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101화
“정 실장님아, 지금 9번 좀 틀어봐 줘요.”
“네.”
명의 한의원 진료가 시작되자마자 오픈런이라도 하듯 대기하던 환자들이 대기실로 들어서며 제일 먼저 진료 접수를 하지 않고 모두 나란히 TV 앞에 앉았다.
정 실장은 평소와 같은 환자들의 모습이 아니라 생소한 모습이었지만, 이상하게 생각지 않고 그저 웃으며 명의 한의원의 모니터를 CBO 방송으로 켰다.
“오늘 맞지?”
“오늘 맞다니까.”
어르신들은 기다리고 있는 방송이 있는 것처럼 설레는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봤다.
[효심왕 아들과 들꽃 어머니]
지난번 김천에서 올라왔던 김태천과 어머니 이간난의 모습이 모니터에 나오자, 다들 반가운 얼굴인 것처럼 박수를 쳤다.
모니터 앞에 모여있는 환자 수 만큼 쌍화차를 준비한 정 실장도 모니터를 바라봤다.
“아이고. 저 양반이 진짜 효자더라니까.”
“그러니께. 어떻게 김천에서 서울까지 오노. 우리 아들이라믄 몬 한다. 몬 해.”
“왜, 형님 아들도 효자라고 맨날 자랑하면서.”
어르신들은 벌써 몇 번째 서울까지 어머니를 모시고 오던 태천이 대단하다는 듯 치켜세웠다.
“조용히 좀 해봐라. 이제 나온다, 나와.”
TV 앞에서 조잘거리는 것이 거슬리는지 갑순이 노인정 동기들을 구박했다.
갑순의 목소리에 아들 이야기를 하던 어르신들은 조용히 했다. 그녀의 말처럼 모니터에는 자신들이 모여있는 명의한의원의 대기실이 비쳤다.
“오메, 왜 한의원 간판은 안 나오는 겨.”
“그러게 말이여. 떡하니 명. 의. 한의원 이렇게 나와야재.”
반가운 명의 한의원이 모니터에서 나오고 있지만, 한옥이라는 특징 밖에 나오지 않고 딱히 명의 한의원을 가리키는 현판이나 간판은 나오지 않았다.
“그게 이번 방송은 저희 한의원이 주인공이 아니라 두 분이 주인공이니까요.”
“그래도 말여. 이 방송 PD 양반이 한의원에 인터뷰 왔다가 저 양반들 찍기로 한 거라매. 그럼 한의원도 대문짝만 허게 나와야지. 그래야 우리 원장님도 보람이 있는 거 아녀?”
기다리고 있던 한의원이 스쳐 지나가듯 나오는 것이 아쉬운지, 어르신들은 한탄했다.
“아휴. 참말로 말들도 많다. 조용히 하라니께. 한의원이 TV에 나오면 뭐 혀. 이미 원장님은 잘나가는디. 다들 조용히 허고 TV나 보셔.”
갑순은 이재마의 뜻이 무슨 뜻인 줄 잘 알겠다는 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방송에 집중했다.
“갑순이, 너는 그럼 이렇게 네가 좋아하는 한의원은 쬐매만 나와도 된다는 겨?”
“그럼. 이게 다 원장님의 뜻 아니것어.”
갑순은 말하지 않아도 재마의 뜻을 알겠다는 듯 다른 동기들의 말에 콧방귀를 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방송의 한 꼭지로 나오는 태천과 간난의 이야기가 끝난 무렵이었다.
“정 실장. 나 접수해줘요. 저 할매들 아직 TV 보니께. 나부터 진료 받을 테니까.”
“네. 어르신.”
쌍화차를 마신 잔을 분리수거함에 정리한 갑순은 제일 먼저 재마의 진료실로 들어가는 첫 번째 환자가 되었다.
* * *
동생인 상도의 부름에 매일같이 드나드는 정한 한방병원 본원 건물로 향하는 상철은 차 안에서 불안한지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모습을 백미러로 보는 그의 비서 또한 불안한 마음이었다.
오늘 잘못 걸리면 제대로 신수가 털릴 것 같았다.
“하, 진짜. 이 새끼들 일 하나 못하고.”
상철은 괜히 욕을 하며 태블릿을 바라보며 검색 포털만 드나들 뿐이었다.
포털 연예면 메인에는 일반인이었지만, 노모와 아들의 사진이 걸려 있고 후속 방송을 염원하는 시청자들이 많다는 기사가 걸려 있었다.
그와 함께 오늘 해인동 상인회의 인터뷰를 내보내기로 했던 방송사에서 방송사의 사정으로 지난번 방송되었던 분량이 재방송되었다는 기사도 걸려 있었다.
“후. 야, 이 실장.”
“네. 이사님.”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이번 일은 상철이 자신이 도맡아 하겠다며 큰소리를 쳐댔으면서 이 실장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 않아도 국장님하고 연락했는데요. 어제 해인동 상인들이 방송가처분 신청을 했고 그게 오늘 아침에 결과가 나온답니다. 자신들도 난감하다면서 방송은 불가하다고 통보를 해왔습니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그건 아까 보고 받았잖아!”
“그…… 그게…… 이렇게 방송가처분 처분을 받으면 제아무리 국장이라도……”
“국장이 아니고, 너 말이야. 어제 해인동 상인들이 가처분 신청을 할 때까지 뭐 했냐는 이야기야. 안 사장은 아직 병원에 드러누워 있을 거잖아. 가처분 신청은 누가 한 건데. 그거 하나 못 막아?”
박상철은 눈을 질끈 감으며 자신의 앞일을 막은 사람이 누구인지 물색하겠다는 듯 어금니를 꽉 물었다.
“안 사장님은 아직 입원해 계시고, 해인동 상인회 회장이 가처분 신청을 하셨답니다. 해인동 상인들 모두의 의견이 아니라는 뜻이랑 함께요.”
“상인회 회장? 그 과일가게?”
“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실장은 그 뒤로 무슨 소리가 나올지 몰라 숨소리도 죽이고 운전만 할 뿐이었다.
상철은 차 안에서 동생에게 무슨 이야기로 핑계를 대야 할 지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도 납득할 만한 핑곗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정한 한방병원 본원에 도착하자마자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서지 않고 로비에서 내리자마자 튀어 들어가듯 들어가는 박상철을 바라보며 이 실장은 혀끝을 내 찼다.
동생 앞에서 벌벌 떨 자신의 상사를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저어질 뿐이었다.
“세상 사는 게 다 똑같다니까. 비서 나부랭이 하고 있는 내 모습이나, 8살이나 차이나는 동생 앞에서 저렇게 벌벌 떠는 박 이사님 모습이나…….”
로비에서 옷매무새를 매만지며 엘리베이터를 탄 박상철은 먼저 엘리베이터를 탄 30대 초반 여자의 모습에 조금 전까지 불안했던 모습을 지우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대표실이 있는 17층이 먼저 눌려 있는 걸 보니, 먼저 탄 사람이 누른 모양이었다.
환자로 보이지 않는 모습이 어쩌면 정한 한방병원에 관련된 인물 중 자신이 모르는 얼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여자의 시선이 자신을 아래위로 훑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자신을 알아본 것인지, 여자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
“네. 안녕하세요.”
상철은 자신을 알아보는 여성에게 그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인사에 답했다.
그러고는 머릿속으로 누구인지 생각해 내려고 애썼지만, 자신이 한 번 본 인물을 잊을 리는 없다는 생각에 고개만 갸웃할 뿐이었다.
대표실이 있는 층에 다다르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상철을 앞서 여자는 먼저 성큼성큼 다가갔다.
‘도통 안 떠오르는데…….’
상철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는 듯 그녀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대표님, 김성은 기자님과 박 이사님 같이 들어오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비서가 두 사람을 보더니, 대표실 안쪽에 있는 상도에게 두 사람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두 분 다 모셔.”
안쪽에서 박상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에게 벼락을 쳐도 모자란 상황에서 기자와 함께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상황에 박상철은 더욱 불안함을 느꼈다.
“어서 오세요. 오래간만입니다. 김 기자님.”
“네. 오래간만이네요. 박 대표님.”
성은은 안쪽으로 들어가 익숙한 듯, 상도가 앉아 있는 소파 쪽으로 걸어가 상도와 악수를 하는 모습이었다.
성은과 함께 들어오는 박 이사를 바라보는 상도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지만, 상철은 떨지 않으려 애쓰며, 성은의 맞은편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쪽은 저희 형님이신 박상철 이사님.”
상도는 성은을 처음 볼 자신의 형을 소개했다.
“네. 엘리베이터에서 인사 나눴습니다.”
상철은 자신을 바라보며 여유 있는 미소를 짓는 김 기자를 보며 어색하게 웃으며 입술을 떨었다.
이미 자신이 누군지 알고 인사를 했다는 소리였다.
“저희 형제에 대해 많이 알아보셨나 봅니다.”
상도는 웃으며 비서가 들여온 커피잔을 손짓했지만, 말에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
“아무래도 제가 정한 한방병원에 관심이 많다 보니, 저절로 박 이사님에 대한 내용까지도 손에 쥐게 되더라고요.”
성은은 상도의 가시 돋친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커피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렇겠죠. 저야 환자들 만나고, 한방병원 일에 정신이 없어 대외적인 일은 쉽게 나서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형님이 맡아주셔서 다행히 경영에 차질이 없습니다.”
상도는 자신을 도와주는 형님의 역할이 크다는 듯 상철을 치켜세웠다.
“형님이 안 계셨으면 우리 한방병원이 이렇게 클 수 있었을까요. 그렇죠? 형님?”
상도는 그렇지 않냐며 상철에게 되물었다.
머릿속으로 지금 자신의 동생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파악하느라 바쁜 상철은 얼떨떨할 뿐이었다.
“어? 아, 네. 그렇죠.”
어색하게 일단 상도의 말이 다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그 말씀은 그럼…… 이 모든 일들을 대표님은 모르신다는 뜻이겠네요?”
성은은 자신의 가방에서 준비한 파일을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렸다.
꽤나 두툼한 파일이 터질 것처럼 문서를 담고 있었다.
상도는 대답을 하지 않고, 성은이 꺼내 놓은 파일을 손에 쥐었다.
그가 손짓을 하자 비서가 들어와 파일을 건네받아 밖으로 나갔다.
손님을 응대하는 동안 그 안에 있는 내용이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라는 뜻이었다.
“너무 자료가 많아서 아마 비서가 파악하기는 시간이 걸릴 것 같네요.”
상도는 자료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보다 다른 이야기를 꺼내 대화를 환기시키려 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정한 한방병원이 이렇게 성장하기까지 기자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면 의문을 품을 만한 자료들을 제가 모으고 있습니다.”
성은은 마치 아량이라도 베풀듯 자신이 정한 한방병원의 대표인 박상도의 그동안의 행적을 밟았다는 것을 제 입으로 밝혔다.
“지난번에 한의 신문 유 국장님과 함께 오셨을 때는 제가 김 기자를 몰라본 모양이네요.”
박상도는 몇 개월 만에 자신을 이렇게 칠 줄은 미처 몰랐다는 듯 이야기를 했지만, 얼굴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런가요?”
성은 또한 박상도 앞에서 절대 굽히지 않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상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부들부들 떨던 입술을 열었다.
“젊은 기자 양반이 겁도 없구만.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서 협박질이야?”
두 사람 사이의 서로를 향한 신경전을 깨기라도 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도대체 우리 한방병원이 무슨 떳떳하지 못한 일이 있을 거라고 저렇게 큰 파일을 들고 대표실까지 찾아온 거요?”
“글쎄요. 정말 떳떳하실까요? 지난번 타 한의사 유튜버의 요양원 영상이 올라가자마자, 그 영상의 실체라며 환자의 자식들을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이 박 이사님이 잘 아시는 분이더라고요.”
성은은 미리 준비해 둔 녹취를 한 녹음기를 그 자리에서 꺼냈다.
상철은 성은의 손에 들인 녹음기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불안한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