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78화
8분은 더 쉬어야 한다며 지수의 어깨를 꾹 누른 정우는 지수 옆에 털썩하고 앉았다.
조금 있으면 경비원이 경비를 돌 때라고 말했던 지수는 불안한지 손목에 있는 전자시계를 계속 들여다보았다.
밤늦은 시간에 발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홀로 남아 농구를 하던 패기치고는 꽤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정우는 때를 놓치지 않고 지수에게 한의원에 몇 번 더 와야 한다고 당부했다.
“지금은 임시방편으로 이 원장이 침을 놔놓은 거야. 한의원 몇 번 다니면서 봉침도 맞고 해야 해.”
“봉침이요?”
“응.”
“막 이만한 침 말하는 거 아니죠?”
지수는 겁이 나는 것처럼 자신의 손을 펴 보였다.
퍽 큰 어른인 것처럼 말은 했지만, 애는 애인 모양이었다.
정우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그것보다 더 크지. 한 이 정도?”
정우는 두 손을 펴서 꽤 길게 표현했다.
“웩. 안 가요.”
“너 무서워서 진료실에서 도망 나간 거구나?”
정우는 아까 낮에 지수가 침이 무서워서 진료실을 뛰쳐나간 걸 놀리듯 물었다.
그러자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을 했던 지수는 고개를 돌리고 표정을 풀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거든요.”
“그럼?”
“그런 게 있어요.”
중2병이 와도 단단히 온 걸까.
무엇을 그리 꽁꽁 숨기고 싶은지 지수와의 대화는 풀릴 듯하다가도 다시 엉키는 기분이 들었다.
-그 녀석들한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가만히 앉아서 치료받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그리고 다친 걸 안다면 팀에서 퇴출이라고요.
지수는 아무에게도 말 못 할 이야기를 속으로만 하고 있었다.
재마는 자신에게만 들리는 지수의 속마음을 티 내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럼 선생님하고 약속 하나 하자.”
“네?”
“한의원은 안 오더라도 정형외과 가서 엑스레이 한 번 찍고, 염증약도 먹고 하는 거로.”
“꼭 그래야 해요?”
“응”
정우는 자신을 찾아 명의 한의원에 오지 않아도 되니, 꼭 병원에 가라는 제안을 했다.
지수의 발목은 이미 상태가 안 좋아 보였지만, 그대로 두면 더욱 악화가 돼 만성화가 될 것으로 보였다.
지금은 아픈 것을 부모님에게 숨기고, 하고 싶은 농구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다쳐서 아픈 것보다 더 큰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었다.
정우의 말에 지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정우가 지수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얼른 약속하라는 듯 새끼손가락을 흔들자, 지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꼭 이래야 해요? 유치하게.”
손가락 걸고 약속하는 건 어린애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듯 지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 중2병 맞구나.”
민망해진 정우는 손가락을 슬그머니 접고 내렸다.
“자, 이제 침 뽑고, 집에 가자. 오늘은 그만 연습하고 집에 가서 좀 쉬어. 찜질할 수 있으면 찜질하면 더 좋고.”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재마는 주머니에서 소독솜까지 꺼내 침술을 마무리했다.
정우는 재마의 주머니에서 치료할 침과 소독솜까지 모두 나오는 것을 보고 단순히 농구를 하려고 자신과 함께 가자고 한 것이 아니라 지수를 만나 자연스럽게 치료를 하기 위함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저 녀석 제법이네.’
대기에 대기를 물고 환자들이 한 시간 이상 대기하는 한의원을 운영하며 모든 환자들에게 친절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성을 잃지 않고 직업적인 정신을 단전에서부터 끌어오고 끌어와야 가끔 힘든 순간에도 최대한 친절할 수 있었다.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한의원을 뛰쳐나간 환자까지 신경을 쓴다는 건 보통 관심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땡땡하게 부어 있던 지수의 발목은 단 한 번 침을 맞았을 뿐인데도 제법 부기가 빠져 있었다.
발을 내디딜 때 극심한 통증을 겪었던 지수는 부종이 빠진 것만으로도 통증이 반 이상으로 줄어든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겁이나 살살 디딘 발목은 통증이 많이 줄어든 기분에 제법 힘을 주고 내디뎠다.
“한 번 치료 받고 좀 나았다고 또 주인 잘못 만난 잘못 혹사하지 말고. 내일 꼭 한의원이든 병원이든 가야 해. 알았지?”
“네,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치료를 받는 것을 약속한 재마와 정우는 지수가 감사하다며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하고 민망한 듯 먼저 집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삐익. 삑.
그때, 재마와 정우 뒤에서 비추는 손전등 불빛이 그 둘을 비췄다.
“거기 뭐요. 늦은 시간에 학교에서!”
“야, 뛰자. 걸리면 진짜 인터넷 기사에 나온다.”
재마와 정우는 눈짓을 하고는 뛰어서 농구 코트를 벗어났다.
* * *
“김성은. 기자가 네 기분을 모두 내비쳐서는 안 돼. 알고 있지?”
“물론이죠. 뭐, 한의 신문에서 일하면서 연세 지긋한 원장님들 만나 뵙고 인터뷰하면서 ‘나는 기자다. 이성 잃지 말고, 최대한 중립을 가지고 인터뷰하자.’라는 마음으로 인터뷰해 왔으니까요.”
국장과 한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는 성은은 자신이 백미러로 보아도 뚱해 보이는 얼굴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동안 한의 신문에서 3년간 일하면서 가장 많이 방문했던 한방병원이 정한 한방병원이었지만, 오늘만큼 가기 싫은 적도 없었다.
“오늘은 특별히 대표님이 부르는 자리니까 최대한 잘 보여야 해.”
“아니, 우리가 정한 한방병원 소속 신문사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엄연히 협회 소속 신문사인데 왜 대표한테 잘 보여야 해요?”
“갑과 을. 우리가 항상 을이지, 갑이냐. 을로서 해야 할 도리는 다해야지.”
국장은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말하자 성은은 허, 하고 탄식을 했다.
“국장님, 근로 계약서 쓸 때 제가 갑이고 회사가 을이거든요. 갑으로서 대우 좀 해주실래요?”
성은은 국장의 말을 인용해 자신에게 대우를 해달라는 이야기로 톡 쏘아붙였다.
강남 한복판을 가로지르던 국장의 차는 이제 정한 한방병원에 도착해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근데 이 정도 한방병원을 강남에 차리려면 얼마나 들까요?”
“정한 한방병원이 여기에만 있냐. 전국에 큰 도시, 땅값 비싼 곳에는 하나씩 다 있는데…….”
국장은 정한 한방병원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듯 읊조렸다.
“그러니까요. 도대체 한의원으로 얼마나 돈을 벌면 이 정도를 할 수 있을까요?”
“이 정도 한방병원을 운영하려면 한의원만으로 되겠어? 한의사 자질보다 사업적인 머리가 있었던 거겠지.”
“사업적인 머리요?”
성은은 국장의 찜찜한 한 마디를 되받아쳤다.
“우리 같은 일개미들은 따라가려고 해도 따라가지 못하지. 어서 서둘러. 약속 시간 다 되었으니까.”
국장은 주차를 마치고 먼저 앞장서서 걸었다.
‘사업적인 머리?’
성은의 머릿속에 번뜩인 한마디가 계속 찜찜했다.
정한 한방병원 최고층에 멈춰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임원실이 모여 있었다.
몇 번 인터뷰차 정한 한방병원 본점을 찾았지만, 최고층까지는 처음 온 성은은 분위기에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한방병원이 아니라 여느 중견 회사의 회장실 복도라 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의 분위기였다.
비서의 안내를 받은 두 사람은 정한 한방병원 대표, 박상도가 있는 대표실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유 국장님.”
“대표님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성은과 다른 기자들에게는 빨리빨리 움직이라며 다그치기만 하는 국장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상도가 내민 손에 허리를 숙여 악수를 받았다.
자신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는 국장의 뒷모습에 성은은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릴 뻔했지만 꾹 참았다.
“반가워요. 김성은 기자라고 했나?”
상도는 이번에는 김성은을 바라보고 손을 내밀었다.
“네. 한의 신문 칼럼을 맡고 있는 김성은입니다.”
“하하. 사실 한의 신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부분이 칼럼 쪽 아닙니까? 제가 썼던 칼럼이라서가 아니라 사실 요즘같이 인터넷이고 너튜브에서 정보가 많을 때는 신문 굳이 안 보죠. 그나마 칼럼 쪽에서 동질감을 느껴서 한의사들이 보는 것 같아요.”
박상도는 자신이 오랫동안 써왔던 칼럼 부분을 적당히 치켜세우며 이야기를 했다.
“이게 다 대표님이 도와주셔서 그렇죠. 사실 저희 칼럼이 정한 한방병원 원장님들 아니면 저희 칼럼 써주실 분들도 없죠. 한의 신문이 그래도 폐간되지 않고 이어 올 수 있는 게 다 대표님 덕입니다.”
박상도가 치켜 올린 칼럼 이야기를 되받아 결국은 박상도의 칭송으로 끝나는 국장의 말에 성은은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폐간될지도 모르는 위기에 있는 한의 신문을 그래도 한의사 독자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건 새로운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성은은 폐간 위기에 있는 한의 신문을 다시 활성화시키려면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죠. 그럴 만한 적당한 후배님을 찾는 것이 우리 기자님들이 하실 일이니까요.”
상도는 자신 앞에 놓인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하며 성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국장은 성은의 말에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박상도가 성은과 함께 들어오라는 말이 있어 그녀를 데려왔지만, 그녀와 함께 무사히 대표실을 빠져나갈 때까지 심장이 두근거려 숨이나 제대로 쉴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이번 칼럼은 기존에 꾸준하게 사이좋게 번갈아 가며 쓰시던 정한 한방병원 원장님들 말고 새로운 인물로 하면 어떨까 하는데요.”
국장은 결국 일을 저지르는 성은의 한마디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를 말릴 새도 없었다.
“오, 김 기자 눈에 새롭게 들어온 후배님이 계신가 봅니다.”
상도는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라는 듯, 관심을 보였다.
“원래 내부 회의를 통해 명의 한의원 이재마 원장님이 결정되어서 이미 제안도 들어갔던 상황입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임원 회의를 다녀오신 국장님이 말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시더라고요.”
“아, 그 부분은 김 기자랑 오해가…….”
유 국장은 성은의 말을 어떻게든 무마해 보려고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김성은 기자는 이번 칼럼을 쓸 정한 한방병원 허명 한의사가 맘에 안 드나 봅니다. 허명 한의사도 정한 한방병원에서 두각을 나타낼 뿐 아니라 교수로서도 꽤 유명한 인물인데 말입니다.”
재마가 아닌 허명 한의사가 칼럼니스트로 지명된 것이 정한 한방병원의 압박이 아닌 그의 명성으로 이뤘다는 것을 말하듯, 박상도는 성은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물론 허명 원장님의 명성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재마 원장은 너튜브를 통해 한의사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령층 구독자를 만나고 있는 만큼 한의 신문에 새 바람을 일으키기 충분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발 그만 말하라는 듯 국장이 손사래를 쳤지만, 성은은 끝끝내 못 본 체하며 제 할 말을 다 했다.
“혹시 한의 신문 칼럼니스트 지정에 있어 박상도 대표님의 입김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성은은 그 어떤 때보다 기자로서 품고 있었던 의문을 진지하게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