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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97화 (97/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97화

“여…… 여기…… 여기…… 사람…… 있어…… 요.”

안사장은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소리를 내었다.

이대로 강산마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가게를 나선다면 다음에 언제 누가 찾아올지 알 수 없었다.

안사장은 이번이 살 기회라는 생각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젖먹던 힘까지 꺼내 쓸 기세였다.

“여…… 여기.”

“사장님 도대체 어디 가신 거지. 사장님! 저 왔어요. 에이. 민망해하지 말고 나오셔도 돼요. 우리 사이에 무슨…….”

강산은 혹여 명의 한의원과 상인회의 관계에 민망해서 자신을 피한 것은 아닐까 농담을 던져가며 가게를 둘러보았다.

“근데 냉동창고 문은 왜 열어두셨대. 냉기 빠지게.”

그때, 강산의 눈에 닫히지 않은 냉동창고 문이 들어왔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안 사장의 모습에 이리저리 기웃대던 강산은 냉동창고 문이 열린 걸 확인하고 문을 닫기 위해 창고 문 쪽으로 발을 옮겼다.

“여기! 여기…… 사람…….”

“사장님!”

냉동창고 문에 손을 댔을 때 안쪽에서 들리는 간절한 목소리를 들은 강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차가운 냉골 바닥에 누워 있는 엉망이 된 상태의 안 사장의 모습을 본 강산은 창고 안쪽으로 들어가 안 사장의 상체를 들어 올리려 했다.

창고 안에 얼마나 있었던 것인지 안 사장의 몸이 꽁꽁 얼어 있었다.

눈물은 얼어버린 채 뺨에 붙어 있었다.

“자…… 잠깐……. 내 허리! 허리!”

칼로 베는 듯한 통증에 안 사장은 신음도 내지 못했다.

“허리 다치셨어요? 이거 들다가?”

옆에 떨어져 있는 큼직한 고깃덩어리를 본 강산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건강한 사내가 들어도 큰맘 먹고 들어야 할 정도의 고기였다.

“사…… 살려줘…….”

“잠깐만요. 허리를 다치셨으면…… 일단 목은 어떠세요. 괜찮으시죠?”

목을 다쳤다면 자칫 잘못 움직이면 안 되었기에 강산은 목과 허리를 살폈다.

다리 아래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상태로, 손을 움직이는 데에는 이상이 없어 보였다.

“다행히 목은 괜찮으신 것 같고. 아프셔도 참으셔야 해요. 일단 창고에서 나가야 하니까요.”

안 사장은 움직일 때마다 온 신경을 자극하는 통증에 괴로워했다. 웬만하면 움직이지 않고 치료를 하면 좋았겠지만 냉동창고 안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건 무리였다.

“우…… 움직여도 되려나.”

“걱정 마세요. 제가 면허는 없어도 한의학과 나온 사람이니까.”

강산은 안 사장을 번쩍 들어 일단 냉동창고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의자에 있던 담요를 바닥에 깔고 안 사장을 눕혔다.

자신이 입고 있던 재킷과 가게에 있던 옷가지들을 누워 있는 안 사장에게 덮은 강산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하, 이 일을 어쩌지? 일단. 일단. 119에 신고를 하고.”

“119에 신고를 하면 가게는 어쩌고. 아들도 오늘 나갔는데…….”

“지금 가게가 문제예요?”

“나는 가게가 문제여. 원장님. 원장님 좀 불러줘.”

안 사장은 명의 한의원과의 관계가 불편해 치료하러 가지는 못했지만, 지금 당장 숨도 못 쉴 것 같은 상황에서 생각나는 사람은 한의사 이재마밖에 없었다.

“재마요? 지금 이 상황에서 응급실을 안 가는 건…….”

“불러줘……. 지금 당장 숨도 못 쉬겠으니까.”

숨을 쉴 때마다 통증이 오는지 안 사장은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일단 재마 불러올게요. 재마가 여기서 치료 안 되고 응급실 가셔야 하면 가게고 뭐고 어쩔 수 없어요. 저 119 부릅니다.”

강산은 휴대전화를 들어 한의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 * *

“감사합니다. 명의 한…….”

-정 실장님. 지금 급해요. 이 원장 정육점으로 빨리 오라고 해주세요. 지금 사장님 허리를 다치셨는데.

“네. 알겠어요.”

정 실장은 다급한 강산의 전화를 받자마자 전화를 내려놓고 원장실로 뛰어갔다.

“원장님! 급해요. 급해. 정육점 안 사장님이 다치셨대요!”

“네?”

진료를 보고 있던 재마는 정 실장의 다급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급하게 그를 찾은 적이 없었던 정 실장이었다.

“남은 진료는 일단 환자분들에게 설명해 드리고 정우 선생님이 진료 보실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어떤 상황인가 보고 오겠습니다.”

재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이 든 케이스를 손에 들었다.

급하게 빠져나가는 재마의 모습을 본 환자들은 웅성대기 시작했고 처치실에 있던 미정과 효주도 밖을 내다볼 정도였다.

“원장님 어디 가세요?”

진료를 보다 말고 급하게 나가는 일이 없었던 이재마 원장이 눈썹을 휘날릴 정도로 급하게 나가자 놀란 모양이었다.

“정육점 사장님이 크게 다치셨나 봐.”

“정육점 사장님이요? 그런데 원장님이 가시는 거예요?”

미정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었다.

지금 해인동 시장 골목 상인들이 명의 한의원이 문화재 지정되는 것에 반대를 하고 나섰는데, 모른 체를 하기는커녕 진료 시간에 진료실을 박차고 나가는 재마의 모습이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다.

“지금 관계가 어떻든 환자는 보셔야지.”

정 실장은 이재마 원장의 뜻이 무엇인 듯 알겠다는 듯 한참을 바라보다 진료를 대기하던 환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원장님이 맞은편 시장 골목에 응급환자가 계셔서 급히 가셨어요. 오래 대기하시기 힘드신 분들은 이정우 선생님께 진료 보시면 됩니다.”

“아이구. 응급 환자가 우선이지.”

“그럼요. 이해해요. 기다리죠. 뭐.”

“저는 그럼 이정우 선생님 진료방 앞으로 옮길게요.”

환자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이재마 원장이 돌아오기를 기다릴지, 이정우 선생에게 진료를 볼지 결정했다.

* * *

“재마야. 여기. 여기!”

정육점 앞에서 재마를 기다리던 강산은 재마의 모습이 보이자 손을 흔들며 서두르라고 다그쳤다.

“어떻게 된 거야?”

재마가 해인 정육점에 들어섰을 때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바닥에 담요를 깐 채 누워 있는 안 사장 위로는 옷들이 가득 덮여 있었고, 어디서 꺼낸 건지 이른 날씨였지만 전기난로도 켜져 있었다.

“냉동창고에서 고기 들다가 허리를 다치신 모양이야. 내가 봐서는 목은 괜찮으신 것 같고.”

재마는 바닥에 누워 있는 안 사장을 바라봤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 안 사장은 다소 민망한지 눈을 금세 피했지만, 재마의 눈동자는 이미 그녀를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 름 : 안숙자

나 이 : 57세

요추 4, 5번간 요추 5번 천추 1번간 추간판 탈출.

마미증후군.

재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느 정도의 디스크를 가지고 있는 안 사장이었는데, 갑작스러운 통증을 느낀 것이 추간판 탈출이 진행된 모양이었다.

특히나 그동안 없었던 마미증후군 증상이 나타났다.

말꼬리증후군, 말총증후군으로도 불리는 질병이었는 데 요추 끝 신경이 말꼬리처럼 생겨서 이런 명칭이 붙여졌다.

허리 통증, 다리 쪽의 통증이나 감각 이상이 나타나는데 회음부 감각 이상과 배변, 배뇨 장애, 성 기능 장애까지 일으킬 수 있는 응급 상황이었다.

“안 사장님. 지금 허리 쪽 말고 다리 쪽은 어떠세요. 저리거나 찌릿한 통증이 있습니까?”

“으…… 으…… 아뇨. 힘도 들어가지 않고…….”

냉동창고 바닥에 수 분을 누워 있던 안 사장은 추위뿐 아니라 밀려오는 허리 통증에 신음만 낼 뿐이었다.

재마의 목소리에 다리를 움직여 보려 했지만, 다리가 제 맘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일단 구급차 불러. 여기서 치료할 게 아니야.”

“그렇지? 안 그래도 119 부른다니까 말리셔서…….”

강산은 자신이 본 대로 119를 진작에 불렀어야 했어야 한다는 안타까움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119에 신고를 했다.

“안 사장님.”

재마는 안 사장의 손목에 손가락을 얹으며 진맥을 짚었다.

차갑게 얼어버린 안 사장의 손에 재마의 손이 얹어지자, 안 사장은 울컥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자신을 위로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재마의 손길만으로도 두려움에 가득 찼던 마음이 치유가 되는 기분이었다.

“하, 지금 너무…… 아픈데 치료가 안 되는 건가요?”

강산이 119를 부르겠다고 했을 때는 가게를 비우고 병원을 갈 수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재마가 온 뒤로는 고집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몸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이재마가 치료를 하지 않고 구급차를 부른다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한 몸 상태라는 것을 인지했다.

“네. 아무래도 ‘마미증후군’ 같아요.”

재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통증에 괴로운지, 얕은 심호흡과 신음을 반복하는 안 사장이었다.

“마미증후군이요?”

“네. 경추 신경 끝부분이 다친 것 같습니다. 한의원에서 치료를 하기보다는 일단 응급실에 가셔서 CT 찍으시고 정형외과 치료를 보시는 게 좋습니다. 심각하게는 배변, 배뇨 작용에도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요.”

재마의 얼굴은 자신이 안 사장을 도울 수 없다는 안타까움과 그녀의 통증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예상되기에 심각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아이고. 이 원장님이 못 고쳐주시는 병도 있네요.”

재마의 표정을 살피는 안 사장은 지레 겁이 났지만, 그런 분위기를 환기해 보려고 농담을 건넸다.

“워…… 원장님. 제가 요 며칠 너무 심보를 고약하게 썼나 봐요.”

“아닙니다. 안 사장님.”

안 사장은 자신이 다쳐서 냉동창고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으면서 언제 자신을 사람들이 찾을지 모르겠다는 두려움과 허리 아래서부터 발끝까지 힘이 쭉 빠져 버린 상황에서 극도의 공포를 느꼈다.

“이렇게까지 일을 벌이려고 한 것은 아닌데…….”

“괜찮습니다. 119 왔나 보네요. 일단 병원에 가셔서 검사 잘 받으시고 치료 잘 받으세요.”

재마는 자신에게 미안한 마음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몰라 하는 안 사장의 손을 한 번 꽉 잡았다 놓았다.

“사장님 병원까지는 내가 보시고 다녀올게.”

강산은 혼자 정육점을 보던 안 사장이 병원까지 혼자 가야 하는 상황이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알았어.”

“원장님!”

들것에 실려 가면서 안 사장은 있는 힘껏 재마를 불렀다.

멈춰선 안 사장은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손을 자신의 경량 패딩 조끼 주머니 안으로 넣었다.

그 안에 있는 구겨진 명함 하나를 꺼내 재마에게 건넸다.

“아마 현수막은 이분에게 전화하면 내릴 수 있을 거예요.”

지금까지 현수막의 주인에 대해 일언반구 말도 없었던 안 사장이었지만, 재마에게 박상철의 명함을 꺼내 건넸다.

재마는 일단 명함을 받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좁은 해인동 시장 골목에 구급차가 들어오자 주민들은 물론 주변 상인들까지 몰려들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정육점 사장님이 쓰러지신 거야?”

“움직이지도 못하시나 본데?”

냉동창고에 쓰러져 있어 체온 유지가 필요한 안 사장이 꽁꽁 싸매고 가게 밖으로 나왔을 때는 사람들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뒤로 강산과 재마가 나오자, 생각지도 못한 인물들의 등장에 손뼉을 쳤다.

“아이고. 그래도 한의사 선생님이 큰마음 썼네.”

“그러게 말이야. 원장님.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들것에 실려 나오는 안 사장의 안부를 재마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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