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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87화 (87/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87화

“어머, 명의 한의원 유명해졌다 싶더니 문화재 지정되나 봐요?”

“아, 네. 아직 절차가 좀 남기는 했어요.”

정 실장은 신규 환자뿐 아니라 오랜 단골인 환자들도 문화재 지정과정에 대해 물어오는 탓에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축하해요. 이제 명의 한의원 더 유명해지면 어쩌나. 지금도 대기시간이 긴데…….”

“근데 한의원도 문화재 지정이 되는 거예요? 난 몰랐네.”

“유명 한의원이라고 입소문 좀 내야겠네.”

이렇듯 환자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오늘 별다른 일은 없었죠?”

마감을 하며 원장인 이재마가 정 실장을 향해 물었을 때는 이미 평소보다 많은 인사를 받은 탓에 정신이 혼미해진 모습이었다.

“정 실장님 평소보다 더 힘들어 보이시는데…….”

재마가 그제야 정 실장의 안색을 살피자, 미정이 정 실장을 걱정했다.

“요즘 환자들이 문화재 지정 이야기로 질문이 많으셔서 그거 다 받아주시느라 그래요.”

평소에도 환자가 많아 미정과 정 실장이 업무가 과중 상태였는데 처치실에서는 미정에게, 상담 데스크에서는 정 실장에게 질문들이 쏟아졌다.

“아…….”

본의 아니게 직원들에게 상담 업무 한 가지를 더 얹어 준 기분이라 재마는 난감할 따름이었다.

“제게도 많이 질문들 주시긴 하는데 환자분들이 정 실장님이 워낙 친절하시니까 더 많이 물어보시는 것 같아요…….”

미정은 정 실장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다 한의원 일인걸요.”

“문화재 지정 과정이 얼른 끝나야 정 실장님도 좀 편해지시겠네요.”

“이왕 이렇게 된 거 결과가 좋았으면 좋겠어요.”

정 실장은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재마와 미정을 바라보며 괜찮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일 간담회하고 나서는 이제 결과만 남았다고 하니까 조금 더 고생해 주세요.”

“네. 내일 간담회 때는 별일이 없겠죠?”

마주 보고 있는 상인들의 반대가 예상되고 있어, 정 실장은 조금 걱정스럽기도 했다.

이미 명의 한의원이 불편하다고 발길을 끊은 상인들도 있었다.

“글쎄요. 내일 간담회를 해봐야 상인분들의 사정도 정확히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인분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서 좋은 방향으로 해야겠죠.”

재마도 상인들과의 관계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

그저 서로 간의 관계뿐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생계가 달린 문제이니 결코 가벼운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간 상인들과 관계도 좋았고, 원장님이 오신 이후로는 너튜브로 홍보 활동이 되면서 해인동 시장 골목도 많은 덕을 봤으니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요?”

최 실장은 재마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마음에 쓰이는지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야기했다.

최 실장의 이야기에 재마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 *

“장석정 님, 진료실로 모실게요.”

노모와 함께 명의 한의원을 찾은 은해는 이제 아흔이 훌쩍 넘은 노모가 십수 년 전에 찾았던 한의원을 가겠다 고집하는 바람에 택시를 타고 예전 살던 동네에 있는 해인동 한의원을 찾았다.

예전에 해인동 살 때도 한옥인 한의원이 세월이 지나도 바뀐 건 하나도 없는 데 미어터지는 마당을 들어서서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장석정 님, 오래간만에 오셨네요.”

은해와 석정을 향해 인사를 하는 직원이 눈에 익은 걸 보니, 오랜 시간이 지나도 예전에 있던 직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먼 곳에 오자고 고집을 부리는 노모에게 다 비슷비슷한 실력을 갖춘 한의사들인데 꼭 택시까지 타고 그곳을 가야겠냐고 투덜댔던 은해였지만, 옛 생각이 나는 것 같아 조금 마음이 누그러들었다.

“네. 이사를 가서요. 근데 어머니가 꼭 이 한의원을 오겠다고 하시네요.”

“감사합니다. 멀리서 찾아주시고. 대기 시간이 좀 길기는 한데 대기해 주시겠어요?”

예전에도 친절했던 기억이 있는 정 실장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석정을 향해 또박또박 설명을 했다.

석정도 알아들은 건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오랜 대기 시간을 견디는 것이 은해와 석정에게 조금 버거워질 때쯤, 드디어 석정의 차례가 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노모를 부축하며 자신의 무릎도 성치 않아 다리를 절뚝이는 은해는 진료실로 노모를 부축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진료실에는 젊은 사내가 있었다.

지금까지 예전과 변하지 않은 한의원의 모습에 긴 시간을 대기했던 은해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아이고. 원장님이 바뀌셨네.”

“네. 오래간만에 오셨네요. 어르신.”

젊은 원장은 환자인 석정을 바라보며 오래간만에 오셨다며, 진료를 시작했다.

어머니가 먼 곳을 찾은 이유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한의원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한의원 원장을 바라보고 왔을 텐데, 긴 대기를 하며 결국 새로운 원장을 만났다는 것이 탐탁지 않은 은해였다.

긴 시간 기다리며 무릎이며 어리며 좋지 않은 은해는 괜스레 제 몸이 더욱 쑤시는 기분이었다.

진맥을 짚은 젊은 원장은 석정을 향해 큰 목소리로 질문을 했다.

“어르신. 저희 한의원 말고도 약 드셨었어요?”

진맥을 하자마자, 한약 복용을 해왔는지를 묻는 탓에 석정은 조금 짜증이 났다.

“연세도 있으시고, 자식이 다섯인데 좋다는 약은 분기별로 해드렸죠.”

조금 툴툴대는 석정의 목소리였지만, 재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실 좋은 약재가 들어간 약을 드시는 건 좋지만, 한 곳에서 꾸준히 드시는 것이 환자에게는 좋습니다.”

“네?”

의아한 원장의 말에 은해는 날카롭게 대답을 했다.

-아니, 자기네 한의원에서만 약을 지으라는 거야, 뭐야?

들어 올 때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내켜 하지 않은 내색을 하던 보호자 은해의 마음을 읽은 재마는 다소 기분이 나쁠 만도 했지만, 보호자의 기분도 이해할 수 있었다.

“환자의 몸과 상태에 맞춰 꾸준한 약을 드시는 것이 오히려 좋거든요. 여러 군데의 한의원에서 약을 짓게 되면 조금 처방이 매번 제각각일 수 있고, 아무리 좋은 약재라도 서로 궁합이 중요한데 안 맞을 수도 있고요.”

은해는 재마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입술을 삐죽였다.

“오늘은 그럼 변비에 좋은 처방이랑 허리와 무릎 안 좋은 것을 낫게 할 침 놔드릴게요.”

재마의 말에 몇 마디 하지 않은 석정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가 불편해서 왔는지도 묻지 않은 원장이 처방을 내렸지만, 은해는 대답도 안 할 뿐이었다.

침을 맞고 나면 노모에게 말해서 동네에 있는 한의원을 다시 가자고 말할 참이었다.

나이가 한참 어린 한의사였지만, 노모인 석정은 고개를 깊이 숙여 수고하셨다고 말을 하며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예전처럼 그대로인 처치실로 안내를 받은 은해는 노모와 단둘의 공간에 들어오자마자 노모에게 바짝 붙어 물었다.

“엄마, 진짜 변비에 좋은 약만 먹어도 되겠어? 어디 아픈지도 안 물어봤잖아.”

“됐어. 나는 그만하면…… 무릎 아프고, 허리 아픈데 침 맞으면 되지. 그리고 다 늙어서 이제 가나, 저제 가나 똑같은 나이에 이 약 저 약 먹어봤자 뭐 해. 이제 너희도 그만해.”

노모는 젊은 원장이 했던 말이 마음에 쓰이는지, 장녀인 딸을 나무라듯 말했다.

“하여간 쓸데없는 소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말할 게 뭐람.”

은해는 원장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여 이제 가나, 저제 가나라며 죽을 날을 받아 놓은 듯 말하는 노모의 말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커튼 밖에 침을 놓기 위해 들어 온 재마가 인기척을 내었다.

“들어가겠습니다.”

“네. 들어오셔유. 원장님.”

석정은 침을 맞기 위해 바지를 걷어붙이며 대답을 했다.

재마는 들어 오자마자 진료실에서 처방을 내렸듯 변비에 좋은 혈자리와 허리, 무릎에 침을 놓았다.

은해는 그저 이제 앙상해진 어머니의 진료 과정을 지켜 보고 있었다.

“제가 진료실에서 했던 말에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마세요. 어르신 괜찮으시죠?”

은해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하는 재마의 말에 은해는 멍하니 어머니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궁합에 맞지 않은 약재는 변비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식욕부진으로도 나타나기도 하거든요.”

“아이고. 그래서 그런가…….”

석정은 나이를 먹으니 점점 심해지는 변비로 고생을 하던 찰나에 해답이라도 얻은 것처럼 대답을 했다.

“그리고 보호자 분도 허리랑 무릎이 좋지 않으신 편일 겁니다.”

“네?”

진료를 보지도 않았던 은해였지만, 보호자인 은해와 이야기를 하며 눈을 마주했던 재마는 은해의 몸 상태를 이야기했다.

이제 50 중반이 훌쩍 넘은 은해이니 무릎도 허리도 성치 않은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체형도 비슷하고 식습관도 비슷하셔서 아마 비슷한 양상으로 통증이 나타나실 겁니다.”

“그래요?”

뒷짐을 지고 어머니의 치료만 탐탁지 않게 바라보고 있던 은해는 자신의 통증을 콕 집어내는 재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직은 심하지 않으시니 한약을 드시기보다는 가벼운 유산소 운동을 꾸준히 하시면서 체력 보강을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재마는 자신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던 은해였지만, 성심성의껏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젊긴 한데 돌팔이는 아닌가 보네.

은해는 지금까지 재마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던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침 치료를 마친 재마가 인사를 하고 처치실을 빠져나가고, 은해는 상담 데스크로 결제를 하러 자리를 옮겼다.

“장석정 어르신, 진료비 4,500원 나왔습니다.”

“네? 생각보다 저렴하네요?”

약재 봉투에 약을 한 아름 받은 은해는 의아한 눈을 했다.

“여기 들어 있는 약은 장석정 어르신이 드시고, 여기 스티커 붙어 있는 약은 따님 드셔보시라고 드리라고 하셨어요.”

“제 것까지도요?”

“체질에 따라 호전 반응이 다르기는 하지만, 저희 원장님 처방약이 꽤 잘 들어요. 무릎에 좋은 우슬로 만든 약이니까 꼭 드셔보시고 또 오세요.”

정 실장은 이 원장이 전달했던 대로 보호자인 은해의 약까지 챙겨 전달했다.

은해는 괜스레 원장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자신이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저희 어머니 한약을 짓고 싶으면 다음에 다시 와야 하는 거죠?”

어머니가 명의 한의원 약이 제일 잘 맞았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을 기억한 은해는 어머니의 약을 지을 때가 되었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어르신 한약도 다른 곳에서 드신 지 얼마 안 되신 것 같다고, 석 달 이후에 드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세요.”

재마가 처방전에 적어 놓은 한 줄까지 확인한 정 실장은 평소처럼 양심적이게 처방을 내리는 재마의 처방에 약을 짓지 못하고 돌아가는 환자들도 더러 있다는 이야기를 은해에게 전달했다.

“아이고. 원장님이 양심적이면 우리는 좋다만, 이렇게 퍼주시기만 하시면 장사가 돼요?”

은해는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이 터져 나왔다.

“저희는 장사를 하는 게 아니니까요. 환자분들의 건강이 우선이죠.”

정 실장은 은해의 마음도 이해를 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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