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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108화 (108/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108화

“저희 한의사 협회 원로회원들은 앞으로 한의학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일각의 행태를 가만두고 보고 있지 않을 것이고…….”

한복 두루마리까지 차려입은 원로회 대표 한의사는 돋보기를 콧등에 얹은 후, 비장한 목소리로 준비한 글을 읽어 내려갔다.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가면서 손가락으로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따라가는 원로회장이었다.

“한의사 협회 회원이자, 한의학 발전에 무궁한 기여를 해온 정한 한방병원의 앞날에 더 이상은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바랍니다. 이상.”

원로들의 뜻이 정한 한방병원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만큼 온 힘을 다해 실어주려는 듯 힘주어 말한 원로 대표는 자신을 촬영한 카메라를 잠시 빤히 응시한 후, 고개를 숙였다.

영상을 찍은 정한 한방병원 홍보팀의 박연아는 촬영본을 확인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회장님이 저희 정한 한방병원에 힘을 실어주시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힘이 납니다.”

박상철은 촬영을 마친 원로회장에게 다가가서 악수를 청했다.

아버지와 함께 동료 한의사로 지내던 원로회장에게 박상철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리고 이건 저희가 성의껏 준비해봤습니다. 원로분들하고 식사하세요.”

박상도에게 지시 받은 대로 두둑하게 현금을 넣은 상철이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원로회장에게 봉투를 건넸다.

“허허. 뭐 이런걸. 한의학 발전을 위해 늙은이가 한마디 한 것을…… 감사하네. 자네 아버지가 위에서 보고 두 아들이 이렇게 한방병원을 일궈 나가는 걸 보며 뿌듯해 하실 거야.”

원로회장은 상철이 건넨 흰 봉투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 들어 두루마기 주머니에 재빨리 넣었다.

“연아야. 어때?”

“영상은 잘 찍혔고요. 편집 조금 해서 보내면 될 것 같아요.”

“그래. 협회 계정으로 올릴 거니까 편집까지 잘 마무리해서 넘기고.”

“네.”

지난번 박상도가 원로회원들을 모아놓고 식사를 대접하면서 원로회원들은 자신들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며 목소리를 낼 방법을 구상했다.

결국 원로회장이 대표로 요즘 젊은 사람들이 올린다는 너튜브 영상을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다.

원로회원들이 소속된 한의사 협회 계정에 올리기로 계획을 하였는데, 원로회원들 중 영상 촬영과 편집이 가능한 사람이 없자 정한 한방병원 홍보팀에서 맡기로 한 것이었다.

이번 원로회의 영상을 정한 한방병원 홍보팀에서 촬영을 해서 협회에 넘긴다는 것이 또 알려지면 잡음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 촬영에는 최소의 인원이 참여하기로 했다.

직접 촬영을 하고 편집을 할 예정인 박연아는 지난번 일로 김 대리의 사표를 받아 내었지만, 아직까지 작은아버지인 박상도의 눈 밖으로 난 탓에 직접 자처했다.

“늙은이들이 요즘 젊은이들 하는 일을 따라가지 못해서 이렇게 부탁하니까. 잘 부탁해요.”

“아이고. 별말씀을. 편집까지 여기 있는 저희 딸이 잘해서 협회에 보낼 테니 회장님은 걱정 마세요. 감사합니다.”

상철과 연아는 나란히 서서 자리를 떠나는 원로회장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원로회장이 떠난 후, 두 부녀가 마주 보며 웃는 미소 속에는 둘만이 아는 음흉한 계획이 숨겨져 있었다.

* * *

연아가 원로회장의 공식 발표를 촬영한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한의사 협회의 공식 너튜브에 영상이 올라갔다.

-‘한의사 원로회’ 한의사 명성에 먹칠하는 행태, 더 이상 두고 보지는 않겠다.

-‘한의사 원로회’ 정한 한방병원 앞날 응원해.

-‘한의사 원로회’ 정한 한방병원의 손들어 주나.

영상 하나에 대형 한방병원 이슈를 눈여겨보고 있던 기자들은 후속 기사들을 연달아 내기 시작했다.

더구나 기자들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정한 한방병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기사를 써 내려갔다.

점차 대형 한방병원 이슈는 덮어져 가고, 한의사 협회와 한의사 원로회의 의견을 옮기는 기사들이 줄지어 포털 사이트를 장악했다.

이번 일을 꾸준히 모니터링하며 후속 보도를 준비하고 있는 성은의 다크서클은 점점 더 내려오고 있었다.

“성은아. 괜찮아?”

귀남은 이번 보도를 도맡아서 준비하며 철저하게 정한 한방병원의 판으로 돌아가는 판세를 뒤집기 위해 2차전을 준비하는 성은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며칠 동안 잠을 못잔 건지 푸석한 얼굴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깝다는 말이 절로 나오게 했다.

“왜……. 왜요?”

성은은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다 자신에게 괜찮겠냐 묻는 귀남을 올려다보았다.

“너 거울 좀 봐. 좀비가 따로 없다. 이러다 사람 잡겠어.”

“후……. 박상도를 잡아야 하는 데…….”

“후속 보도도 중요하지만 일단 네 건강을 생각해야지.”

귀남은 후배가 진심으로 걱정되는 얼굴이었다.

“괜찮아요. 그리고 명의 한의원 원장님이 저 먹으라고 약도 주셨어요. 그러니까 더 힘내야죠. 약 먹어야겠다.”

성은은 보란 듯이 재마가 건넸던 약 한 포를 쭉 들이켰다.

“근데 한의사 협회도 원로회에서도 저렇게 정한 한방병원을 싸고도는데, 다음 영상은 준비 잘되어가는 거야? 웬만한 거로는 안 돼. 알지?”

“네. 지금 증언자들이 줄을 서고 있어요. 정한 한방병원은 이제 끝이라고요. 끝.”

성은은 어떻게 해서든 정한 한방병원의 진실을 밝히겠다는 듯 반쯤 감겼던 눈을 부릅떴다.

* * *

“영원 님. 오래간만에 오셨네요.”

명의 한의원 문을 열고 들어선 영원의 얼굴을 보자 정 실장이 반가운 얼굴을 본 것처럼 데스크에서 일어나 환자를 반겼다.

“정 실장님, 안녕하셨죠?”

“그럼요. 영원 님, 집중치료 끝난 이후 한참 안 오셔서 소식 궁금했는데 이렇게 오신 걸 보니 벌써 3개월이 지났나 봐요.”

재마가 명의 한의원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명의 한의원을 찾았던 영원은 석 달 만에 찾아온 명의 한의원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3개월 동안 복직도 하고 잘 지냈습니다.”

영원은 처음 명의 한의원을 찾았을 때의 어두웠던 얼굴보다 상대방이 느낄 정도로 표정도 밝아져 있었다.

“복직하셨구나. 어머 정말 잘됐어요. 지금 원장님 처치실에 계시니 조금 기다리시겠어요?”

정 실장은 영원의 진료 접수를 하고, 그의 복직 소식에 제 일처럼 기뻐했다.

영원은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양약에 의지하며 자신에게 맞는 약을 찾아 수년을 고생하던 지난날들이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처음 명의 한의원을 찾았을 때, 이재마 원장은 한의학이 영원이 앓고 있는 류마티스에 얼마나 효과적인 치료가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영원에게 꼭 맞는 처방과 집중치료를 시작했다.

아버지의 추천으로 명의 한의원을 찾았지만 대체 의학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그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으로 찾았던 그였다.

하지만 통증이 줄어들고 관절마다 염증이 들어찼던 것이 빠지면서 굽었던 손들이 다시 제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에 그를 전적으로 믿게 되었다.

“장영원 님, 진료실로 들어가실 게요.”

잠시 지난날을 회상하는 동안 영원의 진료 차례가 되었다는 정 실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세요.”

오래간만에 영원이 진료를 왔다는 소식에 재마도 반가운 얼굴로 그를 반겼다.

“원장님, 잘 지내셨죠?”

“저야 한의원에서 환자들과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떠세요. 상태는 많이 호전되었나요?”

집중치료 이후 석 달간 한약 휴지기를 가지면서 재마가 처방한 운동과 면역력 향상에 힘을 썼던 영원이었다.

처음에는 약을 끊고 운동과 식단만으로 석 달을 버텨야 한다는 것이 내심 걱정되었지만, 이재마 원장의 말대로 면역력이 높아지면서 관절에 염증이 들어차지 않고 오히려 힘들었던 몸까지 회복이 되는 것에 신기할 따름이었다.

더구나 자신의 건강에 자부심이 생기다 보니 활력 또한 넘쳐났다.

“네. 예전에 비하면 근육량도 늘고 체력이 무척 좋아졌습니다.”

“잘됐네요. 그동안 운동을 열심히 하셨나 봐요.”

재마는 영원의 말을 듣기도 전에 그의 상태를 동공을 보고 읽기 시작했다.

-동공을 인식합니다.

이름 : 장영원

나이 : 34

자가 면역질환 계열인 류마티스 관절염.

순환 원활. 어혈에 의한 염증 양호.

심폐기능 정상

처음 그를 찾았을 때, 순환장애로 생긴 어혈로 온몸에 염증이 들어차 있던 몸은 순환이 원활해지면서 어혈에 의한 염증 수치가 많이 줄어 있었다.

또 운동 처방에 따라 영원이 꾸준히 운동을 했는지, 원래 약했던 심폐 기 또한 성인 남성 정상 수치까지 올라 있었다.

“네. 진맥 한번 해볼까요?”

재마는 영원의 팔목을 짚으며 굽었던 손가락들이 어느 정도 제 자리를 찾아간 것을 확인했다.

30대의 나이에 아버지가 앓던 지병을 물려받아 병으로 인한 휴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영원의 지난날을 생각하면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주 좋네요.”

“그럼 앞으로 치료는 어떻게 할까요?”

“지금처럼 심폐 지구력에 도움이 되는 운동을 꾸준히 하시면서 면역력 관리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혈을 돕는 약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원은 자신이 느끼기에도 훨씬 좋아진 건강이었지만, 직접 재마에게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어깨가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혹시 원장님.”

“네?”

“파킨슨병도 한의학으로 치료가 가능합니까?”

영원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마음 속에 있던 이야기를 재마에게 꺼내 놓았다.

파킨슨병은 치매와 더불어 가장 흔하게 발생하는 퇴행성 뇌 질환이지만, 영원이 앓고 있는 류마티스 만큼이나 완치가 어려운 병이었다.

“병의 진행 정도와 환자의 나이,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재마는 처음 영원에게 한의학이 그의 병에 얼마나 도움을 줄지 장담을 못 했던 것처럼 확답을 내놓지 못했다.

“제가 모시고 있는 상사께서 파킨슨병으로 고생을 하고 계셔서요.”

영원은 자신이 건강해진 만큼 고생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질병을 앓고 있는 상사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던 나머지 재마에게 질문을 했다.

“영원 님께서 제 치료에 잘 따라오시고, 진행 정도가 심하지 않아 긍정적인 효과를 볼 수 있었지만 완치가 힘든 뇌 질환 같은 경우 병이 호전된다고 장담은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어느 정도의 증상을 조절하고 약물치료의 한계가 왔을 때 한방치료가 보완 대체 치료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재마는 영원이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찾았던 것처럼 또 다른 환자도 간절한 마음을 갖고 새로운 치료 방법을 찾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자신의 소신에 대해 말을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만간 제가 모셔오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예전보다 활기가 넘치는 영원을 바라보며 재마는 활짝 웃었다.

몸은 점점 병에 지쳐가고 힘없는 영원의 꺼져가던 희망의 불씨가 자신의 치료로 다시 활활 타올라 다른 사람들까지 둘러보게 된 모습에 재마는 뿌듯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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