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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89화 (89/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89화

“우리에겐 생계가 달린 문제이니 양보 못 합니다.”

“옳소!”

“해인동 시장 골목 개발 즉각 시행하라!”

“시행하라!”

맨 뒷줄에 앉아 있던 사내가 일어나 외치자 그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동요를 하며 선창에 맞춰 소리쳤다.

“인증되지 않은 무분별한 문화재 지정 취소하라!”

“취소하라!”

“주민들의 동의 없이 문화재 지정, 개발제한 취소하라!”

“취소하라!”

안 사장을 비롯한 시장 상인들은 낯선 무리의 외침에 얼떨결에 손을 들고 선창에 따라 했다.

이렇게까지 일이 크게 벌어질지 몰랐지만, 큰소리로 외치는 무리에 소리를 내니 시청 직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이 보였다.

‘큰소리 내는 쪽이 이기는 거지. 이대로 질 수는 없으니까.’

“취…… 취소하라.”

미숙도 분위기에 휩쓸려 작은 목소리로 소리를 내고 있을 때,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던 시청 직원들이 무리의 소리를 멈추기 위해 나섰다.

“주민 여러분. 진정들 하시고요. 여기에서 이렇게 큰소리로 이야기하시면 안 됩니다. 한 분씩 차례대로 이야기를 해주세요.”

“한 사람씩 좋게 이야기하면 우리처럼 힘없는 사람 이야기, 들어줄 겁니까?”

“시청에서도 주민 여러분들의 의견을 적극 수용할 생각입니다.”

지영은 큰소리를 외치는 사람들을 향해 큰 목소리를 냈다.

자신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기 위해 큰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명의 한의원이 문화재가 되면 우리에게 이득이 될 게 뭐요! 다 명의 한의원 홍보를 위한 문화재 지정 아니요?”

“홍보용으로 문화재 지정이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저희도 절차를 거쳐서 심사 후 결정이 된 겁니다. 주민 여러분들의 동의만 있으면 이제 문화재 지정까지 거의 다 온 단계입니다.”

지영의 말에 아무도 동요하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주민 여러분의 입장에서 백번 이해하고 조정하겠습니다. 이렇게 큰소리로 한꺼번에 대응하지 마시고 의견을 말해주세요.”

“그럼 당장 개발 진행하세요!”

시청에서 의견을 수용한다는 이야기에 또다시 사람들은 개발을 멈추지 말고 진행하라 외치기 시작했다.

“오메. 이게 무슨 일이여.”

“그러게 말이야. 나는 진 할매가 다과 먹으러 오자 해서 따라왔는데 이거 이상한 일에 휩쓸리는 거 아니야?”

“설마. 시청에서 하는 일인디?”

“나는 그거는 모르겄고. 집에 가야 쓰겄네. 나이도 많아서 힘도 없는디 이런 싸움에 괜히 휩쓸렸다가 큰일 보게 생겼어.”

갑순과 함께 무리 지어 왔던 노인정 어르신들은 갑자기 돌변한 분위기에 겁에 질렸다.

괜히 젊은 사람들의 싸움에 휩쓸려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자식들에게 얼굴 볼 낯이 없었다.

“자자. 진정들 허고. 우리까지 이렇게 우왕좌왕하면 안 되지.”

갑순이 할머니들을 진정시켜보려 목소리를 냈지만, 할머니들은 더 이상 자리를 지킬 이유가 없다는 듯 한 명씩 자리를 떠났다.

“해인동 역사의 산증인들인데, 그냥 다 집에 가는 거여?

“산증인고 뭐고. 나는 괜히 큰소리 나는 일에 휩쓸리기 싫어.”

“그려. 아들도 몸 사리라고 했고.”

갑순의 만류에도 자리를 떠나려는 할머니들은 간담회장을 떠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갑순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솔직히 말해 해인동에서 오래된 명의 한의원이 문화재 지정이 되면 동네의 위상이 올라갈까 좋기는 했지만, 할머니들에게 직접적으로 좋은 것도 없었다.

괜한 일에 휩쓸리기에는 위험성이 크다고 느꼈다.

“에휴.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래.”

“갑순 여사님. 오늘은 어르신도 먼저 집에 돌아가세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강산이 갑순의 양어깨를 감싸며 이야기했다.

“이게 다 뭔 일이여. 얼른 원장님한테 연락해야 하는 거 아니야?”

자신이 걱정을 할까 봐 어깨를 감싼 강산을 올려다보며 갑순이 되물었다.

“한의원에서도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긴 한데, 일이 생각보다 커지긴 했네요.”

애써 괜찮은 척해보려 하지만 강산도 막무가내인 상인회 측의 반응에 억지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문화재 지정은 안 되는 거야?”

“글쎄요. 그래도 상인회 분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진행할 수는 없으니 서로 의견 조율을 해야겠죠?”

“의견 조율이 될까. 저렇게 막무가내인데…… 근디…… 처음 보는 얼굴들이 많은데 다들 어디서 온 사람들인가…….”

갑순은 해인동 골목에서 영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에 얼굴을 갸웃했다.

“강산 씨. 오늘 간담회는 이대로 정리해야 할 것 같아요.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분들이랑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고요.”

강경파인 사람들과 대화를 시도하던 지영은 난감한 나머지 어쩔 줄 모르겠다는 기색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 쪽에선…….”

“일단은 저분들과 대화를 해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지영과 문화재과 직원들은 간담회 진행이 더는 어렵다는 생각에 상황을 정리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강산과 갑순은 시청 직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간담회장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 * *

명의 한의원의 간담회 이후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조용했던 해인동 골목에는 현수막이 걸리기 시작했다.

-무분별한 문화재 지정. 문화재과는 즉각 취소하라.

-주민들의 동의 없는 문화재 지정. 즉각 취소하라.

-해인동 시장 골목은 명의 한의원 문화재 지정을 반대한다.

“어휴. 저렇게 현수막이 걸려서 어쩌죠?”

출근을 하던 미정은 하루아침에 걸린 현수막에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의원을 들어섰다.

개발 진행을 촉구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을 때와 또 다르게 명의 한의원과 해인동 상인들 사이에서 싸움이라도 벌어지고 있는 분위기였다.

이런 분위기인 상태에서 진료가 가능할지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게요. 일이 이렇게까지 벌어질지 몰랐는데…….”

“오늘 하루 종일 정 실장님 더 바쁘시겠어요…”

“우리 한의원 한 번이라도 와본 사람들이면 저렇게 반대만은 하지 않을 텐데…….”

정 실장과 미정의 업무는 한의원에서 한의사들의 일을 보조하는 역할이었지만, 한의원에 이슈가 생기면 때때로 상담이 주 업무가 되기도 했다.

이번 일은 온 동네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는 해인동 개발과도 연관이 있으니 특히나 하루 종일 업무가 마비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오늘 최대한 노력해 주세요. 제가 빠른 시일 내 해결되도록 힘써보겠습니다.”

재마는 명의 한의원을 이끄는 수장으로서 다른 직원들이나 환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문화재 지정에 재마가 할 일이 없이 문화재과에서 진행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할 때 같았다.

“어제 보니 상인회 측에서 반대가 큰 것 같아.”

“응. 나도 어제 강 주사님한테 연락 받았어. 상인분들이랑 연관이 많다고 하니까 상인회장님이랑 면담을 좀 해보고…….”

“상인회장님이 과일가게 윤 사장님이시지?”

재마가 상인회장을 만나러 간다는 말에 강산은 명인한의원과 마주 보고 있는 과일가게 윤 사장을 떠올렸다.

어제 해인동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간담회임에도 불구하고 상인회장인 윤 사장이 보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거기에다 어제 큰 목소리를 냈던 무리들은 강산도 처음 보고 갑순도 처음 보는 인물들이었다.

왠지 모르게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선동하는 것이 일반적인 주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응.”

“상인회장님은 어제 안 오셨었는 데.”

“그래?”

어제 간담회 참석을 하지 못했던 재마는 상인회장인 윤 사장이 참석을 하지 않았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상인회장이 없이 큰소리를 내며 단체 활동을 했다는 것이 무엇인가 찜찜한 기분이 드는 재마와 강산이었다.

‘상인회랑은 관련이 없는 일인가 보군.’

상인회장이 움직이지 않고는 상인회의 뜻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한 재마였다.

일단 윤 사장을 만나보고 앞으로의 대책을 세워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같은 시간.

새벽 과일 시장을 다녀오겠다며 시장으로 나섰던 윤 사장이 가게로 복귀하고 있었다.

오늘 새벽시장에서 만난 옆 동네 과일 가게 사장에게 들은 심상치 않은 이야기에 당황한 윤 사장은 오늘 경매를 어떻게 진행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해인동 시장 요즘 분위기 장난 아니라며. 거기 있는 한의원인가 뭔가 문화재 지정한다고 상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권리요구 했다는 데 그래서 한의원에서는 얼마씩 주기로 했대?’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문화재 지정이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상인들이 반대를 하고 있고 그 보상을 한의원에게 요구를 한다는 건 말도 안 되었다.

‘문화재 지정이 되면 홍보 효과도 있을 테니 그 부분에 대해서 상인들이 요구하기는 해야지. 안 그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윤 사장의 생각은 달랐다.

앞으로 길게 본다면 명의 한의원의 문화재 지정이 시장 골목에 분명한 이득을 줄 것이 분명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개발이 늦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도 이해했지만, 상인회 대표로서 개발이 늦어지는 만큼 상인회에서 원하는 의견을 큰소리가 아닌 적당한 의견 조율을 할 생각이었다.

간담회를 당장 다음 날 아침 새벽시장을 가는 자신이 아닌 안사람인 미숙을 보낸 것도 후회가 되는 순간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자신의 가게까지 왔는지 알 수 없는 윤 사장은 해인동에 도착하자마자 경매 받아 온 과일은 내리지 않고 곧장 미숙이 있는 가게로 들어갔다.

“어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새벽 시장을 갔던 남편이 과일도 내리지 않고 다짜고짜 묻는 질문에 미숙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네?”

“어제 간담회장에서 고성이 오갔다며. 상인들이 시청 직원들한테 보상 이야기도 꺼내고.”

“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웬 처음 보는 사람들이 상인들 편에 서서…….”

“뭐?”

윤 사장은 미숙도 모르는 사람들이 큰소리를 치며 상인들 편에 서서 목소리를 냈다는 소리에 한쪽 눈을 찌푸렸다.

이건 또 처음 듣는 소리였다.

“어제 상인회에서 누구누구 갔었던 거야?”

“정육점 안 사장님하고, 소고기구이집 박 사장님 내외…….”

미숙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어제 참석했던 사람들을 이야기했다.

몇 안 되는 상인회 직원들이 가서 간담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는 말에 윤 사장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정육점 안 사장 좀 만나고 올 테니까 가게 좀 보고 있어.”

“시장 다녀온 물건들은요. 안 내려요?”

윤 사장이 물건부터 내려줘야 오늘 영업을 준비하는 미숙은 발을 동동거렸다.

“지금 밖에 현수막 걸린 거 안 보여? 저것부터 해결을 해야 손님들도 올 것 아니야.”

새벽시장을 다녀오다 보니 골목 어귀부터 시작된 현수막들이 윤 사장의 가게 앞까지 걸려 있었다.

“대체 이런 건 누가 한 거야. 상인회에서도 가만히 있는 데!”

“그…… 그야 우리도 권리를 찾아야…….”

권리 이야기를 꺼내는 미숙의 이야기에 윤 사장은 대답도 하지 않고 가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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