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자를 읽는 한의사-90화 (90/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90화

“안 돼. 나는 절대 못 떼.”

“안 사장. 시장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렇게 무턱대고 현수막을 거는 게 능사가 아니라니까요.”

정육점을 찾아간 상인회장인 윤 사장은 막무가내인 안 사장을 설득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현수막을 붙일 사람은 안 사장밖에 없다고 생각한 윤 사장이었다.

“이렇게 앞뒤 안 보고 강경한 현수막을 붙여서 어쩌자는 겁니까.”

“난들 알아요? 그리고 내가 걸어 붙인 게 아니라니까 왜 나한테 와서 이래요? 상인회장님도 참 이상하시지.”

안 사장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제 할 일만 했다.

“안 사장님이 다른 상인들이랑 식사 자리도 만들고 명의 한의원 문화재 지정되는 것 반대했다는 거 나도 다 알고 왔어요.”

“나야 반대는 하지만, 모르는 일이라니까요.”

안 사장은 과일가게 윤 사장에게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잘라 말을 했다.

솔직히 해줄 말도 없었다.

간담회장에서 본 낯선 무리들도, 현수막도 자신이 모르는 일이었다.

혹시 박 이사라는 사람이? 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쪽에서 움직였다는 연락조차 안 사장에게 없었다.

윤 사장에게 해줄 말이 전혀 없었다.

“그럼 간담회 때 왔었다는 무리들도 안 사장님도 전혀 모르는 인물들입니까?”

윤 사장과 안 사장이 현수막을 가지고 실랑이를 하는 사이.

정육점으로 들어선 재마가 안 사장에게 물었다.

“이 원장님 오셨습니까.”

“원장님이 여기까지 무슨 일이세요?”

윤 사장은 정육점으로 들어서는 재마를 보자 온 동네 걸린 현수막 때문이라는 것을 단박에 예상했다.

안 사장은 시계를 바라보며 한의원에 있어야 할 사람이 자신의 가게에 찾아온 것이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안녕하세요. 윤 사장님, 이쪽에 계신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상인회장님 찾아오셨구나. 그럼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네. 저 냉동창고에 좀 다녀올게요.”

안 사장은 재마와 함께 있는 자리가 불편한지, 자리를 피했다.

윤 사장과 이 원장이 동시에 추궁한다면 해줄 말도 없는 상황에서 더욱 난감할 것 같아 냉동창고에 가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휴. 내가 내 건 현수막도 아닌 데 내가 찔릴 게 뭐람.’

냉동창고로 가겠다는 안 사장이었지만, 불편한 속마음은 재마에게 훤히 들렸다.

안 사장의 속마음을 들음으로써 해인동을 떠들썩하게 한 현수막의 주인이 안 사장이 아님은 확실해졌다.

‘안 사장이 아니면 누구라는 거지…….’

재마는 낯선 무리들의 소란과 이번 일의 연관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해인동에 개발이 진행 중이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온 지 꽤 되었으니 투자를 한 투자자 측에서 움직였을 수도 있었다.

재마와 함께 정육점을 나온 윤 사장은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두 손을 마주 대고 비비고만 있을 뿐이었다.

“원장님께 송구스러워서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윤 사장도 현수막의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재마에게 상황설명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윤 사장님께서 송구스러우실 일이 뭐가 있습니까.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한의원에 좋은 소식이 있는데 상인들 사이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으니 상인회장인 제가 죄송하죠.”

윤 사장의 잘못이 아니라고 재마는 괜찮다 했지만, 윤 사장은 재마에게 고개를 숙였다.

“일단 허가 없이 게시한 현수막에 대해서는 상인회에서 게시 중단을 할 생각입니다. 안 사장이 내걸었을 것이라 생각해서 찾아왔는데, 발뺌하는 건지 정말 아닌 건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주인이 없는 현수막이라 게시 중단을 통보할 수는 없지만 일단 현수막을 내리는 것부터 처리하겠습니다.”

윤 사장은 정육점 안쪽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궁금하지만, 나오지도 못하고 이도 저도 못하며 고기 손질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안 사장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이야기했다.

“아마 안 사장님이 게시하신 건 아닐 겁니다.”

“네?”

안 사장의 속마음을 읽은 재마는 그녀가 현수막을 걸지 않았다는 건 확신 할 수 있었다.

안 사장과 직접 대화를 해놓고도 그녀를 믿지 못하던 윤 사장은 재마의 확신에 찬 대답에 의아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저희 한의원에 자주 오시는 분이신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믿고 싶습니다.”

안 사장의 속마음을 읽었다 할 수는 없기에 재마는 안 사장을 신뢰하고 싶다는 말로 대신했다.

“개발 지역으로 묶인 이후로 투자자들이 다수 들어와 매입한 점포들이 있으니 투자자 측에서 움직였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랬을 수도 있겠군요. 그럼 그 부분은 상인회에서 가지고 있는 연락처로 제가 직접 확인해 보겠습니다.”

재마의 말에 걱정이 한시름이었던 윤 사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투자자 측에서 벌인 일이라면 오히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인들이 두 편으로 나누어져 의견 충돌을 내는 것보단 투자자들의 의견이라는 것이 마음만은 편했다.

“휴. 원장님이 이렇게까지 상인들을 신뢰해 주시는 데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상인들과 주민들 둘로 편을 나누자는 것도 아니고.”

윤 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벌어진 상황에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 직원이 간담회 때 처음 보는 낯선 분들이 계셨다는 데 상인분들과는 관련 없는 분들인가요?”

“저도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제가 없는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단 상인회의 공식적인 의견은 아닙니다. 저희 상인회는 시청에서 공식적으로 개발에 대한 가이드를 줄 때까지 섣불리 의견을 낼 생각은 없습니다.”

윤 사장은 상인회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어서 그런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럼요. 상인분들의 입장에서 객관적인 의견을 주셔야죠. 언제든 문제가 있을 때는 말씀해 주시죠. 상인분들이 부당한 상황은 한의원 측에서도 시청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겠습니다.”

재마도 명의 한의원을 문화재 지정을 하는 데에는 긍정적이었지만, 문화재 지정으로 인한 상인들의 희생을 요구할 생각은 없었다.

“원장님이 그렇게 이야기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상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고 잠자코 자리만 지키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 윤 사장은 재마가 결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고집부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에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 * *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을 텐데요. 저희는 가보인 ‘방합경훈’을 결코 내어 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상철이 맡아서 회유하던 ‘방합경훈’을 가지고 있는 박시원의 후손인 박재섭을 박상도가 직접 찾아왔다.

박재섭이 머물고 있는 한적한 시골 동네에 처음 보는 외제 세단이 먼지를 내고 왔을 때 밭일을 하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들어 어느 집에 찾아온 손님인가 관심을 가졌지만, 막상 박상도가 찾아온 재섭은 반가운 손님이 아니라는 듯 시선조차 주고 있지 않았다.

“저희도 무턱대고 협박을 한다거나 과도한 부탁을 드리려고 찾아온 건 아닙니다.”

상도는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재섭 앞으로 명함을 건넸다.

‘정한 한방병원 대표이사’라고 쓰인 명함을 보고 재섭은 잠시 흠칫했지만, 이내 표정 관리를 했다.

처음 박상철이란 인물이 찾아와 재섭의 고조부가 남긴 ‘병합경훈’의 가치를 높이 사며 문화재 지정에 힘쓰겠다는 말에 속아 넘어가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병합경훈’을 냉큼 내어줄 뻔한 경험이 있었다.

두 번째 찾아왔을 때 박상철이 건넨 계약서를 찬찬히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벌써 ‘병합경훈’은 그들의 손에 들어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당신네들이 ‘병합경훈’을 돈을 주고 사 가서 문화재 지정을 한다는 건 우리 집안의 수치요.”

“수치라니요. 가치를 알아보고 힘이 있는 저희 병원에서 관리를 하겠다는 거지요.”

박상도는 ‘병합경훈’의 가치를 운운하고 있었지만 박재섭은 그 들의 속내를 이미 알아챈 후였다.

같은 성씨인 박시원 선생이 저술한 의학 고서를 자신들의 손에 넣어 문화재 지정을 한 다음, 박상도의 조상이 저술한 것처럼 보장을 할 계획을 이미 재섭은 알고 있었다.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조상이 아닌 사람을 조상으로 포장을 하는 것이.”

재섭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오늘 처음 상도를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비록 자신은 눈앞에 있는 박상도라는 사람보다 재산을 축적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사람이었지만 마음속 한구석에는 박시원 선생이라는 조상을 모시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조상이 아니라고 누가 그럽니까.”

“뭐요?”

“한 집안인 박시원 선생을 알릴 수 있는 힘이 있는 건 박시원 선생에게도 좋은 일임이 분명합니다.”

박상도는 자신과 박재섭이 같은 성씨 같은 종파의 한집안임을 강조했다.

상도는 자신이 직접 왔음에도 좀처럼 뜻을 굽히지 않는 재섭을 향해 입을 열었다.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겠다고 가 있는 첫째 아드님, 계속되는 실패로 큰돈이 필요하신 거 알고 있습니다.”

“뭐요?”

고개를 돌리고 있던 재섭은 상도의 입에서 큰아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흠칫했다.

3년 전 베트남으로 들어가 카페를 하겠다며 호기롭게 갔던 큰 녀석의 이야기였다.

1년 전, 자금을 조금 마련해 주면 부모님의 노후를 책임지겠다며 돈을 요구했지만, 아직 장가를 가지 않은 둘째 아들과 막내딸을 생각하니 내어주고 싶어도 쉽사리 큰돈을 투자할 수 없었던 재섭이었다.

그 뒤로 자신에게 연락은 하지 않았지만, 안사람에게 틈틈이 돈을 요구하는 전화가 오는 건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리고 막내 따님이 삼정에 입사하고 나서 삼정 직원과 혼사 이야기가 나오고 있군요. 요즘은 딸 시집보내기도 돈이 좀 많이 드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상도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재섭의 집안 사정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이야기를 했다.

“그…… 그걸 다 어떻게 알고 온 거요?”

“같은 집안사람끼리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드리고는 해야죠.”

상도는 자신의 안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하나 꺼냈다.

재섭은 자신의 앞쪽으로 놓인 흰 봉투를 바라봤다.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열어보지 않고도 가늠이 갔다.

하지만 섣불리 손을 뻗어 열어 볼 수는 없었다.

사람 욕심이 그 안에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는 쉽게 내려놓지 못할 것을 잘 알았다.

‘여보. 그래도 정석이한테 전화라도 한번…… 넣어봐요. 정석이가 첫 단추인데 무엇이든 잘돼야 하지 않겠어요?’

자신에게 첫째 아들인 정석을 저대로 두겠냐고 넌지시 이야기를 하던 안사람의 목소리가 재섭의 귓가에 울렸다.

들은 체도 하지 않았지만 맘속에는 박혀 있었던 한마디였다.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같은 집안사람으로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준비한 겁니다.”

고민을 하는 듯한 재섭을 향해 다시 한번 봉투를 가까이 옮기는 상도는 부담 갖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재섭은 봉투와 상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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