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77화
“재마 네가 농구 한판 하자고 해서 따라는 간다만, 이거 맞아?”
“이 선생님? 따라오시기나 하시죠.”
사위가 어두운 정원 중학교.
이미 교직원들도 퇴근한 이후여서인지 건물에 불은 당연히 꺼져 있었고, 인적이 없는 주변의 가로등도 몇 개 켜져 있지 않았다.
“근데 우리 이렇게 담장 넘어도 돼? 걸리면 무슨 쪽팔림을 당하려고.”
“쪽팔림 당해봤자, 해인동 명의 한의원 한의사 둘이 중학교 담장 넘다가 걸렸다고 소문밖에 더 나겠어?”
“아니, 아마 40만 너튜버 한의사 이 모 씨 중학교 담장 넘다 덜미, 이러고 기사가 날지도 모른다.”
재마가 담장을 넘을 수 있도록 그의 다리를 잡고 있던 정우는 진심으로 그런 기사라도 나올 것처럼 놀리기 시작했다.
“너랑 나랑 조용히만 하면 안 들켜.”
“몰라, 나는 들키면 동기고, 원장이고 생각 안 하고 도망갈 거니까.”
“야야, 잘 잡아. 아오.”
정우가 잘 잡았지만, 학창시절에도 넘지 않았던 학교 담장을 생전 처음 넘는 재마는 아슬아슬하게 담장을 넘고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재마, 괜찮냐?”
“아우, 내일 몸살 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우리 나갈 때도 담장 넘어야 하는 거 맞지?”
“그러게. 왜 넘어서는. 기다려 봐. 나도 넘어갈 테니까.”
재마에 짧은 외마디에 혹시 다치지나 않았을까 걱정이 된 정우는 재마와 달리 소싯적에 담장 넘던 실력으로 휙 하고 넘어갔다.
“너는 좀 넘는다?”
“내가 너처럼 책만 보는 범생이였을 줄 아냐? 나도 할 건 다 했어, 인마.”
담에서 떨어졌던 재마의 부끄러운 모습과 달리 착지까지 완벽했던 정우는 옷을 툭툭 털면 그만이었다.
“가자.”
“근데 꼭 여기까지 온 이유가 있어? 해인동에도 개방된 농구 코트 있을 텐데.”
정우는 굳이 농구 한판 하려고 닫힌 학교 담까지 넘어서 들어가야 하는 것을 이해 못 하겠다는 눈치였다.
이해는 못 했지만 어둠을 뚫고 재마의 뒤는 곧잘 따라가는 정우는 멀리에서 농구 코트에 공을 튕기는 소리를 들었다.
탕, 탕탕, 탕.
텅 빈 학교 빛도 드문 데 늦은 시간까지 농구공을 튀기며 연습하는 아이가 있나 보다 하고 재마의 뒤를 따른 정우는 곧 그 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오후 정우의 진료실을 엄마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찾았던 소리의 주인공은 지수였다.
엄마는 아들의 발목이 걱정돼서 한의원을 억지로 끌고 올 정도였지만, 진료실을 박차고 나가더니 와 있는 곳이 농구 코트였다.
그것도 아무도 없는 농구 코트.
“저 녀석 어머니 걱정은 생각지도 않나 보네.”
정우는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이 육성으로 터졌다.
“너 알고 여기로 오자고 했구나?”
신기하게도 지수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진료를 마친 정우에게 함께 가자고 한 재마에게 툭 무심하게 물었다.
“알기는 그냥 정원중학교 농구 코트가 이 시간에 한가하다는 소리를 듣고 오자고 한 거야.”
재마는 어깨를 으쓱이며 지수가 홀로 농구공을 튀기고 있는 농구 코트로 뛰어갔다.
“상대 없으면 우리랑 같이하지?”
생각지도 못했던 목소리에 농구공을 튕기던 지수가 놀라 뒤를 휙 돌아봤다.
“어떻게 여길 오셨어요?”
정우가 물었듯, 지수도 이 시간에 아무도 찾지 않는 텅 빈 코트를 찾은 두 사람을 보고 의아한 눈치였다.
어머니도 이 시간에 자신이 이곳에 있으리라 생각도 못 할 텐데 두 한의사가 이곳에 자신이 있을 걸 예상하고 왔을 리가 없었다.
“그냥, 우리도 바쁜 와중에 운동 좀 하려고 온 거야 우연히. 어때. 혼자 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어?”
“그렇긴 하지만…….”
공을 한 손에 쥔 지수는 선뜻 같이하자고도, 신경 끄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그때, 잠자코 뒤에서 지켜만 보고 있던 정우가 지수에게 달려들어 공을 탁 하고 뺏었다.
공은 순식간에 지수의 손을 떠나 정우의 손이 이끄는 대로 튕겨 갔다.
“어?”
“뭐해? 뺏기기만 할 거야? 골대에 넣는 것보다 공부터 사수해야지?”
재마도 정우가 튕기는 공을 따라 코트로 몸을 던졌다.
탁탁 몇 번 공을 튀기던 정우는 멀리서 반대편 코트를 향해 슛을 했다.
탕-.
시원한 소리와 함께 농구공이 정확히 골대를 통과했다.
“오…….”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지수는 순식간에 삼 점 슛을 한 정우의 뒷모습을 보고 그저 놀랄 뿐이었다.
골대 밑에서는 정우의 공을 막아보려고 재마가 이리저리 뛰었다.
하지만 재마보다 피지컬이 좋은 정우는 몇 번의 몸싸움 끝에 골대 밑에서 슛을 다시 한번 던졌고.
또다시 점수로 이어졌다.
“야야, 이정우. 반칙.”
“반칙은 무슨. 내가 고등학교 3년 내내 야자보다도 더 열심히 한 게 농구야. 담도 제대로 못 넘는 너는 날 못 이겨.”
내키지 않는다는 듯 억지로 재마를 따라오는 것 같았던 정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 경기를 이어갔다.
“정지수, 인마. 너 뭐 해. 구경만 할 거야?”
재마의 외침에 지수는 재마 쪽으로 뛰어갔다.
그러고는 정우가 다시 한번 골대를 노릴 때, 재마와 한 편이 되어 그를 막았다.
정우와 마주 서서 그의 눈을 바라보자 정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둘이 붙어도 자신은 못 이긴다는 듯 입꼬리를 슬쩍 올려 웃더니 다시 한번 골대를 노렸고, 이번에는 지수가 동시에 뛰어올라 정우의 볼을 튕겨냈다.
“윽.”
동시에 높이 뛰어오른 정우와 지수.
지수는 정우와 부딪히지도 않았지만, 높이 뛰어올랐던 탓에 발목을 붙잡고 주저앉았다.
볼을 놓친 건 둘째치고 발목을 붙잡고 주저않은 지수의 상태를 보기 위해 정우도, 재마도 그에게 달려들었다.
“뭐야. 이 정도도 뛰지 못할 정도로 아픈 거야?”
“발목부터 봐봐.”
두 사람은 지수가 이번엔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양쪽에서 그의 바지를 잡고 들어 올렸다.
바지 안에 감춰져 있던 발목은 그야말로 퉁퉁 부어 있었다.
통증에 걷기도 힘들었을 텐데 그 발목으로 진료실을 아무렇지 않게 빠져나갈 생각을 했다니, 안쓰럽기보다는 미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으윽.”
잔뜩 부은 발목을 살피는 두 사람의 시선에 자포자기한 지수는 통증을 온전히 느끼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런 거야?”
“한 2주 되었어요.”
“약은.”
진료는 받지 않았지만, 이 정도 통증을 쌩으로 삭히고 있을 정도로 미련하지는 않을 거라는 듯 정우가 물었다.
“안 먹었어요.”
“이 정도인데 그냥 쌩으로 참고 있었다고? 적어도 약국에 가서 진통제나 염증 치료하는 약이라도 먹었어야지. 너 나이는 헛으로…….”
정우는 답답한 마음에 지수를 나무랐지만, 중학교 3학년이 알면 뭘 아냐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으로 앉아봐. 이쪽이 빛이 비추니까.”
희미하게 비추는 가로등 불을 향해 앉으라는 재마는 주머니 안에 있던 침을 꺼냈다.
“쌤. 그거 뭐예요. 아악. 저 안 맞아요. 괜찮아요. 내일, 내일 병원 갈게요.”
지수는 자리를 옮겨 앉으라는 재마의 손에 침이 들리자, 호들갑을 떨며 제 발목을 감추느라 정신이 없었다.
“감추기는 어딜 감춰. 이 발목으로 뭘 하게. 집으로 제대로 걸어갈 수는 있고?”
“지금까지 잘 다녔어요. 괜찮아요.”
지수는 바지를 내리고 일어서려고 발을 내디뎠으나 통증이 생긴 지 얼마 안 돼서인지, 아니면 조금 전의 점프 탓인지 발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풀썩 주저앉았다.
“이것 봐. 내일 병원은커녕 집에도 못 가게 생겼잖아. 너 둘러업을 만큼 힘 남아 있는 사람 없다. 잠자코 침 맞고 집으로 걸어가.”
“싫어요. 침.”
지수는 침을 맞으라는 재마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 침을 어떻게 맞아. 엄마한테서 벗어났더니 여기까지 쫓아오고.
덩치는 재마와 정우를 능가할 정도로 큰 지수였지만 속마음은 아직 아이 티를 벗어나지 못했다.
“생각보다 안 아프니까. 겁먹지 말고. 아까 한의원에서도 겁나서 그냥 간 거야?”
재마는 힘을 잔뜩 준 지수의 발목을 혈자리를 찾기 위해 꾹꾹 눌렀다.
하지만 이미 퉁퉁 부어버린 발목은 혈자리를 찾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정우는 지수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의 두꺼운 허벅지를 붙잡았다.
“아, 아니에요. 무섭기는. 하나도 안 무섭거든요.”
“근데 왜 침을 안 맞겠대. 이게 이래 보여도, 주저앉은 황소도 벌떡 일어나게 하기도 해. 허리 삐끗해서 걷지도 못하시던 환자도 나한테 오면 걸어 나가신다고.”
“진짜요?”
침을 들고 자신만만한 재마의 말에 지수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속고만 살았나. 힘 빼. 힘주면 아파.”
“윽.”
재마는 능숙하게 지수의 발목에 침을 놓았다.
“으…… 몇 개나 놔요. 지금 열 개도 더 놨는데…….”
“곧 끝나가.”
끝나간다던 재마는 그의 발목에 스물다섯 개의 침을 놓았다.
“이거 제대로 놓은 거 맞아요? 막 놓은 거 아니에요?”
생각보다 아프지 않은지, 자신의 발목을 슬쩍 실눈으로 본 지수는 재마의 실력을 의심했다.
“딱 이러고 15분만 있자. 이제 조용히.”
침을 놓는 동안 엄살을 부린 지수에게 잠시 동안 조용히 하자는 듯, 정우와 재마는 지수를 가운데 두고 쉴 태세를 했다.
“근데 이거 맞으면 정말 싹 나아요?”
“아니?”
정우가 지수의 궁금증에 당연하다는 듯,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다.
“에이. 뭐예요. 당장 나을 것처럼 하더니.”
“이 상태까지 된 발목을 어떻게 한 번에 고쳐. 그것도 찜질도, 물리치료도 없이 침만 놓은 건데.”
정우는 제아무리 이재마라도 그럴 수는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일 한의원에 다시 와. 물리치료 선생님도 계시니까 물리치료도 받고.”
“안 돼요.”
“안 되기는. 지금 침 맞았잖아. 침 맞았으면 이보다 아픈 거 없어.”
정우는 안 된다는 지수의 말에 허벅지를 찰지가 툭 치며 더 이상 아플 건 없다는 듯 말했다.
“바빠요. 안 돼요.”
“너 아까 한의원 대기실 못 봤냐. 우리 셋 중에 제일 바쁜 사람이 이 사람이야.”
“…….”
지수는 대답을 못 하고 의기소침해졌다.
“발목이 이 지경이 되도록 농구를 하는 이유가 뭐야? 혹시 내일도 농구 해야 해서 치료받을 시간이 없다는 거야?”
재마는 의기소침해진 지수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재마의 물음에도 지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거 언제 끝나요? 경비 아저씨 경비 돌려면 한 시간도 안 남았어요. 연습 좀 더 해야 해요.”
지수는 자리에서 일어나야겠다는 듯, 자신의 발목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퉁퉁 부어 있던 발의 붓기가 눈에 띄게 빠져 있었다.
그렇다고 아직 제 복숭아뼈가 드러날 정도로 완벽히 낫지는 않아 보였다.
속으로 놀랐지만,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무턱대고 자신의 연습 시간에 찾아와 침까지 놓아버린 두 한의사에게 놀란 척을 할 수는 없었다.
“아직 8분 남았어. 조금만 더 쉬어.”
“그리고 이 발목으로 또 농구를 하겠다고? 너 진짜 발목이 나가야 정신 차릴래?”
정우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지수의 어깨를 다시 꾹 하고 눌렀다.