장은 그간 힘들었던 일을 잊을 만큼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명의 한의원 담장 한켠에 있는 5대를 함께 하고 있는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카메라에 얼마나 탐스럽게 담길지 기대가 되었다.

* * *

며칠간 모니터만 들여다보던 성은이 오늘은 외근을 하겠다며 오전에 자리를 비운 지, 몇 시간 후.

다시 사무실로 복귀하는 성은이 사무실 문을 활짝 열어 재꼈다.

“선배, 찾았어요. 찾았어. 이제 박상도 빼도 박도 못할 것 같아요.”

“뭔데 그래?”

몇 달째 정한 한방병원만 파내던 김성은이 사무실로 들어오며 A4종이 몇 장을 흔들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성은의 미소가 얼굴에 걸려 있었다.

“병합경훈 소유주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박상도가 아니었어요.”

“뭐?”

얼마 전 ‘병합경훈’을 세간에 공개하며 문화재 지정을 시킨 박상도의 기자회견 영상도 함께 봤던 귀남은 성은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울시 문화재팀에서 입수한 자료예요.”

성은은 자신이 흔들고 들어온 자료를 귀남에게 건넸다.

정한 한방병원 소유로 문화재 지정이 되었던 병합경훈에 대해 조사하던 중 찾아낸 자료였다.

“문화재 지정을 위해 담당자가 지난 6년간 주기적으로 소유주를 찾아갔어요. 근데 그 소유주가 박상도가 아닌, 경기도 광주에 있는 ‘박재섭’ 씨예요.”

“박재섭?”

“네. 정확히 말하면 박재섭씨가 ‘병합경훈’을 쓴 박시원 선생의 후손이고요.”

“박시원 선생의 후손은 박상도 아니었어?”

귀남은 지금까지 박시원의 후손으로 인터뷰와 기자회견까지 했던 박상도의 상황을 모두 알고 있었으니, 황당할 따름이었다.

“제가 그래서 박시원 선생 후손들을 찾아다녔죠.”

성은은 이제 모든 것을 밝힐 비장의 무기가 있다는 듯, 사진 몇 장과 함께 녹취 파일을 재생시켰다.

-박상도, 그 양반은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에요. 옛날에 뭐 집에서 부리던 종들도 다 양반 성 따라갔으니까. 족보에 찾아보면 알지. 박상도가 있는지, 아님, 박상도의 아버지가 있는지.

연세가 지긋한 것이 목소리에 묻어나는 어르신의 목소리가 기가 찬다는 목소리를 내었다.

-우리 집안 가보인 ‘병합경훈’이 문화재 지정이 되었는데 왜 우리 집안 족보에도 못 오른 사람이 기자회견을 하냐는 말이에요. 집안에서도 말이 많아요. 이걸 바로 잡아야 한다, 아니면 창피하니 그냥 넘어가자.

이번 상황에 혼란스러운 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귀남뿐 아니라 집안 내에서도 혼란스러운 상황이 아직 정리가 잘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왜 그랬냐고 몇 번씩 물어도 입 꾹 닫고 있는 걸 뭐. 근데 돈 아니겠어요. 결국? 집안 가보를 돈에 내어 준거지. 뭐 결과적으로는 그래도 문화재 지정까지 갔으니까 넘어가자는 사람도 있고. 왜 그 돈을 한 사람만 받았냐 따지는 사람도 있고…….

“그러니까 이 어르신 말은 박상도가 돈을 주고, 자기 집안의 가보도 아닌 병합경훈을 매입한 후 자기가 그 집안사람인 것처럼 포장을 했다는 거잖아?”

“포장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으니까요.”

“그럼 4대째 이어오고 있다는 건 진실이야, 아니야.”

이제는 박상도의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는 듯 귀남이 성은에게 물었다.

“그 부분도 지금 알아보고 있어요. 정한 한방병원이 정확히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그리고 4대가 이어오고 있는 것이 맞는지.”

“하, 이게 밝혀지면 진짜 희대의 사기극이다. 사기극.”

자료를 계속해서 믿을 수 없다는 듯 들여다보고 있는 귀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만큼은 박상도가 꼬리를 자르려 해도 쉽게 빠져나가지 못할 만한 상황이었다.

“지난번 영상 이후 떠들썩했던 건, 정말 시작에 불과할 수도 있어요.”

성은은 자신이 생각해도 앞으로 일어날 후폭풍이 가늠이 안 된다는 듯 이야기했다.

* * *

“갑작스럽게 촬영한다고 한의원 내부가 좀 소란스러웠는데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니에요. 다 한의원 일인걸요. 그래도 지난번처럼 좋지 않은 일로 인터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일로 방송에 나가게 돼서 참 다행이에요.”

정 실장이 방송 촬영에 수고를 많이 했다는 생각에 재마는 감사하다는 말을 건넸다.

“우리 한의원 그럼 이제 공중파도 타고 좀 더 유명해지는 거 아니에요?”

“이미 유명한데 더 유명해지려나.”

미정의 말에 효주는 더 유명해질 것도 없다는 듯, 골똘히 생각에 빠진 모양이었다.

재마는 고민을 가지고 있던 것을 직원들에게 말할 때가 되었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명의 한의원을 5대째 이어가고 있는 한의사이자, 명의 한의원을 운영하는 대표 원장으로 고민을 많이 해봤는데요.”

재마의 목소리가 들리자, 명의 한의원이 더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던 직원들이 조용해졌다.

“이제 명의 한의원이 변화를 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과 6개월 전, 처음 명의 한의원에 왔을 때 오래되고 낡은 한의원을 쇄신시키겠다며 직원들의 의견도 묻지 않고 공사를 시작했던 재마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이 시기가 딱 맞는 시기인지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명의 한의원 문화재 지정이 되면서 보존 가치가 높아진 만큼 환자들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는 재마의 말에 모두들 귀를 기울였다.

“명의 한의원 2호점을 진행하는 것이 어떤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네?”

재마의 입에서 명의 한의원 2호점이라는 말이 나오자, 미정과 효주의 눈이 번뜩 뜨이는 듯 상기 되었다.

“정말요? 한의원 2호점이라고요?”

“네. 직원분들이 모두 동의한다는 가정하에 생각을 해보았지만 혹시 반대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진행을 보류할 예정입니다.”

중요한 사안인 만큼 직원들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는 듯, 재마가 이야기를 하자, 효주와 미정이 동시에 손을 번쩍 들었다.

“저는 동의요.”

“저도요!”

그러자 한의사인 정우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바로 어제 동기들이 명의 한의원 2호점은 내지 않냐고 물었었는데 이렇게 빠르게 진행할 줄은 몰랐다.

“저도 동의합니다.”

재마는 이제 최 실장과 정 실장을 바라봤다.

명의 한의원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내도 될 만한 두 사람이었다.

정 실장은 재마의 의견에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겠다는 미소로 대답했다.

“동의합니다.”

재마와 6개월 전, 한의원 리모델링으로 트러블이 있었던 최 실장은 잠잠히 고민을 하는 듯싶더니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주변을 돌아봤다.

미정은 혹여 최 실장이 반대를 해서 2호점이 무산되는 것은 아닌지 조마조마한 얼굴이었다.

평소 무뚝뚝한 인상을 풍기는 최 실장은 오늘도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최 실장님, 얼른 말씀하세요. 최 실장님 밖에 남지 않았어요.”

미정이 최실장을 다그쳤다.

“벌써 내차례입니까?”

최실장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는 듯, 목을 가다듬더니.

그와 어울리지 않는 미소로 활짝 웃었다.

“저도 동의합니다.”

“와아! 그럼 정말 우리 2호점 진행하는 거예요?”

“프랜차이즈 한의원으로 가는 거죠?”

이로써 모든 명의 한의원의 식구들이 명의 한의원 2호점을 진행하는 것으로 뜻을 모았다.

“2호점이 생긴다면 아마도 지금보다도 더 바쁘실 수도 있습니다.”

지금보다 환자를 분산시켜 하루에 진료를 보는 환자 수는 줄어들 수도 있었지만, 2호점을 준비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한의원 식구들의 도움이 없다면 재마 혼자 이뤄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 직원도 더 뽑겠네요?”

“네. 직원도 더 뽑고, 본점에 계시던 선생님들이 2호점으로 가시게 될 수도 있고요.”

“야간 진료는요? 야간 진료 안 한다고 서운해하시던 환자분들도 많아요.”

지금까지 환자들과 대면하며 들었던 의견들을 대표 원장인 재마에게 전달해 더 나은 명의 한의원을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에 직원들의 마음이 급했다.

“모든 직원, 그리고 명의 한의원을 찾는 환자분들이 만족하는 명의 한의원을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 노력해 봅시다.”

“네! 당연하죠.”

홀로 오랜 시간 고민했던 일들을 아무런 반대 없이 받아들여 준 식구들에게 감사한 재마는 앞으로도 명의 한의원을 위해 함께 노력해 보자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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