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91화
재섭은 장롱 깊숙이 넣어뒀던 무엇인가를 들고나왔다.
오랫동안 그의 집안에서 보관하고 있던 가보인 ‘병합경훈’이 보자기 안에 싸여 있었다.
장롱 안에서 ‘병합경훈’을 손에 쥐는 순간부터 방 밖으로 들고나오는 순간까지도 재섭은 생각이 많아졌다.
‘이게 과연 맞는 일일까.’
자신의 고조부인 박시원 선생이 저술한 책을 박상도에게 건넨다면 확실히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간다는 한방병원의 대표이니 그 가치 이상으로 포장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건 내 이익을 보기 위한 게 아니라 부족한 내가 장롱에 꽁꽁 숨겨 가지고 있기보다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길을 택하는 거야.’
재섭은 머릿속에 복잡하게 들어찬 생각을 애써 밀어냈다.
재섭이 방 밖으로 나오자 앉아 있던 상도가 자리에서 일어나 보자기를 받아 들었다.
“아이고. 드디어 제가 ‘병합경훈’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군요.”
대한민국에서 제일간다는 한방병원 대표인 한의사가 이렇게까지 ‘병합경훈’을 귀하게 대해 준다는 데 재섭은 마음속 한구석에 자리 잡은 죄책감을 밀어낼 생각이었다.
“한번 확인해 보시죠.”
상도는 주머니에 미리 준비했던 흰 장갑을 꺼내 양손에 착용한 후, 책자를 한 장씩 넘겨보았다.
“오랫동안 관리를 잘해주신 덕분에 일 처리가 쉬울 것 같습니다.”
“문화재 지정은 확실하겠죠?”
“그럼요.”
재섭의 물음에 상도는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확인을 마친 상도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책자를 정리했다.
이제는 재섭의 손을 떠난 ‘병합경훈’이었다.
“감사합니다. 형님이 걱정하시는 부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걱정하시지 않도록 최대한 빨리 문화재 지정에 힘쓰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재섭은 자신을 형님이라 부르며 마지막 악수를 청하는 상도에게 고개를 숙이며 손을 잡았다.
인사를 마친 상도는 재섭의 집을 의기양양하게 걸어 나왔다.
양손에는 분홍색 보자기 뭉치를 든 채였다.
형인 상철이 오랫동안 맡겨놨던 일을 단 한 번의 만남에 처리해 버린 상도는 정 실장이 문을 연 세단 뒷좌석에 올라탔다.
옆에는 ‘경합경훈’을 올려두었다.
재섭은 상도의 차가 마을 어귀를 빠져나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자식들이 집을 떠날 때보다 더욱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대표님, 어디로 갈까요?”
“약속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북악스카이 쪽으로 가지.”
상도의 말에 정 실장은 서울로 향하는 고속도로로 차를 몰았다.
상도는 자신의 옆에 떡하니 자리한 ‘병합경훈’을 힐끔 바라보았다.
“노인네. 돈이면 다 되면서 지금까지 그 검은 속내를 보이지 않고 끌어안고 있었다니. 저 책 쪼가리가 뭐라고.”
마음 같아서는 트렁크에 넣어두고 이동을 하고 싶었지만, 아직까지는 저 책 쪼가리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가치를 가져다줄지 알 수 없었다.
그때까지는 그의 옆에 두고 가치를 끌어올릴 생각이었다.
“정 실장. 물건의 가치가 어떻게 평가되는 줄 아는가?”
상도의 말에 정 실장은 뒷좌석 박상도의 옆자리에 자리를 차지 하고 있는 ‘병합경훈’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야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얼마나 큰 노고를 가지고 만들었는지 아닙니까?”
“아니야. 제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큰 노력을 기울여 만들면 뭐하나. 그 후손들이 장롱에 처박아 놓고 공개를 안 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어.
또 그 후손이 장롱과 집안 문을 아무리 열어놓고 공개를 한들 무엇하나 사람들이 관심이나 주겠어? 그 물건을 누가 가지고 얼마나 가치를 끌어올리냐가 중요한 거야. 우리 정한 한방병원이 그 가치를 증명해 줄 거야.”
상도는 피식 웃으며 차창을 열며 바람을 쐬었다.
오늘 손에 얻은 ‘병합경훈’으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생각에 상도는 오래간만에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4대째 이어오는 한의사 집안으로 포장되어 있는 정한 한방병원.
그 진실은 상도와 상철만이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한의원을 상도가 운영한 것은 맞았지만, 그 위로는 상도와 상철의 집안이 아니었다.
-상도야, 이거는 네가 이제 보관해야 한다.
-이게 뭐예요? 할아버지?
어린 상도는 할아버지가 손에 쥐여준 족자를 펼쳐보았다.
어린 상도가 알 수 없는 한자들이 적혀져 있었지만, 자신의 성씨인 박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거 옛날 신분증 같은 건가? 할아버지 이름이에요? 박…….
-박 자, 시, 원.
할아버지는 상도가 가리키는 글자를 하나씩 읊었다.
상도는 자신이 알아본 박이라는 글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상도의 물음에 할아버지는 똘똘 맞은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애비가 이게 없었으면 네 애비 한의원도 못 차려줬을 거야.
-응?
-할애비의 할아버지가 모시던 주인님의 이름이야.
-주인님?
197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상도에게는 조금 낯선 단어인 주인님이라는 단어가 할아버지 입에서 나오자, 따라 물었다.
-할애비의 할아버지가 이걸 들고나오지 않았으면 이 땅들을 내 아버지가 물려받을 길도 없었겠지. 상도 네가 이해하기는 어렵지?
-네.
상도는 자신이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할아버지를 빤히 바라봤다.
-상도야. 이 시작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이 모든 걸 딛고 네가 품은 큰 뜻을 이뤄야 한다. 네가 뜻을 이루게 하기 위해 이 할애비의 할아버지가 큰 용기를 낸 걸지도 몰라.
-큰 뜻이요? 저도 한의사가 되야 하는 거예요?
-아니. 기왕이면 이 작은 시골의 한의사가 아니라 서울 땅에서 가장 큰 한의원을 차리렴. 이 땅을 모두 팔아도 좋으니. 네가 필요한 건 다 이 땅으로 손아귀에 넣으렴.
-갖고 싶은 건 다 가져도 돼요?
-그럼. 이 돈으로는 못 하는 게 없으니까.
상도는 오늘 또 한 번 돈으로 자신이 딛고 올라갈 물건을 손에 얻을 수 있었다.
자신이 이뤄온 정한 한방병원은 앞으로도 더욱 탄탄한 미래를 그릴 것이다.
* * *
“문화재과에서도 여러 방면으로 주민분들과 대화를 이어갈 방법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간담회를 저번에 갑작스럽게 마무리를 한 지영은 고개를 들 면목이 없는지, 재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전문 시위꾼들처럼 달려드는 주민들의 태도에 맥도 추리지 못한 문화재과 직원들이었다.
간담회 이후로는 문화재 지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라 예상했던 문화재과에서는 처음부터 다시 짚고 가자는 생각으로 상인들, 주민들과 접촉하고 있었다.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상인회에서도 모르는 인물들이라고 하더라고요.”
“상인회분들이 아니라고요?”
애써 상인들과 주민들에게 전화를 돌리는 일을 하고 있던 지영에게는 뜻밖의 정보였다.
“아무래도 개발 예정지이다 보니 투자자들이 보낸 사람들일 것 같군요.”
“투자자들이라…….”
지영의 얼굴이 재마의 말에 어두워졌다.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주민들보다 전문 투자자들의 뜻을 꺾기가 더욱 어려웠다.
그들은 개발의 가치를 보고 해인동으로 들어왔으니, 투자금을 빨리 회수하기 위해서는 빠른 개발만 생각할 것이었다.
“주민들이 반대가 심하다면 저희 한의원 측에서도 문화재 지정의 뜻을 밀고 나갈 생각은 없습니다. 저희 한의원의 명예를 위해 다른 주민들에게 희생을 요구할 수는 없으니까요.”
“걱정하신 만큼 개발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겁니다. 앞으로 문화재 관리를 문화재과에서 하기는 하겠지만, 시지정 문화재는 그 옆 상가나 가구들에게는 영향이 거의 없습니다.”
지영은 주민들의 희생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는 재마의 말에 두 손을 들어 가로저었다.
주민들이 오해 하고 있는 것을 풀기 위해 문화재과 직원들도 무던히 노력 중이었다.
간담회 때 주민들과 대화로 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문화재과의 실수였다.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되는 것이 개발 지역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테지만 이야기가 꺼내기 무섭게 달려드는 그 들과 대화조차 오가기 힘들었다.
“투자자 이야기는 과에 들어가서 더 이야기를 해봐야겠네요. 투자자가 보낸 인력이라면 투자자와 직접 대화를 하는 것이 좋겠고요.”
지영은 턱 끝을 매만졌다.
지난번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온 것을 보면 그 사람들을 보낸 투자자가 여러 명이 아니라 한 명일지도 몰랐다.
이왕이면 대화가 되는 사람과 대화다운 대화를 통해 풀고 싶었다.
“저희 한의원 때문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사이 얼굴이 헬쓱해진 지영에게 재마가 고개를 숙였다.
“아니에요. 제가 할 일인걸요. 얼른 명의 한의원 문화재 지정이 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요즘 시간 가는지도 모르고 일하고 있어요.”
지영은 애써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의 고생을 재마에게 다 들키고 싶지는 않은지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는 지영이었다.
“강 주임님. 스트레스와 과로는 만병의 근원입니다.”
“앗, 그런가요?”
재마는 아까부터 지영의 눈을 통해 그녀의 건강을 읽고 있었다.
처음 한의원을 찾아왔을 때보다 스트레스와 과로가 심해 짙은 회색빛의 섬광이 머리를 꽉 메우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명치 한가운데에는 소화가 되지 않아 축적된 음식물들이 계속 쌓여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명의 한의원 일을 맡고부터 생긴 증상이었다.
“요즘 소화도 되지 않으시고 머리도 무거우시죠?”
“한의사님을 속일 수는 없겠죠?”
약국에서 사 먹는 소화제로 연명하고 있는 지영은 재마에게는 숨길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으로 물었다.
식사도 거르고 편치 않은 속을 부여잡고 있을 때는 자신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렇게 힘들게 일을 하나 싶었지만, 막상 다시 온 명의 한의원 앞에서는 꼭 문화재 지정을 이뤄야겠다는 의지를 다졌던 지영이었다.
“그럼요. 바쁘시다니 침을 오래 맞는 건 부담스러우실 거고, 혈자리 몇 군데 뚫어 기 순환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가시면 저희 실장님이 약 챙겨드릴 겁니다. 빼 먹지 말고 드세요.”
재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지영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지영은 자신의 건강상태를 말하지 않아도 콕 짚어 낸 재마가 손 위에 몇 군데를 약침으로 찌름으로써 무거웠던 머리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벌써 속에 꽉 들어찬 스트레스와 내려가지 않던 음식물들이 한 방에 정리된 기분이었다.
“와. 명의 한의원을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보다 원장님이 인간문화재가 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한의사가 지금까지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 데요?”
지영의 놀라움에 터져 나온 농담을 재마도 맞받아쳤다.
“모든 일도 건강해야 이루실 수 있는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원장님. 조금 더 힘내서 진행해 볼게요.”
지영은 뻥 뚫린 기만큼 명의 한의원 문화재 지정도 뻥 뚫리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