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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83화 (83/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83화

-명의 한의원 서울시 문화재 지정을 위한 주민 간담회

“원장님 제가 일단 주민 간담회를 진행하기 위한 기획서를 준비해 왔습니다. 검토 부탁드립니다.”

“네.”

문화재과에 있는 지영이 해인동 주민 간담회를 위해 준비한 기획서를 재마 앞에 내밀었다.

명의 한의원을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지영뿐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준비한 건지 기획서만 해도 책 한 권으로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페이지부터, 이 페이지까지는 주민들께 제공될 간담회 자료고요.”

간담회 자료까지 따로 준비하느라 고생했을 지영에게 재마는 감사한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는 막연하게 오래된 명의 한의원이 문화재 지정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지영에게 문서를 받고 나니 확 체감이 되었다.

“간담회 날짜 잡고 무사히 진행만 되면 이제 문화재 지정까지는 큰 문제 없이 착착 진행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문제가 생기기도 하나요?”

그러잖아도 지난 회식 때 직원들에게 주민들 사이에서 문화재 지정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탓에 신경을 쓰고 있던 재마였다.

“음, 글쎄요. 동네 주민들이 문화재 지정에 반대하는 경우도 종종 있죠. 아무래도 문화재 지정을 하면서 한 동네에서 명예로운 일이 생기기는 하지만 그 이득이 주민들에게 돌아가지는 않으니까요.”

지영은 문화재 지정을 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명의 한의원을 해인동에서 5대째 이어 온 구 원장이나 이어받은 재마에게는 더없이 명예로운 영광일 수 있지만, 개발을 앞둔 주민들에게는 제약 조건이 많이 따르는 문화재 지정이 달가울 수만은 없었다.

강산에게 이야기를 들은 후, 문화재 지정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본 재마는 주민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주민들 사이에서 반대하는 의견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아…… 그럴 수 있죠. 특히나 명의 한의원 바로 앞쪽은 상업지구라서…….”

지영도 생각하지 못했던 건 아닌지 재마의 이야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재마에게 모두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문화재 지정 뒤에 따르는 제약들이 꽤 되었다.

그 조건들을 주민들에게 이해시키려면 수일이 걸릴 것이라는 걸 문화재과에서도 예상하고 있었다.

“주민 간담회를 한 이후에 주민들 이야기 들어보고 서로 협의해야죠. 이 원장님.”

“저희가 준비할 게 있을까요?”

“말씀만이라도 감사해요. 너튜브에 한의원 운영까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실 원장님께 부탁하고 싶어도 못할 것 같은데요? 문화재 지정까지는 저희 과에서 맡아서 할 일들이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지영은 재마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와 함께 문화재과에서 책임지고 명의 한의원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함께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명의 한의원을 떠났다.

재마는 지영이 남기고 간 간담회 자료를 넘겨보며 재마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의원을 위한 자신의 결정이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효과만 가져다줄 수 없다는 걸 몸소 깨닫는 계기가 될 것 같았다.

지금까지 한의원이 자리 잡기까지 해인동 시장 골목 상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도움을 꽤 받았는데 그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는 않았다.

* * *

물리치료를 다 마친 지수는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정우의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만큼 정우와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진료를 마무리하고 직원들이 하나둘 퇴근을 했지만, 지수가 오는 날이면 정우가 가장 늦게 퇴근을 했다.

물리치료사인 효주가 퇴근을 할 수 있게 물리치료를 먼저 한 지수의 발목을 정우가 꼼꼼히 들여다보고, 그의 왼손 팔목을 들고 진맥도 했다.

지수는 이제 거의 치료가 마무리될 것 같다는 효주의 이야기를 듣고 아까부터 신이 나 있었다.

효주는 치료를 끝내고 농구를 할 생각에 신이 나 있는 지수에게 정우 선생님의 허락이 중요하니 꼭 물어봐야 한다고 당부했다.

“선생님, 이제 저 농구 해도 되죠?”

침 치료와 물리치료를 총 7회 동안 빠짐없이 받은 지수는 이제는 당당하게 정우에게 농구를 해도 되냐고 물어왔다.

짧은 사이였지만, 지수는 정우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기대를 한 얼굴로 기다렸다.

지수를 믿으면서도 혹시나 발목이 조금 나았다고 생각해 참지 못하고 농구를 하는 게 아닌가 걱정을 했던 정우였지만, 그 사이 정우는 정말 농구를 하지 않고 치료에 매진했다.

어린 마음에 치료를 빼먹을 만도 했지만, 정우가 퇴근을 미루고 한의원에서 기다리는 만큼 지수도 치료 날은 빠지지 않고 한의원을 찾아왔다.

물론 치료가 끝나면 다시 학교로 돌아가 친구들이 운동을 하는 농구 코트 앞으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뛰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그래, 이만하면 괜찮을 것 같다. 대신 이거, 꼭 하고 해.”

정우는 지수가 고대하는 한마디를 하며 자신이 준비한 발목 보호대를 꺼냈다.

정우가 꺼낸 검은 발목 보호대를 탐탁지 않은 얼굴로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엥? 이런 거 꼭 해야 해요? 뛰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그리고 이 테이프로 물리치료사 선생님이 해주신 것처럼 테이핑도 하고.”

정우도 지수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보호기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 정우도 알 수는 없었지만, 한번 다쳤던 발목은 쉽게 다시 다칠 수 있었으니 보호기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마지막 물리치료를 하며 물리치료사인 효주는 지수의 발목에 테이핑을 해줬다.

농구선수들이 경기를 뛰며 부상 당했던 부위에 두른 것을 봤던 지수는 마치 자신이 농구선수가 된 기분이었다.

보조기에 이어 테이핑용 테이프도 꺼낸 정우였다.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수를 위해 사비로 준비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보조기나 테이핑을 해도 부상은 언제든 날 수 있으니까 이상하면 꼭 한의원으로 오고.”

“네.”

“근데 너 이제 치료도 끝났으니까 말해봐. 왜 그렇게까지 농구에 집착하는 거야? 농구부라도 들어갈 생각이야?”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꼭 부상 때문은 아니더라도 학교 농구팀에 들어갈 수 있는 실력 같지는 않았지만 농구에 대한 집착이 대단한 것 같았다.

정우가 묻는다고 지수가 곧이곧대로 이야기를 털어놓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궁금했던 질문을 꺼낸 그였다.

“아…….”

지수는 정우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였다.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신경을 써준 정우에게는 털어놔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농구 좀 그만하라는 어머니에게도, 요즘 왜 학원 수업에 통 집중을 못 하냐는 학원 선생님에게도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던 이야기였다.

“저도 사실 제 농구 실력이 형편없다는 걸 알아요.”

“음?”

자신의 실력이 형편없다고 평가를 하는 지수의 말에 정우는 혹시 자신의 속마음이 지수에게 들리기라도 했나 헉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긴 한데 그거라도 해야 친구들이랑 좀 어울릴 수 있거든요.”

“친구들이랑?”

정우는 뜻밖의 이유에 의아한 얼굴이었다.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방법은 다양했지만, 남학생이라면 아무래도 운동이 친구를 사귀기에는 가장 편한 방법이기도 했다.

전학을 몇 차례 다녀 본 정우는 누구보다도 친구를 사귀는 방법에는 운동만 한 게 없다는 것에 공감했다.

공부도 잘할 뿐 아니라 농구까지 잘했던 정우는 전학을 가더라도 친구들과 금방 사귈 수 있었다.

정우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말에 공감을 하는 듯한 정우의 얼굴에 지수는 조금 더 이야기를 꺼냈다.

“초등학교 때에는 책 읽는 걸 좋아해서 만화책이며 소설책에 푹 빠져 있었어요. 그래서 친구들이랑 놀지 않아도 책만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중학교 올라와서 보니 친구들이랑 어울리기 좀 어렵더라고요.”

“아…….”

정우는 이제야 지수의 이야기가 이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경을 고쳐 쓰는 지수의 얼굴을 보니, 다친 발목을 이끌고도 농구를 할 때보다 만화책이며 소설책을 섭렵한 모습이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근데 농구 하는 친구들한테 어울려서 몇 번 운동 같이하니까 친구들이 한 마디라도 더 걸어주고, 수업 끝나면 농구 한 게임 하자고 먼저 말도 해주더라고요. 반 대항 농구 경기도 나가게 되고.”

지수는 지금까지 말한 적 없었던, 숨겼던 진실을 털어놓기라도 하듯 부끄러운지 얼굴이 붉어졌다.

잘하지도 못하고, 부상까지 당했으면서도 친구들 귀에 다친 것 이야기가 들어갈까 꽁꽁 숨겨왔던 것이다.

부상을 숨기는 것까지는 괜찮았지만 들켰을 경우 경기에서 배제되고 언제 나을지 모르는 발목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할까 두려웠던 지수는 지금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엔 친구들이랑 계속 어울리고 싶어서 다친 걸 숨기느라 점점 경기 뛰기도 힘들었는데 이 원장님이랑 선생님이 도와주셔서 복귀도 가능할 것 같아요.”

지수는 이제 어느 정도 제 기능을 하게 된 발목을 요리조리 돌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치료를 받는 동안에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경기 때마다 벤치를 지키고 드리블 연습만 했던 지수였다.

친구들이 슬슬 지수를 의심하기는 했지만 이제 발목이 다 나았으니, 오늘부터는 친구들과 어울려 농구 한판을 뛸 생각이었다.

정우는 저도 모르게 지수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막냇동생 같은 지수의 모습에 한탄이 나오면서도 안쓰럽기도 했다.

진작에 털어놓았으면 다른 조언도 함께했을 텐데 진료 마지막 날 털어놓다니 아쉽기도 했다.

“짜식. 이제 알았냐. 이제 아픈 거 숨기지 말고 한의원으로 와. 늦게 올 것 같으면 나한테 연락하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정말요?”

“그럼.”

“아싸.”

다치면 치료해 줄 테니 한의원으로 언제든 오라는 말이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지수는 아싸 라며 좋아했다.

“알지? 친구들 다쳐도 명의 한의원에 명의가 있다고 알려주고.”

첫 진료를 했을 때처럼 정우는 농담 삼아 지수에게 자신의 홍보도 해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근데 명의 한의원의 명의는 원장님 아니에요?”

“뭐?”

명의로 소문을 내달랬더니, 명의는 재마가 아니냐고 묻는 지수의 질문에 정우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아니, 저는 그냥. 대기 환자 수도…… 원장님이 한참 많고, 너튜브도 이재마 원장님이…….”

“야, 이 녀석아.”

지수는 순수하게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물었을 뿐인데 미간을 찌푸린 정우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에게 잡히면 오늘 아무래도 딱밤이라도 맞고 끝날 것 같았다.

“선생님, 항복. 항복. 선생님이 명의예요. 제 발목도 고쳐주시고. 아아. 그만요!”

정우는 지수에게 헤드락을 걸고는 끝끝내 자신도 명의라는 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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