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109화
재마의 진료실 안, 진료시간이었지만 정 PD는 진료실로 들어와 재마를 설득하고 있었다.
“원장님, 요즘 한의학에 대한 불신도 커졌는데 방송 한번 하세요. 제가 진짜 멋있게 작품 하나 만들어 드릴게요.”
지난번 효자 아들 태천의 스토리를 아침방송에 내보냈던 PD가 명의 한의원을 찾아왔다.
재마가 진료 중이라 PD를 만날 수 없다는 정 실장의 말에 그럼 진료를 받겠다고 접수를 하고 순서를 기다려 들어온 정 PD는 자리에 앉자마자 재마의 맞은편에 앉아 한의원을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했다.
당장 내일모레 아침방송에 나갈 영상이 펑크 나게 생긴 상황이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으로 명의 한의원을 찾아왔다.
지난번 ‘효자 아들’ 스토리로 톡톡히 덕을 봤던 정 PD 머릿속에는 꼭 한번 명의 한의원을 취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태천의 이야기는 후속 이야기로 꾸며질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효자 아들이 김천에서 서울까지 와서 찾는다는 한의원을 궁금해하는 시청자들도 많았다.
더구나 지난번에는 바로 마주 보고 있는 상인들과 신경전을 부리고 있었던 분위기였지만, 부정적이었던 현수막들은 싹 사라지고 명의 한의원의 문화재 지정을 반기는 현수막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명의 한의원을 촬영하기에 적격인 날이었다.
“요즘 분위기 좋잖아요. 해인동에서. 문화재 지정됐는데 기자들도 잠잠하죠? 정한 한방병원은 떠들썩하게 기자회견이다 뭐다 하더니, 같은 한의원인 명의 한의원은 잠잠하게 넘어가고.”
정 PD는 어떻게든 재마를 설득해서 방송을 내보내려고 애를 썼다.
재마는 자신에게 방송을 찍자고 설득을 하는 정 PD의 동공을 바라봤다.
환자로 들어온 정 PD를 환자로만 대하는 재마였다.
-동공을 인식합니다.
이름 : 정성주
나이 : 38
동공을 인식하자, 어혈들이 성주의 목과 허리 언저리에서 꽉 뭉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어깨에 어혈이 과하게 뭉치고는 하는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모양이었다.
거기에다 장에는 흙색의 섬광들이 부글부글 끓는 모양으로 재마의 눈에 비쳤다.
성주가 가지고 있는 병들은 모두 현대인들의 공통적인 스트레스에서 오는 질병이었다.
“정성주 님. 어깨도 안 좋으시고, 허리도 안 좋아요. 알고 계시죠?”
이 정도 어혈이면 두통과 요통으로 일상생활에 영향을 충분히 미치고 있을 것이었다.
몰라서 치료를 안 받고 있는 건 아닐 것이었다.
시간에 쫓기고, 방송 일정에 쫓기고 있는 것이 그의 스트레스의 원인인 것 같았다.
오늘도 당장 내일모레 나갈 방송 펑크로 재마를 찾아온 것을 보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제 몸 성하지 않은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두통하고 요통 오면 진통제로 넘어가고, 또 진통제로 넘어가고 합니까?”
움직임 없이 어혈들이 꽉 뭉쳐져 있는 모양새로 보아 원인은 파악하지 않고 머리 아플 때마다 진통제만 찾아 먹고 또다시 일을 강행하는 성주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방송밥 먹는 사람들은 다 그래요. 오래 모니터 앞에 앉아서 편집하랴, 이렇게 영상 펑크 나면 펑크 메꿀 스토리 찾아 헤매느라 병원 갈 시간도 없다고요.”
“오늘은 잘 찾아오셨네요.”
“오늘 펑크 나자마자, 딱 이재마 원장님이 떠올랐으니까요. 꼭 좀 해주세요.”
“장도 안 좋으시죠? 밀가루, 매운 음식 먹으면 5분 안에 화장실 신호 오고.”
방송국 PD로 직업병으로 목과 허리가 좋지 않지만 병원 갈 시간도 없다는 한탄을 하며, 방송에 나와달라고 애원을 하는 성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재마는 성주의 몸 상태를 살필 뿐이었다.
“손목 이렇게 잡으면, 내 몸이 진짜 쫘악 스캔 됩니까? 원장님?”
과민성 대장염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 성주는 자신의 몸 상태를 스캔한 영상을 읊듯 이야기하는 이재마의 모습에 놀랍다는 듯 물었다.
지금까지 몇 군데의 병원을 가봤지만, 이렇게 자신의 상태를 꿰뚫는 병원은 처음이었다.
“아니면 옆에서 누가 말해줘요? 어디가 아픈지, 어떻게 치료를 하면 좋을지.”
믿기지 않는 듯, 성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제가 신기라도 있다는 말씀이에요?”
재마는 신기해하는 성주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으며 모니터를 바라보며 성주의 상태를 입력했다.
“제가 원장님 채널 영상도 쭉 정주행했다고요. 사람들이 댓글에 이런저런 추측도 많이 하던데……. 신기가 있다. 영험하다. 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명의이다.”
“처치실로 가시죠. 오늘은 뭉친 어깨와 허리. 거기에다 장에 가스 빼줄 수 있는 혈자리에 침술 치료하겠습니다.”
“채널명처럼 진짜 환자를 쫙 읽는 건 아닐 거 아닙니까. 제가 원장님이 어떻게 환자들을 그렇게 꿰뚫듯 진료하는지 영업비밀은 지켜드릴게요. 딱 한 번만 15분짜리 영상 하나 만듭시다. 원장님이 허락해 주셔야 오늘 오후에 영상 따고, 편집하고 모레 아침방송 나갈 수 있어요.”
한 번이라도 해달라고 애원을 하는 성주의 모습에 재마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처치실 2로 가시면 되시고요.”
“촬영은요.”
“15분 영상이면…….”
“시간 오래 안 뺏겠습니다. 환자분들 인터뷰 세 분 정도 따고, 원장님 일하시는 것 몇 분 따면 됩니다. 거기에다 명의 한의원 문화재 지정된 소식까지 전하면 완벽하게 15분 채울 수 있어요.”
성주는 어떻게든 기회를 잡으려고 애를 썼다.
“처치 받으시고 정 실장님께 말씀드리고 가세요. 아, 그리고 인터뷰해 주실 만한 단골 환자분들은 이미 처치실에서 침, 뜸치료 받으시고 곧 노인정으로 가시니까 알아두시고요.”
재마는 당장 내일모레 나갈 영상에 생각나는 곳이 명의 한의원밖에 없어 찾아왔다는 성주의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듯, 인터뷰를 할 어르신들에 대해서도 빠뜨리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원장님.”
성주는 이제 살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진료실을 빠져나갔다.
“정성주 님, 처치실로 가실게요.”
성주의 진료가 끝나자, 진료실 문을 연 정 실장은 성주를 처치실로 안내했다.
성주는 진료실 밖으로 나가며 명의 한의원을 찾은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기라도 한 듯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작가님, 우리 목요일 방송 나갈 수 있어요. 조금 이따 촬영 가야 하니까 준비하고 있어요. 네. 점심 먹고, 두시까지 모이는 거로 해요. 네. 네.”
성주는 처치실로 들어가기 전 담당 작가와 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명의 한의원이 촬영 가능하다는 걸 알렸다.
“국장님, 명의 한의원 촬영 협조 드디어 따냈습니다. 네. 네. 제가 누굽니까. 하하.”
재마는 몇 번이고 정 PD의 제안을 거절했던 것이 미안할 정도로 성주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처치실로 들어섰다.
* * *
“산이는 요즘 시험 준비하느라 바쁠 거고.”
“우리는 환자 없이 놀아도, 정우는 바쁘지 않겠냐. 이재마 원장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던데.”
한의학과 동기들은 오래간만에 만나는 정우와 맥주를 기울였다.
“그렇지? 명의 한의원은 끄떡없지? 후, 요즘 그렇지 않아도 한의사가 많아서 환자들 나눠 먹기 한다고 매출 안 나오는 한의원도 많다고 개원하기도 힘든데 더 힘들어질 것 같다.”
2년 정도 경력을 쌓아서 고향으로 돌아가 개원을 할 생각이었던 준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대형 한방병원이 독점하던 게 좀 빠지지 않겠어?”
정한 한방병원의 스캔들로 한의학 명성이 흔들렸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의원을 꾸준히 찾는 환자들은 있을 것이라 믿고 싶은 정용이 준수를 다독였다.
“독점? 야, 너 원로회에서 공식 발표한 것 못 봤냐. 대놓고 정한 한방병원 밀던데. 한의학 명성이 흔들리면 정한 한방병원이 흔들리는 게 아니라 동네 한의원들만 흔들릴 거다.”
“원로회도 문제야. 정한 한방병원이 인정하고, 빼도 박도 못하게 증거가 나왔는데 편을 들어주면 어떡하냐.”
페이닥터로 있는 동기도, 곧 개원을 할 생각이었던 준수도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이왕이면 진실이 밝혀진 상황에서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넘어갔으면 하는 마음을 갖는 동기들이었다.
“원로회의 생각일 뿐이지, 우리는 그냥 넘어가길 바라는 사람 없잖아?”
“그럼 준수 네가 공식 발표 대표로 해. 우리는 꼭 진실을 밝히고 넘어갔으면 좋겠다고.”
이대로는 가만히 넘어가는 걸 못 보겠다는 듯 준수가 흥분을 하자, 동기들은 준수의 등을 떠밀며 웃어넘길 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내가 그럴 수 있냐. 정한 한방병원에 찍히면 다른 병원으로 이직도 힘들어. 안돼. 안돼”
큰 뜻을 품었지만, 정한 한방병원에는 밉보일 수 없다는 듯 준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네 그거 모르냐? 협회도 협회 신문사도 다 박상도 대표가 꽉 쥐고 있대. 우리 원장님은 소신을 갖고 있어도 어쩌겠냐고. 그나마 협회에 미운털 안 박히고 한의원 유지하려면 잠자코 있어야 한다고 하시더라.”
잠자코 넘어가는 일이 반복되어 진실은 묻혀 가는 것이 개탄스럽다는 듯 준수는 맥주를 쭉 들이켰다.
“진짜 문제다. 문제.”
동기들은 마주 앉아 한숨만 푹 내쉴 뿐이었다.
“재마는 어때? 그래도 요즘 젊은 환자들이 선호하는 한의사 하면, 이재마인데.”
명의 한의원의 대표를 맡고 있는 재마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 정우에게 묻는 그들이었다.
한의학과 같은 동기였지만, 항상 한 발 이상 앞서가는 재마였기에, 재마에게 건 희망이라도 있는 것 같은 얼굴들이었다.
“글쎄. 원장님 생각이야, 나야 아직은 모르지.”
정한 한방병원이 저질렀던 만행들을 폭로하기 위해 김성은 기자와 준비 중이었지만, 그 이야기를 섣불리 할 수 없는 정우는 어색하게 웃었다.
“야, 이정우 봐라. 우리 앞에서도 원장님이란다. 원장님은 원장님이지.”
“너희 한의원 확장 안 한대? 문화재 지정도 됐다며, 2호점도 내고 그러자고 네가 좀 말해봐.”
동기는 정우의 옆구리를 찔렀다.
“야, 이동기. 왜 재마가 2호점 내면 거기로 옮기게?”
준수는 동기의 속마음이 훤하다는 듯 물었다.
“정우만 재마 덕 볼 수 있냐. 나라 사랑 동기 사랑. 나도 좀 끌어 달라고 재마한테 말해봐야지.”
동기는 정우 옆에 찰싹 붙어 재마의 덕 좀 함께 보자는 듯 말을 했다.
정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를 슬쩍 비켜 앉자 동기가 다시 한번 따라붙었다.
“그나저나 중기 녀석 파혼했다는 것 같은데 어째 조용하다. 그 녀석도 폭탄 몇 개쯤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
정한 한방병원 이야기를 하다 보니 중기 생각이 났는지 중기 이야기를 꺼냈다.
정한 한방병원 조카인 박연아와 곧 결혼을 할 것이라 이야기를 했던 중기가 파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 뒤로는 연락이 되지 않던 중기였다.
동기들은 그사이 중기의 소식을 들은 게 없나 서로에게 물었지만 아무도 그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