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82화
진료가 끝나자마자 강산은 기다렸다는 듯, 마당에 숯을 피웠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환자들이 대기하던 명의 한의원이었지만, 지금은 고기 파티를 위해 직원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와, 한의원 앞마당에서 고기를 굽다니.”
“제가 오늘 제대로 준비했습니다.”
강산은 보란 듯이 시장 골목에서 사 온 고기들을 펼쳤다.
이제 막 정리를 마치고 나온 효주와 미정이 평상에 다가와 고기를 구경하며 감탄했다.
단골이자, 강산과 각별한 해인동 시장 골목의 정육점에서 고기를 구매했으니 고기의 질은 최상급이었다.
소고기가 아닌 돼지고기였지만, 삼겹살과 특수부위로 이뤄져 있어 그 빛깔은 뛰어났다.
“와우. 이게 다 몇 인분이에요?”
“열 명이 먹어도 넉넉할 정도로 달라고 했어요. 사장님께 맛있는 부위 섞어 달라고 했으니까 많이들 드세요. 시장 골목 고기가 참 맛있더라고요.”
“저희 집도 지난번에 고기 사다 먹었는데 맛있어서, 퇴근할 때 종종 사가요.”
“진짜요? 난 몰랐네.”
숯에 불을 붙인 강산은 불을 피우면서 물리치료사인 효주와 간호 조무사 미정에게 오늘 사 온 고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와, 진짜 많이 준비하셨네요. 야채며, 술까지.”
“이왕 파티하기로 제대로 놀아봐야죠. 물론 결제는 우리 원장님 카드로~”
강산은 정리를 마치고 나온 재마를 향해 손짓을 했다.
“너 왜 내 카드로 생색이야?”
“에이 생색은 무슨, 물주는 정확히 밝혔는데.”
강산은 자신은 생색을 낸 적이 없다는 듯, 정색을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장님, 맛있게 잘 먹을게요.”
“저도요! 분위기 너무 좋아요!”
카드의 주인인 재마가 나오자마자 효주와 미정은 입을 맞춰 재마에게 잘 먹겠다는 인사를 건넸다.
고기도 굽고, 직원들이 다 모이자 이제야 회식을 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첫 회식을 한의원에서 한다는 것이 직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걱정을 했던 재마였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다행이었다.
주방에서 정 실장이 강산이 시장을 돌며 사 온 야채들을 씻어서 마당으로 가지고 나왔다.
오늘 회식을 한다는 이야기를 지나가며 했을 뿐인데, 노인정에서 어르신들이 직접 키웠다는 대파 한 단을 받아서 파절이도 직접 준비했다.
“이런 건 저희 시키시죠.”
“선생님들도 하루 종일 바쁘셨잖아요. 그래도 카운터 보느라 앉아 있는 내가 하지 뭐. 참고로 이 파는 노인정에서 어르신들이 직접 키우신 거예요.”
정 실장은 자신도 정작 카운터에 앉아서 쉴 시간이 없었으면서 다른 선생님들은 앉아 있으라고 당부하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이정우 선생님은 아직 진료가 안 끝나신 건가요?”
효주는 맨 늦게까지 처치실에서 정우의 마지막 환자인 지수를 치료한 다음에 나왔는데 아직도 정우가 보이지 않자 그를 찾았다.
“아마 지수 상태 좀 더 보느라 그런 것 같습니다.”
“많이 좋아진 것 같던데요. 다행이에요. 처음에는 그 발로 어떻게 걷나 걱정했는데.”
효주는 자신이 물리치료를 담당하고 있는 지수가 처음 발목을 내밀었을 때를 생각했다.
요즘 며칠간 특별 야간진료를 하는 정우 덕에 효주도 퇴근 시간이 조금 늦어졌지만, 날로 좋아지는 지수의 상태에 10분의 야근쯤이야 감당할 수 있었다.
“이 발로 농구도 하겠다고 고집부리던 녀석인걸요. 지수야. 너 고기 좀 먹고 갈래? 오늘 고기 파티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알고 나온 건지, 진료를 마친 정우가 지수의 어깨에 손을 얹고 밖으로 함께 나왔다.
아직 환자가 있는 데 고기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으니, 함께 먹자는 제안이었다.
“아니에요. 저 얼른 가봐야 해요.”
“너 너. 또 바로 농구 하러 가는 건 아니지?”
정우는 아직 조심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한 지 몇 분 되지 않아 지수가 벌써 농구를 하러 가는 건 아닐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니에요. 오늘은 진짜 학원 가봐야 해요. 오늘 치료 감사합니다.”
지수는 정우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마당에 있는 선생님들에게도 한 번씩 인사를 하고 누가 부를 새라 재빠르게 한의원을 빠져나갔다.
“녀석…….”
“중2병이 와도 단단히 왔나 봐. 꽁지 빠지게 달아나네.”
아직 풋풋한 모습이 귀엽다는 듯 모두 지수가 나간 자리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이 선생님도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오늘은 환자가 많아서 바쁘셨죠?”
“바쁘긴 했는데 몸은 왠지 날아갈 것 같은데요?”
정우는 자신에게 얼른 자리를 잡으라며 자리를 만들어 주는 정 실장 옆으로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루 종일 환자 한 명을 보기가 힘들었던 정우였지만 이제 명의 한의원에 한의사가 단 한 명이 아닌 둘이라는 입소문이 타면서 환자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급기야 오늘은 하루 종일 화장실 갈 틈을 억지로 만들 정도로 바쁜 하루를 보냈다.
“이야, 이게 다 뭐야.”
“오늘은 형님이 쏜다.”
10인분이 넘는 고기가 준비된 걸 보고 정우가 감탄하자 고기 집게를 들고 강산이 어깨를 으쓱였다.
“다 들었다. 이 원장님 카드로 결제했다는 거.”
“굽는 건 내가 하잖아. 쏘는 건 이 원장.”
“얼씨구.”
강산과 정우의 티키타카를 본 효주와 조무사 미정은 서로를 바라보며 키득거렸다.
“직원들이 많아지니 좋네요. 그렇죠? 최 실장님?”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최 실장을 바라보며 정 실장이 물었다.
정 실장만큼 오래도록 명의 한의원을 지킨 터줏대감인 최 실장에게 변화한 분위기가 어떠냐는 뜻이었다.
“흐음. 좋네요. 젊은 선생님들 분위기에 절로 흥도 나고.”
“오, 최 실장님 한 잔 받으세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강산은 좀처럼 칭찬을 하지 않는 최 실장에게 좋다는 칭찬이 나오자마자 준비된 맥주를 들고 최 실장, 정 실장에게 차례대로 맥주를 따랐다.
그때, 명의 한의원의 문이 삐꺽 열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고기 잔치 한다믄서. 김치는 가지고 하는 겨?”
명의 한의원의 소식이라면 빠삭한 갑순이 등장했다.
진료가 끝났는데도 떠들썩한 명의 한의원 앞을 지나다가 오늘 고기를 굽고 첫 회식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지난겨울 담갔던 김장 김치가 묵은지가 된 김치통이 들려 있었다.
“아이고, 어르신 무겁게 이걸 직접 들고 오셨어요. 괜찮은데.”
“괜찮기는 뭐가 괜찮어. 이 동네에서는 내 김치를 먹어봐야 이 동네 주민이 되는 겨. 오늘 명의 한의원 선생님들 다 내 김치 맛에 반할걸?”
“하하. 감사합니다.”
재마가 나서서 갑순의 김치통을 받아들었다.
“감사한 만큼 맛있게 드시면 돼. 젊은 원장님.”
“어르신 이리로 오셔서 고기 한 점 드세요.”
강산이 조금 전에 막 구운 따끈따끈한 고기 한 점을 갑순에게 권했다.
“아녀. 아녀. 나는 저녁 많이 먹었어. 선생님들이나 많이 잡숴.”
“김치 감사합니다.”
“아이구. 선생님들이 감사하다고 하면 내가 부끄러우니께. 늙은이는 얼른 가야지.”
갑순은 일어서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는 명의 한의원 식구들의 인사에 손을 흔들고 서둘러 한의원을 빠져나갔다.
한의원 앞마당에서 회식을 하는 것도, 동네 주민이자 단골 환자의 김치를 얻어먹는 것도 서울 한복판에 있는 한의원에서 일어날 수 없는 드문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고기도 다 구워졌고, 이 원장님의 건배사 한번 듣고 갈까요?”
강산이 분위기를 업 시키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만큼 첫 회식의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건배사는 무슨, 유치하게.”
“왜요. 첫 회식인데 원장님께서 한 말씀 하셔야죠.”
“맞아요.”
다른 직원들도 강산의 말에 동의하며 서로 잔을 채우며 재마의 건배사를 들을 준비를 했다.
“음…….”
재마는 준비되지 않은 건배사 요구에 잠시 뜸을 들였다.
지난 6개월간의 명의 한의원, 그리고 환자를 읽는 한의사 너튜브 채널을 운영했던 기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지금 명의 한의원의 위치, 환자를 읽는 한의사 채널이 운영되고 있는 모든 것이 여러분들의 노고에 의해 이뤄졌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발전하는 명의 한의원과 환자를 읽는 한의사 채널에 함께해 주세요. 위하여.”
“위하여!”
재마의 이야기에 잔을 들은 명의 한의원 전 직원은 위하여를 외쳤다.
화기애애하게 첫 회식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준비된 고기들도 한 점 한 점 사라져 갔다.
“근데 요즘 골목 분위기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고기를 한 점 입으로 가져가던 미정이 조심스럽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물었다.
“어머, 왜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저는 집이 가까워서 퇴근하고 시장에서 장도 자주 봐서 가거든요. 원래 상인분들이 제가 가면 엄청 반겨주셨는데…… 요즘은 좀 아닌 것 같아서요.”
미정은 혹시 자신이 실수한 것이 있어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혼자 맘속으로 전전긍긍하다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었다.
“어, 나도 오늘 정육점 갔을 때 느꼈는데!”
강산은 오늘 자신이 정육점에서 느꼈던 쎄한 느낌이 자신만 느끼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산 선생님도 느끼셨어요?”
“네. 오늘따라 정육점 안 사장님이 이상하시더라고요.”
“음, 전 채소가게 사장님이 이상하시긴 하시던데…….”
미정이 의기소침한 목소리를 내자 어두운 표정의 최 실장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원장님, 아무래도 시장 골목에 좋지 않은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오며 가며 소문을 들은 최 실장이 명의 한의원의 원장인 재마도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입을 연 것이었다.
“소문이요? 무슨 소문?”
명의 한의원의 안에서 전반적인 것을 책임지고 있는 정 실장은 듣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구 원장이 물러나고 재마가 원장이 된 이후, 자리를 잡아가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시장 상인들에게 좋지 않은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은 전혀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최 실장님이 말씀하신 것, 자세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재마는 자신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야기를 누군가를 통해 듣는다는 것이 유쾌하지 않았지만 사실 파악을 위해 최 실장에게 부탁했다.
“명의 한의원이 문화재 지정이 된다는 소문이 상인들에게 돌면서 좋지 않은 여론이 형성된 것 같더라고요.”
문화재 지정은 문화재청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이었지만 확정된 것이 없어 재마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문화재 지정이요? 그럼 좋은 거 아닌가요?”
오랜 역사를 지닌 명의 한의원이 문화재 지정이 될 수도 있다는 말에 효주나 미정은 반색을 띄웠다.
“명의 한의원 직원인 우리에게는 좋을 수 있는 데…… 상인들에게는 안 좋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죠.”
최 실장의 이야기를 들은 강산이 상인들의 마음이 이해 간다는 듯 표정이 좋지 않았다.
듣고 있던 최 실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강산의 의견에 동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