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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92화 (92/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92화

“아이고 대표님, 이렇게 어렵게 결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진작에 마음먹었어야 하는데, 쉽지 않았네요.”

박상도가 서울 시청장실로 들어서자 시장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를 반겼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보자기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묻지 않아도 꽤 오랫동안 문화재청에서 심혈을 기울이던 ‘병합경훈’이었다.

“아무래도 저희가 관리를 하고 있다 해도 집안 일가 모든 분들의 의사결정에 따라야 하는 것이라 제가 혼자 결정하기는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설득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 노고, 시에서도 꼭 잊지 않겠습니다.”

시장의 활짝 핀 얼굴과 그의 말에는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정한 한방병원과 서울시와는 긴밀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다.

상도가 시청장실에서 시장과 만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문화재과 팀장은 조사관과 함께 한달음에 시청장실로 달려왔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어어, 팀장님 어서 앉으세요. 이쪽으로 오셔서 확인해 보셔야겠습니다.”

“네.”

오랜 시간 기다리고 있던 ‘병합경훈’인 만큼 팀장과 조사관은 상기된 얼굴로 ‘병합경훈’을 바라봤다.

시장은 박상도가 들고 온 ‘병합경훈’을 문화재과 팀장과 조사관이 함께 검토하기 시작했다.

한참 ‘병합경훈’을 확인한 조사관은 잠시 후 시장을 바라보며 경과를 보고했다.

“시장님, 이대로 진행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박상도가 ‘병합경훈’을 문화재 지정하기 위해 판을 깐 것도 벌써 1년 반이었다.

1년 반 동안 재섭을 설득하지 못해 실물을 제출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이제는 자신의 손에 들어왔으니 문화재 지정만 남겨두고 있었다.

“이제 큰일은 다 끝냈습니다. 대표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는요, 저희 집안 물건이 문화재가 된다는 것이 가문의 영광이죠.”

“아, 그리고 지난번에 말씀하신…….”

시장은 ‘병합경훈’을 확인하기 위해 시장실에 자리하고 있는 조사관을 슬쩍 바라보며 목을 가다듬었다.

문화재과 팀장은 시장의 눈치에 조사관의 어깨를 툭 치며 이제 어느 정도 일이 끝났으니 먼저 나가보라는 제스처를 했다.

“그…… 그럼 저는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조사관은 상도가 들고 온 병합경훈을 다시 보자기에 싸서 양손에 쥐었다.

조사관이 나가자마자, 시장은 이제 가릴 것이 없다는 듯 활짝 미소를 지었다.

이미 문화재과 팀장에게 보고를 받은 이야기이니 상도에게 이야기해도 문제가 없었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명의 한의원 건은 문제가 좀 있어서 문화재 지정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병합경훈’이 문화재 지정이 된다는 것만큼이나 기다리고 있었던 소식이었다.

“그…… 그것이 해인동 개발을 한다는 소리에 들어왔던 투자자들의 반대가 극심합니다. 주민들의 동의를 받는 것도 어렵지만 개발 하나 보고 들어온 투자자들은 개발에만 관심이 있으니까요.”

“허…….”

이미 형인 상철에게 보고받은 일이었지만, 상도는 처음 듣는 일이라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아주 골치 아프게 되었습니다. 문화재 지정이 뚝딱 되는 것도 아니고 몇 달간 조사관들이랑 직원들이 준비한 것이 많은데…….”

“그렇지 않아도 바쁘고, 중요한 일 하시는 분들이 그런 일에 신경을 쓰실 여유가 있습니까.”

“그렇죠. 문화재 지정할 것이 명의 한의원 한 곳도 아니고…….”

시장이 이번에는 문화재 팀장을 향해 눈짓했다. 거들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저희도 적당히 하고 발을 빼야 하나 하고 생각 중입니다.”

“그러셔야죠. 그럼요.”

상도가 이해를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자신들이 계획한 대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주민들에게는 동네 오래된 한옥 하나가 문화재 지정이 되는 것보다 자신들의 이익이 더 중요하니까요.”

“참…… 사람들이 가치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한데요.”

상도는 안타깝다는 듯 혀끝을 차 냈다.

“그러게 말입니다. 명의 한의원이 오래된 한옥이라는 것보다도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며 서울 시민들과 함께했다는 것이 참 가치 있는 일인데…… 그건 저희 생각일 뿐이니까요.”

상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저는 일을 다 마쳤으니 이제 가보겠습니다.”

‘병합경훈’을 문화재과에 건네는 것뿐 아니라 명의 한의원 문화재 지정 불발 소식까지 들었으니 묵은 체증이 풀린 기분이었다.

“그럼요. 그럼요. 바쁘신 분인데…… 이렇게 직접 시청으로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시장은 상도에게 감사하다며 악수를 청하며 고개를 숙였다.

상도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윤 실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상도의 지시에 윤 실장은 들고 있던 쇼핑백을 시장에게 건넸다.

시장은 반색하며 윤 실장에게 쇼핑백을 건네받았다.

* * *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 거야? 한참 너튜브에 바쁘더니 요새는 뜸하더라?”

오래간만에 중기를 만난 대학 동기 정환은 그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한참 단톡방에서 정한 한방병원 박연아와 약혼 이야기로 떠들썩했던 그였지만 한동안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었다.

동기들 사이에서는 결혼이 틀어진 것은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아직까지 파혼 소식이 들리지 않고 중기가 정한 한방병원을 다니고 있는 걸 보면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왜, 다들 나한테 관심이 많냐? 정한 한방병원 공주 만나서 팔자 피는 줄 알았더니 조용하다고?”

“야, 또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안부를 물었던 정환은 중기의 물음에 당황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중기는 눈앞에 보이는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팔자가 피기는 무슨, 요즘 생각이 많다. 내가 여기 들어와서 뭐 하는 짓인가 회의감도 들고.”

“야, 또 뭐 회의감씩이나. 처음에 졸업하고 국시 합격하고 임상 나가면 다 그 생각이야. 나는 그동안 한의학과 다니면서 뭘 배운 건가. 처음부터 배우는 것 같고. 선배들한테 혼나면 나도 그런다야.”

정환은 똑같이 한의원, 한방병원으로 첫 발령을 받아 나가 고생하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느낀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 뜻이 아니고. 나는 한의사가 되려고 공부를 했는데, 막상 황금 동아줄이라고 느낀 게 썩은 동아줄이라는 뜻이야. 정우는 잘 지내냐?”

중기는 자신과 함께 너튜브를 찍고 난 이후부터 이상하던 정우가 곧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뒤로 그의 소식을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정환을 보니, 동기인 정우가 오래간만에 떠올렸다.

“정우? 아 한 석 달 쉬더니 재마네서 일한다더라. 재마가 너튜브 잘되면서 한의원도 잘되나 봐. 동네 쪼그만 한의원인지 알았더니 페이닥터도 두고.”

“이재마?”

“응. 거기 있잖아. 명의 한의원.”

재마의 이름에 중기는 다시 한번 술을 들이켰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한방병원을 박차고 나가 고작 간다는 곳이 동네 한의원이라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아…… 너 재마 이야기 불편하냐?”

“불편할 게 있냐? 됐다.”

중기의 눈치를 본 정환이 연아의 전 남친인 재마의 이야기가 불편하냐는 듯 묻자 중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새끼는 처음부터 우리랑 달랐어.”

“그렇지.”

“다 쓰러져 가는 한의원을 인수 받은 거 듣고 저걸 어쩌려나…… 했는 데 요즘은 그 한의원이 문화재 지정이 된다고 하고.”

“문화재?”

중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못 들었구나? 요즘 애들 사이에서는 소식 한창인데.”

정환은 동기 단톡방을 중기에게 건넸다.

문화재 지정 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동기들이 축하 인사를 한마디씩 건넸고 재마는 아직 확정이 아니라며 겸손한 대답을 할 뿐이었다.

“이 녀석 겸손하게 말은 하는데 다 된 일이지 뭐. 명의 한의원이 200년이 더 됐다는 데 가치를 인정받아야지. 그래야 우리 한의사들도 좀 더 어깨에 힘 좀 넣지 않겠냐?”

“어깨에 힘은 뭐. 야, 이 새끼야. 그런 거 아니어도 너도 자부심을 갖고 일해 인마.”

“자부심은 무슨. 허리 아파서 침 맞는다, 무릎이 아파서 침 맞는다 찾아와서 치료받고 나서는 나중에는 침, 뜸은 다 자기 위안에 맞는 거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정환이 말하자 중기는 코웃음을 쳤다.

정한 한방병원이 동네 한의원이 아니라 대형 한방병원임에도 불구하고 비수술 치료법을 안내해도 못 미더워하는 환자들이 수두룩했다.

그런 못 미더움은 모두 임상을 처음 나온 한의사들 몫이었다.

“큰 병원은 좀 다르냐?”

한의사가 다섯이나 되는 한의원에 있는 정환이었지만, 자신과는 다른 처우를 받지는 않을까 기대를 하며 중기에게 물었다.

“다르기는. 다 똑같아.”

“그러니까. 이게 문제라니까. 한의학이 이렇게 신뢰를 못 받아요. 동기가 나서서 한의학에 대해서 사람들한테 알려야 하는 일을 하니 얼마나 좋냐. 요즘 봉사팀도 두 팀으로 나눠서 계속한다는 데. 난놈은 난놈이야.”

중기는 정환의 말에 술만 계속 들이켤 뿐이었다.

* * *

“연아야…… 연아야!”

“아, 진짜 어디서 술을 마시고 와가지고 찾고 있어. 내일 기억은 할 것 같아?”

연아의 집 앞으로 찾아온 중기는 제대로 중심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연아는 자신의 약혼자인 중기의 술주정을 들으러 나온 것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너 그거 들었냐? 명의 한의원 문화재 지정된다던데.”

“뭐?”

“문화재 지정된대. 어떤 놈은 타는 줄마다 황금 줄이고, 누구는 티도 안 나고.”

“무슨 소리야. 황금 줄은 뭐고, 뭐. 오빠는 썩은 줄이라도 탄다는 소리야?”

연아는 자신이 썩은 줄이라도 되냐는 듯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거기에다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 와서 자신에게 옮기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아니, 재마는 하는 일마다 잘되잖아. 유치하게 ‘환자를 읽는 한의사’ 뭐 이런 거로 너튜브를 해도 잘되고.”

“그거야, 오빠가 못났다고 생각은 안 해?”

연아는 술주정을 듣고 있는 시간이 아까울 따름이었다.

연아의 눈에는 판을 깔아줘도 제대로 못 하는 건 최중기인데 괜히 이재마에게 자격지심이 생겨 자신에게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집에 가서 잠이나 자. 그리고 명의 한의원 문화재 지정 안 돼. 문화재 지정되면 우리 아빠나 작은 아빠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뭐?”

“그런 거 두고 볼 사람들 아니니까, 괜히 이재마 부러워 나 하지 말고 오빠나 병원에서 잘할 생각 하라고. 나야말로 다른 사람들이 썩은 줄이라고 할 판이야. 괜히 이재마한테 자격지심 있어서 나한테 이럴 거면. 다시는 나 찾아오지 마.”

연아는 중기를 한심스럽게 바라봤다.

“자격지심?”

“나 만나서 동기들 중 제일 잘나갈 줄 알았는데 이재마보다 못하니까 괜히 나한테 와서 자격지심 부리는 거잖아.”

연아와 중기와의 감정의 골은 깊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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