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84화
“소식 들었어?”
미숙이 새벽시장에서 윤 사장이 경매 받아 온 과일 박스들을 진열하고 있는 사이 정육점 안 사장이 다가왔다.
상인 사이에 정보통인 안 사장은 정보를 듣자마자 과일 가게로 달려왔다.
상인들 사이에서 가장 문제는 상인회장인 윤 사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소식이요?”
“명의 한의원 문화재 지정된다는 거. 거의 확실시 됐나 봐.”
“어머 진짜요?”
미숙은 반가운 마음보다도 상가 재개발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개발 건만 아니었다면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되지 못했다.
“응. 이제 곧 간담회 한대.”
“간담회요?”
“시청 문화재과에서 진행하는 건데 명의 한의원이 지정되면 어떻게 되는 건지 설명하는 건가 봐. 주민 상대로 하는 거긴 한다 해도 뭐 우리 목소리를 얼마나 들어주겠어.”
안 사장은 아마 시청에서 주민들의 의견은 듣지도 않은 채 무작정 진행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된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간담회를 하는 것 자체도 영 못마땅한 안 사장의 눈치를 살피며 미숙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주민 간담회 가서 우리 이야기를 좀 하면 반영해 주지 않겠어요?”
“아이구. 현정 엄마처럼 차분하게 우리 얘기 좀 들어주세요, 하면 들어줄 것 같아? 흠. 나 정도 목소리는 돼야지. 저쪽 신발 가게랑 몇몇 곳 가서 목소리 좀 낼 생각이니까 현정 엄마도 간담회 당일에 꼭 와. 무조건 남편한테 맡기지 말고.”
“네.”
상인회장인 윤 사장이 나서서 간담회를 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고 있으면 안 된다는 듯 안 사장이 다그쳤다.
아무래도 그날은 미숙이 가게를 봐야 할 테지만 안 사장이 저렇게까지 말하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진짜 문화재 지정되면 우리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어.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해.”
안 사장의 말에 미숙은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박 대표. 지난번에 말한 거 말이야.”
연아의 아버지 상철은 자신의 동생이지만, 정한 한방병원 대표인 상도 앞에서 그의 눈치를 봐가며 슬금슬금 입을 열었다.
“그…… 그 아무래도 현 주인이 마음을 안 바꾸네.”
“숫자는 올려보셨습니까?”
상도는 자신의 형이 가져온 서류를 하나둘 검토할 뿐 눈도 마주치지 않고 질문을 했다.
이럴 때면 동생이 아니라 영락없는 직장상사처럼 보이는 상도였다.
“내가 충분히 올려봤지. 이 노인네가 욕심이 많은 건지…….”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나서야겠군요. 명의 한의원 건은…….”
“그야, 그쪽은 내가 착착 잘 진행 시키고 있어. 걱정하지 마.”
명의 한의원 이야기가 나오자 상철은 반색을 하며 대답했다.
수개월째 진행 중인 책자 일이 좀처럼 진행되고 있지 않을 때, 명의 한의원 문화재 지정이 마주 하고 있는 상인들과 트러블이 생길 수 있을 것이란 첩보를 들은 상철이었다.
‘사람이라면 공익보다는 제 이득이 앞서는 게 당연하지.’
개발을 눈앞에 두고 코앞에 있는 한의원이 문화재 지정이 되면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격이라 개발 논의가 처음부터 이뤄질 수도 있었다.
이 상황을 상인들에게 살짝 흘리기만 하면 동네 분열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명의 한의원이 그 자리에서 5대째 있었고, 동네 주민들과 신뢰도 두둑할 텐데요.”
“에이. 박 대표. 신뢰가 두둑하면 뭐 해. 신뢰는 깨지라고 있는 게 아닌가? 다 이거면 된다고.”
상철은 동생을 향해 엄지와 검지를 원을 만들어 보였다.
“다 이걸로 움직이는 거지. 사람이든, 신뢰든 이거 하나면 만사 오케이야.”
책자 문제로 동생에게 잔뜩 움츠러들었던 상철은 앞으로 분열될 해인동 상가 상인들을 생각하며 움츠렸던 어깨를 쫙 폈습니다.
“요즘 홍보실 쪽은 어떻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너튜브는 계속 보고 받고 있습니다.”
“아유, 말해 뭐 해. 내 딸이라 하는 소리가 아니라 연아 걔만큼 그 자리에 맞는 사람도 없어. 눈치 안 보고 밀고 나가야 할 때는 밀고 나가고, 잠잠해야 할 때는 잠잠하고. 이게 또 우리 연아 주특기잖아.”
상철은 연아의 성격이 자신을 닮았으니 걱정 말라며 동생에게 제 딸의 칭찬을 들어놓았다.
상도는 지난번, 홍보팀 인터뷰 건을 막기 위해 움직이지 않아도 될 일을 직접 움직여야 했다.
그 일이 뉴스에만 나오지 않았어도 정한 한방병원 대표인 박상도가 직접 움직일 필요까지는 없었겠지만 어디에서 흘러나간 이야기인지 전국 방송을 탔으니 직접 손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 일로 여러 가지 찜찜한 구석들이 생겼는데, 특히 한의 신문 쪽 김성은 기자가 맘에 걸려 두 눈으로 확인하는 시간까지 가져야 했다.
다행인 건지 상도의 움직임을 파악한 한의 신문 측에서는 그 기자가 퇴사를 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먼저 연락을 취해 왔다.
“이제 뭐 세상 사람들에게도 잊혀 가는 일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가뜩이나 신경 쓸 게 많은 사람인데.”
상철은 제 딸의 허물은 얼른 덮어 버릴 생각으로 상도의 눈치를 봐가며 이야기를 했다.
“그러게요. 가뜩이나 신경 쓸 게 많은데 신경 쓸 것이 계속 생기네요.”
서류를 덮는 상도의 한마디가 누구를 향한 건지 잘 아는 상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번 일은 부디 다른 곳에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잘 움직여 주시길 바랍니다.”
“알았네. 알았어.”
상도는 동생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표실을 빠져나왔다.
어릴 때부터 자신보다 항상 앞서는 동생이라 좀처럼 그 앞에서 기를 펴는 것이 쉽지 않은 상철은 오늘도 역시나 동생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기 바빴다.
대표실을 빠져나오자마자 굽은 어깨를 쭉 켜는 시늉을 하는 상철의 모습에 윤 실장은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꾹 참았다.
“윤 실장. 평소에 대표님한테 우리 연아 일하는 거, 좋은 이야기만 쏙쏙 뽑아서 잘 좀 말해줘. 알지?”
상철은 동생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윤 실장에게 딸 이야기를 넌지시 해달라는 듯 눈을 찡긋거리고는 대표실 복도를 지나쳤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주차장으로 내려온 상철은 차에 타자마자 자신의 비서에게 해인동으로 향하자 말을 했다.
책자 건이 지지부진하니, 눈에 확 띄는 일 한 건을 제대로 해보여야 할 터였다.
“해인동으로 가자고.”
이미 비서를 통해 해인동 골목 상인들과 몇 번의 접촉을 했던 상철은 이번 일만큼은 누구보다도 잘 해낼 수 있다고 다짐했다.
* * *
“한의원 담장에 걸린 현수막 이게 다 뭐랴?”
갑순은 처음 보는 현수막에 써 있는 글씨를 읽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의원을 들어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것이었는데 해인동 골목의 빠른 개발을 추진하라는 현수막 사이에 홀로 걸린 한의원 현수막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 모양이었다.
“어제 시청에서 달고 간 거예요.”
“시청에서?”
정 실장이 갑순의 궁금증에 곧바로 대답을 했다.
“저희 한의원이 문화재 지정이 될 예정인데 지정 전에 이웃분들과 간담회를 진행 한다네요.”
“오메. 그게 진짜여? 문화재? 그거 경사 아녀? 동네 경사.”
갑순은 문화재라는 말에 귀가 번뜩 뜨이는 것 같았다.
절로 쳐지는 박수에 허리까지 쭉 펴졌다.
“아직 지정이 확정은 아니고요. 예정이요.”
“간담회인지 뭐신지 하면 다 온 거지 뭐어. 그리고 우리 한의원이 안 될 게 뭐 있어. 역사가 적기를 햐. 원장님 실력이 별로길 햐.”
“그렇긴 하지만, 바로 앞이 상가라.”
“상가여도 말여. 동네에 경사가 생겼으면 다들 축하해야지.”
갑순은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 이야기를 했지만 이야기가 불편한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었다.
대기 환자 중, 정육점 안 사장이 있었는데 정 실장은 갑순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할 때부터 그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번 강산이 고기를 사러 갔을 때, 안 사장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탓이었다.
정 실장은 목소리를 낮췄다.
“사정은 각자 다르니까요.”
“에휴. 걱정을 하덜 말어. 잘 될 거니께. 그렇쟈?”
갑순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이 아니냐는 듯 대기실에 익숙한 환자들을 향해 물었고, 다른 주민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안 사장만 눈을 피할 뿐이었다.
안 사장은 오랜 시간 동안 정육점을 해오며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꽁꽁 언 고기를 냉동창고에서 들고 이리저리 옮길 때면 손가락 끝은 동상이 오는 것 같았고, 어깻죽지는 매일 뭉치기 일쑤였다.
꾸준히 시간이 날 때마다 한의원을 다니고는 했는데 그 좋다는 큰 병원을 가봐도 명의 한의원만큼 제 몸을 잘 아는 병원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오늘도 명의 한의원 문턱을 지나왔다.
근데 이렇게 불편할 수가…….
대기를 하는 이 시간이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었다.
“안숙자 님, 처치실로 먼저 가실 게요.”
처치실에서 미정이 나와 안 사장의 이름을 불렀다.
이미 단골 환자인 숙자가 처치실 1을 선호한다는 걸 잘 아는 미정은 처치실 1에 자리를 마련했다.
“선생님, 저 오늘은 저쪽으로 가고 싶은데…….”
대기실에서 일어난 숙자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처치실 2를 가리켰다.
“저쪽은 온돌이 아닌데요?”
매번 온돌에 몸을 지지는 기분이라고 처치실 1만 고집하던 숙자가 베드가 있는 곳을 가겠다는 말에 미정이 되물었다.
“그냥, 오늘은 좀 이쪽이 날 듯싶은데.”
숙자는 더 묻지 말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네. 그럼 이쪽 베드에 준비해 드릴게요.”
작은 목소리였지만, 안 사장과 미정의 대화를 들은 정 실장은 숙자가 다른 주민들과는 역시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잠시 후, 진료실에 있던 재마는 안 사장의 차례가 되자 처치실로 자리를 옮겼다.
“원장님 오늘은 안숙자 님 처치실 2, 3번 베드에 계세요.”
“네?”
온돌방만 고집하는 그녀를 알기에 재마도 의아한 눈치였다.
“원장님, 아무래도 안 사장님이 불편한 마음이 좀 있으신 것 같아요.”
정 실장은 재마에게만 들릴 듯한 목소리로 넌지시 전했다.
무슨 뜻인지 재마가 알아챈다면 안 사장이 조금이라도 불편한 일은 없을 것이었다.
“아…… 네…….”
재마는 침 치료를 들어가기 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3번 베드 앞으로 간 재마는 숨을 한번 들이켜고는 커튼을 열었다.
베드 위에 누워 있는 안 사장의 마음이 고스란히 들릴 것을 이미 재마는 알고 있었다.
“안숙자 님, 안녕하세요.”
재마는 평소보다 한 톤 밝은 목소리로 숙자의 이름을 불렀지만, 숙자는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네. 안녕하세요. 원장님.’ 하며 짧게 인사를 했다.
-후, 불편해서 원장님 얼굴을 보기도 힘드네. 한의원을 옮기던지 해야지.
숙자는 한의원을 바꿀 생각은 없었지만, 이 불편한 상황이 언제까지 갈지 모르니 한의원을 바꾸는 것도 고려해 볼 생각이었다.
“오늘은 어깨가 더 불편하신가 봐요.”
숙자의 마음을 이미 캐치한 재마는 한쪽으로 웅크리고 있는 숙자의 어깨를 살피며 자연스럽게 진료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