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99화
“강산이한테 들었다.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고.”
어제 저녁 강산과 함께 정한 한방병원 측 사람인 박상철이 명인한의원 문화재 지정을 반대하려고 해인동 상인들과 접촉한 증거에 대해 대화를 나눈 이후, 강산이 정우에게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출근을 한 정우는 재마에게 할 말이라도 있는 듯한 얼굴로 그의 진료실 문을 열었다.
“아니야. 내가 해결할 부분이 더 많은 것 같아서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다.”
재마는 박상철이 명의 한의원의 일에 나선 이유가 자신의 전 연인 관계인 박연아와의 관계 때문일지, 아니면 서울 안에서 공존하는 한의원의 문제일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사적인 감정이든, 공적인 감정이든 주변 사람들까지 끼어들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의 도움으로 자신이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신경 쓰이지 않게 하기는 내가 힘들 때 네가 손 내밀어 줬는데. 나도 할 말도 있고.”
정우는 결코 자신이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는 듯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그전에 내가 왜 정한 한방병원을 박차고 나왔냐고 물었었지?”
정우는 그동안 재마에게 이야기하지 못했던 일들을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정한 한방병원 윗선에서도 같은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홍보팀에서는 명의 한의원, 이재마 너를 견제하고 있어.”
“홍보팀에서?”
“홍보팀장인 박연아를 주축으로 약혼자인 최중기까지 움직여서 너튜브로 ‘환자를 읽는 한의사’ 채널을 견제하려고 비슷한 컨텐츠를 만들었고.”
정우는 자신이 정한 한방병원 F4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시골 요양원에 봉사를 나갔던 이야기부터 모두 조작되었던 영상이라는 일들을 털어놓았다.
“파견 한의사들을 손꼽아 기다리는 환자분들을 우롱하는 것도 아니고, 모두 짜인 판에서만 움직이고 카메라가 돌아갈 때만 진료 봉사를 하는 척 연기를 하는 거였어. 그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진심으로 진료를 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정우는 자신의 양심 고백이라도 하는 듯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재마는 힘겹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정우의 말에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뿐이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이런 일이 당연하다는 듯 여기는 최중기와 정한 한방병원 측 사람들의 시선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내가 한심스러웠고. 어설프게 타 병원 이미지를 따라 하려고 연기를 한 영상을 올려놓고, 타 병원을 따라가지 못한 것은 모두 봉사에 참여했던 한의사들의 능력 부족으로 몰고 가는 홍보팀의 행태에 더 이상 대형 한방병원이라도 참을 수 없었어.”
정우는 자신이 부산까지 내려가서 근무를 해야 했던 정한 한방병원을 그만둬야 했던 이유를 모두 털어놓았다.
“정한 한방병원을 그만둔 뒤로는 다시 환자들을 진심으로 대할 수 있을까, 내가 한의사 자격이 있는 것일까 하는 의심을 나 스스로에게 품을 수밖에 없었고 ‘환자를 읽는 한의사’ 측에서 함께 진료 봉사를 할 의사를 찾는다는 공지에 나 같은 비양심적인 한의사도 할 수 있을까 하는 자신감은 없었지만 면접에 왔던 거야.”
정우는 한치의 숨김도 없이 재마에게 이야기했다.
“면접을 보기 전에도 너를 따라 하려는 한방병원이 있을지언정 너를 따라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직접 명의 한의원에서 일을 해보니 더욱 확실해졌어. 그리고 내가 갈 길도 확실해졌고.”
“앞으로 네가 갈 길?”
“너만 괜찮다면 정한 한방병원의 행태를 밝히는 데 내가 말한 이 사실을 모두 공개하고 싶어.”
정우는 떨리는 마음으로 재마에게 이야기를 했다.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사실을, 부끄러움에 수개월을 숨을 수밖에 없었던 모든 것을 재마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한의사라는 자신의 직업을 걸고 이 이야기들을 공론화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괜찮겠어? 쉬운 일은 아닐 거야. 그래서 나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거고.”
명의 한의원의 이미지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정한 한방병원의 박상철이 직접 움직일 정도였다.
어쩌면 한의사 협회도 쥐락펴락하는 박상도까지 연결이 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나도 큰마음 먹은 거야.”
일이 잘못된다면 대한민국 최고의 한방병원인 정한 한방병원을 상대로 루머를 퍼뜨렸다는 화살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재마는 물론 정한 한방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은 정우까지도 한의사 협회에서 제명 당할 수도 있었다.
똑똑.
“네.”
진료 시간이 되기 전 출근을 한 효주가 재마의 진료실 문을 두드렸다.
“원장님, 본의 아니게 이야기를 들어버렸는데 저도 힘을 좀 보태도 될까요?”
생각지도 못했던 효주의 등장에 재마와 정우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 * *
“어휴. 박 이사님 저는 이제는 더는 못해요.”
마미증후군 판정을 받은 안 사장은 응급수술을 받은 상태로 몇 주간 입원을 해야 했고, 앞으로 석 달간 재활을 받아야 할 지경이었다.
재마의 도움으로 늦지 않은 시간에 응급실에 온 안 사장은 응급실 진료진에게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장 병원을 찾아와 천만다행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재마에게 감사했고, 자신이 그동안 무슨 일을 한 것인지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정신을 차린 안 사장은 그대로 휴대전화를 들어 자신의 사고 직전 인터뷰를 한 방송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자신을 포함한 상인들의 인터뷰 내용을 수정해서 다시 촬영하고 싶다는 내용을 전달했지만, 시간 관계상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은 그녀는 쿨하게 인터뷰를 폐기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한 방송국 PD는 이번 제보에 관련 있는 박상철에게 곧장 연락을 취한 것이었다.
“안 사장님, 이렇게 말을 바꾸시면 어떻게 해요. 저희는 방송만 앞두고 있는데…….”
“그러니까 방송 며칠 앞뒀으니까 다시 찍고, 내보내면 되잖아요.”
“그게 그렇게 쉬운 일 같으세요?”
“저도 알아볼 대로 알아봤어요. 일반인 상대로 인터뷰 했던 것, 방송가처분 신청하면 내보낼 수 없다는 거요. 저희 뜻 안 받아들여 주시면 저희도 방법은 하나예요.”
박상철과 함께 안 사장을 찾아온 PD와 작가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상황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제 모든 일이 고지를 앞두고 있다고 생각한 박상철은 안 사장의 행동에 화가 치밀었다.
방송만 나간다면 연달아 명의 한의원의 이미지를 박살 낼 수 있는 기사들이 줄지어 있는데, 그 모든 것의 시초가 될 것이 틀어지게 생긴 상황이었다.
도대체 냉동창고에 쓰러진 안 사장을 명의 한의원 측 사람이 왜 발견했고, 진료 시간이라던 이재마는 그곳에 왜 가서 안 사장의 마음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게 만든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박상철은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손부채질을 신경질적으로 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화를 참지 못한 박 사장이 안 사장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저희 상인들이 생각을 잘못했어요. 저희 욕심만 생각해서 오랫동안 한 가족처럼 지냈던 한의원을 상대로 저희 이기심만 내세웠다는 의견이에요.”
안 사장을 면회 왔던 상인들은 모두들 자신들의 안일했던 생각을 후회하고 있었다.
시장 상인들과 주민들의 일이라면 두손 두발 걷어붙였던 구 원장과 그의 손자의 이재마를 두고 욕심을 부렸다는 생각이었다.
“뭐요? 이제 와서?”
“솔직히 이사님이 오셔서 부추기시지만 않으셨어도 일이 이렇게 커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안 사장은 간담회 때 난입한 인물들부터 시작해, 반대 현수막, 마지막에는 방송국 제보까지 박상철이 그녀를 통해 지시했던 것을 이야기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작가와 PD는 자신들까지 박상철에게 놀아난 것이라는 생각에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안 사장. 잘 생각해 봐요. 이 일이 내게 무슨 이득이 있었겠소. 모두 안타까운 상인들 입장에서 내가 조금 팁을 준 거지.”
“그러게 말이에요. 박 이사님이 이득도 없는 일에 이렇게 나서 주실 때부터 조금은 의심해 봤어야 하는 데…….”
“그건 또 무슨 소리요?”
“혹시 이렇게 방송 타고 난장이 된 해인동 골목이 집값이 떨어지면 대량으로 매매하려는 투기 목적으로 접근하신 건 아닌가요?”
안 사장이 입원한 사이 병문안을 와서는 태도를 돌변한 상인들이 박상철에 의심을 품었던 것을 이야기했다.
혹여 이게 사실이라면 방송을 나가도 나중에 인터뷰를 했던 PD와 작가에게 법적 책임이 돌아올 수도 있었다.
투기를 위해 조작된 방송을 내보냈다는 누명을 쓸 수도 있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 사람들이 정말!”
박상철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저기요. 박 이사님, 그리고 안 사장님. 제가 두 분 싸움을 들어 드릴 시간이 없거든요. 상대 방송국에서는 아마 다음 주 월요일 방송분 촬영 다 끝내고 편집까지 다 끝내놨을 거예요. 근데 우리는 방송도 불가피한 상황을 만들어 놓으시면 어쩌자는 겁니까.”
“방송이 장난도 아니고, 정 PD 그냥 진행해요. 어차피 방송가처분 신청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으니.”
“박 이사님, 이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당일에 가처분 신청이 떨어지면요. 그리고 안 사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동네 집값 떨어지면 투기하시려고 일을 꾸미신 거라면 저희도 법적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 위험성을 우리가 다 감수해야 하나요? 고작 인터뷰 하나로?”
“어허, 그냥 진행해 보래도. 나도 힘써 볼 테니까!”
박상철은 이대로 모든 일을 엎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정 PD는 아침 방송 한 꼭지 인터뷰 하나로 이 사달이 난 것에 답답할 따름이었다.
차라리 가처분 신청이 떨어지길 바라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휴. 진짜.”
답답한 마음에 정 PD는 한숨을 내쉬며 발을 구를 뿐이었다.
함께 온 작가는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상인분들 인터뷰 다시 한다면 어떤 방향으로 하실 겁니까?”
가처분 신청이 떨어질지, 아니면 그대로 방송이 나간 이후 법적 책임이 돌아올지 가슴 졸일 수만은 없는 정 PD가 상인들의 생각을 물었다.
“뭐요. 정 PD 고작 이 아줌마 말에 흔들리는 거야?”
“박 이사님, 아까도 말씀드렸잖습니까. 저희도 어쩔 수 없다고.”
“내가 힘써본댔잖아. 국장이랑 내가 직접 이야기할 테니, 병실에서 나와요.”
박상철은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듯 정 PD와 작가를 끌고 병실에서 나갈 생각이었다.
병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박상철의 비서에게 그가 눈짓을 했지만 비서는 방금 전 연락 받은 것을 상철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의 귓가로 다가왔다.
“아휴. 진짜.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거 하고는!”
박상철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병실 문을 세게 걷어차고 병실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