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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86화 (86/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86화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귤 한 바구니를 사가는 손님을 살뜰하게 챙기고 인사까지 한 미숙은 자신을 기다리듯 과일 가게 앞을 서성이는 안 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오늘 저녁에 모이는 거 잊지 않았지? 꼭 나와야 해. 현정 엄마.”

안 사장은 윤 사장의 과일 가게를 지나며 미숙에게 눈짓을 했다.

오늘 잊지 말고 꼭 참석하라는 뜻이었다.

급작스럽게 저녁에 밥이나 함께 모여 밥을 먹자던 안 사장은 상인회장인 윤 사장이 참석할 것이 아니라 미숙이 꼭 와야 한다고 당부를 하고 또 했다.

“애 아빠한테 말은 해놨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하루 저녁 현정 아빠가 도맡아서 가게 보면 되지 뭐.”

“현정 아빠는 새벽에 새벽 시장에 물건도 떼러 가야 해서…….”

미숙은 오늘 약속이 확실치 않아, 난감한 내색을 했다.

저녁 모임을 나가겠다는 말을 윤 사장에게 확실하게 하지 못하고 얼버무렸을 뿐이었다.

아마 상인들이 모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호통을 칠지도 몰랐다.

“으이구. 하루쯤 우리 뜻 맞는 사람끼리 만나서 밥도 먹고, 대책도 세우자는 건데 자기가 빠지면 돼? 꼭 와. 오늘 전문가도 오시니까,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제대로 들을 수 있으니까.”

“네…….”

지금까지 상인회 일이라면 윤 사장이 상인회 대표라 모두 알아서 하느라 미숙이 나선 적이 없었는 데, 이번에는 유독 안 사장이 미숙을 꾀었다.

이번 일만큼은 사람은 좋지만 꽉 막힌 윤 사장이 하라는 대로 두지 말고 목소리를 내라는 뜻이었다.

사실 상인회 일이라면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나서는 윤 사장이었지만, 항상 중립의 입장에서 서는 것이 문제였다.

자신이 조금 피해를 보더라도 상대방이 피해를 보지 않는다면 백번이고 뒤로 물러설 사람이었다.

이번 일도 명의 한의원에게는 분명 좋은 일이지만, 상인회에는 피해가 불가피할 텐데 중립입장을 고수하며 간담회까지 아무런 모임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자신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음에도 나서지 않고, 중립입장을 고수하는 윤 사장의 모습에 미숙만 애가 탈 뿐이었다.

이번 개발만 잘 진행되면 비도 새지 않고,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가게에서 장사를 해보나 싶은 부푼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 상황이었다.

이번만큼은 남편인 윤 사장의 뜻대로 그저 흘러가게 둘 수는 없었다.

무조건 상인들 무리에 우르르 휩쓸려 반대는 하지는 않겠지만, 간담회를 들어보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면 이번에는 윤 사장과 자신이 최소한의 피해를 보는 데 목소리를 낼 생각이었다.

* * *

“어서 와. 어서 와. 얼른 이쪽으로 와. 내가 자리 맡아뒀어.”

상인들이 점포 문을 닫고 안 사장이 잡은 장소로 하나둘 모이게 되었다.

모두들 가게를 오가며 인사를 하기는 했지만, 각자 가게를 운영하며 이렇게 모이기 쉽지 않았다.

개발을 앞두고 불안한 마음에 모이기는 했지만, 반가운 얼굴들을 한자리에서 보니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고 각자 친한 상인 옆자리를 차지하고는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늘 모임 장소를 제공한 소고기구이 집은 오래간만에 가게 안이 꽉 차서 손님들이 북적여 사장이 정신없이 식탁 세팅을 하고 있었다.

“윤 사장한테는 말하고 왔어?”

“그냥 이 앞에 모임 간다고만 했어요. 현정 아빠는 항상 중립 입장이라 간담회까지는 상인회 모임도 주최 안 한다고 하니까요…….”

“으이구. 그게 문제야 상인회 대표면 우리 입장에서 목소리를 내줘야 하는데…….”

안 사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윤 사장은 그것이 문제라며 혀끝을 차 냈다.

“일단 오늘 이야기 들어보고 윤 사장한테 잘 말해봐. 윤 사장이 이번 일 잘 해결해야 또 상인회 회장 연임하지. 안 그래?”

“그렇긴 하지만……”

미숙은 윤 사장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으이구. 착해 빠져서는.”

안 사장은 미숙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눈을 찡긋거렸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소고기 구이집에 낯선 인물이 들어서며 자신보다 먼저 와 있는 상인들에게 반듯하게 인사를 했다.

너도, 나도 장사를 하고 퇴근 후에 모인 것이라 편한 복장인 반면에 식당으로 들어서는 중년 인사는 정장에 서류 가방까지 들고, 뒤에는 반듯하게 생긴 청년까지 대동했다.

“저 사람은 누구래요?”

“글쎄 우리 골목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인데…… 건설사 사람인가?”

상철을 처음 본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낯선 상철을 바라보며 의아한 얼굴을 할 뿐이었다.

오늘 모임을 주최한 안 사장을 바라보며 누구냐는 신호가 계속 오자, 안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우리 상인들의 비정기적인 모임은 이쪽, 박 이사님이 나서서 마련한 자립니다. 모두들 요즘 걱정이 많을 텐데 궁금한 게 있으면 부담 없이 질문해도 된다고 하셨으니까, 고기랑 술들 먹으면서 너무 한꺼번에 몰려들어 부담스럽게 해드리지는 말고 차근차근 질문도 하고, 답변도 받고.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현명할지 이야기를 갖는 시간을 갖기로 해요. 알았죠?”

안 사장은 자신이 대표해서 박상철을 상인들에게 소개를 하며, 마치 상인들의 구세주라도 되는 것인 양 그에 대해 소개를 했다.

“근데 저쪽 양반이 뭐 하는 사람인 줄 알고 우리가 우리 고민을 상담합니까?”

건어물 집 송 사장이 손을 번쩍 들더니, 안 사장과 박상철을 번갈아 보면서 질문을 했다.

“아 그야 이쪽 부동산 방면으로는 지식이 빠삭한 분이니까 이 자리를 만들어 주셨지. 이게 다 우리 손해 보지 말라고 깊은 뜻으로 마련한 자립니다.”

“아, 제 소개를 제가 늦었습니다. 저는 (주)정한에서 일하는 박상철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해인동 시장 골목의 개발을 위해 얼마나 불철주야 노력을 하셨습니까.”

상철의 말에 자신들의 상황을 이해해 줄 것이라는 희망에 고개를 끄덕이는 상인들도 있었지만, 그의 정체를 알지 못해 여전히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상철은 다시 한번 상인들을 향해 90도로 깍듯이 인사를 했고, 그와 동시에 그의 뒤에 있던 청년이 상인들에게 명함을 하나씩 건넸다.

“정한이 뭐 하는 회사야?”

테이블 세팅을 하던 식당 사장도 손을 멈추고, 건어물집 안 사장에게 물었다.

“글쎄. 건설회사인가?”

“아무튼 이사잖아. 뭐, 큰 회사니까 이사도 있고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야?”

정한이 어떤 회사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안 사장을 통해 자신들을 통해 자리를 만들었다는 생각에 상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든 명함을 바라보았다.

“해인동 상가 건물의 개발을 목전에 두고, 이제나저제나 개발이 되기만 고대하셨을 상인분들의 생각을 하니, 제가 나서서라도 상인분들을 도와드리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미 문화재 지정이 된 곳 중에는 무분별한 문화재 지정으로 피해 보는 평범하고 힘없는 시민들이 상당합니다.”

피해를 보는 힘없는 시민이라는 말에 너도, 나도 탄식을 하며 서로를 바라봤다.

피해가 코앞으로 다가온 기분이 든 탓이었다.

“이제 해인동 시장 골목도 생각지도 못한 피해를 입는 것이 남의 일이 아니라 내 경우가 될 수 있고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문화재 지정이 되면 좋다는 말에 앞날은 생각도 못 하고 동의를 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혹시 문화재 지정이 되는 과정 동안 문화재 지정에 대한 정보가 상인분들께 공개가 되었던가요? 말뿐인 간담회는 그저 형식적인 과정일 뿐입니다.”

“아이고. 우리 이제 어떡해요.”

상철의 이야기가 무르익을 때마다 상인들의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다행스럽게 뜻이 맞는 해인 정육점의 안 사장님의 도움으로 이런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으니, 부담 갖지 마시고 식사도 하시고 허심탄회하게 상인분들끼리 의견도 나누시고 궁금한 건 언제든 제게 물어봐 주시면 되겠습니다.”

상철은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자신의 깊은 뜻이 전해지기라도 바라는 것처럼 간절한 목소리를 내었다.

상철의 이야기가 끝나자, 상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해답이라도 찾은 것 같은 표정들이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해인동 시장 골목의 빛이 비치네요.”

“그러게요. 일이 되려니 이렇게 좋은 분도 나서주시고, 아이고 얼마나 다행이에요.”

상철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안 사장뿐 아니라 다른 상인들도 박수를 자처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상철의 등장을 반겼다.

“이렇게 반겨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성심성의껏 해인동 시장 골목을 위해 돕겠습니다!!”

상철의 외침에 모두들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와아아아아!!!”

미숙은 얼떨결에 분위기에 휩쓸려 박수를 쳤지만, 이 상황이 얼떨떨할 뿐이었다.

* * *

상인들이 모여 있는 시간에서 시간을 보낸 상철이 결제까지 다 한 후, 식당을 빠져나왔다.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상인들의 호응도가 좋았다.

원래 가진 것들이 없는 자들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이성을 잃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상철은 해인동 시장 골목의 상인들의 간절함, 그것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어때, 분위기 괜찮았지?”

“네. 분위기 좋았습니다. 간담회까지는 일주일가량 남았습니다. 그때까지 해인동 상인들의 편에서 조금만 노력하시면…….”

최 비서는 박상철의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소고기구이 집에서 상인들의 반응을 찍어 놓은 사진을 상철에게 내밀었다.

상철은 이 사진을 동생인 박 대표에게 보낼 생각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바라보다 최 비서의 이야기에 정색을 했다.

“노력?”

“네. 뭐. 별일은 없겠지만 아무래도 투자 상담이라던지, 진행 상황에 대한 경과 같은 질문들을 받을 경우가…….”

최 비서는 상철이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인 것을 알았지만, 그 정도는 해야 한다는 듯 대답을 했다.

“됐고. 연락 오면 최 비서 선에서 대답하고 정리해. 괜찮으니까.”

상철은 조금 전 상인들에게 약속했던 것과 달리 그 들의 편에서 노력하겠다는 말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었다.

모두 최 비서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자신은 더 큰 일을 도모해야 했다.

이 일을 성공시켜야 동생에게 면이 서는 상황인데 상인들에게 발목 잡혀 있을 수만은 없다는 뜻이었다.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저런 일까지 신경 써야 해? 잘 어르고 달래다가 간담회 때 들고 일어설 멘트 정도 쥐여줘. 판만 흔들어 놓으면 되는 거니까.”

“그래도…….”

최 비서는 자신은 신경 쓸 생각이 없다는 말에 최 비서는 그래도 괜찮냐는 듯 말끝을 흐렸지만 상철은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일개 상인들이 힘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어. 결국 결과는 시청 윗배들이지.”

결국 결정은 시장 상인들이 아니라 시장의 결정이었다.

상철은 상인들의 입맛에 맞춰 움직일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시장을 노려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상인들은 그저 분위기를 만들어줄 바람잡이일 뿐이었다.

자신에게 계획이 다 있다는 듯 상철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군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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