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79화
정한 한방병원 대표인 박상도와 인사를 나눈 후, 밖으로 나온 유 국장과 김성은.
차가 주차되어 있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지 않고, 담배가 당기는지 유 국장은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화를 누르며 1층을 눌렀다.
국장에 1층에서 내리니 어쩔 수 없이 따라 내린 성은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거리를 두고 따라 나갔다.
성은보다 한참을 앞서 성큼성큼 걸어가던 유 국장은 한방병원 입구를 지나 인적이 드문 구석으로 가더니 훽 하고 몸을 돌렸다.
“김성은.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한 시간 가까이 박상도 앞에서 소리치고 싶던 말을 드디어 터뜨린 그였다.
한국 한의학계에서 제일가는 위상을 떨치고 있는 정한 한방병원 대표 앞에서도 시선 한번 돌리지 않고 똑똑히 바라보던 성은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던 그는 둘만이 있는 공간이 돼서야 큰소리를 쳤다.
“국장님이야말로 왜 그러세요? 한의 협회 소속인 만큼 중립적인 입장이셔야 하지 않나요? 거대 기업이나 마찬가지인 한방병원과 한 편인 티가 너무 나서 못 봐주겠더라고요.”
“너, 말 다 했어?”
성은과 대화를 더 이어나갔다가는 혈압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인 국장은 이제 팔까지 걷어붙이고 삿대질을 해댔다.
박상도 앞에서는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한숨만 내쉬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아뇨. 다 못했어요. 설마 혹시 박 대표한테 뒷돈이라도 받으신 거 아니죠?”
성은이 의심스러운 눈치로 추궁을 하자, 삿대질하던 유 국장은 결국 목덜미까지 잡았다.
박상도 앞에서도 고개를 빳빳이 들더니, 제 앞날을 생각하지 않고 국장에게 바락바락 대드는 성은의 모습에 황당할 따름이었다.
“김성은. 됐고, 너 사직 처리 할 테니까 사직서 써와. 여기가 무슨 사회 이슈 다루는 신문사인 줄 알아?”
“네? 지금 부당해고하시겠다는 말씀이에요?”
“너도 한의 협회 소속 신문사 오래 다닐 생각 없었잖아. 칼럼이나 잘 받아오라고 했더니, 쓸데없이 사건 캘 생각이야? 내부에서 일 만들지 말고, 그냥 각자 길이 다르다 생각하자. 너는 너 쓰고 싶은 기사 쓸 수 있는 곳으로 가. 괜히 한의 신문에서 물 흐리지 말고.”
“허, 진짜. 국장님 이거 부당하시다는 건 아시죠?”
성은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누르고는 자신이 들고 온 가방 속에 있는 편지 봉투를 꺼냈다.
직장을 다니며 누구나 가슴에 사직서를 품고 다닌다고 하지만, 진짜 사직서를 가지고 오라고 하자마자 가방 속에서 사직서를 꺼낼 줄은 몰랐던 유 국장은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네가 눈에 뵈는 게 없는 이유가 있었구나?”
“부당해고로 신고는 안 할게요. 저도 더 다닐 생각 별로 없었거든요.”
“야, 인마. 너 진짜. 이따위로 하고도 네가 갈 곳이 있을 것 같아?”
유 국장은 성은이 던지듯 건넨 사직서를 받아 들고, 훽 돌아선 그녀의 뒤에다 대고 소리를 쳤다.
지금 행동에 책임을 지라는 듯 이 바닥에 고개도 들지 못하게 하겠다며 외쳐댔다.
하지만 성은은 대꾸도 하지 않고, 당당히 강남대로를 걸었다.
자신을 부르는 몇 번의 외침이 있었지만 뒤를 돌아볼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비리로 똘똘 뭉친 협회 소속 신문사, 다녀봤자 내 커리어에 도움도 되지 않네요.”
성은은 유 국장에게 들리지는 않겠지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읊조렸다.
그러고는 휴대 전화를 꺼내 익숙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은 성은의 번호를 보자 반가운 듯, 전화를 받았다.
“선배, 지난번에 생각 있냐고 했던 일 있잖아요. 저 그거 하고 싶은데…….”
성은은 둘러대지 않고 상대방에게 전화를 건 이유를 이야기했다.
* * *
정우가 명의 한의원 출근한 지 3일째.
아직까지도 자신의 진료실을 찾는 환자가 없었다.
정우는 멍하니 진료실 문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멍하니 보다가 또 한 번 한숨을 내쉬고를 반복했다.
부산 정한 한방병원을 다닐 때는 몸이 고단했지만, 서울로 올라와 집도 가까워지고 여러모로 편안한 일상을 보냈지만, 그렇다고 환자 구경도 못 하는 건 이제 괴로울 따름이었다.
명의 한의원에서 가장 터줏대감인 정 실장 말로는 재마는 노인정으로 왕진을 갔다가 동네 환자들의 신뢰를 얻었다던데, 자신도 직접 나가 환자를 찾아봐야 하나 하고 고민이 될 정도였다.
왕진은 시골에서나 다니는 줄 알았더니, 2022년 서울에서도 가능한 일일까 곰곰이 생각을 하게 했다.
그때.
“이 선생님, 환자 오셨습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정 실장이 문을 열고 찡끗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물꼬를 텄다는 듯, 안심하라는 미소였다.
“화…… 환자요?”
한의사가 있는 진료실에 환자가 들어오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정우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운지 말까지 더듬었다.
“네. 정지수 환자 들어가실게요.”
“지수요?”
특히나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이 들리자, 정우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손가락 걸고 약속하자 할 때는 유치하다니 약속을 지킨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엄마의 손에 붙들려 억지로 끌려온 것이 아니라, 교복 차림으로 혼자 스스로 찾아온 지수였다.
“너 학교 안 갔어?”
아직 하교 시간이 아닌 시간임을 확인한 정우는 이 시간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듯 지수를 바라봤다.
“점심시간 시작하자마자 왔어요. 빨리 진료봐 주세요.”
11시 40분부터 시작하는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을 치자마자 외출 허락을 받은 지수는 보란 듯이 외출증을 정우에게 보여줬다.
“하교하고 오면 되지. 점심도 못 먹고, 오후 수업도 못 받으면 어쩌려고?”
오늘 한의원에 오기 싫으면 정형외과라도 가서 소염제와 항생제는 꼭 먹어야 한다고 당부를 했던 정우는 시간을 억지로 내서 자신을 찾아온 지수가 기특했다.
“점심은 있다가 들어가면서 삼각김밥 사가면 되고요. 수업은 뭐, 외출증 가지고 나왔으니까 조금 늦어도 혼은 안 날 거예요.”
“혼 안 나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 수업은 늦으면 안 되지.”
“하교하고는 농구 해야 해요.”
지수는 공부보다도 농구가 우선이라는 듯 말을 했다.
“어떻게 공부보다 농구가 우선이냐?”
“걱정하지 마세요. 공부도 놓치지 않고 하니까.”
“어쭈.”
공부라면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로 했던 정우는 자신 앞에서 공부로 자신만만한 지수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지수는 어깨를 으쓱이며 의자에 앉았다.
“발목은 어때, 걸을 만해?”
“네. 어젯밤보다도 오늘 좀 덜 부었더라고요.”
어제는 환부를 보자고 해도 억지로 바짓자락을 붙잡고 보여주지 않았던 지수였지만 오늘은 아무렇지 않게 바지를 걷어 올렸다.
“생각보다는 괜찮은가보다. 오늘 봉침 맞고, 물리치료 받을 시간이 되려나. 물리치료 받으면 훨씬 좋을 텐데.”
“선생님, 근데 봉침이라는 거 아파요?”
“봉침?”
어제 양손을 뻗어 손바닥보다도 더 큰 사이즈라고 말했던 정우의 말이 생각났는지 지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침 사이즈가 크다고 다 아픈 건 아니야. 오히려 안 아플 수도 있으니까 걱정 마.”
“정말요?”
“대신 알러지가 있으면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 데…… 혹시 벌꿀에 이상 반응이 있거나 하지는 않지?”
“네. 약물 알러지도 식품 알러지도 특별하게 없어요.”
지수는 자신이 마음먹고 왔으니, 다른 걱정을 할 필요 없다는 듯 알레르기와 상관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는 소량으로 확인하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고.”
“몇 번이나 와야 해요?”
“음, 그래도 2주 정도는 꾸준히 와야지.”
“2주나요?”
2주나 꾸준히 와야 한다는 소리에 지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사이에 운동해도 되죠?”
“무리하면 안 돼. 안 하는 게 제일 좋지.”
“안 되는데…….”
지수는 붓기는 많이 내렸지만, 아직 다치기 전 상태가 아닌 발목을 바라보며 더 큰 한숨을 내쉬었다.
“너 농구에 집착하는 이유가 뭐야? 보아하니 학교 대표 농구팀은 아닐 것 같고.”
중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만큼이나 농구를 열심히 했던 정우는 성적을 유지하면서도 학교 대표로 옆 학교와 농구 대회를 할 정도로 농구 실력도 출중했다.
그는 어제 학교 농구 코트에서 농구를 하는 모습에 아무리 부상 중이지만 실력이 평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지수의 실력을 알아챘다.
“학교 대표는 아니어도 중요하기는 하거든요.”
“발목이 아파도 참고 할 정도로? 만성화되면 치료를 해도 계속 아플 거야. 발목뿐 아니라 통증이 타고 올라가기도 하고.”
정우는 농담이 아니라 진짜 걱정이 된다는 듯 말을 했다.
“친구들이랑 어울리려면 해야 해요. 그것도 잘.”
“친구들?”
“요즘 농구 하는 게 반에서 붐인데…….”
딱 지수 나이만 할 때 시기별로 친구들 사이에서 붐이 이는 운동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었다.
월드컵 시즌에는 축구에 열광하는 것이 당연했고 예나 지금이나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슬램덩크 만화책을 보는 친구 하나가 있으면 서로 돌려보며 농구화와 농구공을 사들이게 마련이었다.
“부상이면 어쩔 수 없지. 네 몸이 제일 중요한 거야.”
“부상인 걸 친구들이 알면 경기에 안 끼워준단 말이에요.”
아픈 것보다 친구들 사이가 멀어질까 걱정하는 것이 딱 사춘기 소년의 고민 그 정도였다.
“음…….”
정우는 2주 동안이나 친구들 몰래 치료를 받는 것이 걱정인 지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지수가 당당하게 내놓은 외출증 사유에는 두고 온 물건이 있어 집에 다녀오겠다는 이유가 써 있었다.
분명 저 핑계도 하루 이틀밖에 사용하지 못할 핑계였다.
일주일에 적어도 네 번 이상 한의원으로 치료를 와야 하는 상황에서 매번 집을 다녀온다고 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친구들에게 다쳤다는 거 티 내고 싶지 않다는 거지?”
친구들이 다 하교한 이후에 홀로 남아 연습을 한 이유도 그 이유일 테였다.
어떻게 하면 아픈 발목을 조금 덜 쓰고 기술을 부릴지 혼자 습득을 하려던 모양이었다.
“농구 다 하고 애들 학원 갈 시간이 되면 그때는 이미 한의원도 문 닫을 시간이고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낸 후에 올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라는 듯 지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내었다.
“오케이. 알았어. 그럼 내가 원장님한테 말해서 다음 주까지 너만 특별히 야간 진료 봐도 되냐고 허락받아 둘게. 다 나을 동안 적어도 주 4회 빠짐없이 와야 한다?”
정우는 큰맘을 먹었다는 듯 의기소침해하는 지수의 어깨를 쥐며 말했다.
“정말요?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대신.”
“대신?”
“농구 하다 다치는 친구 있으면 한의원으로 데려와. 다친 몸을 해서 무리해서 운동하지 말고.”
“친구요?”
“여기 해인동에 농구 하다 다친 곳 기가 막히게 치료하는 한의사가 있다고 소문 좀 내 달라는 이야기야.”
환자 구경을 하기도 힘든 정우는 이렇게 해서라도 홍보를 하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네. 그렇게 할게요.”
지수는 무슨 소리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