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88화
“아이구야. 해인동에 경사여. 경사.”
“그러니까. 우리 동네에 문화재가 생길 줄 누가 알았어.”
노인정 어르신들이 간담회 장소로 하나둘 속속 들어올 때마다 해인동에 경사가 났다며 한마디씩 칭찬을 이어갔다.
“근데 간담회는 뭐여?”
“그, 그런 거 있잖어. 동네 사람들 모여 놓고 인사도 하고 앞으로 계획 같은 거 말하고.”
“그런 게 필요한가?”
“필요하지. 그럼. 요즘 젊은 사람들은 절차가 중요해. 절차 없이 무슨 일 했다가 큰일 난다구.”
“여, 여, 이리와 봐. 다과도 있네. 과자도 있고. 양갱도 있고.”
갑순은 함께 우르르 몰려온 할머니들에게 다과가 차려진 한쪽 면으로 모이라며 손짓했다.
오늘 간담회에 노인정 어르신들을 한꺼번에 올 수 있었던 건 명의 한의원의 최고 단골인 진갑순의 역할이 컸다.
“노인정에 죽치고 앉아서 화투만 치고 있으면 뭘 혀. 여기 와서 다과상도 받아먹고. 앞으로 우리 해인동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이야기를 들으면 좋지.”
“에이. 우리 늙은이가 낄 데가 있어?”
“왜 그래. 우리가 해인동 역사 산증인들인데…… 솔직히 생각혀 봐. 명의 한의원이 문화재 지정이 되는 것도 다~ 우리랑 역사를 함께해 왔으니까 가능한 거야. 그걸 누가 증명해 줘. 기록? 기록도 중요허지만, 조작이라도 있어봐 봐. 우리가 산 증인으로 나서야 된다니까.”
“그려그려. 진갑순이 똑똑허지.”
해인동 명의 한의원이 문화재 지정이 되는 데 어른들이 나서서 일조를 해야 한다는 말에 어르신들은 이해를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우리 진 여사님 역시 명의 한의원 홍보대사시네.”
강산은 시청 직원들을 도와 간담회를 준비하다가 갑순의 이야기를 듣고는 어르신들에게 다가왔다.
“그럼. 내가 홍보대사지.”
“자, 저쪽으로 가면 명의 한의원 표 쌍화차도 있으니까 한 잔씩들 하시면서 기다리세요.”
“근데 원장님은 안 오셔? 원장님이 주인공 아닌감.”
간담회에 사람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는데, 정작 한의원을 운영하는 재마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갑순이 장내를 둘러보며 물었다.
“우리 이 원장님은 진료하느라 바쁘시죠. 그리고 주인공은 원장님이 아니라 해인동 주민분들이시고. 이게 다 해인동에서 많은 분들이 한의원 찾아주시니까 명의 한의원이 오래도록 진료를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재마가 보이지 않아 서운한 듯 보이는 어르신들에게 강산은 재마가 참석하지 못한 이유를 할머니들의 눈에 맞춰 설명했다.
“그렇긴 하지만. 그럼 오늘 진행은 누가 하는 겨. 강 선생이 하나?”
“제가요? 에이. 아니죠. 오늘 간담회는 시청에서 진행하시는 거라 명의 한의원에 대해 아주 잘 아는 분이 하실 거예요.”
“그렇게 다 맡겨도 돼?”
갑순은 혹여 해인동의 자랑이 될지 모르는 명의 한의원이 문화재 지정이 되는 데에 문제라도 생길까 봐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저나 이 원장님보다도 더 잘 아실걸요? 문화재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하시고 문화재 지정에 힘쓰는 분이니까 잘하실 거예요.”
갑순의 걱정을 안심시키듯 강산은 잘 이야기를 마쳤다.
“근디, 진짜 우리가 와도 되는 겨? 젊은 사람들 오는 덴디 눈치 없이 온 거 아닌가 몰라.”
갑순의 부추김에 오기는 했지만, 혹시 환영받지 못하는 방문인 게 마음에 걸리는 영숙이 강산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막상 따라오고 보니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상인회에서도 몇 오지 않고 노인정 사람들이 괜히 자리를 채우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아이고. 그런 걱정일랑 하지 마시고, 그냥 오늘 이야기도 들으시고 맛있는 것도 많이 잡수고 가세요. 알았죠?”
강산은 특유의 친근함으로 할머니들의 손자처럼 따뜻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의 말에 다른 어르신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할머니들 뒤쪽에서 이미 자리를 잡고 앉은 정육점 안 사장이 미간을 찌푸리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갑순이 당연히 간담회에 올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할머니들을 우르르 몰고 올 건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휴. 저렇게 할머니들이 몰려와서 이따가 한마디씩 하면 우리 이야기할 시간이 없을 텐데…….”
“그래도 저희만큼이나 권리가 있으신 분들이니까요. 우리보다도 해인동에 오래 계셨는데 당연히 와보셔야죠.”
할머니들이 오며 가며 눈인사를 하는 통에 정신없이 인사를 받던 과일가게 미숙은 안 사장의 투덜거림에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를 했다.
“현정 엄마는 누구 편이야. 우리 상인회가 힘을 쓰려면 한마음이어야지.”
“아, 그야…….”
미숙은 자신의 대답에 톡 쏘아붙이는 안 사장의 말에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안 사장!”
상인들 모임을 했던 소고기구이집 박 사장과 정애가 손을 흔들면서 간담회 장소로 들어왔다.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상인들에게 박상철이 밥도 사줬건만, 다들 사는 것이 바쁘다는 이유로 간담회에 드문드문 얼굴을 비추고 있으니 안 사장이 마음이 다급했다.
“상인들은 아직 별로 안 온 거야?”
박 사장은 정육점 안 사장과 과일가게 미숙, 자신의 아내인 정애가 몰려 앉아 있고 그 뒷줄 서너 명밖에 모이지 않은 상황에 조금 당황한 모양이었다.
“박 사장네는 저녁 장사를 하니까 두 내외가 온다 하지만, 다른 가게들은 장사 내팽개치고 올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간담회 날 대타라도 구하고 참석하라고 목이 터져라 이야기를 했건만 상인들이 모이기는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뭐. 우리라도 이야기 잘 듣고, 할 얘기 또박또박하면 되니까.”
평소에 똑소리 나는 정애는 할 말은 하겠다는 듯,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런데 저 뒤에 사람들은 누구야?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정애는 의지를 불태우며 간담회에 아는 인물이 있나 고개를 돌렸는데, 맨 뒷줄에 앉은 열댓 명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안 사장에게 물었다.
안 사장이 해인동에서 가장 발이 넓고 정보통이니 아는 사람도 많았다.
“글쎄. 나도 잘은 모르겠네. 근데 뭐 이쪽 골목 말고도 이미 개발 예정지에 묶여 있는 원룸촌 사람들일 수도 있지.”
해인동 시장 골목 뒤쪽으로 있는 원룸촌에는 가까운 대학의 대학생들이나 서울 중심으로 출퇴근을 하는 젊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 시장 골목 쪽으로 내려오는 일이 드물었다.
안 사장은 처음 보는 인물에는 관심이 없고, 진짜 관심이 필요한 상인회 골목 사람들이 많이 참석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하긴 뭐. 우리가 해인동 사람들 다 아는 건 아니니까.
“자, 어느 정도 모이신 것 같고 간담회 시간이 다 되었으니 간담회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시청 문화재과에 있는 지영이 마이크를 잡고는 장내에 있는 상인들과 주민들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역사가 유구한 마을인 만큼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찾아주셨네요. 저는 시청 문화재과에 있는 강지영이라고 합니다.”
지영의 인사에 노인정 어르신들뿐만 아니라 상인들도 박수를 쳤다.
지영은 명의 한의원이 문화재 지정 계획부터 간담회까지 일을 맡아 하고 있어 마지막 관문인 간담회를 앞두고 많이 긴장한 듯 보였다.
“아시다시피 명의 한의원은 해인동과 꽤 오랜 시간 함께해 왔습니다. 현재 5대째 한의원을 이어오고 계신 이재마 원장님은…….”
지영은 준비해 온 자료를 차근차근 주민들과 상인들에게 설명을 하며 문화재 지정의 이유와 앞으로의 발달 모습. 지정 후 관리 계획 등을 상세하게 이야기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해나갈 때마다 노인정 어르신들은 이야기에 동요해 가며 박수를 치기도 때로는 감탄하기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강산은 오늘 진료로 참석하지 못한 재마를 대신해 영상촬영을 하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 명의 한의원 문화재 지정에 대해 질의응답 시간을 갖겠습니다. 궁금하신 점 있으신 분들은 편하게 손들어 주세요.”
질의응답 시간이라는 말에 안 사장이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네. 저쪽 빨간색 상의 입으신 분.”
“아아. 네. 정육점을 하고 있는 안숙자라고 합니다.”
숙자는 진행요원이 건네준 마이크를 잡고 자신의 소개를 했다.
“명의 한의원이 문화재 지정이 되는 건 참 반가운 일이기는 한데요. 문화재 지정을 하면 아까 말씀하셨듯이 미관상의 문제로 그 주변 일대 환경까지 시청에서 책임지신다고 했는데 그 일대에는 우리 해인동 시장 골목이 있습니다.”
문화재 지정 진행 과정과 간담회를 담당하고 있는 지영은 안 사장의 말에 긴장을 했다.
해인동 명의 한의원의 문화재 지정에 가장 큰 숙제인 시장 골목 상인의 의견이 제일 첫 질문으로 나온 것이었다.
“해인동 시장 골목을 포함해 명의 한의원은 해인동 개발지구에 묶여 있기도 하고요. 이제 개발을 코앞에 두고 있는 데 이 과정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합니다.”
더구나 개발 이야기까지 묶여 있으니 지영의 머리가 아찔해졌다.
이 부분은 시청 문화재과에서도 여러 번 회의를 거치고 어렵게 진행 중인 이야기였다.
“네. 질문 감사합니다.”
일단 질문에 감사하다고 이야기를 한 지영이 심호흡을 짧게 하고 답변을 시작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문화재 지정이 되면 일대 환경조성을 시청이 맡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옆 건물, 뒤 건물과의 간격도 최대한 문화재 보호에 맞게 다시 공사를 하게 될 수도 있고요. 그 부분은 충분한 보상과 협의로 진행됩니다. 그리고 해인동 개발에 대한 문제는…….”
지영은 한마디 한마디 자신의 입 밖으로 나온 이야기가 상인들과 주민들의 마음에 모두 부합할 수는 없다는 걸 잘 알아 더욱 조심스러웠다.
“현재 개발 진행을 위해 현장을 맡은 시공사와 논의 중이며 문화재 지정이 개발보다 앞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그럴 경우 해인동 명의 한의원은 개발 지역에서 제외되며…….”
“아니, 그럼 개발 진행이 더 늦다는 이야기입니까?”
지영의 말을 딱 자른 맨 뒷줄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아무래도 문화재 지정이 먼저 진행되야 명의 한의원의 역사를 그대로 보존하고…….”
“역사고 나발이고 지금 사람들 생계가 딸린 문제인데 지금까지 진행해 온 건 올 스톱해놓고 갑자기 문화재 지정이라는 이유로 개발을 막겠다고요?”
맨 뒷줄 사내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50대 중년 여성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삿대질을 시작했다.
노인정 어르신들은 물론, 문화재 지정에 탐탁지 않아 했던 안 사장과 박 사장도 당황한 나머지 뒷줄 사람들의 목소리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제가 다시 설명해 드릴 테니 진정해 주시고요.”
“진정이 됩니까. 지금? 이제 좋은 말이라 간담회지. 통보 아닙니까. 선생은 당신 집이 이제 개발을 앞두고 있는 데 갑자기 옆집에서 문화재 지정하겠다고 개발은 물 건너갔다고 하는데 진정하겠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은 지영을 비롯한 시청 직원들을 향해 큰소리로 대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